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문화재단 시네마 키드의 생애, 영화인 탁광(卓光)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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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드의 생애, 영화인 탁광(卓光)
  • 2020-05-1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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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시네마 키드의 생애, 영화인 탁광(卓光)

영화 아리랑으로 영화인 탁광(卓光)을 만나다

 

탁영환(미디어 아티스트·다큐멘터리 프로듀서)

 

 

프롤로그

정갈하게 잘 정리된 한옥마을의 한옥 한 채, 안쪽 대청마루에서 서걱 서걱 벼루에 먹을 가는 소리가 들린다. 백발이 희끗한 홍안(紅顔)의 어르신 옆에서 조그만 꼬마하나가 먹을 갈고 있다. 묵향(墨香)이 가득 한 이곳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이 좀처럼 예사롭지 않다. 일본에서 출간된 영화잡지인 키네마 준보, 영어로 씌여진 각종 영화서적, 한국영화총감 셀 수 없이 다양한 영화관련 서적이 빼곡히 꼽혀있다. 서가 한쪽에는 무성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낡은 8미리 영사기와 필름카메라도 무심하게 놓여있다. 고희를 앞둔 어르신 앞에서 꼬마는 눈빛을 빛내며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물어보려하고 있다. “큰아버지, 전주에서 시네마 키드의 생애는 어떠셨나요.” 어르신은 쓰던 글을 멈추고 꼬마와 똑같은 눈빛을 빛내며 이렇게 답한다. “내가 네 나이 때 제국관이라는 극장에서 임자 없는 나룻배라는 영화를 밥도 굶어가며 하루 온종일 본적이 있단다. 그때는...”

 

하이 눈(High Noon 1952 프레드 진네만)

엊그제 군산에서의 교섭은 수치와 더불어 현실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되지도 않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찾아온 전주 촌놈에게 소금을 뿌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공연차 서울에서 군산에 내려온 잘나가는 악극단 배우에 사전 교섭도 없이 출연섭외를 하러 온 것부터가 무리한 일이었다. 하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중에 무리가 아닌 일이 어디 있을까. 전주에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유니폼을 맞추고 16미리 아이모 카메라를 사고, 지금 우리들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서울에 있는 상영관에도 스크린에 걸 영화가 부족할 정도로 영화제작의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한데 정말 미친 짓이다. 지금 대구로 가는 기차의 차창 밖으로 한 촌놈의 수심 가득한 얼굴과 무심한 달빛이 애처롭다.

한풀 꺽인 마음으로 도착한 대구역은 때마침 정오를 알고 있었다. 대구역에서 대구극장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오늘은 시나리오라도 보여주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들어간 무대의 뒤편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 총소리와 더불어 관객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흩날린다. 한참을 이어진 음악과 관객의 환호소리, 그리고 피날레를 알리는 듯한 음악이 흐르고 열띤 박수소리가 극의 마지막을 알린다. 이윽고 무대 뒤의 어두운 곳으로 성큼 들어오는 한 그림자, 호리호리한 몸매에 오똑한 콧날, 잘빠진 턱선, 첫인상이 강렬하다. ‘서부의 무법자라는 공연 타이틀에 맞게 의상도 터프하다. 순간 어제 만난 배우보다 섭외는 더 어렵겠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힌다. 어쨓든 시나리오라도...“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사내의 질문에 시나리오가 붙은 영화제작계획서를 건네준다. “전주에서 온 탁광 이라고 하오 우리가 전주에서 영화를 찍으려고 하오만, 주연배우를 해주시오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제안에 사내가 한참을 시나리오를 읽어본다. 긴장의 시간이 흐른다. 시나리오를 내려놓으며 사내가 말한다. “좋소, 하겠소사내의 대답 역시 간결하다. “내가 그렇지 않아도 영화는 한번 해보려 했소, 그런 차에 먼 곳에서 일부러 나를 만나러 오시니 이것도 큰 인연이라고 생각하오, 한번 만들어 봅시다지난 군산에서의 수모가 물밀 듯이 사라지고 고집과 열정으로 시작한 영화제작에 비로소 서광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의외의 승낙에 멍해진 나를 보며 사내가 일어서며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했구려, 난 장강이라고 하오, 허장강!” 이때의 섭외로 대한민국의 영화계는 큰 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때를 계기로 영화인 탁광의 둘도 없는 영화적 동지가 된다.

 

촌놈들, 영화를 만들다

대한민국에서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의 상업영화가 있다면 당연히 영화 아리랑이 그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영화제작에 문외한들이 겁도 없이 뛰어들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욕 하나만 가지고 당시 제작비 오백만원으로 1950대 초반을 영화로 시작했다. 당시에는 최고 카메라였던 16미리 아이모 카메라와 흑백필름을 구입하고 기타 촬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를 구입하면서 전주최초의 아니 지역최초의 상업영화를 위해 시동을 건다. 시나리오를 탈고하고 시나리오 상에 있던 미군병사 역할을 섭외하고 주연배우의 섭외 그리고 로케이션 현장의 섭외, 그리고 당시만 해도 어려웠던 다양한 행정절차를 밟아가며 영화에 대한 조그마한 불씨를 살려가고 있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시나리오에 연출, 촬영에 녹음, 음악 그리고 수없이 많은 기술적인 후반작업이 산재해있다. 영화인 탁광은 영화 아리랑의 처음과 끝을 같이 하며 이 험난한 여정, 어느 한 과정 빠지지 않고 열정과 노력으로 가득 채워갔다. 한국전쟁 후 척박한 한국사에서 영화가 주는 위치는 아직 미약했다. 그런 시대상황에서 멋진 영화한편 만들겠다는 의지로 모든 과정을 발로 뛰며 시작하였다. 그 첫발은 당연히 주연배우인 허장강 씨의 섭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한미 합동제작 영화 아리랑은 전주출신 영화인들이 하나로 뭉쳐 제작에 성공한 최초의 상업영화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특히 김종환, 조진구씨 등 유능한 시나리오 작가의 배출과 이강천 감독의 보다 폭 넓은 본격적인 감독으로서의 행보, 강영화씨의 탁월한 촬영기법은 한국영화계에 있어서도 큰 수확으로 꼽혔다. 또한 이 영화는 당시까지만 해도 악극단에 몸담고 있던 변기종, 허장강, 김재선씨 등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영화배우로서 확고부동한 자기 자리를 찾게 했고 류춘, 송미남씨 등 신인들을 어느 수준급 이상의 연기인으로 성장시켜 당시 전주 영화 제작진의 높은 안목을 크게 과시하기도 했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간직한 영화 아리랑의 완성은 1950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개화기(開花期)에 흥행과 화제성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까지 끼쳤던 전북영화계뿐만이 아니라 한국영화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일대 사건이었다. 영화 아리랑과 그 영화적 위치에 대한 서술한 상기의 내용은 전라북도지(全羅北道誌) 실린 내용을 자신의 저서인 전라북도영화이면사(1995출간)에 인용해 실은 내용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이외에도 영화 아리랑은 꽤 많은 영화사적 가치와 지역 예술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그 영화의 이면 곳곳에는 당연히 영화인 탁광, 그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 아서 펜)

전주보다는 활기차지만 아직은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서울의 풍경이 덜컹거리는 전철의 창밖으로 흐르고 있다. 몇날 며칠을 읍소해서 겨우 문화공보부 공보처에 있는 라보(당시 영화제작의 후반작업을 하던 공보처의 현상소 및 작업실을 이르던 명칭)를 섭외하고 급히 서울 길에 올랐다. 공보처의 차갑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무거운 필름통을 옮기고 나니 하루해가 다 지나고 있다. 같이 동행한 스텝들에게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나가서 국밥이라도 사드시고 오슈, 여기는 내가 기다릴테니전주에서 새벽부터 서둘러온 라보에는 아직 한걸음도 들이지 못하고 있다. 무슨무슨 정부시책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하고 한나절이 지난 지금은 다음 주에 극장에 상영될 대한뉴스를 작업릴을 걸었다고 안에서 일하는 시다(보조 스태프를 일컫는 속어)가 잠깐 얼굴을 내비치며 알려준다. 이 상태로라면 우리 같은 촌놈들이 만든 이름도 없는 영화는 아마도 내년쯤에나 작업할 듯 싶다. 통금을 지나 며칠 밤을 근처에 여관에서 지내며 매일 라보에 출근하듯이 아침저녁으로 찾았다. 여전히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다. 다시 라보를 찾았다. 무사하게 잘 있는 필름통을 확인하고 오늘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세게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출근하는 기사를 쫓아 라보에 들어갔다. “선생님 도대체 저희는 언제부터 작업할 수 있습니까. 공보처 담당한테 연락받고 당장 작업할 줄 알고 전주에서 부리나케 왔단 말입니다.” 메인기사는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카키색 항공잠바를 벗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툭 던진다.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소, 여기 걸려 있는 필름 안보입니까나는 항변하듯 얘기했다. “이보슈 기사양반, 지금작업은 며칠 전에도 잡고 있던 것 아니오? 우리가 하루에 녹아나가는 제작비가 얼마인줄 아슈, 아니 다 떠나서...그놈의 똑같은 대한뉴스는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그동안 차가운 복도에서 몇날 며칠을 기다리며 쌓였던 울분이 한번에 터졌는지 자꾸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목소리가 갈라졌다. 터지기 일보직전의 댐처럼 버티고 서있는 내 모습에 조금은 움찔했는지 메인기사가 철제의자를 삐걱거리며 뒤를 돌아보며 한 템포 쉬었다가 나지막이 한마디 내뱉었다. “내일 9시까지 필름통 가지고 여기로 오슈, 1분이라도 늦으면 다음 작업 들어 갈 테니 알아서 하시고

 

5분의 완성을 위하여 일생을 걸다

영화는 자본과 기술의 집합체이다. 영화아리랑을 제작하던 1950년대 초반의 한국은 전쟁을 막 끝내고 흉흉한 사회 분위기에 피폐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1년에 제작되던 한국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무렵 서울시내 극장은 통틀어 10여관 정도였으며 그마저도 상영할 작품이 부족해 공관(空館)으로 돌아가던 극장도 있었고 외화도 높은 수입가격에 예산 부족으로 들여오는 양도 적었지만 제작되는 한국영화는 더 적었다. 개점휴업의 극장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척박한 상황과 환경에서 영화제작을 지속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영화제작의 수많은 제작 과정 중에서도 음향작업은 지금의 컴퓨터그래픽 작업처럼 최고의 난이도에 속하는 테크니컬한 작업이었다. 당시에는 현재처럼 동시녹음이 아닌 후시녹음(After Recording)이 대부분이었는데 사운드를 필름에 입히는 작업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초창기 무성영화 시대, 미국의 필름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가(필름을 자르고 붙이는 작업이 전부였던 당시의 작업과정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정도의 작업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토키영화(Talkie, Talking Picture:무성영화와 달리 스크린에 영상을 영사할 때 음성이 동시에 상영되는 형태의 영화)시대가 도래 하면서 음성을 입히는 작업에 전기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고 많은 여성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남성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음성을 입히는 작업의 난이도가 초기 영화작업에서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짐작케 한다. 현재는 모든 직업에서 성별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는 전기라는 매체가 가지는 직업적 특수성이 종사자의 성별을 구분하는 시대였다. 당시의 영화인 탁광은 제작주임(현재의 Producer)이라는 스태프명으로 타이틀 롤에 올라가 있었지만, 훨씬 더 많은 양의 작업 전반을 책임지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녹음과정, 필름현상 및 편집과정 음악녹음 및 더빙과정 등 거의 전 분야에 음으로 양으로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저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의 제작환경으로 보았을 때 그가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았고 아이디어가 출중했으며 상황에 대한 빠른 판단, 그리고 특유의 목표를 향한 적극적인 행동력 때문에 영화제작 전반에 걸쳐 데스크와 현장을 오가며 현재의 라인 프로듀서(Line Producer)의 역할까지 소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까지 하였으니 당시의 영화 환경은 많은 일을 한사람이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당시에는 영화 후반제작을 하는 사설기관은 전무했던 때라 대부분의 작업을 문화공보부의 공보처에 있는 현상실(라보)에서 검열도 하고 제작도 하던 때이다. 당시의 공보처 현상실은 국정 홍보영화를 우선적으로 제작해야 했고 이후 대한뉴스, 그리고 서울의 유명한 감독이 만든 영화 등의 순으로 작업 순서를 정해놨는데 이것 역시 정해진 규칙도 룰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영화 후반작업의 시스템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하루에 5분 정도의 필름을 작업자와 같이 수없이 만지작거렸다. 그것도 잠시 독과점이었던 탓에 작업자의 기분대로 금방 맥이 풀려 작업자의 태업이 시작되기도 하고 상부의 명령에 뜬금없는 대기가 내려오기도 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작업환경 속에서 촌놈들이 만든 영화를 세상에 어떻게든 내어 놓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탁광 선생은 사망유희의 이소룡처럼 발로 뛰며 각개 격파를 하며 한 과정, 한 과정 영화를 완성시켜 나갔다.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 1952 스텐리 도넌, 진 켈리)

해군정훈음악단(서울시 교향악단의 전신)의 조율소리가 녹음실의 창문을 어루만지듯 두드린다. 영화 일 하나하나 녹녹한 것이 없지만, 영화의 타이틀이 타이틀이다 보니 이번 음악 제작과정은 정말 산고를 겪는 것처럼 어렵고 힘들었다. 작곡가인 박 선생을 만나러 멀리 대구까지 가던 일, 작곡가인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기 싸움을 벌이던 일, 녹음실의 섭외와 일정을 어렵게 잡던 일, 그리고 지금 녹음실 너머에 있는 음악단을 섭외하고 녹음실에 부르기까지,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이윽고 녹음실 안쪽에서 악보대를 지휘봉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간 정적과 함께 녹음실의 모든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 하다.

!!!!

여관방문을 부서지듯 두드렸다. 안에서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진한 눈썹의 경상도 남자가 심드렁하게 속옷차림으로 한가하게 책을 읽고 있다. ‘이놈의 인간이!’ 순간 욕지기가 훅 올라온다. 영화 아리랑은 제목이 제목이다 보니 영화제작 초기 단계부터 음악이 중요하다는 데에 모든 제작진들이 의견을 같이 했다. 온 정보망을 동원해서 대구에 사는 박 선생을 알아냈고 삼고초려의 마음으로 전주까지 데리고 온 터였다. 하지만 그때 다 닳아빠진 칫솔하나 달랑 들고 나타난 이 사이비 작곡가를 알아봤어야 했다. 그동안 수도여관에 모시고 조석으로 문안드리던 내 자신이 갑자기 한심스러워 졌다. 한참을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박 선생이 더 이상 내 마음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듯 농담 섞어 한마디 건넨다. “거 이 양반, 참 성격 급하시네, 아 기계도 구리스도 치고, 시동도 걸고 공회전도 좀 하고 그래야 속도를 내지, 바로 속도 내면 망가지지순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2주 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고 있는 상황에 말은 청산유수다. 이제는 대구로 돌려보내야겠다고 다짐하고 한마디 덧붙이려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로 툭 한마디 던진다, “오선지 하고 기타 하나 구해주시게

때마침 여관방 창밖 파란 하늘에 햇빛이 들이비치며 빛살 사이사이로 낮은 비가 사랑스럽게 흩뿌리고 있었다.

 

영화 아리랑의 음악 아리랑

영화 아리랑은 음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아리랑 레코드 하나 앨범 하나가 없었다. 어렵사리 작곡가를 섭외했는데 대구에 사는 박시춘이라는 작곡가였다. 당시를 탁광 선생은 이렇게 술회했다. “행색이 아주 초라했죠. 다 뭉그러진 칫솔하나 들고 나타나서 전주에 데려다 놓으니 작업은 하지 않고 지내기를 몇 십일, 어르고 보채고 다그치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오선지와 기타 하나를 사다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기쁜 마음에 사다 드렸는데 처음에 되지도 않는 기타소리로 뚱땅 거리더니 나중에 보니까 일곱 곡이나 만들었더라구요. 원래 있던 아리랑을 7가지로 편곡을 했는데 타이틀, 중간삽입곡, 라스트 신에 들어가는 음악까지 전부 일곱 개의 곡을 편곡해 놓고 있었더라구요.” 박시춘 작곡가와 탁광 선생은 녹음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다. 당시 사설 녹음실 역시 전무한 상태라 문화공보부 녹음실을 섭외하고 라이브로 녹음해야 한다는 작곡가의 고집에 어렵사리 해군정훈음악대를 섭외하게 된다. 당시 제작 여건이나 자금 상황이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의 예술적 고집에 공감, 녹음실까지 섭외했으나 가요 작곡가에 대한 클래식 연주자들의 당시의 편견을 깨기에는 쉽지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의 특유의 고집과 추진력으로 녹음을 진행하였는데 이때 영화의 라스트 신에 삽입된 아리랑 환상곡이 탄생하게 된다. 영화 아리랑에 음악아리랑을 작곡해 넣은 작곡가 박시춘. 박시춘은 이미 가요 신라의 달밤으로 부동의 유명 작곡가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굳세어라 금순아’ ‘낭랑18’ ‘이별의 부산정거장등 연이은 히트곡을 만들며 최고의 인기곡 제조기였다. 이러한 유명 작곡가를 전주까지 데리고 와서 최초의 영화제작에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까지 만든 영화인 탁광의 뚝심은 영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라쇼몽(羅生門 1950 구로사와 아키라)

공보실장실의 창문 너머에는 막 피어오른 백합 꽃망울이 탐스럽게 부풀어 오르며 더 따뜻한 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공보실장실에는 국회에서 문화공보 분과위원을 지내고 있는 익산 출신 국회의원 윤택중씨, 공보실장, 문제의 공보실 K영화과장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의 남자가 짙은 커피색으로 깊게 들어간 소파에 앉아 있다. 시선마저 서로 얽히지 않은 채 한참동안의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이 무거운 분위기에서도 오로지 영화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잘 끌고 왔는데 그깟 잠시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내 자신에게 돌이라도 던지고 싶다. 한참동안의 정적을 깨고 윤 의원이 한마디 나직이 일갈한다. “서로의 입장을 다 들으셨겠지만, 우리 선거구에서 온 분들이라 편들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오, 누가 되었든 지방에서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가지고 오면 발을 벗고 협조해야 함이 마땅하지, 방해하고 중지 시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요.” 한마디 한마디에 엄중한 힘이 실려 있었다. 공보실장이 죄송하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시정하고 협조하도록 명령하겠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문제를 일으킨 K영화과장도 고개를 떨군 채 이후 관련 작업에 대하여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겠구나, 이제 다시 마무리를 향해서 달릴 수 있겠구나 하고 맥이 풀림과 동시에 선명하게 열리는 길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자리를 파하는 순간 창밖에서 하고 꽃망울 하나가 터지는 소리가 내 귀에만 선명히 들려왔다.

 

영화 아리랑의 지옥과 천당을 오가다

영화 아리랑은 후반 제작 당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문제로 각 부처별로 대응방법을 논의하느라 당시의 정부관련 조직들은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영화 제작기관인 공보실까지 예외 없이 분주했다. 매일 야근 또는 철야로 국책 관련 뉴스나 문화영화를 쉴 새 없이 만들고 있어서 일반인이 제작하는 영화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리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에 작업준비를 시켜 놓고 다녀오면 점심때쯤 정부 문화영화 독도를 만들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왔다고 하면서 일방적인 통보로 번번이 작업이 취소되곤 했다. 작업재개와 취소가 반복되던 중 일정을 다시 배정 받고 제일 중요한 장면을 작업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기술로는 녹음작업을 하는 데에는 2~3분씩 필름을 나누어 최대 5분의 작업까지 할 수 있었다. 녹음의 순간 현재와는 다르게 숨소리 하나라도 들어가면 작업한 비싼 필름을 폐기하고 동일한 작업을 다시 해야 하는 과정의 반복을 거듭해야 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NG가 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서 작업을 진행해야만 했다. 현재의 디지털 기술이라면 몇 번이라도 리테이크를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NG가 나면 그 필름은 바로 버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버려지는 필름이 촬영필름보다 더 많을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중요한 순간 누군가가 거침없이 녹음실 문을 차버리는 것이었다. 순간 영화의 마지막까지 모든 일정에 긴장에 긴장을 더하며 주변의 상황으로 늘어진 일정을 걱정하며 녹음을 진행하던 탁광 선생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소리가 난 문을 열어보니 젊은 남자 한사람이 다짜고짜 누가 이런 작업을 하라고 했냐고 딴지를 걸었고 순간 앞뒤 없이 이성을 잃고 눈앞의 무뢰한에 주먹을 날렸다. 같이 작업하던 공보부 직원들의 만류로 더 이상의 폭력 사태는 없었지만 맞은 이가 공보부의 절대 실력자인 K영화과장 이었다. 말하자면 영화계(공보실)의 절대 권력자의 오른팔을 건드린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작중지 명령이 떨어졌고 평소에도 안하무인이었던 K과장의 성정에 불만이 많았던 공보실 직원들은 쾌재를 부르며 탁광 선생의 행동에 속 시원해 하다는 눈치였지만 작업에 있어서는 상부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쨓든 작업을 계속해야하는 입장에서 온간 방법을 강구하다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찾아가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익산출신 윤택중의원의 중재로 작업재개는 물론이고 이전보다 일사천리로 제작이 진행되었고 결국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치고 각고의 노력으로 탄생한 영화 아리랑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첫 시사에서 전 스태프들이 맥이 풀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 탁광 선생의 눈에도 영화의 모든 과정 하나하나를 지켜본 이가 느낄 감상과 애수가 동시 상영되고 있었을 것이다.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1946 데이비드 린)

“1983년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자는 탁형연(탁광의 본명)선생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연단의 사회자가 호명하자 가족과 지인의 축하가 연이어진다. 축하의 목소리들이 한데 모아지면서 점점 에코가 섞인 사운드로 변해간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멀어지며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 아리랑의 첫 시사가 있는 날이다. 게다가 노천시사회이다. 장충단공원 체육관 건너편 고문관 앞은 경찰 지프 수 십대가 몇 시간 전부터 진을 치고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져 버렸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게 세상일이다. 시작은 단순히 촬영 스태프의 신분 증명을 위해 사람을 대었던 일이다. 지리산에 공비도 많이 나오고 해서 로케이션을 더 원활히 다니고자 평소 친분이 있던 남원의 신상묵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을 만나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던 중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소속 공보요원이 되었고 스태프 전원이 경찰 신분증을 발급받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제작이 끝난 후 미안한 마음과 감사의 뜻으로 앤드 자막에 신 사령관의 이름을 넣었는데 홍보과정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기획책임자인 듯한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경찰과 관청에서 주도한 시사회까지 자연스럽게 물타기를 하며 오게 되었다. 오늘은 고문관의 관사가 메인 상영관이다. 마당을 슬쩍 엿보니 경무관 이상의 경찰 고위간부와 국회의원 등이 참석한 듯 보인다. 이윽고 영사기의 램프가 켜지고 필름이 돌아간다. 갑자기 깊은 감회가 밀려온다. 필름 감기는 소리, 영화의 토키(talkie)소리, 사람들의 숨소리 등이 한데 어울려 귓가에 떠밀려 온다. 지난 1년의 나의 열정이 우리의 땀이 이렇게 한시간 이십분에 필름 풀리듯 풀려가고 있었다. 자막에 자가 나오자 장내는 박수로 가득 찼다. 스태프들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고 눈은 몽롱히 풀려 있다. 모두 긴장 속에 시사회를 지켜봤을 터이다. 하나하나의 얼굴을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앤드자막에 올라가던 이름을 뇌까려본다. 제작에 김영창 씨, 이석천 씨, 시나리오에 조진구 씨, 기획에 신상묵 씨, 시나리오 각색에 김종환 씨, 감독에 이강천 씨, 촬영에 강영화 씨, 그리고 제작주임에 나, 그리고 그 배경으로 입담 좋던 경상도 사나이 박시춘 씨의 아리랑 환상곡이 경쾌하게 흐르고 있다.

 

100, 20, 1954, 2019

영화 아리랑은 첫 시사를 필두로 공보부의 호평에 이어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과 비서진이 모인 특별 시사회도 가졌다. 흥미롭게 보던 대통령도 나름대로의 영화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시골 촌놈들의 영화는 성공적인 데뷔작이었다. 수차례에 걸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계에 시급한 현안들을 얘기한 것을 계기로 당시에 한국영화의 폐해로 지적되던 한국영화 면세조치가 의회에서 급 물살을 타고 표류 중이던 국회를 통과하는 성과도 이루었다. 영화 아리랑의 대중성과 영화적 평가가 좋게 회자되면서 10여개 남짓 되던 서울의 상영관 중 4개관에 동시 상영을 하게 되었고 이 때 참여하였던 이석천, 김영창, 이강천 씨 등은 이후에 제작자로 감독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갔으며, 강영화, 조진구 씨 등도 영화사에 촬영, 시나리오 등으로 족적을 남겼다. ‘아리랑의 스태프 중 영화인 탁광은 유일하게 서울에 상경하지 않고 고향에 남았다. 그는 이 지역의 문화, 예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한때는 한국영화의 산실의 하나였던 전주를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전주의 변화를 목도했다. 단관이 멀티플렉스로 바뀌고, 흑백 텔레비젼이 스마트TV로 교체되고, 필름이 디지털로 대체되는 시절의 성쇠를 지켜봤다. 올해는 우연찮게도 한국영화 100주년과 전주국제영화제 20주년이 겹치는 해였다. 한국에서 영화가 100년을 살아남는 동안, 한국의 현실 또한 수 없이 다양하게 변했고, 많은 영화인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그는 그 성쇠의 와중에 오로지 한길 고향 전주의 문화와 예술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헌신했다. 생전에 본인이 관여했던 전주의 많은 문화예술 관련 일 중에서도 1982년 한국문예진흥원과 한국영화인협회 그리고 유공자 협회의 후원을 얻어 개최한 한국영화 60년사를 기념한 영화스틸전 및 문화정책에 대한 포럼을 유치하고 진행했던 것에 대해서는 특히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었다. 행사에 대한 유치가 단순히 이벤트가 아닌 전주가 영화의 변방이 아닌 것에 대한 확신이며,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시대에 대한 회고이며, 그 모든 애정과 찬사에 대한 무언의 웅변이었으리라. 스무번째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렸다. 타 도시의 영화제처럼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영화제이다. 칸보다는 선댄스에 가깝다. 다른 영화제들이 부침을 거듭해 왔지만, 전주국제영화제는 꾸준함과 끈기로 20년을 버텨왔다. ‘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에 맞게 영화제의 아이덴티티도 명확하다. 20년이라면 짧은 세월이 아니다. 모든 이의 노력이 더해져 이루고 있는 단단한 껍질이다. 그렇다면 전주의 영화인들, 전주를 찾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65년전, 전주 촌놈들이 벌인 한바탕 유쾌한 영화만들기를 기억할까. 올해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도시 전주를 찾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영화에 미쳐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던 젊은 그들의 정열이 써내려간 그들만의 시나리오를 기억할까. 첫 번째 전주국제영화제를 한해 앞두고 전주 최초의 국제 영화제에 목말라하던 탁광 선생은 그해 10월 떨어지는 고엽과 함께 이 세상에 마지막을 고했다. 이듬해 첫번째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변영주 감독이 영화인 탁광의 미망인과 유족을 만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장비를 챙겨 떠나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건네준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진심입니다.”

그녀가 건넨 마지막 한마디는 같은 영화인으로서 평생을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온 멋진 선배에 대한 진심어린 안타까움과 아쉬움이었다. 젊은 감독의 진심어린 한마디가 그 어느 누가 바친 미사여구 가득한 헌사보다도 가슴에 깊게 새겨진다.

 

에필로그

영사기에 필름은 이렇게 해서 이렇게 감는 거란다. 그리고 스위치를 올리면... 낡은 8미리 영사기의 램프에 불이 들어오고 필름을 감아채는 모터소리가 챠르르륵 들리면 영사기 앞 하얀 벽에서는 상상으로만 꿈꾸던 모든 일이 현실이 되어 피어오른다.

예전 소리가 없는 무성영화에는 변사라는 분이 있어서...”

주인을 잃은 임자 없는 나룻배는 오늘도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아래로 아래로 한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만장하신 신사숙녀 여러분 과연 이 다음에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자못 그 결과가 궁금합니다. 그럼 친애하는 관객여러분, 다음 후편을 기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개봉~박두!”

*그의 저서 전북영화이면사에서도 영화인 탁광의 영화작업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가 실려져 있으나 이번 글에서는 최초의 장편영화 한편을 만드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당시의 영화제작의 현실과 그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해갔던 영화인 탁광의 족적을 중심으로 글을 구성하였습니다.

**원고 중 탁광 선생의 입장에서 바라본 픽션처럼 구성된 부분은 탁광 선생이 저술한 전북영화이면사와 어린 시절 옛날이야기처럼 들었던 수없이 많은 탁광 선생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글쓴이(탁영환)가 영화적인 시나리오로 재구성 하였습니다.

 

탁광(탁형연)

1923~1999

<경력>

전주 제2보통학교 졸업

국립경찰학교 졸업

전라북도 경찰국 근무

전라북도 극장협회 상무

전주 백도, 코리아, 중앙극장 상무

영화 아리랑제작주임

영화 애정산맥제작부장

예술인총연합회 전북지회 사무국장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사무국장

한국영화인협회 전북지부장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고문

<수상력>

전라북도문화상 1983

전주시 시민문화장 1991

<저서>

전북영화이면사 1995

<편저>

한국화삼백년사 1985

전주시사편찬위원회 1986

전주대사습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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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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