전주문화재단 유별나게 전주를 사랑한 남전 허산옥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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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나게 전주를 사랑한 남전 허산옥
  • 2020-05-1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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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나게 전주를 사랑한 남전 허산옥

 

이종근(다큐멘터리 작가)

 

1.전주와 서화

 

이규보는 1199년 전주목(全州牧) 사록(司錄) 겸 장서기(掌書記)로 부임했으며, 그후 변산 벌목감독관으로 부안을 오가면서 변산 노상등 많은 글을 남겼다. 1199년부터 2년 동안 전주막부 등 전북 곳곳을 방문한 가운데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란 산문을 지었다.

119911월 지석(支石), 즉 고인돌을 보고 쓴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 기록이다. '지석'은 고인돌의 한자 표기다. 이규보는 이렇게 말했다.

 

변산은 나라 재목의 보고이다.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듯한 나무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할 때도 변산의 나무들로 전함을 만들었다

 

그는 처음 전주로 들어오면서 말 위에서

 

북당에서 눈물 흘리며 어버이를 작별하니/ 어머니를 모시고 관직나간 고인처럼 부끄러운데/ 문득 완산의 푸른 빛 한 점을 보니/ 비로소 타향객인 줄 알겠네

 

라 읊었다. 그리고 전주 효자동을 지나다가 그 곳의 무명의 효자비 때문에 효자리가 되었다는 시도 썼다.

 

비석 세워 효자라 표했는데/ 일찍이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네/ 어느 때 누구인지 알 수도 없으니/ 어떠한 효행인지 모르겠네

 

그는 전주에 대해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며 백성의 성품이 질박하지 않고 선비는 행동이 신중하다고 표현한 바, 맞는 말인가.

전주 동문거리 막걸리집인 길목집 벽면에 빼곡히 그림이 걸려있다. 월담 권영도, 청포 이철수, 남전 허산옥(1924~1993) 등의 작품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이 아주 많아 아쉽기만 하다. 지인과 막걸리 한 잔을 들면서 이들의 예술혼을 생각해본다.

허산옥의 작품은 전주 '행원(杏園)'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전주의 대표적 요정으로 손꼽히던 행원이 2017년 한옥 카페로 재탄생했다.

완산구 풍남문 근처에 위치한 행원은 20174월 초까지 운영하던 한정식 식당을 정리하고 전시회가 가능한 갤러리 카페와 실내공연 무대를 갖춘 문화공간으로 최근 탈바꿈했다.

살구(오얏)나무가 있는 정원이라는 뜻의 행원은 독특한 구조로 돼 있다. ㄷ자 건물 안쪽에 작은 연못과 정원을 갖췄으며, 모두 3공간으로 나눴다. 복도를 통해 들어가면 전통공연 공간이 있다.

각종 공연이 가능한 작은 무대로, 일반인이 판소리·국악 체험을 할 수 있다. 나머지 2곳은 갤러리 카페로, 그림과 함께 조용히 차를 즐길 수 있다. 삼백예순다섯 날, 서예 등 작품 50여 점을 전시, 분위기를 한껏 살려내고 있다.

바로 이곳은 '전주미래유산 18 풍류객들의 모임터 행원(풍남문312(전동 96-1)'으로, 허산옥의 여덟폭 병풍과 화조도, 그리고 그녀에게 붓글씨를 가르쳐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풍죽(風竹)’도 편안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전주 미래유산이란 전주사람들이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과 감성들로,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유무형의 것들 중 미래세대에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행원에는 판소리와 관련된 북과 장구, 꽹과리, 거문고와 가야금 등 우리 악기들이 있고, 이처럼 벽면에는 서화 작품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杏園(행원)'이란 목각 글씨는 서예가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1947~, 전북 김제 출생) 선생이 썼다.

 

'1942년 전주국악원이었던 낙원권번건물을 전주의 마지막 기생으로 불리는 남전 허산옥이 인수해 문을 열었다고 한다. 당시 행원은 전주를 대표하는 요정(料亭)으로 불렸다. 보통 우리나라의 전통 한옥은 앞마당에 정원을 두는데, 이곳은 ㄷ자건물 안쪽에 작은 연못과 정원을 갖춘 일본식 한옥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풍남문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의 삼청각처럼 지방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유지들의 연회 장소로 활용되는 등 한때 밀실 정치의 상징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전주의 대표 요정으로 자리 잡은 행원은 한편으로 예술가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허산옥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을 불러들여 창작활동을 도왔다. 따라서 행원에는 예술인 식객들이 줄을 이었다. 1983년 무렵, 판소리 명인이며 전북도 무형문화재인 성준숙 명창으로 주인이 바뀌면서 전주를 대표하는 요정으로 명성을 이어온 행원은 2000년대 중반, 사라진 요정문화를 현대에 맞게 되살려 한정식 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 전통음악과 춤의 명맥을 잇게 한 요정 문화를 살려낸 한정식집 행원은 건전한 국악공연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전주의 풍류 명소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름에 걸맞게 요정에서 한정식 집으로 명맥을 이어온 행원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주술적 의미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스마트한 변신을 통해 옛 번영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소리 카페로 변신했다'

 

이는 행원의 안내문 전문이다.

 

안쪽 한 켠에는 10~20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취향으로 꾸몄다. 1928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행원은 1942년 전주의 마지막 기생으로 불리는 허산옥이 영업을 시작했다.

전주국악원이던 낙원권번을 인수해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983년 무렵 판소리 명인이자 전북도 무형문화재 성준숙씨가 주인이 됐다. 6년여 전엔 한 임차인이 운영을 맡기도 했으나 문을 닫았고 리모델링을 거쳐 한옥 카페로 거듭났다.

남쪽 방문 위에 걸려 있는 '풍패권번(豊沛券番)' 목각 편액은 하석 박원규 선생의 글씨다.

풍패(豊沛)’는 한고조 유방의 고향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전주를 의미한다. 전주 객사를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부른다.

판소리와 관련된 새로운 조직이 생겨난 것은 1920년대 무렵의 권번이었다. , 일제시대에 기생들의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부르는 이름으로,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이다. 권번은 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고, 또 기생들의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권번이 일제시대를 통틀어 중요한 판소리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것은 여자 소리꾼과 관련해서이다.

대체로 그 지방의 돈 많은 한량들이 사비를 모아 문을 열었고, 전국에서 소문난 국악인들을 초빙, 지도선생으로 임용했으며, 그들 자신이 운영위원이 되어 운영했다. 판소리는 역시 남성 위주의 음악이었기 때문에, 권번의 학습생들은 여자들이었지만 선생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권번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행원의 의미를 알고 있나

 

행원의 상량문에는 '행복은 천지인의 조화에 있음'을 적었다.

 

檀紀 四二七九年 三月 三日 辰時 立柱 同日 午時 上樑

(단기 사이칠구년 삼월삼일 진시 입구 동일 오시 상량)

 

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

(응천상지삼광 비인간지오복)’

 

이를 풀이하면, ‘단기 4279(서기 1946) 33일 진시(7~9)에 기둥을 세우고 같은 날 오시(11~13)에 들보를 올리다. 하늘의 세 빛이 비추고 인간세상의 오복이 갖추어지기를 기원한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한다.

서경(書經)’의 오복(五福)을 알아보면, 첫번째는 수()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을, 두번째는 부()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의 복을, 세번째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을 말한다.

네번째는 유호덕(攸好德)으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을, 다섯 번째는 고종명(考終命)으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을 말한다.

 

사람들이 이처럼 큰 행복으로 여겼던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 집을 지으면서 상량(上梁)을 할 때는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세가지 빛에 응해 인간 세계엔 오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를 써 넣었다.

 

'행원(杏園)'이란 이름은 두목(杜牧)의 시()에서 따왔을까? 이는 '살구(오얏)나무가 있는 집'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전주를 대표하는 국악원이 있었던 자리다.

 

'夜來微雨洗芳塵 (야래미우세방진) 간밤 내린 보슬비에 꽃 먼지 씻기고

公子華騮步始均 (공자화류보시균) 화려한 말을 탄 공자들의 발걸음이 잦네

莫怪杏園顦顇去 (막괴행원초췌거) 행원에 꽃이 초췌해졌어도 괴이하다고 말하지 말라

滿城多少搜花人 (만성다소수화인) 성 안에 많은 젊은이들이 꽃을 꽂았네'

 

이는 두목(杜牧, 803~852, 중국 당나라 시인)의 행원(杏園)으로부터 비롯된다.

'오얏''자두'의 옛말인가? 그냥 잘못 쓰는 말인가? 오얏나무를 자두나무라고 할 때 오얏나무는 잘못된 표현인가? 아니면 지금은 사라진 옛말인가?

재 널리 사용되는 자두/자두나무가 표준어다. '표준어 규정' 20항에 따르면, 사어(死語)가 되어 쓰이지 않게 된 단어는 고어로 처리하고, 현재 널리 사용되는 단어를 표준어로 삼도록 규정함에 따라, ‘오얏/오얏나무, 자도등은 버리고 자두/자두나무를 표준어로 삼았음을 보이고 있다.

오얏(오얏 리)’ 등의 한자 훈에 남아 있으나, 고어의 화석화일 뿐 현대 국어에서는 쓰이지 않으므로 표준어로 삼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살구(오얏)나무 동산'의 의미를 왜 담았을까. 혹여, 전주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전주지도(全州地圖, 보물 제1586,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그림 속에 보이는 1872년 전주의 봄 풍경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는 17세기에 마정(馬政)의 정책 수립을 위해 국가가 제작한 목장지도(牧場地圖), 진주성의 전경을 회화적으로 기록한 진주성도(晉州城)와 함께 지도에 회화적 요소를 더하여 예술성을 갖춘 회화식(繪畵式)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T자형의 전주 읍성 내 도로망이 특징적으로 묘사, 왕권을 상징하는 전주 객사의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으며, 전주의 풍수적 특성도 매우 정확하게 묘사돼 있다.

기린봉에서부터 발원한 산줄기가 현재 덕진연못 앞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이 지도상에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전주성 안팎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민가, 감사(監司) 일행의 행차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경기전 주변의 수목과 새들, 만개한 오얏꽃까지 생생하게 묘사되는 등 화사한 봄날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있다.

전주성 안에는 관찰사의 청사인 선화당(宣化堂)을 비롯한 감영 건물과 부윤이 집무하던 본관(本官), 객사, 경기전, 옥사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고, 성밖 우측 하단에는 전주향교, 한벽당 등 전라감영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아스라히 펼쳐지면서 울긋불긋한 오얏꽃의 향연은 끝이 없는 바, 이는 전주이씨를 상징한다.

,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진전(眞殿)인 경기전이 부각되어 있지만 아직 조경묘가 세워지지 않은 모습이다. 대신 그 자리에 나무가 우거지고 백로떼가 앉아 있는 장면을 표현, 상서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인근의 서서학동에서 날아와 '송수천년(松壽千年) 학수만년(鶴壽萬年)'의 신화를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10장생의 하나인 백로떼 바로 밑 소나무는 지금은 볼 수 없다.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고 친지를 모아 잔치를 벌인 오목대에선 한무리의 선비들이 봄놀이를 한껏 즐기고 있는 등 가옥과 건물들은 다소 옅은 먹선을 사용, 전주 풍경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지도 속 아래로 보이는 다리는 오룡교(남천교)가 분명하지만, 왼편에 보이는 다리는 어떤 것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 그 누구는 서천교라고 말하지만 시기가 맞지 않아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을 듯하다.

 

3. 강암 송성용과의 인연

 

행원, 전주한정식의 원조

 

행원은 개업한 이래 전주 대표 맛집으로, 명맥과 전통을 이어왔다. 이곳은 음식과 함께 예술인 양성을 위한 권번이 창설되어 운영되어왔던 곳이라고 한다.

전주문화재단이 펴낸 '일제강점기 전통음악 지킴이- 국악의 본향 전주(지은이 황미연 전북 문화재전문위원)'에 따르면 매일신보 194013일자에는 전주 기생들의 근하신년 광고가 실렸다.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외모와 이름을 소개하면서 연예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전주 권번은 교육 과정은 소리, 기악, , 서화, 구연극, 예절교육, 일본어 등 교육과정이 이뤄지면서 문화예술의 번성기를 일군 계기가 됐다.

'조선미인보감'에는 신취옥, 장옥주, 송경주, 오산호주, 오채경, 김명옥 등 전주 출신의 기생으로 소개됐다.

 

조선미인보감에 나타난 전주출신 기생

이름

나이

원적

현주소

기예

소속

신취옥

24

전주군

경성부 돈의동

양금, 우조, 남중잡가

한성권번

장옥주

18

전주부

경성부 청진동

남중이요, 승무

한남권번

송경주

19

전주군

경성부 관철동

남중이요, 시조

한남권번

오산호주

20

전주군

경기도 수원군

검무, 경성잡가 등

수원조합

오채경

15

전주군

경기도 수원군

승무, 서도잡가 등

수원조합

김명옥

21

전주군

경기도 인천부

입무, 남도잡가 등

인천조합

 

 

예컨대 1915년 전주의 얘기조합, 1917년 전주퇴기조합, 1923년 전주 권번이 등장한다.

 

전주 권번 오십여 명 중 일부분은 작년 가을부터 단연을 하는 동시에 비단 등을 도무지 사지 아니 하고 조선 물산을 쓰기로 실행하여 오던 바, 요사이에 이것을 철저히 실행하자 하여 서약서를 받아 실행 단체를 조직 중이라 하는데, 이에 발기된 자가 십이 명이요, 지금 취지서와 규칙서를 기초 중이더라.’(매일신보 1917.7.15)

 

강암은 역사다

 

전북의 서맥은 송재 송일중(16321717), 창암 이삼만(17701847), 석정 이정직(18411916), 벽하 조주승(18541903), 유재 송기면(18821959), 설송 최규상(18911956), 석전 황욱(18981993), 강암 송성용(19131999), 여산 권갑석(1924~2008) 등에 이르기까지 오래 전부터 탄탄한 서단을 형성해 왔다.

이 때문에 전주시 강암서예관(송성용이 작품 등 기부 채납)이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가 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암은 역사다'. 1995, 서예가 강암 송성용 회고전을 마련한 동아일보는 전시 타이틀을 그렇게 내걸었다. 강암은 서예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존재라는 찬사에 다름 아니다.

강암을 얘기하려면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라는, 전주 한옥마을 출신의 유학자까지 거슬러 올라야 한다. 그는 고종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자 옛 성현의 말과 함께 홀연히 서해로 떠나갔다. 이윽고 서해 여러 섬을 떠돌다가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 섬 이름을 성인의 도학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바꾸고(繼華島), 평생 학문에 힘쓰는 한편 제자들을 양성했다. 3,000여명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세 선비가 전주향교 근처에 모여들어 오늘날의 한옥마을을 일구었다.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1877~1960),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으로 이들을 일러 삼재(三齋)’라고 한다.

간재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 상인들이 중앙동에서 득세하자 그들 삼재와 제자들은 경기전과 향교가 자리한 교동과 자만동 일대, 이른 바 오늘날의 한옥마을에 한옥 집을 짓고 저항하듯 모여 살았다.

유재 송기면은 이때 한옥마을에 와서 살지는 않았다. 고향인 김제 백산의 여뀌다리 마을로 돌아가 요교정사(蓼橋精舍)를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의 아들 만큼은 한옥마을 고재 이병은의 남안재로 보내 학문을 익히도록 주선했으니 바로 그가 강암 송성용이다.

강암은 스승의 셋째 딸과 결혼해 한옥마을 남천 천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1999년 작고할 때까지 흰 한복만을 입었으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채 꼿꼿한 자세로 글을 읽고 사군자를 치고 글씨를 쓴 유학자, 서도가였다.

그가 평생 보발과 한복을 고집한 건 부친인 유재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의 단발령에 대한 항거였다. ‘강암이 역사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이러한 선비정신 때문이리라.

그의 글씨는 단아하고 예쁘다.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덕진공원의 연지문(蓮池門) 같은 현판들에서 그 정제된 서예의 맛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강암서예관을 찾을 일이다. 그곳에 강암 서예의 진면목이 전시되고 있다.

교동의 남천교 바로 그 인근엔 전주시 강암서예관과 강암 송성용선생이 살았던 아석재(我石齋)’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지은 시 琴書四十年 幾作山中客 一日茅棟成 居然我泉石의 마지막 구에서 ()’자와 ()’ 자 두 글자 따서 아석재(我石齋)’로 작명했다.

이는 물과 돌이 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 아석재(我石齋)에는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아석재(我石齋)’라는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 등이 마루 위에 걸려 있다.

그는 이곳에서 청빈하고 조용한 예술 삶을 영위해 왔다. 강암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깊이 있게 공부한 바, 서예의 바탕이 된다. 그가 만든 강암체는 글속에 담긴 깊은 뜻이 붓 끝에 전달돼 마음에 새기는 글을 의미하리라.

그는 김제출생 유학자 유재 송기면의 3남으로, 초기엔 구양순 미원장 동기창 등의 서체를 즐겨 쓰고, 이후 황산곡, 김정희 등의 서예 5(, , , , 초서)를 두루 섭렵, 강암 서체를 확립했다. 특히 구체신용(舊體新用)사상에 따라 고법(古法)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조형미를 갖춘 서예 세계를 구축한 가운데 자신의 삶과도 닮은 대나무 그림은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글씨는 전통적 서법을 현대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전서, 예서 등 오체 뿐 아니라 사군자, 문인화도 독보적 경지에 올랐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고 연묵회를 창설 지도 및 연구발표회(30)와 함께 8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유도회 전라북도본부 위원장, 예술의전당 자문위원, 한국유교학회 이사, 간재사상연구회장 등을 역임했다.

 

 

강암 송성용과 허산옥, 사제의 정을 잇다

 

강암은 국전에 출품하기 전부터 이미 글씨와 그림으로 일가를 이뤘다. 주변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국전(대한민국 미술대전) 출품을 여러 차례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유재에게는 못미치는 재주와 학문이라고 자신을 돌아다보면서 출품을 계속 사양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에야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김제에 살고 있던 그를 전주로 이사 오게 끔 한 사람이 남전(藍田) 허산옥(許山玉, 본명 許貴玉, 1924~1993)이다. 서화 능력이 뛰어난 그녀는 국전 초대작가와 전북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전북 최고의 여류작가다.

그러면서도 배포 큰 문화예술계의 메세나였다. 말하자면 40여 년 동안 전주 문화예술계의 대모(代母)였던 셈이다.

그는 김제 부량의 가난한 집에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16살에 남원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이곳에서 산옥(山玉)이란 예명을 받았다. 이후 예능활동은 전주에서 펼쳤다. 당시 권번은 가무와 시, 서화를 가르치는 종합예술학교였고 기생은 잘 나가는 아이돌 가수요, 탤런트였다.

남원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지만 예능 활동은 주로 전주에서 했다. 당시 전주 권번의 교장은 유당 김희순이었고, 효산 이광렬, 설송 최규상 등 당대의 명필과 화가들이 교사로 활동을 했다.

허산옥은 낙원(樂園)’의 건물 일부를 인수받아 행원을 개업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풍남문 골목 안에서 운영했던 행원은 전주 음식과 약주의 맥을 이은 제일의 전통 한국음식점임은 물론 풍류의 맥을 잇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낙원은 행원의 3배 정도로 규모가 큰 요정이었으며, 권번에서 익힌 춤과 북 장단은 한국화와 서예로 넓혀졌다. 그래서 정치인과 재력가, 언론인, 관리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국악을 곁들이는 만찬은 전국으로 알려졌다.

허산옥은 예술가이자 전통요릿집의 경영자로 그 시절 정치인과 예술인, 언론인들과 폭 넓게 교분을 나누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치백 무성서원 원장은 필자에게 1960년대 초 몰락한 정치인을 불러 술을 대접하며 당시 100만원이 넘던 거액의 외상값을 탕감해주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행원에서 번 돈으로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가 하면 외국 유학 자금을 보태주기도 했다고 했다.

체육발전연구원 이인철 원장도 예술가들에게 잠자리와 술 밥을 풍족히 대접하고 이들이 그린 그림을 구입해줬다. 또 자신의 그림을 용채(用債)로 내놓은 경우도 빈번했다. 남몰래 선행도 베풀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많이 주었다고 말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화가치고 그의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이곳은 그들의 단골 명소였다. 한국전쟁 당시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모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가람 이병기를 비롯한 문학계 인사들이 거쳐 갔던 곳이고, 박초월, 김소희, 임방울 등 당대 명창들로 그녀에게 신세를 졌다. 이 가운데 신석정, 송지영, 정비석선생 등 문인들이 행원을 찾을 때엔 돈의 액수에 관계없이 특별손님으로 배려했다고 한다.

당시 행원에서는 곧잘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술을 마시고 흥이 나면 지필묵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서화가들이 앞다투어 글씨와 그림 대결을 벌이곤 했기 때문이다. 서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씨를 쓰게 하고 그것을 모두 사들인 사람이 바로 허산옥이다. 그 당시 다락엔 최고로 유명한 서화가들의 그림과 글씨가 차고도 넘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녀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그림과 글씨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의재 허백련과 고암 이응노에게 산수화를, 강암 송성용으로부터는 서예를 각각 배웠다. 그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송성용이 전주로 이사오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후에 아석재 마당에 그의 서실을 별도로 마련해 주었고, 그 서실에서 자신도 공부를 했다. 이같은 후원 역할에 그치지 않은 가운데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를 역임했다. 안타깝게도 1993년 전북예술회관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4. 허산옥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보다

 

전주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이다. 1950·60년대의 전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월등한 문화적 발달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전주는 전국적인 문화예술의 도시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예술가와 후원자가 서로 교류하는 장이 존재했으며, 이 공간을 통해 예술의 창작과 유통, 소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허산옥은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전주가 예향으로서 맥을 잇도록 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녀가 보여준 문예활동은 근대기 문예사의 한 페이지를 뚜렷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특히 전통 예술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다.

하지만 지금까지 허산옥이 당대 문예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 당시 활동하였던 문화인들과 이 지역 거주자들이 구술한 단편적인 언급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본래 이름은 허귀녀이다. 작품에 사용하는 호는 남전(藍田)이라 많이 기록됐으나, 정식 호는 행원(杏苑, 또는 杏園)으로 더 알려졌다.(전북여성백년사 432)

행원은 의재 허백련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서 받은 호로 가게 이름으로 걸고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신선로와 잣죽이 유별나며, 조선게와 굴비로 맛있게 찬을 만들어 한상 가득히 내오던 이곳을 전주 한정식의 원조라고 부른다.

남원 권번에 들어가 한 남자를 만난다. 안타깝게도 반가 자제와의 사랑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권번에서 나온 허산옥은 최고급 요릿집 행원을 차려 많은 돈을 번다. 훗날, 미술인 가운데 변관식, 이상범, 김은호, 이용우, 조방원 등도 행원에 들러 많은 날을 묵고 갔다고 한다.

7차례의 개인전, 국전 입선 15차례, 특선 1차례라는 경력은 화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대변하고 있다.

허산옥은 권선문(勸善文, 보물 제728)’을 남긴 설씨부인(1429~1508), 몽연 김진민(1912~1991), 우향 박래현(1920~1976) 등과 함께 전북을 빛낸 여류 미술 인물이다.

그녀는 다채로운 색조를 시도했던 채색화들은 대개로 람전(藍田)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는 허백련이 지어준 초호(初號) ‘행원(杏園)’과 구별되어 새로운 화풍상의 전개를 의미한다.

문인화는 남도 특유의 여기적, 취미적 형태의 느낌이 강하며, 동시대적이라기보단 전통의 의고적(擬古的)인 행위로 보여진다.

1970년에 그린 화조 병풍은 호남 문인화풍의 구심점인 김희순, 허백련 작품에서의 유사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형화된 4자 화제, 수묵에 기초한 담채를 통해 수묵화훼류에서 출발한 그녀의 작품 경향을 알 수 있다.

이 화조 병풍은 꽃으론 장미, 동백, 과실류론 감, 포도, 호리병박 등을 묘사, 표현의 범주가 넓어졌다. , 파초, 소나무, 대나무와 같은 군자적주제와는 분리되어 있다.

여타 나머지 화조 병풍들도 거의 8폭으로 구성된다. 표현된 식물에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순서에 따라 계절별로 배치됐다.

종종, 대화하는 듯한 작은 새들이 등장한다. 은자들이 선호한 상서롭고 고귀한 조류들보단 기쁨과 건강, 해로를 기원하는 흔하고 작은, 평범한 작은 새들을 선호했다.

허산옥의 작품은 이처럼 오랫동안 수련한 수묵사군자, 탄탄한 기본기의 서예 실력을 기반으로, 문인화의 전통 아래 새로운 접목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거침없고 과감한 채색으로 그 가치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발전시켰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장미 중에서도 흑장미를 더 잘 그렸고, 사군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老來靑帝亦風流(노래청제역풍류) 늦게 온 봄의 신은 풍류가 아직 있고

年少花王正黑頭(연소화왕정흑두) 나이 어린 모란은 머리가 새까맣네.

最憶東風舊遊路(최억동풍구유로) 동쪽 바람 노닐던 옛길을 생각하니

殘紅亂紫不勝愁(잔홍란자불승수) 흩어진 붉은 꽃에 수심을 못 이기네'

 

이같는 내용의 화조도도 빼놓을 수 없다.

 

모란을 그린 작품이 보인다. 그녀의 그림은 대담한 구도와 채색을 사용하면서 매우 시적으로 표현했다. 담묵과 농묵이 조화를 이루게 꽃을 표현했고 이에 채색은 더욱 화려하다. 여백이 많은 화면에 단정하게 내려쓴 제화시로 화면에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대표작으로 매화도’, ‘장미등이 전한다.

그렇다. 작가의 테마는 꽃피고 새날고가 많다. 모란, 소나무, 매화 등 각종 꽃과 학, 텃새, 닭을 비롯한 새를 중심으로 한 화조도를 펼쳐보이지 않았나.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 낸 문인화에 함축된 사상과 철학은 깊어가는 4계절의 정취와 수묵의 향기로 듬뿍 묻어난다.

색채가 아주 화려하기 보다는 부드럽고, 수묵을 바탕으로 문인화다운 필선을 보이면서 맑은 담채풍의 시원스런 느낌을 주는, 특성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노출시켰다.

오랜 숙련에서 익힌 필선이 보이고 담묵에 의해 처리된 먹색의 어울림이 뛰어나다. , 서체의 필획에서 보여 지는 세차고 강한 선()이 먹의 농담을 잘 표현하면서도 각 소재마다 뼈대와 구조를 잘 소화해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전체적으로 선적인 회화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작가의 문인화가 돋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고전과 동시에 현대감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조형 의지로 새로운 세계를 일구어낸 가운데 누구보다도 사의(寫意)를 중요시 여기는 화가로 우뚝 서 있다.

울긋불긋한 꽃도 아름답지만 새하얗고 단아한 빛을 내는 목련도는 깊은 멋이 배어나며, 이른 봄 피어난 목련 사이에 나란히 몸을 감추고 사랑을 속삭이는 참새는 더욱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화조도는 꽃과 새가 보기 좋게 어우러진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민화 중 큰 부분을 차지했던 테마다.

대부분 암수 한 쌍이 의좋게 노니는 모습을 담음으로써 부부금술과 부부화합을 간절히 바랐던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만큼 전통의 바탕에서 새로운 그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근대적 감각이 두드러진 발랄하고 화사한 채색화들이다. 화가 정직성은 그녀의 그림이 "너무나도 잘 그리지만 난 잘 그린다면서 잘난 체하지 않는 그림이다. 매화가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미술사가 김소연은 "거리낌 없는 붓질의 흐드러진 꽃들", "거침없고 과감한 채색"으로 허산옥의 그림을 묘사하기도 했다.

다음은 서예평론가 정충락이 월간 서예 201010월호에 '풍류 여성 부채바람 일어나고'에 소개된 허산옥의 예술 세계다.

 

'자신의 고향을 남다르게 사랑하고 선비들이 즐기는 서화에 마음을 다 바쳤다 해도 잘못이 없을 정도의 '여성풍류객'인 남전 허산옥여사의 부채 작품을 선발했다. 운동선수들은 자신들의 등장이 반갑지만 풍류객들의 붓놀이는 역시 전통이 멋지다. 그러한 의미에서 남전 여사의 경우는 보통의 경우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전통적인 명사다. 그녀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대는 이른바 국전시대였다. 그 시대에는 지금 말할 수 없는 전통의 문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였고, 그 어려운 국전의 관문을 수십 차례에 걸쳐 입선과 특선을 했다는 것은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전통의 힘이 멋진 작품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 했다. 또 아래와 같은 내용이 관심을 갖게 한다.

 

'남전 여사는 무척 겸손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막연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이른바 선비들의 붓놀이에서 가장 멋지다고 하는 사군자를 중심으로 화업에 열중했다고 하니 그가 목표한 바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선비들의 인간적인 생활의 멋을 그녀는 찾아냈던 것이었다. 직역을 하면 쪽밭이 되는 남전(藍田)이라는 아호는 의재 허백련선생이 지어주셨다 하니, 이의 배경에는 무언가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입장에서 행동하라는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경향간을 통해 펼쳐진 개인전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한다. 대표적인 전시회를 펼친 곳은 서울을 비롯, 대전, 전주, 군산 등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유별나게 전주를 사랑한 남전 여사는 그러한 의미에서 묵향과 풍류를 함께 사랑하고 실천하는 전통의 호남인이다'

 

이같은 분위기는 우리 근·현대미술사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허산옥의 화조화는 우리 근대미술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성취다.

금빛 햇살이 어찌나 유혹하는지 자연의 향기따라, 이름 모를 들꽃 향기따라 촉촉히 상념에 젖어본다.

어느샌가, 지붕 같은 하늘채에는 흰구름이 윤무하고 침실 같은 대지와 출렁이는 저 하늘 밑엔 푸른 산과 꼬막 등 같은 사람의 집, 아름다운 우리네 산하가 천년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시나브로,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앞다투어 쑥쑥 커 가면서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한국의 자연은 그렇게 봄의 싱그러움, 여름의 푸르름, 가을의 넉넉함, 겨울의 순결한 눈꽃을 통해 계절마다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허산옥이 낫으로 가늘고 긴 낭창낭창한 왕죽을 한웅큼 베어 왔다. 합죽선에 돌 하나 올리고, 별 하나 얹고, 바람 하나 얹고, 시 한 편 얹고, 그 위에 인고의 땀방울을 떨어 뜨려 소망의 돌탑 하나를 촘촘하게 쌓았다.

하늘이 우리 선조들이 눈물을 너무 흘러서 파란색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진중하게 작업에 임했다.

작가의 손을 거치면 어느 새, 기억 속 풍경 위에 자유로운 터치들이 부챗살 너머 다양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수묵채색으로 작업되어지는 작품들은 먹의 농담과 번짐, 그리고 붓 터치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까닭에 느낌이 편안하다.

반복적인 수묵의 집적을 통해 진행되는 눅진한 적묵(積墨)의 깊이는 물론이거니와 무게를 지니고 있는 실경 작업, 분방한 필묵의 경쾌한 속도감이 두드러지는 작업 등 다채로운 표현의 미학을 살려 잘 담아내고 있다.

산수 풍경은 투명하리 만치 맑고 담백한 맛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담담한 이미지를 통해 시선을 아주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간다. 작가는 자연의 형태 속에서 물질적인 실체만을 보는 것이 아닌, 자연의 섭리를 보며 그 섭리를 가능케 하는 정신을 파악하려 하고 있다.

허산옥은 종종, 한국의 정원을 거닐면서 쾌랑쾌랑한 선비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소쇄원에서는 맑고 깨끗한 기운을, 윤증고택 정원에서는 누마루에 앉아 산중 정취에 젖어들곤 한다.

명옥헌 정원은 배롱나무 꽃사이로 무릉도원이 그윽히 펼쳐진다. 월궁 용궁 선계가 모두 펼쳐진 광한루에서는 지구촌사람들의 무병장수를 빈다. 수면 위에 비친 그림자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경복궁 경회루와 아미산에서는 술 잔에 시 한 수 읊고픈 심정이 든다.

끝없이 말고 구김살없는 동해의 의상대, 연못속에 아롱거리는 달을 감상케한 선교장 등을 통해서는 자유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갈망했다. 남원 광한루에서는 토끼 한 마리를 건물에 새겨놓고 월궁에 닿고 싶어했던 옛 사람들의 욕망을 감히 저도 꿈꾸곤했다. 그래서 작품 속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는 바, 우주관이 투영돼 있다.

천원지방이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뜻이지만, 이 말 속에는 음양, 천지, 건곤, 상하, 동정이라는 우주 만물의 존재와 운행의 이치가 함축되어 있다.

이와 함께 '()'을 통해 그의 이유 없이 바쁘게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화두를 던져주기도 한다. 속도, 소비, 자본, 통신 등을 키워드로 한 현대 사회는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는 등 앞으로도 이같은 현상은 가속화될 터이다.

시안이 흐를수록 여백, 고요, 느림, 성찰 등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가벼움, 얄팍함, 경쟁, 외로움, 아픔, 등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되며 점점 더 트라우마에 점점 빠져들게 하고 있다. 때문에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허산옥의 작품을 통해 향기 나는 사람의 냄새를 기억할 수 있다.

그 냄새는 웃음이 묻어난다는 소리의 파동, 그것은 흐린 날을 한 방에 지배해버릴 수 있는 은은한 먹의 향, 그것은 비 뿌리는 구름 사이로 뻗치는 햇살의 구김살 없는 빛.

떡을 하거나 부침개를 부친 날 돌담 위로 오갔던 소쿠리는 작품의 일부가 됐다. 때론 청계수조(淸溪垂釣), 낚싯대를 드리우며 향기 나는 하루를 만들기도 하니, 이 모두가 허산옥이 추구한 소재에 다름 아니다.

 

산길처럼 들길처럼 걸어가라 하네.

햇살처럼 윤슬처럼 지나가라 하네.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다가라 하네.

강물처럼 별빛처럼 흘러가라 하네.

 

5.남전 허산옥 일대기 만화로 제작

 

학처럼 깨끗하게 살다간 그녀는 슬프고,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남전 허산옥 일대기가 2010년 만화로 만들어졌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추진한 지역문화콘텐츠 발굴사업에 전주정보영상진흥원과 만화가 조원행씨가 전주 권번출신 남전 허산옥을 제안, 국비 5천만 원을 지원받았다. 이에 따라 남전 허산옥을 주제로 한 만화는 총 20(1회당 30~60)에 걸쳐 20104월까지 제작 완료됐다.

어게인을 타이틀로 한 뮤지컬영화는 감독지망생인 연주의 도전과 꿈을 그린다.

허산옥의 삶이 담긴 공간과 전주8경을 무대로 음식과 노래가 한데 어울린 감동적인 힐링뮤지컬로 제작될 예정이다.

영화 제작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금(2018년 지역특화콘텐츠 개발지원사업) 47,500만원이 투입된다. 여주인공인 연주 역에는 인디영화계의 퀸으로 떠오른 샛별 김예은(1989년생), 허산옥 역에는 아이돌 가수출신 김소이가 캐스팅됐다.

제작프로젝트는 감독 조창열이 연출을 맡고, 영화제작사인 하늬바람(대표 김주한)이 개발에 참여한다. 영화와 함께 권번기생 허산옥 소재 뮤지컬 웹무비(205부작)’도 동시에 제작될 예정이다.

 

6. 허산옥(1924~1993) 프로필

 

전북 김제 출생

문인화가

개인전 7: 서울, 전주, 광주 등

동광미술연구소 수학

의재 허백련, 강암 송성용 사사

국전 입선 15, 특선 1

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한중일 문화교류전

국전 초대작가, 추천작가, 심사위원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추천작가, 심사위원

전주시민의 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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