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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악필(握筆)의 대가 석전 황욱(石田 黃旭)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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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악필(握筆)의 대가 석전 황욱(石田 黃旭)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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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인의 자화상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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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필(握筆)의 대가 석전 황욱(石田 黃旭)
  • 2021-09-1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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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악필(握筆)의 대가 석전 황욱(石田 黃旭)

 

오광석(서예가)

 

 

1. 생애(生涯)

 

석전 황욱(石田 黃旭)은 1898년 11월 10일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구슬마을에서 평해 황씨(平海 黃氏)인 황효익(黃孝翼)의 5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석전의 집안은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석전의 7대조인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1729~1791)은 실학사상의 거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재유고(頤齋遺稿)』, 『이재속고(頤齋續稿)』, 『이재난고(頤齋亂稿)』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석전은 대대로 이어 온 선비 집안 분위기에서 생활하며 6세에 서학에 입문하여 붓을 잡기 시작하였다. 당시 집안의 경제적 여건도 1천여 석을 할 정도로 좋았으며, 뛰어난 재능과 노력하는 자세로 석전은 항상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석전의 나이 16세 되던 1913년, 순창군 쌍치의 노병준(盧秉準)의 장녀 노희숙(盧希淑)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막역하게 지내던 독립운동가인 근촌 백관수(芹村 白寬洙, 1889~?)의 권유로 1916년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친의 만류에 1년도 못 채우고 포기하고 귀향하였다.

그 후 석전은 한학과 서예에 더욱 정진하였고 육예(六禮)를 섭렵하며 선비로서의 수양을 쌓아갔다. 특히 이 시기에 고창 최초의 율계(律契)인 ‘삼구회’가 창립되어 익산 출신의 거문고 명인인 신쾌동(申快童)에게 배우면서 황하영·황오익·신쾌동·이화중선 등 풍류객들과 어울려 연주도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이때를 즈음하여 석전은 25세(1922년) 때 고조부의 비문(碑文)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석전은 갈수록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고 암울한 시기가 계속되자 망국의 한을 극복하고자 처 숙부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곳 돈도암(頓道庵)에 기거하면서 왕희지(王羲之)와 구양순(歐陽詢) 등의 필법을 중심으로 서예와 한학에 몰두하였다.

1930년, 8년여간의 금강산 돈도암에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석전은 풍류를 즐기며 서예에 전념하였고, 1942년에 8대조의 비문(碑文)과 1944년에 15대조의 비문 등 10여 점을 휘호(揮毫)하였다. 그 당시 석전은 시간만 있으면 붓을 잡았으므로 연습으로 버린 종이가 많이 쌓여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해방과 더불어 석전의 가정에 큰 시련이 닥쳐왔다. 석전의 슬하에 3남 1녀가 있었는데 장남 병선(炳善)과 차남 병옥(炳鈺)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좌익운동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시절, 장남 병선은 고창고보(高敞高普)를 졸업하고 짧지만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전북도청과 고창 성내면사무소 등에 근무하면서 좌익 활동을 하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전라북도지부 중앙본부를 거쳐서 전주시당 위원장으로 내려와 활동하다가 인민군 후퇴 시 회문산으로 들어가 소위 빨치산이 되었다. 형과 함께 좌익 활동을 했던 차남 병옥(炳鈺)은 전쟁 중에 인민군을 따라간 뒤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나중에 북한에 들어가서 대학교수를 지냈다.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장남 병선은 1953년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석전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는데 천석지기 집안의 재산이 이때에 모두 탕진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장남 병선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가산만 탕진하고 별다른 방법이 없자 석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탄원서를 올리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탄탄한 경제력으로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 석전은 남의 집 다락방에서 잠을 자며 화선지에 정성 들여 쓴 탄원서를 가지고 매일 경무대로 찾아갔다. 경비병들을 붙들고 며칠 동안 애원한 끝에 간신히 비서관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비서관에게 끈질기게 매달려 마침내 탄원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되고, 탄원서를 본 대통령은 석전의 글씨에 탄복하여 “이 탄원서 글씨가 그 죄인 아비의 글씨란 말이냐? 이런 선비의 자식이라면 목숨을 살려야겠다.”고 하면서 사형을 무기로 감형해 주었으며, 다시 감형되어 20년 만에 출감하였다. 석전의 훌륭한 글씨가 대통령을 감동시켜 죽음 직전의 아들을 구한 것이다.

이후 석전은 고향의 형님 집에서 기거하면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가야금과 양금을 연주하면서 글씨 쓰기에만 몰두하였다.

금강산에 가기 전 몸담았던 율계회(律契會)인 삼·구회(三·九會)는 193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다가 일제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해산되었고, 1935년에 인근 흥덕에 아양율계(峨洋律契)가 결성되어 20여 년간 지속되다가 해체되었다. 그 후 한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1961년 3월 삼·구회 잔여 회원들을 중심으로 육·이계(六·二契)가 설립되었다. 율계회의 이름을 육·이계로 한 것은 육예(禮·樂·射·御·書·數) 중에서 두 번째가 음악인 것을 상징하여 육·이계라 한 것이다.

회원으로는 회장에 황하영(양금), 황화익(가야금), 황오익(거문고), 황욱(가야금·양금), 이병구(양금), 황재문(장단), 김환문(가야금), 김환철(대금), 한양수(가야금·장단·시조), 김광호(가야금), 김용일(거문고) 등이다. 이들은 매월 회원 집을 돌아가면서 율회를 갖고 정악(正樂)을 연주하고 풍류를 즐겼는데, 전통악기와 시조(時調)가 어우러져 무아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석전은 주로 가야금이나 양금 그리고 시조를 하였다.

당시 고창과 정읍·전주 등을 오가면서 글씨를 쓰고, 율계 회원들과 정악을 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던 차 석전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석전이 60대 중반을 지나면서 오른손에 수전증이 온 것이다. 그 정도가 심하여 도저히 정상적인 집필법(執筆法)으로는 글씨를 쓸 수가 없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석전은 붓대를 손바닥으로 움켜잡고 붓을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집필하여 글씨를 연습하였다. 이것을 ‘악필법’이라고 하며 비정상적인 집필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악필법을 사용하여 작품을 하던 시기인 1965년에 부인 노희숙이 사망하였다. 부인과 사별한 후 한동안 글씨도 쓰지 않고 실의에 빠져 있었으나 곧 서예에 정진하였으며 악필법으로 작품을 하기 시작하였다.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 오직 책을 보고 글씨만을 써 온 석전에게 세상에 알릴 기회가 왔다. 아들 병근이 부모의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열어 드리기로 하여 1973년 전주시 중앙동에 있는 아담다방에서 석전의 제1회 전시회가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열렸다.

아들의 주선으로 이춘성 도지사를 비롯한 설인수 교육감, 신석정 시인 등 도내 기관장 및 유지 30여 명이 초대하는 형식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석전은 이 전시회에 약 30여 점의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전시장을 둘러 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때까지 서예계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석전의 독특한 서풍과 선이 굵고 힘이 넘쳐 획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악필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석전은 이렇게 76세에 첫 전시회를 열면서 당당히 대한민국의 서단(書壇)에 나타난 것이다. 석전은 제1회 전시회에서 악필에 반한 사람들이 70여 점을 주문하여 더 써 주기도 하였다.

1974년 6월에는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서울에서 희수(喜壽)기념전이 열렸다.

전주에서 생활하던 석전은 아들의 사업 실패로 며느리가 임실군 내의 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자, 1975년도에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로 시골집을 빌려 이사하게 되어 전주로 이사를 나오던 1978년 하반기까지 임실에서 생활을 하였다.

1975년도에 전주와 광주에서 3회, 4회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1977년에는 서울의 출판문화회관에서 제5회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전국적으로 명필로서 그의 명성을 떨쳤다. 1978년 가을에는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성황리에 제6회 전시회를 열었다.

석전은 임실에서 기거하던 1975년부터 1978년 상반기까지 아호를 백련산인(白蓮山人), 백련산방(白蓮山房)으로 많이 썼고, 귀수헌주인(龜壽軒主人), 물기헌주인(勿欺軒主人) 등도 가끔 사용하였다.

1978년 임실에서 전주시 태평동으로 이사한 후 아호를 ‘태평노인(太平老人)’으로 쓰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태평동에서 1년 정도 살다가 1979년에 평화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때에는 아호를 주로 ‘평화노인(平和老人)’, ‘모악산인(母岳山人)’, ‘학소봉하(鶴巢峰下)’ 등을 썼다. 전주 백제화랑(월담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고, 1980년에서 광주 현대화랑에서 전시를 가졌다.

1981년에는 전라북도에서 수상하는 ‘전라북도문화상’을 수상하였고,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아일보 초대전이 열렸다. 이 초대전에 8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금서사십년(琴書四十年)>, <향우종화(香雨種花)>, <산공벽수류(山空碧水)>, <한퇴지 시 8폭 병풍> 등 84점이라는 많은 작품들을 출품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어 1982년 부산에서 부산일보 초대전이 열렸으며, 1983년에는 남산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고, 서울 롯데미술관에서 초대전이 열렸다. 이 초대전에는 이방자 여사를 비롯한 유진오, 황인성, 서예가 원곡 김기승 등 많은 사람들이 개막식에 참석하였으며 성황리에 전시회를 마쳤다.

1984년부터는 오른손 수전증이 더욱 심해져서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때 석전의 나이 87세이니 보통 사람 같았으면 거동도 제대로 못 할 정도였겠지만 그는 질경이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밤낮없이 좌수악필(左手握筆)을 시도하고 연습하였다.

석전은 각고의 노력 끝에 1985년에 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 출품하면서 좌수악필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어서 미수(米壽) 기념 초대전이 3월에 서울 롯데미술관에서 열렸고, 이 초대전에 <고인서무불독(古人書無不讀)>, <설령고송(雪嶺孤松)>, <귀거래사(歸去來辭) 8폭> 등을 출품하였다.

1986년에는 전라북도에서 수여하는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7년도에는 전북일보사의 ‘모수(耄壽) 기념 초대전’이 열렸다.

1988년에는 중앙일보사 초대전이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망백기념(望百紀念)으로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전시였다. 우수악필에서 좌수악필로 바꾼 지 몇 년이 지나 좌수악필의 진가가 나타난 전시회였다. 특히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는 18폭의 대작으로서,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덕유린(德有隣)>, <금수강산(錦繡江山)> 또한 규격 면에서 91세의 노인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대작들이었다. 그는 이 전시회에 120여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전시장에는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 관람하였고 대성황을 이루었다.

같은 해 국내 최대의 ‘지리산화엄사’ 일주문 현판을 썼고, 경주 불국사의 종각과 전주 오목대 편액도 휘호하였다.

1991년에는 금산사 대적광전을 휘호하였고, 같은 해 예술의전당에서 동아일보사 주최로 회고전이 10월 10일에서 10월 30일까지 열렸다. 이 회고전은 전 서예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성황리에 전시회를 마쳤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붓을 놓지 않던 석전은 1993년 3월 초에 앓다가 1993년 3월 22일 100세를 몇 년 앞둔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고향 선산에 영면(永眠)하였다.

석전이 세상을 떠나던 날, 그의 손자 황방연(黃邦衍)이 제5회 한국미술협회 추최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일간지(日刊紙)에 두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였다. 석전의 필신(筆神)이 손자인 방연에게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희비(喜悲)가 엇갈린 보도였다.

혼탁한 이 시대의 정신적 보루로서 육예(六藝)를 사랑하였고, 우리나라 서예계에 우뚝 선 석전 황욱은 90여 년간 잡아온 붓을 영원히 놓아 버렸다.

1999년 5월에 아들 황병근이 418점의 석전 유작을 포함하여 고서(古書), 간찰(簡札) 등 5,000여 점이 넘게 전주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고, 1999년 10월에 석전은 국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석전 기념실을 따로 만들어 석전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16년 4월에 국립전주박물관 석전 기념실 앞에 석전의 흉상이 세워졌다.

 

 

2. 학서(學書) 과정

 

석전은 처음에는 서예보다는 한문(漢文)을 암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학서(學書)하였다. 석전의 나이 열 살이 지나면서 점차 소질이 나타났고,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붓글씨에 뛰어난 제주가 있다는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리고 적성에도 맞았으므로 아무리 오래 써도 힘들거나 지루한 줄을 몰랐다.

당시엔 종이가 부족하여 앞뒤로 여러 차례 연습한 뒤에 종이를 버렸으며, 종이가 없을 때에는 마룻바닥이나 판자로 만든 목판에 연습하였다.

아들이 글씨에 제주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부친은 석전의 15세를 전후하여 글씨를 본격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필첩을 구해주는 등 후원해 주었다. 이러한 부친의 관심이 석전으로 하여금 오로지 서예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서예를 배울 수 있는 교습소가 몇 군데 있었지만 대부분이 서당에서 이른바 서당체(書堂體) 글씨를 배웠으며, 또는 선조들 중에서 필체가 좋은 글씨를 체본으로 삼아 공부하였기 때문에 정통 서법을 공부하기란 어려웠다. 석전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였으나, 근촌 백관수, 인촌 김성수 등 지인들을 통하여 구하기 어려운 중국 명필들의 법첩(法帖)과 국내 명필들의 필첩(筆帖)을 구하여 공부할 수 있었다.

처음 법첩을 구하여 쓰기 시작한 것이 구양순(歐陽詢)의 해서(楷書)인 <구성궁예천명(九成宮禮泉銘)>이었다. 그러나 법첩이라 해봐야 아쉽게도 구양순의 비첩(碑帖)이 아니라 그 비첩을 보고 중국의 황자원(黃自元)이 임서(臨書)한 법첩(法帖)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법첩도 아주 좋은 교재였다. 이 법첩을 가지고 처음에는 글자 모양이 똑같게 형임(形臨)을 하였고, 나중에는 의임(意臨)을 하는 등 철저히 공부를 하였다.

석전은 구양순과 조맹부를 공부한 뒤 같은 전북 출신으로 조선 후기 명필로 이름이 났던 창암 이삼만(蒼岩 李三晩)의 글씨에도 관심을 가져 그의 필첩을 여러 권 구하여 임서를 하였으며 특히 그의 해서를 좋아했다.

석전이 공부한 법첩으로는 고시(古詩)를 집자한 <고시초법첩(古詩抄法帖)> 그리고 <집자성교서(集子聖敎序)>를 열심히 썼고, 안진경(顔眞卿)의 삼고(三稿)에 대해서도 상당 기간 학서를 하였다. 그러다가 25세 때 고조부(高祖父)의 비문(碑文)을 해서로 쓰고, 암울한 시기에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처숙(妻叔) 노병권과 함께 금강산의 돈도암에 들어갔다. 금강산의 수려한 자연을 보면서 예술적 감각을 키웠고 그때까지 미진했던 서예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석전이 오로지 글씨에만 정진하게 된 것은 역사적 수난기를 겪으면서부터 “정심(正心)과 정심(靜心)의 상태에서 붓을 놀리면 모든 괴로움이 잊혀진다.”면서 이렇게 시작된 생활은 석전을 초야에 묻혀 지내는 은둔 작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석전은 금강산에서 8여 년간 있으면서 많은 글씨들을 썼는데 예서 전서보다 행초서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였다. 먹물이 없으면 바위에 고인 물로 바위나 목판에 쓰기도 하였다고 하니 그의 글씨에 대한 열정과 고충을 짐작케 한다.

석전은 금강산의 영겁에 걸쳐 비바람에 깎이고 패인 기암절벽과 수백 년의 풍상을 견디어 낸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보면서 예술 감각을 키웠다. 이 시기에 석전의 서학(書學)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3. 석전의 작품세계

 

석전은 많은 서예가들의 글씨를 법첩에 따라 수련하였으며, 그 임서를 바탕으로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예술혼을 불어넣었다. 초기 작품들은 유약해 보이는 듯하고 선질이 고왔으나 나이가 들고 역경을 이겨내면서 서풍이 달라졌다. 석전은 두 번의 신체적 장애 때문에 정상적인 집필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우수 악필법(1965~1983)과 좌수악필법(1984~1993)을 사용하여 글씨를 썼다.

석전은 글씨를 쓸 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심서(心書)를 하였는데 아쉽게도 석전의 초기 작품들이 6·25 때 대부분 소실되어 악필 이전의 글씨가 몇 점밖에 없는 상태다. 다만 광복 전에 선조들의 비문을 썼는데 악필 전의 부드러운 글씨체로 10여 점의 비석에 비문으로 남아 있다.

 

1)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전서 작품은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예서 작품도 몇 점 되지 않아 희소하다. 예서는 법첩 「한비범(漢碑範)」을 통하여 습득한 서풍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김돈희(金敦熙)의 서풍이 보인다. 특히 1944년(47세)에 쓴 <종사랑묘비문(從仕郞墓碑文)>(도1)은 전면을 예서로 측·후면을 해서로 쓴 비문이다. 일반적인 예서는 가로획의 양 끝이 수평을 유지하나 김돈희의 예서는 우측이 약간 올라가면서 묵직하니 독창적인 풍취가 있었는데 이 비문을 보면 석전의 예서도 살이 많고 투박하면서 우측이 올라가 예서만 본다면 김돈희의 서풍과 비슷한 점이 있다.

현재 내려오는 예서 작품들 중에는 1977년도(80세)에 쓴 것이 병풍을 포함하여 5~6점으로 가장 많다. 이때는 이미 수전증으로 우수악필법으로 글씨를 쓰던 시기로, 해서나 예서 그리고 작은 글씨를 쓰기엔 불리한 여건이었다.

1977년 작 <예서8폭병풍(隸書8幅屛風)>(도2)은 획이 약간 굵고 투박한 맛이 있다. 기존에 석전이 쓴 예서는 우측이 올라가게 썼으나 이 시기에는 좌우 수평을 유지하게 된다. 같은 해의 작 <천상운집(千祥雲集)>(도3)은 한예(漢隸)에 근거하였으며, 글자의 필획이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운필되었다. <월인천강일체동(月印千江一體同)>(도4) 또한 1977년 같은 해의 작품으로 사신비(史晨碑)의 풍이 엿보인다. 필획의 변화가 심하고 획(劃) 간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청아한 느낌을 준다.

<반담추월(半潭秋月)>(도5)도 같은 해 작품으로 필획의 조세(粗細)가 분명하며 강건한 느낌을 준다. 한동안 예서 작품이 없다가 1981년(84세) 작품으로 <한벽진구천세기(漢壁秦璆千歲器)>(도6)를 썼는데 신체적인 불편함으로 인한 운필의 부자연스러움으로 필선이 불규칙하며 전체적인 느낌은 어리숙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2) 해서(楷書)

 

해서 작품도 희소하여 현재 보이는 작품이 비문(碑文)까지 포함하여 몇 점밖에 없다. 20대에 쓴 해서 비문을 보면 그때 이미 결구나 필력에 있어서 상당히 수준에 올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악필 이전에 쓴 작품들이 소실되지 않고 전해졌더라면 상당히 좋은 작품들이 다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해서는 아쉽지만 약 20년 간격으로 휘호한 비문 2점과 81세에 쓴 작품을 가지고 비교해 보겠다.

석전이 25세 때 쓴 해서 비문 <회와황공휘중섭지묘(晦窩黃公諱中燮之墓)>(도7)는 1922년에 쓴 것으로, 구양순 풍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확연히 다른 점은 구양순 해서의 갈고리는 짧고 세차며 내각이 거의 90도를 유지하는 반면, 이 비문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필선이 깔끔하고 엄정하며 크게 흠 잡을 데가 없고 단아한 맛이 난다. 속기가 나지 않고 유약한 듯하지만 골(骨)이 섰다. 원필과 방필을 적절히 섞어서 썼으며 결구나 필획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한 해서체의 글씨이다.

이러한 글씨가 20년 후인 1942년(45세)에 쓴 <만은처사평해황공지묘(晩隱處士平海黃公之墓)>(도8)에서는 기필과 수필에 더욱 힘이 있고 강건해 보이며 중후하면서도 골육(骨肉)의 조화가 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로획의 부세(俯勢)와 결구에서 조맹부의 서풍과 유사한 느낌을 주고 있다.

1978년(81세) 작품으로 <필락경풍우 시성읍귀신(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도9)은 수전증이 있는 노인의 글씨로서는 대단히 좋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붓을 대니 바람과 비가 놀라고, 시가 이루어지니 귀신이 흐느낀다”라는 뜻의 이 글씨는 우수 악필로서, 악필의 단점인 곧은 선질과 정교함을 잘 극복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필획·결구·장법 등이 창암 이삼만(도10)의 서풍과 매우 흡사하다.

이상과 같이 해서 작품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는데 석전의 청년기·장년기·노년기의 각 1점씩을 가지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풍의 변화도 볼 수 있다.

석전의 해서는 구양순과 조맹부를 거쳐 창암 이삼만에 이르렀다고 보인다. 두 작품에 비해 세 번째 작품 <필락경풍우 시성읍귀신(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도9)은 만년의 글씨로서, 결구가 성글고 어수룩한 듯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유연하고 고졸(古拙)스러운 것이 속기가 없고 청아하다.

 

3) 행서(行書)와 초서(草書)

 

석전은 악필 이전의 젊은 시절에 이미 행서와 초서에 밝았으나 불행히도 현재 내려오는 행초서의 작품 대부분이 악필 이후(1965년) 노년기의 작품들이다. 본 장에서는 석전 황욱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우수악필기(1965~1983)와 좌수악필기(1984~1993)의 행초서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석전은 악필법에 대하여 “악필법의 특성상 작은 글씨 쓰기와 정교한 기교를 부리기는 어렵지만, 큰 글씨를 써보면 나름대로 준경강건(遵勁强健)하고 묵직해 보이며 근골의 균형이 건실한 풍모를 표현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석전은 악필법을 이용하여 글씨를 연습한 지 3~4년이 지난 68세부터 작품을 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운필이 불안정하고 자형의 구성도 어설픈 느낌이 들었으나, 꾸준한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나름대로의 운필법을 터득하였다. 먼저 우수악필기(1965~1983)의 작품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석전의 1968년(71세) 대련 작품 <종성세진부진념·간수류소반속록(鐘聲洗盡浮塵念·澗水流消絆俗綠)>(도11)을 보면 악필법으로 썼는지 정상적인 집필법으로 썼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원활한 운필을 보여준다. 보통 평범한 행초서같이 획이 부드럽고 운필이 약간 미끄러운 느낌이 든다.

1974년(77세)의 작품 <승사여제(承事如祭)>(도12)는 해서에 가까운 행서로 썼는데 (도11)보다 묵직하고 필획이 안정되어 있으며 짜임새가 있다. 필의는 의외로 전서의 필획이 많이 배어 있다.

1975년(78세)의 작품 <효제연의(孝弟淵懿)>(도13)를 보면 농묵을 이용한 전서와 예서의 필의가 많이 들어 있는 해서에 가까운 행서로서 글자마다 획의 강약이 두드러졌다.

1978년(81세)의 작품으로 행서<벽옥반중롱수정(碧玉盤中弄水晶)>(도14)은 행서로서, 다른 글씨에 비해 붓의 떨림 현상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났는데, 선면(扇面)이라 더욱 떨린 것 같다. 특히 ‘중’ 자는 그 정도가 심하다.

1978년을 기점으로 1979년부터는 석전 악필의 특징인 생동하고 웅건하며 청아하고 속기 없는 노송 같은 분위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1979년(82년) 작 <음주독서사십년(飮酒讀書四十年)>(도15)은 행초서로 활달한 필치로 글자의 대소(大小), 농담(濃淡, 강약(强弱)이 잘 나타난 빼어난 작품이다. 이 시기의 아호로는 ‘태평노인’을 썼다. 1979년과 1980년의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으며, 1981년에 많은 작품을 하였는데 그것은 동아일보 초대전에 대비한 점도 있지만, 여러 형태의 변화를 구사하려는 작가 나름대로의 노력을 읽을 수 있는 바이다.

1981년(84세) 작 초서인 <금서사십년(琴書四十年)>(도16)은 석전이 겪어 왔던 가야금과 서도의 길을 생각하며 쓴 글씨로서, 한 획 한 획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과 글 내용에도 있듯이 가야금 줄을 튕기듯 기백이 넘치고 활을 당기듯 팽팽한 탄력이 자획에서 우러나는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은 가로로 한 자씩 포치하다가 ‘사(四)’와 ‘십(十)’ 두 자로 포치하여 조형미와 여백의 미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아호를 ‘물기헌주인(勿欺軒主人)’으로 기록하였다. 이 시기는 우수악필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운필의 자유자재로움과 물 흐르는 듯한 리듬감과 꿈틀꿈틀한 생동감의 분위기를 자아내곤 한다.

석전은 오른손 수전증이 심해지자 좌수악필을 시도하였다. 신체적인 장애도 그의 예술혼을 꺾지는 못하였다. 고난이 오면 올수록 불굴의 예술혼으로 이겨내고 더욱 근골(筋骨)이 뚜렷한 생동감 있는 좌수악필이 1984년(87세)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좌수악필 작품에 대해서 분석해 보겠다.

1984년(87세) 작 <일이관지(一以貫之)>(도17)는 좌수악필이 시작되던 시기의 작품이다. 우수악필이 한두 점 같이 나오던 시기인데 이 작품은 좌수 초기 악필로 조형미는 있으나 아직 운필이 부자연스럽다. 같은 해의 작 <천지만물지역여(天地萬物之逆旅)>(도18)는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중 일부를 인용하여 쓴 행초서로서 자못 절제된 양상이다. ‘천(天)’, ‘백(百)’ 자 등에서 기울기를 우측으로 처지게 한 것이 뚜렷하며, ‘광(光)’ 자는 예서를 풀어쓰듯이 한 것이 독특하다.

1988년(91세)에 열린 석전의 망백전에는 여러 가지 풍모의 작품들이 나왔다. 1988년(91세) 작 <적벽부(赤壁賦) 18폭 병풍>(도19)은 가로 70cm, 세로 190cm의 큰 화선지에 쓴 18폭 병풍이다. <적벽부>는 석전이 좋아하는 글귀로서 자주 쓰는 것인데 그 느낌은 모두 다르다. 망백전에 출품한 이 <적벽부 18폭 병풍>은 석전의 대표 작품으로 여기저기서 획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석전은 90세 때부터 꿈속에서도 금강산을 그린다는 ‘몽유금강산인(夢遊金剛山人)’을 아호로 쓰기 시작했다.

1988년 같은 해의 작품으로 <무언도심장(無言道心長)>(도20)을 보면 종서의 작품으로 석전 특유의 자법 구성이 잘 나타나 있다. 다섯 자의 문장에서 1, 3, 5번째 자를 강하고 크게 쓰고, 사이의 글자들은 약하고 작게 운필하였다. 리듬감을 주기 위한 표현일 것이다. 석전의 작품에서 이러한 취향이 자주 나타난다. 이 글씨는 “말이 없는 도의 마음은 길다.”라는 뜻으로 석전의 정신과 잘 어울리는 글귀이다.

1988년 작 <군자소귀호도자(君子所貴乎道者)>(도21)는 논어구를 31자로 썼는데 큰 글씨를 즐겨 쓰던 석전이 작은 글씨로 썼는데 글씨의 강약과 리듬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조형성에서 보면 글자의 우측이 이 시기부터 자주 내려가게 쓰게 된다. 글자 우측이 내려가는 통일성과 획이 굵을 때는 마치 고목을 보는 것 같으며 가늘 때는 흙을 헤치고 나오는 새싹과 같다.

석전은 운율을 알았으므로 서예 작품에서도 음악적으로 리듬감 있게 표현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특히 석전이 90세를 지나면서 더욱더 법과 도를 떠나 자유자재로운 운필이나 결구 그리고 흑백의 대비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석전의 좌수악필은 1988년 망백전에 이르렀을 때부터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해의 작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22)를 보면 석전의 기분이 고양되어서 쓴 것 같다. 거리낌 없는 유유자적하는 운필은 마치 학과 용이 어울려 노는 형상을 방불케 한다. 글자의 옆줄을 똑바로 맞추지 않고 내려가고 올라간 것이 음악에서 음을 이용한 화음 같다. 석전다운 포치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불균형 속의 조화이며 자연스러움의 구현이다. 글자를 간격이나 크기에 구애 없이 법을 일탈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시(時)’ 자 밑에 ‘습(習)’ 자를 포치하였는데 똑바로 배치하지 않고, 밑의 글자를 우측으로 틀어서 공간을 생각하였고 그로 인한 공간의 불균형을 우측‘지(之)’ 자의 마지막 획을 길면서 크고 강하게 하여 교묘할 정도로 운필하였다. 마치 아호로 쓴 ‘몽유금강산인’처럼 꿈속에서 노닐면서 쓴 것 같다.

1988년(91세) 국내 최대의 지리산 화엄사의 일주문 편액을 휘호하였는데 <지리산대화엄사(智異山大華嚴寺)>와 <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은 가로 750cm, 세로 170cm나 되는 편액이었으며 글자 한 자의 넓이가 사방 1m가 넘었다.

<지리산대화엄사(智異山大華嚴寺)>의 편액은 중후하고 방정한 느낌의 해서에 가깝고, <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은 석전 특유의 초서에 가까운 행서로 썼으며, 운필이 활달하고 크며 힘찬 웅비를 느끼는 편액으로 장엄한 가람의 위용을 더 한층 빛나게 하였다. 위의 두 작품은 석전이 쓴 편액 중에서 규모 면으로 보나 작품성으로 보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89년(92세) 작 <온고지신(溫故知新)>(도23)은 운필의 속도가 빠른 듯하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강인한 느낌을 준다.

 1990년(93세)의 작 <화욕개시방유색·수성담처각무성(花欲開始方有色·水成潭處却無聲)>(도24) 대련은 글자의 자형 우측이 확실하게 내려가게 썼다. 일반적으로 자형의 우측이 올라가기 마련이나 석전의 글씨는 그 반대이면서도 전혀 어설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적인 불균형을 좌우로 움직이는 흐름으로 그 단점을 보완하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무(無)’ 자를 우측으로 붙여서 운필을 하였고, 위에서 밑으로 길게 운필하는 획이 있을 때는 ‘각(却)’ 자처럼 좌로 틀면서 운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좌수악필의 진수로 조형성과 리듬감이 뛰어난 수작으로 볼 수 있다.

1990년 같은 해의 작품으로 <궁달불환심(窮達不換心)>(도25)의 작품을 보면 종서로 휘호하였는데, 두 번째 글자인 ‘달(達)’ 자는 석전이 평상시 자주 작품에 인용하던 자이다. 전체 흐름으로 볼 때 ‘달(達)’ 자가 크고 강하지만 조형상으로 전혀 어색한 느낌이 없다.

같은 해의 작 <일세지웅(一世之雄)>(도26)을 보면 횡서로서, 거친 기필, 수필과 운필의 비백이 적절히 조화된 작품이다. ‘一’ 자 같은 경우 삼절과 비틀음, 굵기로 특징을 내었으며 역시 획이 단순한 ‘지(之)’ 자도 크고 강하게 하여 나머지 작은 두 자와 대조를 이루었다.

1990년(93세) 같은 해의 작 <의수청류천(倚樹廳流泉)>(도27)은 좌수악필의 완벽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글자의 옆줄을 똑바로 맞추지 않고 음정이 계명에 따라 높고 낮음이 있듯이 자연스러운 조형미를 갖추었다고 본다. 운필이나 물 흐르는 듯한 리듬감, 글자의 포치 등 여백의 미가 아주 잘 나타나 있다.

1990년(93세)에 휘호한 금산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도28)은 몰지각한 사람의 방화로 불타버린 뒤 다시 중건을 하고 완공 후에 쓴 편액으로, 사각형에 마치 전각에서 4자로 포치한 것처럼 4등분하여 포치하였다. 글자를 포치하다 보니 위로 두 자는 획이 단순하고 밑으로 두자는 획이 많고 복잡하여 전체 구성상 균형을 갑기가 어려웠겠으나 ‘대(大)’ 자의 머리 부분을 가로획 위로 굵고 크게 운필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또 ‘광(光)’ 자의 경우는 속도감 있게 일필휘지한 느낌이 들며 마지막 부분의 갈필은 마치 새가 가뿐히 나는 듯한 경쾌한 느낌을 준다.

1991년(94세) 작품 <아역무심인(我亦無心人)>(도29)은 횡서로서, 강약의 리듬이 과도하게 나타났는데 특이한 것은 작게 쓴 두 번째 글자인 ‘역(亦)’ 자 밑에 양각으로 된 ‘금강산인(金剛山人)’ 유인을 찍어 큰 공간의 여백을 처리하였다.

1991년 같은 해의 작품 <약란지수여송지무(若蘭之秀如松之茂)>(도30)와 <락자유여장자족(樂者有餘長自足)>(도31)은 빼어난 작품으로 강약의 조화가 빼어나며 조형성도 뛰어나다. 특히 <약란지수여송지무(若蘭之秀如松之茂)>의 세 번째 글자인 ‘지(之)’ 자는 글씨를 써 내려간 중앙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측으로 애교스럽게 붙였다. 이 작품에서는 글씨의 좌우 흔들림이 더욱 심해졌는데 그것은 자형의 우측이 내려가는 어색함을 방지하기 위한 사군자의 태점(苔點) 같은 기분으로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

1992년 95세 되던 해의 작품으로 <의초인삼사어진세외유9衣草人三四於塵世外遊)>(도32)는 어떻게 보면 석전 자신을 지칭한지도 모른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신경 쓰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오직 글씨를 쓰고 가야금을 연주하고 고서를 탐독하는 자기만의 고적한 생활이 일반인들과는 딴 세상에서 노니는 신선 같은 그런 생활일 것이다. 이 작품은 종서로 썼으며 기력이 쇠잔한 나이인데도 아직도 기골이 강하게 표출된다. 그러나 획의 살이 빠진 마른 느낌을 준다.

이상과 같이 석전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각 서체별로 분석해 보았다. 전서는 작품이 없어 확인하지 못하였고 예서와 해서는 몇 작품씩밖에 없어 깊게 분석하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행초서는 석전의 남아 있는 전체 작품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많은 수량으로, 석전 황욱의 주류라고 할 수 있으며, 본 장에서도 가장 심도 있게 분석하고 조명해 보았다.

 

 

4. 석전 서예의 특징

 

앞에서 이미 거론한 것과 같이 석전은 20대에 작품을 시작하여 96세로 타계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청년기 및 장년기의 작품들은 6·25 동란 시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남아 있는 작품들은 몇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악필 이후의 작품들이다.

석전은 작품의 분위기에서도 나타나지만 평범한 생을 살지 못하고 항상 시련과 싸우는 고독한 삶을 살았다. 석전의 희로애락과 더불어 그의 서풍도 변하였으며, 만년에는 특유의 석전체를 가진 악필로 명성을 떨쳤다.

이 장에서는 석전 황욱의 우수악필과 좌수악필로 나누어서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우수악필(1965~1983)

 

석전이 60대 중반에 들어서서 수전증이 와 오른손으로 악필을 연습하여 68세 때부터 작품을 하였는데 초기의 글씨는 일률적으로 굵은 느낌을 주고 글자 결구 하나하나가 산만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운필도 부자연스러웠으나 ‘인서구노(人書俱老)’라는 말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악필의 독특한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8년을 기점으로 하여 웅혼하고 강건하며 기암괴석 같은 느낌을 주었다. 기교는 없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난 글씨를 썼으며, 시간이 갈수록 글씨에 힘이 넘치고 활달하며 웅건한 맛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강약과 대소의 변화를 주어 가야금으로 익힌 음악적인 리듬감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자형의 오른쪽이 올라간 보편적인 행초서의 틀을 유지하였으며, 오랜 경험과 육예와 함께 심신을 수련하여 무궁무진한 내면의 세계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글씨를 썼다.

 

2) 좌수악필(1984~1993)

 

85세를 넘으면서 오른손 수전증이 심해져 오른손으로 쓸 수 없게 되자 왼손으로 악필을 연마하였으며, 87세 때부터 96세로 타계할 때까지 석전 황욱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좌수악필을 구사하였다.

좌수악필은 우수악필과 또 다른 맛을 가지고 있는데, 글씨의 획이 경직장엄(硬直莊嚴)하며 마치 기암절벽에 선 노송 같은 생동감을 주었고, 강약과 대소의 변화가 심하여 리듬감의 극치를 보이며 획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전은 90세를 넘으면서 좌수악필의 전성기를 맞았고 서풍 또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까지는 글자의 오른쪽이 올라가는 일반적인 행초서의 흐름을 유지하였으나 이때부터 자형의 오른쪽이 반대로 조금씩 내려가면서 자간의 흐름도 달라진다.

90세를 넘어서 우측이 기울기 시작한 자형이 93~94세에 가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데 어딘가 모르게 괴기하게 보이는 듯하지만 그런 점이 석전 서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자형 오른쪽이 내려가는 불균형은 글자 배열을 좌우로 움직이는 흐름으로 그 단점을 보완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불균형 속에 조화를 이루었다.

석전은 정통 서법을 임서를 통하여 터득한 후 그 토대 위에 자기의 개성을 펼쳐놓아 특유의 악필을 개발한 것이다. 끊임없는 창작정신으로 한 획 한 획에서 탄금성을 자아냈고 90세를 넘기면서는 아예 법과 틀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유유자적하면서 글씨를 썼던 것이다.

 

 

5. 결론

 

석전은 19세기 말 서구 열강들의 세력 확장 정책과 세도정치에 의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민란이 일어나는 등 조선왕조가 망해가는 시기에 15대를 이어 내려온 부농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육예에 밝았으며 학문적으로는 가학으로 내려온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특별한 스승 없이 혼자서 왕희지·구양순·조맹부를 공부하였고, 우리나라의 창암 이삼만에게도 눈을 돌려 정통 서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육예에도 밝아 서예 외에 활쏘기, 말타기, 가야금 연주에도 조예가 깊었다.

석전은 이념에 희생된 두 아들로 인한 충격과 두 번에 걸친 수전증으로 인한 신체적 절망감을 예술로 승화시킨 근래의 드문 서예가로 볼 수 있다. 석전의 글씨는 시련을 겪으면 겪을수록 노송이나 등나무의 구부러진 가지와 옹이처럼 한 획 한 획에 혼을 불어넣어 기골이 생동하고 웅건한 악필을 남겼다.

석전의 작품세계는 서체별과 우수악필기, 좌수악필기로 나누어서 분석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젊은 시절에 썼던 전서 작품이 한 점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예서와 해서 작품도 몇 점씩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행초서의 작품에서 전서와 예서의 획이 보이는 작품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전서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고 보인다.

석전이 60대 중반을 지나면서 오른손 수전증이 오기 시작하여 정상적인 집필법으로는 글씨 쓰기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악필법을 연마하여 우수악필 작품을 하기 시작하여 86세까지 우수 악필법을 사용하였다. 1973년 전주에서 가진 첫 작품전을 필두로 우수악필기에 11회의 작품전을 가졌다. 우수악필 초기에는 정상적인 운필법에 의한 글씨처럼 필선이나 운필법에 있어서 부드럽고 매끈하였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기괴한 풍모의 서체가 나타났다. 우수악필기의 전성기를 1979년(82세)부터 1982년(85세)까지로 볼 수 있다.

석전이 86세를 지나면서 오른손 수전증이 심해져서 오른손으로 글씨를 쓸 수 없게 되어 미수를 바라보는 나이에 좌수악필로 글씨를 쓰기 시작하였다. 1985년 서울 롯데미술관에서 열린 미수기념전에 좌수악필의 작품을 출품하여 서예계를 놀라게 하였다. 좌수로 4번의 전시회가 열렸다.

우수악필과 좌수악필의 차이점은 우수악필 때는 자형의 우측이 올라가는데 좌수악필을 사용하면서 점차 자형의 우측이 내려가는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90세를 넘어 말년으로 가면서 우측이 내려가는 정도가 심하였으나 이러한 불균형을 세로줄을 맞추지 않고 좌우로 움직이게 조형함으로써 석전 특유의 불균형 속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이 석전을 조명해 보았다. 우리 후학들은 절망적인 역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끊임없는 창작정신으로 독특한 악필 작품을 창출해 냄으로써 서예사에 큰 획을 그은 석전의 예술정신을 본받아 서예술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6. 석전 황욱 약력

 

1898.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출생(본관 : 평해)

1903.          서당에서 한학 수학, 서예 입문

1914.          서울 중앙고보 입학, 부친의 만류로 자퇴

1920.          금강산 돈도암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서예에 전념

1930.          고향에 돌아와 자하 신위의 시서 세계를 사숙한 이후 율계회를 조직, 정악 합동 연주

1931.          5대 조부모 묘비 글씨를 씀, 정읍으로 거처를 옮김

1938.          고창으로 다시 거처를 옮김

1942.          8대 조부와 많은 조상들의 묘비 글씨를 씀

1954.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세 몰락으로 전주와 고창에 은거하며 지필묵과 시조, 그리고 가야금으로 한적함을 달램

1973.          전주에서 처음으로 개인전 개최(결혼 60주년 기념)

1978.          서울 현대화랑 전시회

1981.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동아일보 초대전

1982.          부산일보 초대전

1983.          남산문화재단 문화예술상 수상, 롯데미술관 초대전

1985.          미수기념 초대전(롯데미술관)

1986.          전라북도 문화장 수상

1987.          전북일보 초대전

1988.          중앙일보 망백전(호암갤러리)

               구례 화엄사 일주문 현판과 경주 불국사 종각 현판 글씨를 씀

1991.          금산사 대적광전 현판 글씨를 씀, 동아일보 회고전(예술의전당)

1993.          별세(96세)

1999.          황병근 기증유물 특별전 『석전 황욱』 개최(국립전주박물관)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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