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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바친 치열했던 비평가, 오하근
  • 2019-09-26 17:44
  • 조회 3033

본문 내용



 

 

 

 

 

 

[오하근 추모 작품론]

 

작품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바친 치열한 삶

 

 

글. 호병탁(시인·문학평론가)

 

 

  

 

 

 

1

오하근의 작품 해석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한 예를 들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가 즐겨 낭송하는 김영랑의 시(詩) 중에 「오매 단풍 들겄네」라는 짧은 시가 있다.

 

 

 

“오-매 단풍 들것네” / 장광에 골 불은 감잎 날아오아 /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 “오-매 단풍들겄네” //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 바람이 잦아서 걱정이리 /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오매 단풍 들겄네‘

 

- 「오매 단풍 들것네」 전문

 

 

 

그렇잖아도 짧은 시에 “오-매 단풍 들겄네”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니 이 말이 발화된 직접적 원인과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행간을 살펴보아야 한다. 오하근은 단도직입적으로 이 작품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화자인 ‘나’와 ‘누이’가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 오하근은 누이의 이 발화가 “장광에 골 불은 감잎”을 보고 놀란 듯 터져 나온 것에 주목하고 시선을 이에 집중한다.

 

지금까지 대개의 해설자가 슬그머니 “골 불은”은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넘어갔다. 말의 의미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설령 짚고 넘어가도 ‘불은’은 ‘붉은’의 오식으로 판단했다. 엿장수 맘 대로다. 아마도 ‘단풍’ 어쩌고 하니까 이를 ‘붉은’의 잘못된 표기로 알고 쉽게 처리해 버리고 만 것이다. 오하근은 이에 대해 원전을 검증하며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다.1)

 

‘골 불은’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지 된 시어다. 제목이나 다른 말은 정정하면서도 이 시어는 계속 고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시인의 의도도 확연한 것이다. 오하근은 ‘골’은 ‘이파리의 잎맥’으로, ‘불다’는 ‘불어나다, 팽창하다’로 해석한다. 즉 그 잎은 그의 말에 따르면 “한창 무르익은 누이의 얼굴처럼, 한창 부풀어 오른 누이의 젖가슴마냥 잎맥이 불어 팽팽한 잎”이 되는 것이다. 추석 무렵에 감잎은 단풍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장광에 떨어진 감잎은 단풍들어 떨어진 게 아니라 ‘바람이 잦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비평가들은 장독대에서 일을 하던 누이에게 ‘붉게 물든 감잎’이 날아오자 그 빛깔의 아름다움에 자신도 모르게 “오-매 단풍 들겄네”라고 탄성을 터뜨린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해석의 방향은 엉뚱하게 틀어진다. 잔가지 휘기에 따라 나무가 구부러지는 법이다. 같은 ‘감잎’인데도 ‘잎맥이 불어 팽팽한 잎’으로 보는 시각과 ‘곱게 붉은 물이 든 잎’으로 보는 시각은 벌써 나무가 휘는 방향이 다르다.

 

오하근은 감잎이 곱게 물드는 ‘가을의 서정’, 혹은 가을을 맞는 ‘소녀의 정서’란 일반의 안이한 해석에 팔뚝을 걷어붙인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어야 한다. 빵빵하게 무르익은 누이는 시집갈 한참 나이인데 벌써 추석이 낼모래다. 곧 단풍이 들 것이고 머지않아 올해도 다 가고 말 것이다. 누이의 탄성은 시집가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화자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고 말하고 있다. 오하근은 이를 “누이만 시집을 못 간 것이 아니라 오빠인 나도 장가를 가지 않았고, 누이만 시집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빠인 나도 장가가고 싶은 것”으로 해석한다. 달리 말하자면 누이의 외침은 “가을이 가기 전에 오빠인 내가 빨리 장가가서 제 차례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된다.

 

바람은 벌써 아직 단풍이 들지도 않은 감잎을 떨구고 있다. “바람이 잦아서 걱정이리”라는 말은 무심하게 흘러만 가는 세월에 대한 화자의 심적 동요를 드러낸다. 그래서 이젠 화자도 누이와 함께 “오-매 단풍 들겄네”라고 기대 반 걱정 반의 외침을 발하게 된다. 오하근은 이를 “누이를 설득하는 체하면서 실은 자신을 설득하는 발언”으로 보고 있다. 즉 화자는 시침을 떼고 아이러니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세상은 결코 거짓 없이 도덕적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시침 떼기이고 이것이 아이러니의 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화자에게 유죄 선고를 할 수 없다.

 

 

아이러니는 진실게임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시침 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치 없이 이에 속아 넘어간다면 우리가 유죄이다. 아이러니는 추리소설마냥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꼬투리를 남겨 놓고 있는 진실한 언어인 것이다.2) 작품은 자칫 계절의 서정과 이에 대한 소녀의 감상적 정서가 표출된 것으로 읽혀질 뻔했다. 그러나 오하근의 새롭고 적확한 해석은 시의 의미를 완전히 변모시켰다. 작품은 이제 생생한 심상으로 넘실대고 시적 긴장의 끈은 바짝 조여지고 있다.

 


1) 이 시는 1930년의 『시문학』 1호에 발표된 이래 『영랑시집』 『영랑시선』을 거치면서 제목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서 「오-매 단풍 들겄네」로 바꿨어도 ‘골 불은’은 그대로 지켜졌다. 더구나 『시문학』 2호에는 「시문학 제1호 정오표」를 붙여 몇 개의 어휘를 정정하고 있는데도 이 시어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데도 이 시어를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텍스트는 ‘불은’을 ‘붉은’으로 정정해버렸다.

 

2) 오하근 「시침 떼기의 시」,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작가, 2012, 39쪽

 

 

  

 

 

 

 

 

 

 

2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라는 문장에 선생은 괜히 헛기침이나 하고 학생은 고개나 꼬게 마련이었다. 오하근은 앞에서 보는 것처럼 쉽고 바른 해석을 통해서 단박에 그들의 자세를 편하게고쳐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독특한 작품 해석 스타일이라 말할 수 있다.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독자의 접근을 오히려 차단하는 것 같은 난해한 비평도 많지만, 그의 평론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서 일반 독자 누구에게나 편하게읽히는 특징이 있다.

오하근은 201212, 영랑의 시 끝없이 강물이 흐르네의 한 구절을 인용한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인 듯이란 표제의 노작을 상재했다. 타계하기 전 펴낸 마지막 평론집이다. 그는 자신이 시를 산문화하는 정도의 수필형식으로 이 책을 썼다고 자세를 낮추고 있다. 바로 이런 자세가 그의 글을 편하게읽히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앞의 오매 단풍 들겄네의 해석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글은 결코 단순한 해독정도가 아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영랑이 남긴 87편의 시 전체를 일일이 확인하여 텍스트의 확정이란 결과물을 생산하였음은 물론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수많은 오류를 바로잡았다. 마지막 저서가 된 이 책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자.

작품을 해석하기 이전에 확실한 텍스트를 마련하고자 하는 작업은 어찌 보면 비평가의 양심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확정 작업은 일견 비문학적인 것 같이 보이나 실은 예리한 비평적 안목이 필수적이다.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특질에 대한 민감한 판단력이 있어야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비평의 한 방법으로 간주하고 원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 비평의 목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항용 발생하는 와전으로부터 텍스트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아무래도 교정과 수정을 거쳐 종합된 교열본(critical text)이 결국은 정본으로 채택되기 마련이다. 이는 어찌 보면 교열 과정에서 이미 문예비평의 기능이 발동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독서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재와 작품이 창작된 당시와의 언어적 거리를 메꾸는 작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어 교열된 텍스트, 정본혹은 결정판(definitive edition)이 확정되고 나서야 수많은 독자가 이를 자신들의 독서 대상 텍스트로 삼고 독서 행위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오하근은 이제 보게 되는 것처럼 작가의 본래 의도를 추적해 그 순수성이 회복된 확실한 텍스트의 확정 작업을 수행한다.

문학의 표현 수단인 언어는 진화하고 변화한다. 영랑이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할 때와 현재와의 언어적 상거는 거의 한 세기에 가깝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언어 역시 변화의 흐름을 보여 왔음은 자명한 일이다. 오하근은 한 세기의 언어적 거리를 주로 음운(音韻)어휘구문의 분석을 통해 좁혀간다. 그 과정에서 기존 해석의 허점과 논리적 모순도 잡아나간다.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라는 말은 시의 음운체계가 의미 전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말이다. 특히 운문시의 경우 음운체계의 재구성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운문시의 음악성은 대개의 영랑 시가 그러하듯- 시인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얽혀 있는 음의 조직에서 발현되게 마련이다. 오하근은 이런 음의 조직을 운율은 물론 소리의 동질적 조화, 이질적 갈림, 그리고 그런 것이 미치는 효과에 이르기까지 분석해내고 있다.

그는 또한 시인이 무슨 어휘를 어떤 의미로, 어떤 문맥에서, 무슨 단어와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는지 밝혀내고 있다. 이는 작품의 해석과 가치판단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훌륭한 작가는 많은 어휘를 사용할 뿐 아니라, 자신만의 의도를 가지고 그 어휘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바로 그런 의도와 의미는 이 책에서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처럼 포착되고 있다.

어휘 선택 못지않게 문장 구성의 어법도 작가에 따라 다르다. 문장 구문이 문학적 효과를 위해 어떻게 직조되고 있는가 하는 연구는 큰 비평적 의의를 가진다. 당시 작가가 구사하는 어휘도 현재를 사는 독자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지만 정작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것은 구문이다.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라는 구문을 문학 전문 기술자들도 불은붉은으로 해석했을 뿐 아니라 아예 오기(誤記)로 판단하고 텍스트 자체를 정정하고 말았다. 오하근은 이를 다시 뜯어고쳤다.

그런데 음운이고, 어휘고, 구문이고, 이 모든 것의 분석은 작품 전체의 의미 구조를 파악하는 비평적 안목을 전제로 한다.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전체의 의미 파악이 결여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은 말짱 공염불이 된다. 전체를 꿰뚫지 못하고 한 군데 혹은 부분의 분석에 매달리는 것은 지나가는 불에 밥 익히려는 짓이나 매일반이다. 우선 가장 회자되는 작품 하나를 예로 들고 오하근 분석 방법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전문

 

위의 시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와 함께 중학교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으로 대개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즐겨 낭송하던 시편 중의 하나다. 영랑시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순수 서정시면서도 쉽게 이해되는 시로 간주 되어 국어 교과서에 채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하근은 이 시를 해석하며 의미의 표리부동이란 글제를 단다. 표리부동하다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니 심상치 않을 수 없다.

우선 평론가는 예의 음운체계의 구성 요소에 시선을 모으고 오날 하로 하날의 모음조화를 포착한다. 그는 양성모음군으로 이루어진 이 구절을 영랑의 고심이 깃들인 시어라고 경의를 표하며, 이런 모음조화가 자그마하고 오밀조밀하고 날카롭고 밝고 가볍고 맑은 느낌의 효과를 살리는 문학적 장치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읽히고 있는 많은 텍스트에는 오늘 하루 하늘이라 표기되어있다.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이 뒤섞인 것이다. 영랑의 고심은 어디로 사라졌고 그가 의도한 모음조화의 운율은 어디로 날아간 것인가. ‘오날 하로 하날은 전후 문맥으로 대충 때려잡아도 오늘 하루 하늘과 같은 말이라는 것은 중학교 1학년생도 다 알 수 있다. 오하근은 지지고 볶고 싸우려 하지 않는다. 조용히 오날 하로 하날로 운율 조화에 맞게 다시 고쳐, 시인이 의도대로 정본의 제자리를 잡아주고 있을 뿐이다.

평론가는 시인이 무슨 어휘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오하근은 내 마음이라는 어휘를 주목한다. 위의 작품에서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은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다. 그는 영랑의 전 작품을 뒤져 50여 군데의 마음을 찾아내고 이를 동경과 애수 등의 정서가 발로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햇발같이’, ‘샘물같이등으로 나타나는 많은 직유를 상기시키며 이를 내 마음 같은 햇발’, ‘내 마음 같은 샘물로 환치시켜도 하등 이상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내 마음햇발, 샘물과의 함수관계는 수식과 피수식의 역할을 함께 하는, 주객일치의 의미를 갖게 되는 셈이다. ‘새악시 볼부끄럼’, ‘시의 가슴물결’, ‘에메랄드하날이란 어휘 역시 주객일치(主客一致)의 혼융으로 내 마음이 우러르고 싶은 하늘로 해석하고, 또한 이들 체언을 수식하고 있는 떠오르고’, ‘젖고’, ‘흐르는과 같은 수식어들은 모두 여성적 이미지의 이음동의어라고 파악하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평론가는 이 시의 첫 귀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에 주목한다. 그리고 작정한 듯 지금까지 수행된 평단의 안이한 해석에 예봉을 세운다. 그는 이 시가 그렇게 쉬운 시인가 묻고 있다. 또한, 시어 소색이다의 낱말 뜻조차도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지 묻고 있다. 지금까지의 해설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소색이다속삭이다로 해석한다. 즉 발음하기 쉽거나 듣기에 유쾌한 음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속삭이다에서 을 탈락시킨 유포니(euphony)3)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오하근은 영랑이 시어를 조어했다고 알려져있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이 말은 영랑을 폄훼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시어라 해서 조어법에 맞지 않게 아무렇게나 만들지는 않기때문이다. 그는 쏘삭이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의미로 보나 음운으로 보나 소색이다와 지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시에서 된소리를 예사소리로 바꾸는 것은 조어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하근은 자기주장만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편협한 지성이 아니다. 그는 소색이다어느 한쪽만의 뜻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다양한 해석의 길을 여는 다의성(ambiguity)이란 시적 가치에 부합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시는 가치 하나를 부가하여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 오하근은 음운’, ‘어휘’, ‘구문의 순서로 분석을 해나감으로 해석의 거리를 좁혀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평론가는 책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글이 영랑시의 인터프리테이션 이라기보다 페러프레이즈 정도의 작업, 즉 시를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겸양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견인하는 이론들은 놀랍도록 다양하다. 당장 위의 소색이다를 해석함에 있어 부추기는감이 더 드는 쏘삭이다로 해석하고자 하는 자신의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는 즉시 정신분석학을 들이댄다. 성적 이미지는 우리의 꿈에 변형되어 나타나고 예술가는 무의식적으로 이 이미지를 작품화한다. 그는 프로이트의 꿈에 있어서의 상징에 나타나는 여러 이미지를 예시하고 이 시에서의 햇발은 큐피드의 화살로, 돌담은 성채처럼 무언가 숨기는 여성으로, ‘쏘삭이다는 돌담의 틈새기마다 햇살을 비추는 힘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풀 아래 샘물은 여성의 음부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시는 밖으로 순수를 표방하고 안으로 에로티시즘의 시로 변용시킨 작품이 된다. 따라서 아이에게는 동시로 읽게 하고 어른에게는 에로틱 아트로 읽게 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의 시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시인의 창작 능력에 대해 오하근은 신기(神奇)한 신기(神技)라는 상찬을 영랑에게 바치고 있다.

오하근은 자신의 글이 시를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겸양의 말을 하고 있지만, 전문적 해석과 평가 작업이 책 전체에서 수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장 위에서 보는 것처럼 정신분석학이 적용되는 것은 물론 언어학적인 면에서 어휘의 근원과 파생이 그 음성학적 효과와 더불어 분석되고 있다.

이외에도 오하근은 동·서양의 신화와 고전, 다양한 문학작품을 견인하여 시 해석에 사용하고 또한 비교 분석을 시도한다. 관계되는 역사·철학과 함께 여러 문학 이론도 시 해석에 깊이 관여시키고 있다. ‘소월 시연구로 학위를 받았던 그에게 영랑 시연구는 또 하나 학위에 값하고도 남는다.

 

 

3) 언어듣기에 좋은 음질. 한 단어의 내부에서 또는 두 단어가 연속될 때에, 인접한 음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변화로, 모음 조화나 자음 동화, 모음 충돌을 피하기 위한 매개 자음의 삽입 따위가 있다. =활음조.

 

 

 

 

 

 

 

 

3

오하근은 문학작품이 무엇보다도 우선 제대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현대시들, 예로 한의 정서로 먹칠 된 김소월 시 작품 같은 경우를 제시하며 시편들이 제대로 해석되지 못하고, 필자는 달라도 동어반복으로 전체 윤곽만을 추상적으로 설명한다거나, 풀이가 곤란한 부분은 비켜 가고, 해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많은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해 왔다. 따라서 그는 해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작품, 해석에 논란이 있는 작품, 고착된 오류가 있는 작품들을 골라 올바른 해석을 시도하고 오류는 뜯어고쳐 바로잡고자 힘썼다. 이런 그의 노력은 한국 현대시 해석의 오류와 같은 비평적 노작에서 잘 드러난다. 이 저서는 작품론과 작가론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는 우선 앞부분 작품론의 서두에서 왜 자신이 지금까지의 통상적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최남선의 에서 少年에게는 정형시와 자유시의 중간 형태인가, 신체시나 신시인가, 모작시나 번안시인가, 이는 단순한 구호에 불과한가, 전통적인 은둔사상의 되풀이인가. 주요한의 불노리carpe diem적인 쾌락에의 탐닉인가, 화자가 부르는 는 시인 자신인가 독자인가. 김소월의 招魂은 절규인가, 하늘과 땅 사이는 거리인가, ‘은 단순한 초혼의 의지인가, 그의 금잔듸는 임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한의 표현인가, 금잔듸이 아니고 금잔듸인가.

()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자연은 서구적인 것인가, 현실과 그 나라와의 거리는 어떠한가. 이육사의 絶頂강철鋼鐵로 된 무지개라는 기상(奇想,conceipt)은 어떻게 은유를 성립시키는가. ‘무릎 꿇음은 기도나 굴복인가. 또 그의 廣野에서 千古의 뒤는 해방의 날인가, ‘超人은 조국인가. 서정주의 꽃밭의 獨白은 영원성의 추구인가, 그는 新羅抄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가. 4)

 

그는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작가들, 즉 최남선, 주요한, 김소월, 한용운, 조운, 김영랑, 신석정, 이육사, 서정주 등 9인의 이름과 함께 이들의 작품명을 일일이 거명하며 쟁점이 될 문제점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책 이름 그대로 해석의 오류를 똑바로 고치고자 하는 그의 마음가짐이 추상같다.

그는 먼저 장문의 논고를 통하여 영광과 굴욕을 함께하고 있는 최남선의 해에서 소년에게시대사적 구조로 해석하여 제자리를 찾아 주었다. 논란이 된 신체시신시의 효시에 대해서 그런 명칭은 시의 형태상의 명칭일 수만은 없고, 시대와 내용과 형태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며 당시 개화운동의 시가, 혹은 이런 시대정신이 깃들여 있는 시가를 개화시가라 하여 신시를 대신하고 여기에 창가, 시조, 자유시, 산문시 등 당시의 각종 시가 형태를 포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시가 바이런의 The Ocean이나 테니슨의 Break, Break, Break의 모방 내지 번안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 증거의 허구성을 자세히 고찰하였다. 오하근은 이 시가 가르치려는 외침이 지나쳤기 때문에 미학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침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속성은 교훈시의 함정이라고 명쾌한 판단을 내리면서도 육당이 개화기의 소년을 계몽하기 위해 영탄, 돈호, 의지, 명령, 청유 등 교훈시의 모든 속성을 동원해서 이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을 노린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이런 수사학이 결코 결점으로 지적될 수 없다고 이 시를 옹호하고 있다.

그는 주요한의 불노리서사적 구조로 다루며 작품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작품의 원문 해독부터 제대로 하지 않고 시적 가치를 논하는 난센스를 저지른 경우로 이 시를 제시하고 3연에 나타나는 물결치는 뱃슭에는 조름 오는 니즘의 형상이 오락가락이란 대목을 문제 삼는다. 대부분의 책들이 현대 표기법으로 뱃슭뱃속혹은 뱃기슭으로, ‘니즘리듬이나 이즘으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그는 뱃슭’, 옷깃의 의미임으로 뱃슭배의 목 부분의 가장자리로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그는 또한 니즘이란 어휘에 대해서도 언어 변화의 자세한 고구考究를 통해 평안도 방언 발음의 연철 표기로 잊음[망각(忘却)]이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이런 작업은 원문 해독이라는 해석의 초기 단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이 시가 감탄, 반복의 남용, 감정의 직접적 토로 등의 결점을 지니지만 대립적 시어의 직접적 결합을 피하면서 모순과 갈등을 빚는 아이러니를 은폐하고, 시어를 반복하면서 동시에 이를 절제하는 비약적 수법을 사용하여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긴장감의 결여를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아이러니의 은폐와 비약적 수법을 읽지 못한 오해이런 오해는 불식되어야 한다고 이 시를 옹호한다.

그의 김소월에 대한 깊고 넓은 천착은 학계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금잔디상상적 구조로 읽고 시선의 집중과 확산’, ‘시야의 축소와 확대’, ‘시선과 시야의 이동과 복귀를 중심 구조로 하는, 임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한이 아닌 재생으로 인한 만남의 기쁨을 그 정조로 하고 있다고 새로운 해석을 내린다. 초혼양가적 구조로 해석하여 백주술의 진혼가와 함께 흑주술의 초혼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이 시가 단세포적인 과잉감정노출로 평가절하되는 것에 대해서는 감탄어의 빈도가 심하고 반복이 중첩되기 때문에 외관상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감탄어는 항상 외침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중얼거림으로 머물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지는 것이고, 반복어구 역시 감정 변화의 추이에 따라 같은 시행이라도 그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라고 이 시를 편들고 있다.

그는 이외에도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4원소의 구조로 파악하고, 조운의 구룡폭포유물론적 구조로 해석하고 있다.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아이러니 구조, 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원근법적 구조, 육사의 절정기상(奇想)구조, 광야원형적 구조,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정신분석적 구조로 파악하여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고 있다.

또한, 책 뒷부분의 작가론을 통해서도 김억과 김소월 간의 영향 관계, 가람 이병기의 전기 서경과 후기 서정의 범주, 석정의 시가 목가 시인가 현실비판 시인가 등을 장문의 논고로 고구하였다. 그는 이제껏 고착되어 왔던 잘못된 통설에 문제를 제기하고 반론하고 스스로 해답함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개안(開眼) 기여하였다.

이러한 그의 커다란 문학적 성취는 그가 작품을 정독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작품의 언어가 지닌 모든 외연적, 내포적 가치와 함축에 대해 심도 있게 글을 읽는다. 그는 단어의 복합적인 의미의 인식이 작품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고 믿고 사전에서 추적되는 모든 어휘의 변화와 그 어원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새삼 논란을 벌일 까닭이 없다는 평자들의 주지의 사실에 분노한다. 그에 의해 새롭고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 언어가 얼마나 다수인가. 그런데 무슨 주지하는 사실이란 말인가.

그가 아이러니와 역설을 통한 긴장과 대립을 중시하는 것을 볼 때 그를 신비평가로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오하근은 시침 떼기의 시라는 글을 통해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영랑의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소월의 임의 말씀, 김동한의 웃은 죄, 정양의 진달래 캐러왔다가등 많은 시 작품을 예로 들며 아이러니의 진실을 찾아 우리가 올바른 독법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다. 그는 과장, 축소, 대조, 패러독스, 패러디, 동음이어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아이러니의 다의성을 중시한다. 신비평가들은 서로 긴밀하게 작용하는 긴장, 아이러니, 역설 등을 무엇보다 크게 강조한다. 때로는 다른 요소들을 거의 제거하고 이들의 상호관계만을 추적할 정도다. 이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외연과 내포의 갈등에서 야기되는 긴장의 성공적 해결을 추구하는 작업으로 오하근도 평소 즐겨 쓰는 비평 방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비평에만 경도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오산이다.

신비평이 우리의 감식력과 감상의 폭을 넓혔고 여러 가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신비평 추종자들은 작품그 자체 외의 것은 모든 것을 무시하는, 좀 더 중차대하다 할 만한 과오를 범했다. 따라서 명민한 비평가들은 절충적인 방법을 채택했고 다양한 방법들을 융합했다. 오하근은 이미 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가 해석의 오류를 잡기 위해 시도한 평론들의 소제목만 일견해보자. 시대사적 구조, 서사적 구조, 상상적 구조, 양가적 구조, 4원소의 구조, 유물론적 구조, 아이러니 구조, 원근법적 구조, 기상(奇想)적 구조, 원형적 구조, 정신분석적 구조 등, 이들만 보아도 오하근이 얼마나 다양한 비평방법을 수용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그가 수행한 수고와 헌신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새롭고 커다란 한 획을 그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4) 한국 현대시 해석의 오류집문당, 2003, 5

 

 

 

 

 

 

 

4

오하근은 2010전북현대문학·하권을 상재한다. 상권은 문학사와 작가론을, 하권은 작품론을 쓴 것으로 상권이 356페이지, 하권이 398페이지로 합하면 무려 754페이지나 되는 대단한 역작이다.

그는 상권에서 전북현대문학사를 기술하며 우선 전북문학의 개념을 정리하고, 그 기점, 방법론을 확실히 하고자 한다. ‘한국현대문학은 문학의 주체와 매체와 제재에 따라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삶을 표현한 문학이라고 정의된다. 그렇다고 해서 전북문학을 전북인이 전북어로 전북인의 삶을 표현한 문학이라고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전북의 방언도 한국어일 따름이고 전북인의 삶도 한국인의 삶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전북문학이란 단지 전북 출신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문학일 따름이다. 따라서 오하근은 전북현대문학사의 기점도 초기 한국현대문학사의 전개 과정에서 전북인의 참여를 기점으로 잡고 문학사의 기술 방법은 자료 제시를 우선으로 삼겠다고 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는 유엽(1902~2975)을 초창기 현대문학의 대열에 최초로 참여한 전북인으로 본다. 유엽은 1923년 와세다 유학 중 같은 문과 학생인 손진태, 양주동, 백기만 등과 함께 동인지 금성을 창간하고 이 동인지 첫 호에 시 낙엽, 수필 사자의 아가리, 평론 시와 만유를 발표한 사람이다. 오하근은 이어 1923년 파스큘라와, 1925년 카프의 발기인으로 참가한 이익상(1895~1930), 192411조선문단과부로 등단한 김태수(1904~1982), 19252개벽대도행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김창술(1903~1950), 1926년 동아일보 신춘 1회에 새날의 기원이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한 김해강(1903~1987)20년대에 활동한 주요 작가로 보고 있다. 또한, 당시 활동을 시작하는 시조시인 이병기(1892-1968)와 양상경(1903~1988)에 대해서도 작품과 함께 문학적 경향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초창기 한국문학과 전북문학은 그 궤를 같이하였고 거명한 이들이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1920년대의 전북문학사를 매듭짓고 있다.

오하근은 1930년대에 활약했던 신석정, 서정주, 이성범, 이한직을 고구하고, 당시 주류 밖에 있던 채만식과 이근영을 천착한다. 최초의 전북 아동문학 작가인 김완동을 소개하고 1930년대 국내에 몇 안 되는 전문 평론가 중 이 지역 출신인 김환태와 윤규섭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1940년대는 창씨개명, 신사참배, 국어사용금지가 강요되고 조선·동아일보가 폐간되어 한국문학이 종말을 고하는 일제 마지막 시대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고 소수의 문인들은 아예 붓을 꺾었다. 오하근은 당시의 시대상을 설명하며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유진오를 소개한다. 또한, 해방 후 채만식, 이병기, 김창술, 김해강, 신석정, 백양촌, 정우성 등이 주축이 되어 범 지방 문인단체인 전북문화인연맹이 최초로 조직되었음도 기록하고 있다.

1950년대는 6·25동란의 비극으로 시작되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소위 전후문학이 등장하고 이 지역에서도 수많은 문인이 배출되고 동인회가 형성된다. 작가는 이 시기에 등단한 시인들, 이철균, 박봉우, 고은, 조두현, 정렬 등을 소개하고 특히 김환태를 잇는 평론가, 천이두의 등장에 주목하고 있다.

1960~1980년대의 작가들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고, 타계했더라도 기억이 아직 생생한 분들이다. 1960년대 시에서는 이병훈(1960년 등단), 이기반(1960), 허소라(1960), 김민성(1960), 박항식(1962), 진을주(1963), 이가림(1966), 채규판(1966), 문효치(1966) 등이, 소설에서는 홍석영(1960), 서정인(1962), 윤흥길(1968) 등이, 아동문학에서는 서재균(1965), 윤갑철(1969) 등이, 평론에서는 이상비(1960), 김교선(1962) 등을 다루고 있다. 이어 1970년대 시에서 김영석(1970), 송하선(1970)을 시작으로 진동규(1978), 김남곤(1979) 등이, 소설에서는 이정환(1970)을 필두로 양귀자(1978)에 이르기까지 소개한다. 1980년대의 작가들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들로 몇만 거명하자면 이병천, 안도현, 소재호, 조기호 등이 있고 평론의 전정구, 임명진도 이때 얻은 수확이다. 최명희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오하근은 전북현대문학사를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8장으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대충 일별해보기만 했는데도 그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뒤적이고 땀을 쏟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지와 자료 미비로 누락된 문인도 많고 요식적이고 형식적인 나열이 되었다고 겸손해한다. 문학인이 많지 않았던 초창기는 그 희소가치로 작품과 인간에 대해 약간은 서술했으나 1960년대 이후는 등단에 대한 기록만 제시했을 뿐이라고 겸양의 말을 하지만 문단에 등단했다는 것이 문학사에 기록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잊지 않고 있다. 자신이 쓴 1960년대 이후의 문학사는 다만 평가되지 않은 자료에 불과하다며 이를 바탕으로 전북 현대문학사는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다. 문학사는 가치 평가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5

그는 문학사를 기술하며 마지막 부분에서 특별히 이 지역 출신 평론가의 문학이론, 작품평가, 시대성과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지역 평론가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고구(考究). 특히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이익상, 유엽, 김환태, 윤구섭을 제외한 한국문학평론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바로 1920년대 후반기에 전개된 민족문학과 프로문학 간의 논쟁의 중심에 선 평론가들이기 때문이다.

전주 출신 이익상은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을 결성하고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신석정의 스승이었고 김해강, 김창술의 후원자였다. 그가 조선일보의 학예부장이었을 때 이들은 많은 시를 같은 신문에 발표하였고 김해강. 김창술은 등단 후 카프시인으로 두드러진 활약을 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이익상은 예술적 양심이 결여한 우리 문단이란 글에서 당시 문단의 문제점을 통박하는데 작가들이 진실한 시대고나 인생의 번뇌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울분과 고뇌와 반항적인 제재들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희적 작품을 산출한다는 점, 지적 성숙이 부족한 자들이 명예욕으로 글을 쓰고 잡지들이 이를 게재하고 있다는 점, 예술성 없이 연애를 구가하고 향락에 도취하는 퇴폐적 경향, 무슨 주의니 하는 서구 문예사조의 범람 등이 그 비판의 대상이었다.

오하근은 이익상의 이런 비평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빙허 군의 빈처와 목성 군의 그날 밤을 읽은 인상과 같은 글은 이익상이 얼마나 뛰어난 실제 비평가였는지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현진건의 빈처에 관한 부분은 소설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함으로 지금까지 이 소설에 가한 최고 수준의 비평이라고 평가한다. 남에서는 금기되는 카프의 맹원이라는 점에서, 북에서는 조직적 투쟁이 아닌 개인적 항거에서 머물렀다는 점에서 무시당한 이익상은 앞으로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오하근은 목청을 높이고 있다.

전주 출신 유엽의 평론에 대해서는 서구의 표현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짧은 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시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에 이 정도의 시론을 소개한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그 공로를 인정한다. 또한, 이익상이 모방론을 주장했지만 유엽은 이와 대립적으로 표현론을 제시한 것으로 양자를 비교하며 이는 소설론과 시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무주 출신 김환태의 인상주의 비평에 대해서는 무려 9면의 지면을 할애하며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만큼 김환태는 한국비평사에 중요한 비중을 가진 인물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김환태는 "비평의 대상은 사회도, 정치도, 사상도 아니요 문학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비평가는 작품에서 실용적, 정치적 관심을 버리고 작품이 주는 인상을 종합하여 또 하나의 작품을 재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하근은 김환태의 이런 비평적 지표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지만 반론할 것에는 예각을 세운다. 예로 김환태가 옹호하는 순수문학 역시 일제의 탄압과 카프의 정치성에 식상한 시대의 반영이다. 카프문학 역시 암울한 역사적 배경과 현실에 의한 시대적 산물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사회의 외적 조건에 초월해야 하고 비평가가 작품에서 시대와 사상을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며 반문하고 있다. 오하근의 주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있다.

 

왜 작가가 사회를, 비평가가 작품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이 부당한가. 그것은 유기체이므로 그렇다면 생명을 상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학에서도 산 사람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다. 딴 동물이나 시체를 해부하여 생명체가 생명체이게 하는데 활용한다.

()

무엇보다도 생명체는 해부 복원할 수 없으나, 예술은 분석 후에 종합이 가능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분석은 종합의 전제이다. 5)

 

그렇다고 해서 김환태의 비평론과 오하근의 견해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김환태에 대한 오하근의 큰 관심은 비평론 하나하나를 검토하게 만들고, 그 결과 시각 차이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차이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오하근은 김환태의 열렬한 독자가 되는 것이다.

문학의 사상성 회복을 줄기차게 외친 남원 출신 윤규섭이야말로 김환태의 대척점에 서 있는 비평가다. 이런 점은 작가나 작품에서 받은 인상만으로 평론을 이끌어 나간다면 이는 평론의 자기모멸이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평론의 지표를 분명히 한 다음 실제비평에 들어가 기술 문제를 논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사상성은 세계관, 역사성, 시대성, 사회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문학을 두 가지 인식의 방법으로 본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인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있어야 하는 인생을 인식하는 것이다. 당연히 전자는 주변의 사생활이나 관습적 사고를 그린 것으로 사상성이 결여된 현실주의적 문학이 되는 반면 후자는 그가 주장하는 특수한 체험들을 개괄하여 진실을 표현하는 사상성을 가진 작품이 된다.

이런 윤규섭의 비평 정신에 대해 오하근은 상당한 호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이런 당위적 진실을 극단으로 추구해 소설의 기술조차도 제재를 선택하는 사상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문학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

근대문학 초창기, 비평의 불모기에 활약한 이 지역 출신의 비평가들에 대한 오하근의 문화사적 정리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특히 1930년대에 본격적인 평론을 쓴 김환태와 윤규섭에 대한 그의 자세한 고찰은 이익상은 소설가로, 유엽은 주로 시인으로 활동했다- 눈에 띄는 값진 수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하근은 김환태를 순수문학의 겸손한 옹호자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쓰는 비평가를 힐난하며 자기부터 어려운 비평문장을 쉬운 문장으로 바꾸어 놓은 미덕은 김환태의 또 다른 업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순수문학에 가장 강한 반발을 보이며 시대정신과 목적주의를 주장한 윤규섭도 비평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관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프로문학의 선도적 역할을 했던 윤규섭은 분단시대 문학사의 질곡으로 남아 그 존재조차도 잊혀졌다.

한국문학사의 흐름에 순행하였든 역행하였든 이들의 커다란 족적은 무시되고 있다. 오하근은 이 책에서 특별히 인상비평과 경향비평의 대립적 양상이란 별도의 글로 김환태와 윤규섭을 다시 논하며 두 사람의 문화사적 위치를 바로잡아주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책무라고 강조한다.

 

 

5) 오하근 전북현대문학평론사, 전북현대문학신아출판사, 2010, 상권 73

 

 

 

 

 

 

 

6

오하근은 바로 이 책으로 평론가에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2011년도 제22회 김환태평론문학상을 받게 된다. 이 책에는 앞서 논의한 문학사 외에도 작가론과 작품론을 통하여 이 지역의 수많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치밀하게 분석되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어느 선각자의 도전과 좌절6) 같은 글은 문학사 연구에서 외면당했던 초창기의 소설가 김태수를 새롭게 발굴·조명한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

심사위원들은 오하근의 지역문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그 사적 정리 작업으로 그동안 문학사 연구의 중심 영역에서 소외된 지역 문인들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평가함으로 지역문학사 확립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점을 선정 이유로 평가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상의 명칭은 '김환태평론문학상이다. 앞에서 김환태는 "비평의 대상은 사회도, 정치도, 사상도 아니요 문학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오하근은 김환태의 이런 비평적 지표에 대해 예각을 세우고 왜 작가가 사회를, 비평가가 작품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이 부당한가.”라고 반문하고 있음도 보았다. 실제로 그는 역사의식이나 시대성을 외면하는 김환태의 인상주의를 같은 글에서 모순으로 지적하고 있다.

필자는 비판적 시각을 피력한 평론가가 바로 당사자 이름을 딴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데 대해 아이러니하다는 느낌7)이라고 쓴 바 있다. 물론 아이러니를 느꼈다는 말잘못되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같은 글에서 필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모습을 띠어 슬픔과 기쁨을, 사랑과 미움을,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하는 것이며 이런 이율배반적인 충동을 한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포괄하여야할 것이라고 오하근의 수상에 박수를 보냈다. 그는 진정 우리를 참다운 인식에 도달시킬 수 있도록 전력투구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도 않고 알리려고도 않는 사람이다. 혼자 연구실에서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고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그는 자신을 알릴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땀의 결과 그는 지역문학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 바로 그 땀에 대한 조그만 위무(慰撫) 이 아름다운 상은 그를 찾아 왔던 것이다.

 

 

6) 같은 책, 상권 86-115

7) 호병탁, 현대문학사의 굵직한 획, 문학사상 11, 2011  

    호병탁 부여 출신으로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다시집 칠산주막평론집 나비의 궤적』 등이 있다

 

 

 

 

 

 

 

7

지금까지 오하근의 주요 저작 3개를 중심으로 글을 썼다. 따라서 작가론이 아니라 작품론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의 비평 창작물에 대해 나의 미학적 관점을 기준으로 또 다른 비평, 메타비평을 쓴 것이다. 작가의 삶과 전기(傳記)적 활동에 대해선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가 계속 건필을 휘두를 줄 알고 작가론을 훗날을 기약했지만, 그는 20171117일 밤 별세하고 말았다. 겨울이 되어야 진정 솔이 푸른 줄 알게 되는 법이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얼마나 그가 푸른 솔 같은 사람이었는지 새삼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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