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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인의 자화상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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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소리꾼, 성준숙
  • 2023-04-19 18:01
  • 조회 1896

본문 내용

 













담대한 소리꾼, 성준숙




 

서경숙 전라북도립국악원 학예연구팀장

 

 

 


 

전라북도는 소리의 고장으로소리의 고장답게 소리꾼들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다여러 명창들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의외로 태생 자체가 이곳 출신은 드물다성준숙은 그중 몇 안 되는 전주 출생의 명창이다.

성준숙은 1944년 9월 16일 전북 전주시 완산동에서 부친 성홍근과 모친 김희순 사이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어린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잠시 완주군 이서로 이사를 가서 살았는데그 이유로 그의 본적은 완주군 이서로 되어 있다고 한다.

성준숙의 아버지는 종종 딸 성준숙을 업고 다녔는데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홀아비 딸이라고 부를 만큼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어머니 또한 성준숙이 커가는 동안 부엌일 한번 시켜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그렇게 어린시절 성준숙은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열 네 살 때였다임춘앵과 김진진 단체의 여성국극단이 전주를 찾아왔다. 50년대에 창극을 대표하는 단체는 이른바 여성국극단이었다여성국극단은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이들에 의해 남자 역할도 맡아 하기에 남녀혼성의 창극단과는 사뭇 달랐다당시 임춘앵과 김진진 국극단의 인기는 실로 지금의 아이돌스타와 버금가는 현상이었다성준숙과 판소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한창 감성이 풍부할 무렵이니 공연을 보고 난 후 소리의 매혹에 이끌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홍갑수임방울 단체가 이틀 동안의 공연일정으로 전주에 내려왔다첫날 공연을 보고 그날 밤 집에 들어와서 공연 장면만을 생각하며 설렘으로 잠들었다이튿날그렇게 겁도 없이 가출을 감행하여 홍갑수임방울 단체를 따라 나섰다그 단체에는 임방울홍갑수 외에 박도화성순종과 같은 소위 일류급 창극 배우가 몸담고 있던 제법 큰 규모의 단체였다갓 들어온 성준숙은 가장 어렸고 얼굴도 예쁘장했으며특히 소리목까지 타고났다며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57년 그는 단체를 따라다니면서 틈틈이 임방울 선생께 수궁가를 배우기 시작하였다창극 연습을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명씩 개인지도를 해주셨다녹음기가 없었던 때라 무슨 작품인지도 모른 채선생님께서 소리를 하면 가르쳐 준대로 사설을 공책에다 적어가며 연습을 했다기껏해야 두서너 장단의 토막소리들로 배움을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단에서는 어린 성준숙에게 흥보전의 돌남이 역을 시켰다첫 출연 날돌남이 역으로 분장한 성준숙은 무대 위에 서 보니 관객들의 머리가 마치 콩나물 시루에 꽉 차 있는 콩나물처럼 보일 정도로 까마득해 보였다그때부터 머릿속은 온통 하얗고 겁이 났다어찌나 긴장을 하고 떨었던지 공연이 끝나고 그대로 아파버렸다톡톡한 신고식이었다마음 같아선 당장에 아버지가 찾으러 오셨으면 싶었다단체 생활은 말이 단원이었지 주연급을 제외하고는 봉급이란 없었고 그저 먹고 자고 배우며 공연하는 생활이 일상이었다.

성준숙은 단체 생활이 그가 꿈꿔왔던 일들과는 거리감이 있었다며 당시를 회고하였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국악이 싫어지더라고요.

단체에서는 간간히 소리 공부도 했지만 선생님들 수발을 들거나 심부름 하며 창극 연습하고공연을 하는 생활이었어요.

공연을 마치고 분장을 지울 때는석유기름을 사가지고 비닐봉투로 된 약봉지에 석유기름을 부어서 솜에 묻혀 화장을 닦았어요.

나는 그런 생활이 안 맞았더라고요좋아서 갔는데 얼른 오고 싶어진게지.

그렇게 지내다가 8개월 쯤 되어가지고 마산에서 공연하는데 정말 아버지가 오신 거예요.

야가우리 딸이다” 며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까 단장이 안 된다고 했던 거예요.

우리는 공짜니까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하니 아버지가 단장의 멱살을 잡고 막 싸우시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속으로 통쾌하고 좋았어요아이고 내가 다시는 안따라 다닌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8개월 만에 아버지가 찾아와서 나를 끌고 내려왔어요집에 와서 얼마나 경을 쳤는지 몰라요.

집에 와서 보니까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어요.

한 공연이 끝나면 이틀 만에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전국을 유랑하며 다니는 생활이었으니 내 몰골이 알만했겠죠?"

 

 

어린 나이에 단체를 따라다니며 혹독한 생활을 경험했던 탓이였으리라극단하면 한동안은 쳐다보기도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실망이 컸다더구나 아버지를 비롯해서 친척들은 판소리를 기생이나 광대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가족의 반대와 함께 성죽순은 자신의 힘든 단체경험으로 이제 판소리는 접고 평범하게 여느 학생들처럼 학업에 매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소리에 대한 그의 끌림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 되던 해남원에 계시던 주강덕 선생님이 전주에 오시어 판소리를 잠깐 접하게 되었다이 계기로 강도근 선생님께 흥보가를 배우러 갔다판소리 배움에 대한 갈증이 다시금 살아난 그는 이번에도 역시 가족들 모르게 일주일에 한 번씩 버스를 타고 남원에 계신 강도근 선생님께 3개월 동안을 공부하러 다녔다.

그러다 김동준 선생님이 전주국악원에 강사로 오시게 된 소식을 듣게 되었다당시에 전주에서 국악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전주국악원이었다흔히 전동국악원으로 알려진 전주국악원은 지금의 전동성당에서 팔달로 건너편 쪽(남문시장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었다전주국악원은 일제강점기때 설립된 예기조합(권번)이었으며해방 후에는 국악인들이 후진을 양성하던 국악의 산실이었다.

 

"김동준 선생님은 전주국악원에 강사로 계셨지만 나는 그때 용돈을 쓰지 않고 그 돈으로 학채를 내고 선생님 댁으로 가서 1:1로 춘향가를 공부했어요선생님께선 참으로 목도 좋으시고 소리를 잘하셨던 분이에요그때는 전주국악원이 상당히 컸어요홍정택강도근김동준유대봉 같은 선생님들이 그곳에서 사범으로 가르치셨어요옛날에는 예술인들이 돈이 없어서 개인으로는 공부를 못 하고 전주국악원에서 단체로 그렇게 배웠어요."

 

 


 


성준숙은 어렵게 공부했던 것도 무색하리만큼 오랫동안의 공백기간을 보내게 된다그러다가 1975그동안 중단되었던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를 개최한다기에 구경을 가게 되었다그 모습을 보고 판소리 공부를 해서 나도 저렇게 대통령상을 꼭 타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그렇게 몰래 판소리를 다시 시작했다그런데 이번에는 작은아버지가 쫓아 오셔서 대통령상 같은 것을 타면 뭐하냐내가 선산 묘 앞에서 꼬실라 버릴란다!”라며 내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협박을 할 정도로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렇듯 집안에서는 판소리를 못하게 극구 말렸지만이후 판소리 학습에 대한 집념과 갈망은 더욱 커져갔고결국 다시 소리를 할 작정으로 이름을 민소완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가족들 몰래 이름을 바꿔 가며 선생님들을 찾아 다녔다.

일반적으로 문화예술인들 사이에는 이름 대신 호()를 부르기도 하지만 성준숙의 경우는 이름 대신 민소완이라는 예명(藝名)으로 더 알려져 있다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호는 학봉(壑峰)이다골짜기 학자에 봉우리 봉자적벽가 화용도에 나오는 만학천봉에서 따왔다고 한다. ‘민소완’, 원래는 부모님 몰래 소리 공부를 하려고 지은 이름이 결국 성준숙의 예명이 되어 현재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서른두 살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고자 결심한 그는 이일주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그의 스승 이일주는 좋은 목구성과 서슬이 담긴 소리가 장점으로 알려져 있다목구성이 좋다는 것은 거친 맛과 부드러운 맛슬픔과 너그러움 그리고 깊은 그늘을 느낀다는 말이다서슬이 담긴 소리는 절망적 상황과의 대결이 두드러지는 부분에서 진가를 발휘한다그는 이런 목을 가진 이일주 선생의 소리를 닮고 싶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소리를 다시 시작하니까 목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요아무리 소리를 해도 안 나와요그러니까 매일 밥만 먹으면 북 가져와서 소리연습을 했어요소리하려고 힘을 쓰면 무릎에 바람이 슬슬슬 들어가요그때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학원을 다녔어요혼자 북 놓고 소리연습하고선생님께 소리를 받아서 계속 연습을 하는 거예요얼마나 다리가 저리고 시린지 몰라요그러면 시장에 가서 천을 떠다가 다리를 막 묶어요그걸 떠다가 묶으면 다리가 조이니까 바람이 안 들어가는 것 같아요그렇게 공부를 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어휴중앙동 파출소 순경이 쉬면 쉬었지너는 하루도 안 쉬고 공부하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일주 선생님께 공부할 때만 해도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산으로 올라갔어요여름에야 훤하지만 겨울에는 다섯 시면 깜깜해요새벽부터 소리를 지르며 공부를 하고 내려와야 해요우리 같으면 아침에는 목을 푸는 상태로 사설을 외우고 안 되는 것만 '살살살 해라그러거든그런데 옛날 선생님은 그런 말씀은 절대 없어요.

이일주 선생님은 생전 낮은 청으로는 공부를 하질 않으세요아침 새벽에만 한두 시간에 물 한 모금 잡수신가 몰라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소리공부를 하신 분이에요그렇기때문에 제자들도 전부 다 그렇게 가르치셨어요그러다보니 이일주 선생님께 공부한 제자들은 다 목이 쉬어가지고 있어요선생님께선 지금도 그때 단련된 목으로 소리하시잖아요그렇지만 소리 연습을 많이 해서 목이 넘어갈 정도인 제자들은 없어요그리고 그런 사람은 그 정도 가면 자기가 깨우칠 거에요. '내가 청 조절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그런데 요즘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은 없어 보여요.

이일주 선생님은 제자들이 상당히 많아요이일주 선생님이 많은 명창 제자들을 배출하는 비결은 다른 게 없어요선생님은 그저 소리연습을 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이일주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면 그때부터 소리하시니까그 선생님은 평생을 소리로 산 분이세요내가 아무리 소리 연습을 많이 했어도 선생님 1/3도 안될거에요다섯 시에 일어나면 그 양반은 산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질이 들어버린 거에요제자를 가르칠 때 학습시키는 비결이 있는데 어찌되었든간에 소리에 입문한 사람을 야무지게 가르쳐 놓거든요이일주 선생님은 당신의 방식대로 그대로 가르치는 거예요그런데 이일주 선생님한테 배우는 사람은 목이 약하면 안 맞아요우리 선생님은 요령이 없이 가르치시니까 공부를 할 때는 '그냥 질러라그 말씀 뿐이니까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이일주 선생님 모시고 조소녀 언니와 함께 남석사로 백일공부를 들어갔어요그때는 상을 안 탔을 때였어요거기서 인분을 먹었어요거기는 화장실이 수세식이 아니고 재래식이었어요공부하고 내려오니까 조리에다 딱 받쳐놨더라고요이만한 사발에다가 딱 담아 놓은 거예요그러더니 이일주 선생님이 '민소완조소녀!' 부르더니 와서 먹으라는 거예요처음에는 선생님이 약이라고 하시더라고요좋은 약을 해 놓았다 하시더니 간을 보고 마셔요나중에는 그거라고 이야기 하시더라고요정말 환장하겠더라고요조소녀 언니는 끝까지 안 먹었어요그런데 선생님이 내 앞에서 이렇게 휘저어서 맛을 보는 거예요맛을 보면서 나보고 마시라고 하잖아요그런 상황에서는 안 마실 수가 없더라고요그래서 그냥 한사발 들이켰어요마셔보니까 짭짤해그게 효과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왜 먹었냐고요선생님이 먼저 드시고 맛을 봤잖아요사발을 드시고 '암시랑토 안찮아그래요나는 그 모습이 진심으로 감사해서 먹은 거예요.

소리를 많이 하다 보면 갈비도 아프고 등도 쑤시고 몸이 많이 붓잖아요그때는 그렇게 심하게 공부했어요지금 같으면 음식도 잘 먹고 운동으로 몸을 풀어주고 했을텐데 말이죠재래식 화장실에서 금방 퍼다가 그릇에 받쳐서 막 주는걸 어떻게 먹겠냐고요더군다나 더운 여름인데. '예라체독이 걸리든 말든 먹자해서 먹었어요그리고 산에서 내려왔는데약국에 가서 인분을 먹었다고 약을 좀 주라고 이야기하니까 '아이고 됐어요당신같이 무식한 사람한테는 약을 줄 수가 없으니 가세요!' 그러더라고요그래서 약을 안 먹었어요다행이도 그 뒤에 아무 탈이 없었어요선생님들 말씀이 인분을 먹는 이유는 골병들지 말라고 먹는다고 하셨어요날이면 날마다 온 몸을 쥐어 짜듯이 소리를 하니까 골병들지 말라고 먹는다고."

 

 


 

"이일주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고 춘향가를 배운 도중 오정숙 선생님을 만났어요그래서 오정숙 선생님께 네바탕 공부를 했어요. 15년 동안 공부하면서 이일주 선생님께 배운 심청가도 다듬어 가며 다섯바탕을 다 배웠어요그때는 밥만 먹으면 소리공부를 했어요나 같은 경우는 돈 벌러 다니는 일도 없고 하니 종일 소리공부만 정진한 거죠.

당시에는 오정숙 선생님이 국립극장에서 근무하고 계셨기에 오래 지도를 해주진 못했어요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면 며칠씩 공부를 했어요밖에 나가서 밥은 사먹고잠은 선생님 댁에서 자고선생님께서 퇴근 하면 공부를 했죠보통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소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백일공부를 들어가요백일공부 들어가면 선생님께 답례는 여기서 공부하는 것보다 많이 드려야 했어요그때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돈이 많은 부자였어요그러니 그때부터 오정숙 선생님께 공부를 많이 했죠우리는 타고난 재질이 있어서 이일주 선생님께 공부할 적엔 혼나진 않았어요이일주 선생님이 소리를 잘 가르치시잖아요하나하나 잘 가르치시지그런데 오정숙 선생님은 쭉 가다가 못 받으면 혼을 내고 성질을 내셔요그래서 북에게 화풀이 하듯 북편을 막 때려요그럼 미치는 거죠.

 

 

 


오정숙 선생님께 배울 때는 동초제 사설집이 춘향가 창본집만 있었어요춘향가만 먼저 나온 상태였어요동초 선생님이 다 정립을 하고 춘향가만 출판을 했어요그런데 오정숙 선생님은 다섯 바탕을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흥보가까지 하고 나니 다른 선생님들은 나에게 수궁가나 적벽가는 다른 바디 소리를 하라는데 나는 그런 말이 전혀 와 닿지가 안더라고요그래서 나는 동초제 소리로만 다섯 바탕을 했어요동초제는 사설이 정립이 잘 되어 있거든요.

 

옛 선생님들은 지금처럼 아니리를 안 하셨어요아니리는 무시하고 소리만 잘하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그런데 동초 선생님은 아니리를 중요하게 여겼어요창극이기 때문에 극적인 요소를 중시하거든그런 것들을 앞서서 생각하시고 소리를 하신 거예요동초제를 만든 연조는 짧잖아요시대를 엄청 앞서갔어요동초 선생님이 혜안이 있으셨죠그 양반이 춘향가를 정립해서 책을 내놓았잖아요합리적으로 되어 있고그에 따른 발음이 정확하고극적인 요소가 잘 정리되어 있고앞을 보고 소리를 짜신 것 같아그러니까 소리가 세상을 앞질러 갔어요.

사설이 정리가 잘 되어 있지만 아니리가 너무 길다는 단점이 있어요어떤 분들은 선생님이 목이 안 좋으시니까 아니리를 이렇게 길게 하셨다지만자진머리 대목이 많아근데 목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어요동초 선생님의 소리에 대하여 말들이 많았어요. “아니리가 너무 길다!” 그런데 그런 것은 후대의 제자들이 정립을 하면 돼요그 사설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우리 오정숙 선생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금쪽같은 동초제다” 라 하셨어요그러면 도대체 뭐가 금쪽같냐고 속으로 생각했는데보세요정말로 대단한 분이지 않아요오정숙 선생님은 늘 무대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시잖아요참 그런 분은 없으세요.

오정숙 선생님께 공부하러 갈 때는 내가 공부를 해서 다듬으러 가는 시간이에요그때 당시 오선생님 음반이 나오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소리를 한 시간 정도 녹음을 넣어서 주시니까 그걸 가지고 연습을 해요혼자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여름이나 겨울에는 선생님을 모시고 산공부를 들어가요나는 다섯 바탕을 다 할 때까지 선생님 옆에서 계속 공부를 했어요혼자 공부하는 것은 외우는 것 밖에 없어요지속적으로 선생님 곁에서 공부하며 다듬어야 하는 거죠오정숙 선생님한테는 이일주 선생님이 큰 제자이고 나랑 그리고 조소녀 선생님이 그 다음 정도일 거예요우리까지는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렇게 공부를 해왔으니까요."

 







“1984년에 오정숙 선생님을 모시고 이일주 선생님조소녀방성춘 광주의 정춘실 이렇게 다섯이서 전주의 법우사로 백일공부를 들어갔어요그때 오정숙 선생님이 적벽가를 공부하시려고 들어갔어요김연수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오정숙 선생님이 적벽가를 제대로 공부를 못 했어요그래서 녹음기 듣고 하시려고 산공부를 들어가신 거예요그 바람에 우리가 선생님과 함께 다 들어갔어요.

백일공부를 들어가면 몸이 아파 버려요하루 종일 공부만 하니까 몸이 부어버리더라고요워낙 몸을 혹사시키니 심지어 여자는 자궁을 드러내기도 하는 경우도 있어요그러니까 공부하다가 막 나와서 수술을 하는 일도 생겨요백일공부 동안 하루 일과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산으로 가 공부를 해요아침 6시나 6시 반에 식사하고 오전에 오선생님께 공부하고 또 산으로 나가요점심 먹고 오선생님께 공부하고 다시 산으로 공부하러 가는 생활이 반복 되었어요그리고 저녁 8시에 자요.

백일공부는 다 채우기가 쉽지 않아요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내려가게 되더라고요함께 들어갔던 방성춘정춘실은 중도 하차했고 조소녀 언니도 공부하다가 복막염으로 실려 나가 수술을 했어요그렇게 내려가는 사람이 늘 생기더라고요마지막까지 남아서 공부한 사람은 나하고 이일주 선생님하고 오정숙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만 남았으니까요.”

 

 

그렇게 오정숙과 이일주 선생님께 배운 심청가로, 1985년 국립극장에서 그의 나이 마흔 둘에 드디어 첫 완창발표를 하였다그런데 그날 무대에서의 목은 쉬이 마음 같지 않고 답답하기만 하였다그도 그럴 것이 오관상청으로그렇게 청을 높게 잡고 불렀으니 힘들수 밖에 없었다그렇게 여섯시간 정도의 시간을 높은 청으로 무대에서 독공 하다시피 하였더니 실력이 늘었는지 후에 목을 순조롭게 다룰 수 있었다다만 그날 무대에서는 목이 뜻대로 나오질 않아서 무모하게 힘으로만 밀어부친 기억이 역력하였다.




심청가로 완창 발표한 이듬해인 1986전주대사습놀이에서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지금과는 달리 당시 대통령상은 전주대사습놀이와 남원춘향제 두 대회에서만 수상할 수 있었기에 두 대회는 소위 명창의 등용문이었다특히 전주대사습놀이는 소리에 대한 수준이 높으면서도 적극적인 일명 귀명창들 천지였기에 전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이 대회에서 장원을 한 성준숙의 감회는 남달랐다판소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대사습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 위함이었기에 그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전주대사습을 여러 번 나갔었어요맨 처음에는 그냥 나갔는데도 막상 대회 나가서 떨어졌을 때는 너무나도 힘들더라고요그런데 세 번 나가서 떨어지고네 번 나가서 떨어졌을 때 그 심정은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대회 나가려고 무식할 정도로 공부를 했으니까요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소리가 다져졌겠지요그런데 나는 매번 떨어졌어요대사습대회에서는 항상 예선에서 떨어졌어요일단 본선에는 붙지를 못하고 예선에서 떨어져요그러니 그게 어떻게 되겠어그런 과정을 겪고 대통령상을 탔어요.

1986년 전주대사습대회에 출전을 했는데 대사습대회 결선에서 은희진 씨하고 올라간 거예요그런 상황에서는 누가 보더라도 은희진 씨가 수상 하는게 당연해요은희진 씨는 서울에서 활동하잖아요나는 활동도 않고 공부만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은희진 씨가 탄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그런데 그때 은희진 씨 순서가 1번이야그때는 대사습대회가 로테이션으로판소리하고 기악하고 무용하고 그렇게 돌아가며 순서대로 했어요.

전주 실내체육관에서 본선을 했는데사람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체육관에 꽉 찼어요밖에서는 풍물패가 농악을 하고안에서는 소리를 하고판소리하고 나면 한참 있다가 순서가 되니 나는 여관에서 좀 쉬었어요쉬면서 은희진 씨가 하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지요그런데 본선에 올라간 또 한 사람이 내가 대통령상 탄다는 소문을 듣고 기권하고 가버렸어요조남희 씨라고 지금은 일본에서 살고 있다고 해요민소완 씨가 1등 한다고 가버렸대결국 나하고 은희진 씨 둘이 경합을 벌인 거예요나는 1등을 포기한 채로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은희진 씨가 어사출도를 하는데부르고 또 부르는데 두 바퀴를 도는 거예요그러면 떨어지는거나 다름없죠저녁내 잠을 못 잤다는 거예요그런데도 은희진 씨하고 나하고 나이를 두고 경합에 올려놨어요그런 실수를 했던 사람을 올려놓고 연장자로 결정을 하더란 말이죠틀린 곳 하나 없이 소리를 한 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더라고요이미 은희진 씨는 떨어진 사람이지 붙은 사람이 아니거든그러는 반면 나는 무대에서 소리를 하는데 지르면 지르는 대로 소리가 나왔거든요소리같이 바람 타는 게 없어요누가 잘한 사람이 나왔다고 하면 주눅이 들어가지고 목이 탁 가버려요그러니 판소리는 대회에서 누구에게 1등을 주고 싶어도 못 주는 이유에요.


소리를 하다가 가사를 까먹어버리고목이 팍 쉬어버리고장단이 어긋나 버리고그래서 판소리가 어려워요북 하나 놓고 거기서 몇 사람 역을 하잖아요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호락호락하지가 않지대사습 대회는 꼭 20분 넘어야 해요내가 대사습 나갈 때는 예선에 25분 소리 했어요그러니까 지금은 짧게 하는 거죠내가 대회 나갈 때는 깐깐하신 분들이 심사를 했어요.”


대통령상을 수상한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방송으로 나가자 방송을 본 가족들과 친척들도 그의 소리에 대한 일념과 열정을 드디어 인정하게 되었다.



심청가에 이어 1986년 45세 때는 춘향가를 완창하였다.


"춘향가 완창할 때도 참 힘들었어요전주시청 강당에서 여섯 시간을 발표했어요그런데 후반부에 가서 어사출도를 부르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장이 꼬이는 듯하게 아파와목도 꽉 막혀버려요그래서 배를 부채로 가리고 손으로 문지르면서 했어요그렇게 여섯시간 동안 쉬질 않고 소리를 한 거예요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의 고통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요춘향가 완창을 할 때는 방송국에서 녹음을 넣는 거야녹음을 하니까 소리가 내게 안 들어오고 신경이 자꾸만 쓰여서 목이 안 나와요목이 마르고 딱 조여져버린 상태였으니까요뱃심은 있는데 그래요완창을 위해서 매일 같이 서서 연습을 했어요앉아서 하면 소리가 안 돼요앉아서 소리하면 쉽잖아요서서 연습하면 곱절은 더 힘들어요그러니까 서서 연습을 해요그래도 혼자 공부할 때는 앉아서 연습을 하잖아요그런데 나는 주봉신 선생님을 모시고 완창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서서만 연습을 했어요."

 

 

심청가와 춘향가 완창 때 힘들게 소리를 했던 반면 1987년에 흥보가부터 1989년도에 수궁가와 1994년도에 적벽가 완창할 때는 그의 말을 빗대자면목에 질이 나서 여유가 생겼다그는 무대에서 너름새도 하고무대 연출도 새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무엇보다도 목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요령이 생겨서 무대에서의 끼를 마음껏 발산 할 수 있었다어쩌면 그의 스승인 이일주의 목을 닮고 싶어했던 바람처럼 그의 목 또한 수리성으로 애원성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소리목 중 다른 사람은 잘 쓰지 않는자신만이 잘 쓰는 목을 표목이라고 한다판소리 공연은 다양한 음색과 목재치의 변화를 구사하기 때문에 성음놀음이라고 하는데이 세 번의 완창에서 그는 성음놀음을 마음껏 발휘 하였다.

 



국립극장에서 적벽가로 완창을 하고 난 후성준숙은 1996년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동초제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그러나 한때 그는 적벽가로 문화재 지정을 받은 것에 대한 후회도 했었다고 고백했다문화재니까 어디를 가서든지 적벽가를 불러야 하는 이유였다삼국지를 호령한 영웅들의 호방한 소리를 통성과 호령조로 불러야 해서 적벽가는 웬만한 공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부르기 힘들다특히나 적벽가는 고어와 사자성어를 비롯해 고음이 많고 풍부한 성량을 필요로 하기에 판소리 다섯바탕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스토리는 좀 알지만 소리의 이면은 모르니까 관객들도 그 맛을 모르는 까닭이다.

판소리 적벽가는 삼국지연의 소설을 바탕으로조조와 유비손권과의 전쟁 장면인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완창 판소리 적벽가는 사설 중후반부터 이를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변형했다도원결의로 유비관우장비와 형제가 된 후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는 삼고초려부터 완창 판소리 적벽가는 시작한다.

동초제 적벽가는 김연수-오정숙-성준숙으로 전승되어 온 소리다동초 김연수는 소리의 이면뿐 아니라 극적인 면을 강조하여 짜임새가 합리적이고장단이 사설과 잘 맞아 떨어지게 구성하였다성준숙은 이를 바탕으로 통성을 구사하는 목구성 뿐만 아니라 정확한 가사전달과 박자에 뛰어나 남성적소리로 인식되는 적벽가를 소화하는 드문 여성 명창으로 꼽는다.

 

 


성준숙는 적벽가를 이렇게 말한다.

 

 

"적벽가는 오정숙 선생님께 2년 동안 공부를 했어요장수 이름을 외우는게 그렇게 힘들더라고요국립극장에서 적벽가로 완창을 하고 나서 1996년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어요적벽가는 한 바탕 소리 중에서 무대 소리는 서너군데 밖에 없거든요불 지르는 대목조자룡 활 쏘는 대목새타령조조가 패해서 도망 나가는 대목군사설움타령은 조금 쉬는 대목이에요나는 어디 가서 소리하려면 활 쏘고 불 지르고 새타령으로 가거든근데 다른 사람들은 군사설움 타령을 하더라고요적벽가도 잘하면 기가 막히게 좋아요그런데 버거워서 힘들죠특히 활쏘기 대목은 엄청 힘들어요그 대목이 8분에서 9분 정도 되는데 그 대목을 하고 나면 힘이 딸려서 주저 앉게 돼요적벽가를 제외한 판소리 네 바탕 소리는 아무래도 애원성도 좀 집어넣고 그러는데 적벽가는 매번 싸움하는 장면을 불러야 하니 그럴수 밖에 없어요그런데 음악적으로는 잘 짜져 있어요."

 

 



오정숙 선생님께 사사를 받을 무렵 성준숙은 사업가로 변모했다물론 소리공부에 게으른 법은 없었다그에게는 소리공부를 위한 비용이 필요했다남들처럼 직장이 있지도 않고 시간은 많았던 상황이었다당시 아버지의 도움으로 경제적으로도 좀 여유가 있었지만 언제까지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그렇기에 그는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공부를 하고 싶었던 마음으로 행원을 인수 받았다.

행원에 대한 설명은 여러 안내서에 나와 있기에 내용을 종합하여 소개한다.

전주 풍남문에서 전라감영 사이 골목 깊은 곳은행나무가 있는 정원의 뜻을 가진 행원(杏園)이 자리잡고 있다행원은 1928년에 식도원(食道院)’이라는 조선요리 전문점으로 건축되었다가 1938년 낙원’(樂園)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요정으로 운영되었다이후 1942년 당시 전주국악원이었던 낙원권번’ 건물을 전주의 마지막 권번이자 여류화가인 남전(藍田허산옥(1926~1993)이 인수해 문을 열었다. ‘행원은 전주를 대표하는 요정(料亭)으로 불리웠다건물 앞마당에 정원을 둔 우리나라와는 달리 자 형태의 건물 안쪽에 작은 연못과 정원을 갖춘 일본식 한옥으로 설계되어진 것이 특징이다행원은 정치인과 기업인언론인 등 지역 유지들이 애용하면서 서울의 삼청각처럼 자연스럽게 전주의 대표적인 요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이러한 행원은 한편으로 예술가들로 북적였다전쟁의 혼란 속에서 생계 자체가 어렵거나 피난을 온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화가음악인들을 불러들여 후원하고 창작활동을 북돋았다행원은 가난한 음악인들에게 연주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터전이자새로운 음악활동을 이끌어 준 장소였다.

1983년 무렵 행원의 주인은 성준숙으로 바뀌면서 한정식 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성준숙은 전통음악과 춤의 명맥을 잇게 한 한정식집 행원으로 운영하다가 현재는 리모델링 후 한옥카페 행원으로 재개관한 상태다.



당시 행원을 인수하게 된 사연을 들어보았다.

 

 

맨 처음에는 허산옥 씨가 아니고 그 전에는 집 주인이 장가라는 사람이 있었고그 다음이 남전 허산옥 선생님이였어요그분이 자네는 판소리를 하니까 이집하고 자네하고는 참 적합하네그랬어요그때가 1980년 초쯤 인가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 집을 6억을 달라는 거에요그전부터 남전 선생님이 나에게 이집은 자네 집이네사소사소!” 그랬어요그런데 집을 두 채를 팔아도 그 집을 못 살 정도로 비쌌어요결국 남전 선생은 나에게 팔려 했던 행원을 이런 일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로 넘겼어요그런데 그 분이 사서 감당을 못한 상태였어요그때 에너지 파동이 있었을 때였는데 빚을 상당히 졌나봐요자기도 집을 하나 팔아서 그 집을 샀는데 손님이 없어가지고 그 집(행원)이 은행으로 넘어가 버렸대요한 달에 은행에 사백만원씩 이자를 낸다고 그랬어요그런데 나도 행원을 살 정도의 돈은 없어서 형편이 안됐어요그래서 그 집을 다시 세무서에서 근무하는 사람한테 팔았더라고요본인이 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며 그 사람(세무서직원)한테 팔았는데 어떻게 그 집 이자를 내겠어요그래서 이번엔 새 주인인 세무서 직원이 나를 만나자고 해요. “여기는 선생님께 딱 맞는 집이니 선생님께서 사십시오!” 때마침 그때는 내가 조금 여유가 생겨서 내 집 두 채를 팔아 그 집(행원)을 샀어요내가 그 집을 사고 나니까 이젠 돈이 없는게지공부는 해야겠고그래서 장사를 한거에요거기서 장사해서 번 돈 가지고 공부를 하는 거예요당시에 행원터는 지금보다도 더 컸어요지금 주차장 자리가 모두 건물이 있었던 자리였어요내가 그 자리는 밀어버리고 마당 겸 주차장으로 쓰려고 변경을 했어요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으니 그렇게 했어요이 곳 행원에서 주봉신 선생님의 북장단에 맞춰 함께 공부한 세월이 자그마치 15년이었어요소리공부 하다 말고 정원을 바라보던 주봉신 선생님께선 또 꽃이 피네난 새로운 봄이 슬퍼또 이렇게 한 해가 시작되고 세월이 흘러가잖아라며 이야기 하신 장면이 새록해요

 

 

성준숙은 결국 판소리 다섯바탕 공부가 다 끝나고 나서야 행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렇다면 전주국악원과 행원과의 관계가 궁금하였다.

 

 

권번 시대는 우리 시대가 아니에요권번이 해체되고 전주국악원으로 되었다고 하는데홍정택 선생님이나 김유앵 선생님 때지그 시절에 공부한 선생님들은 김동준 선생님 정미옥 선생님 최난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 권번을 통해서 공부를 했어요권번을 하다가 일제 침략전쟁 때문에 권번이 중단되어 버렸잖아요우리는 권번을 잘 몰라요우리 세대 전에 권번이 있었던거라권번에서는 소리뿐만 아니라 춤이나 악기를 두루 두루 배웠어요내가 들었던 건 권번에서 배우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 그랬대요권번이 없어지면서 이곳 행원에서 요리도 하고 음악과 춤 같은 공연이 곁들인 접대도 있었다고 해요당시에 요정이나 단체 같은 곳에서 예술인들이 먹고 살았지원래 행원 주인이 화가였던 남전 선생이잖아요그 분이 예술 쪽에 관심이 많고 멋도 있고 그래서 국악인들과 문인화가들이 모인 거예요.”

 

 


 

성준숙은 행원을 정리한 후 전주와 대전을 오가며 판소리 연구소를 마련하였다활발하게 제자를 양성하고 있을 무렵불현듯 전주대사습보존회 측으로부터 이사장직 제안을 받게 되었다일신상의 이유로 홍성덕 이사장이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성준숙은 대사습대회에서 판소리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소리에 입문했기에 대사습에 대한 남다른 마음이 있었다하지만 신경쓸 일이 많고 골치 아픈 이사장직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성준숙은 대사습 이사로 있다가 5~6년간 동안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던터라 이를 계기로 김판철 전 이사장과 홍성덕 이사장은 그에게 이사장직을 이어 달라고 권유를 받았다아마도 행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과 대사습에서 오랫동안 이사로 활동하면서 관계자들과의 원만한 인간관계가 그를 신임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그는 몇 차례 고사하였으나 결국에는 이사들의 검증을 거치며 수락하였다.

성준숙은 제13대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전통문화 발전과 전주대사습보존회 현안의 사업들을 처리하였다특히 전주대사습놀이 복원 40주년때인 2014년은 전주대사습을 현재에 맞게 다시 살릴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시도를 하고더불어 전통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천년 고도 전주에서 최고의 명인명창 자리를 놓고 겨루는 국악경연의 장으로 이끌었다전주대사습의 틀을 깬 또랑광대경연 부활시상의 격을 올리기 위해 상금을 상향 시켰다.

역대 전주대사습보존회 이사장에는 1대 손주항, 2· 3· 8대 김판철, 4대 김원술, 5대 송광섭, 7대 한선종, 9대 황병근, 10대 배기봉, 11대 홍성덕, 12·13 성준숙, 14대 송재영이다.




성준숙은 1990년대 중반성준숙의 판소리 활동은 전주를 중심으로 전북을 넘어 대전 지역으로까지 활동 무대를 넓혔다성준숙은 목원대학교와 중앙대학교 국악과에 출강을 계기로 20여 년 동안판소리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전에 둥지를 틀고 판소리 연구소를 운영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고공연활동을 통해 판소리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성준숙은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국악발전을 위해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 중이다.

어린시절 국극단의 동경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그의 판소리 인생은 치열했던 스스로의 의지를 불태워 완성하였다이젠 노장의 예인으로언제나 그러하듯이 그는 소리꾼의 지조를 잃지 않고 평생 걸어온 판소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성준숙은 오정숙 선생님으로부터 판소리 다섯바탕을 사사한 후 유관순 열사가를 배운 유일한 제자다열사가 중 일부를 소개한다.

 

동초제 유관순 열사가 중에서

 

열사가

(아니리)

이조말년 어지러워 왜적이 침입허니 간신이 득세로다보호조약 억제터니 억울한 일한합병 뉘 아니 분개허며 매국적 부귀탐욕 일시영화 꿈을 꾸니 조국을 어찌 돌아보랴반만년 우리역사 일조에 무너지고 삼천리 분한설음 삼월일일 폭발되니 피 끓는 독립투사 도처마다 일어나서 의를 세워 분투헐제 유관순은 누구든고 십육세 어린처녀 근본을 이를진데

 

출생과 성장 대목

(평중머리)

충남천안 삼거리에 수양청청 능수버들 우리나라 유망터니 지기상합 다시 푸려 구목천지령이 평화로운 유씨 가문에 관순 처녀 태어나서 일대명천 순국처녀 도움 없이 삼겼으랴계룡산세 장헌 기운이 어려 있고 금강수 흐르는 물은 낙화암을 돌고도니 삼천궁녀 후인인지 귀인자태 아름답고 월궁항아 환생허니 뚜렷한 그 얼굴 의열지심이 굳고 굳어 양미간에 어렸더라유시부터 출중허여 범사가 다른지라부모님께 효도허고 동기간 화목허기 예의염치 기거좌립 뉘랴아니 칭찬허리유다른 그 인정은 사랑옵고 따뜻허여 사람마다 정복되고 정대헌 그 마음은 신의가 분명허니 일세영향이 그 아닌가

 

아우내장터 대목

 

(아니리)

이렇듯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빌며 탄식허다 불놓아 군호헌 연후 집으로 돌아와 잠한숨 못이루고 밤을 세워 준비헐제

 

(자진머리)

날이 차아 밝어오니 음력 삼월 첫날이라아우내장 네거리에 십육세 어린처녀 무엇을 옆에 끼고 이리저리 갔다 왔다 수천명 군중들 연속허여 모여들고 한편 길 어구에서 태극기 선언서를 조용히 나눠줄 제 어느덧 오정이라 관순이 높이 서서 선언서를 낭독헌다선언문이 끝이 나자 수천명 군중들 태극기 높이 들며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천지가 뒤넘는 듯 강산이 뒤끓어서 매봉산이 떠나갈듯 수천명 군중들은 시위행렬 전진헐제 왜놈의 총소리 쾅 김구응이 꺼꾸러지니 군중은 더욱이 열이 북받쳐 네이 무도헌 왜놈들아 총은 너희가 왜 쏘느냐저놈들을 죽여라 우루루루루루 달려들어 파견소 문짝을 후다딱 직근직근 때려부시니 왜놈들이 겁을 내여 담 넘어 도망헐제 어데서 자동차소리 우루루루루루루 천안 헌병본부에서 응원대 쫓겨들어 오며 총소리 쾅쾅쾅 종환이 쓰러지고 유중권 내외가 꺼꾸러지니 관순이 눈이 캄캄허여 우루루루 달러들다 칼날이 번듯 관순이마져 쓰러지는구나무도헌 일헌병은 연속허여 총을 쏘니 죽엄이 여기저기 수라장이 되었구나.


 

옥중 투쟁과 순국 대목

 

(아니리)

이렇듯이 설리울다 분기가 북받치여 옥문을 두다리며 독립만세를 외쳐노니 그때에 독립투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판이라이 소리를 듣고 의분에 받쳐 같이 합창으로 독립만세를 불렀겄다감옥이 발근 뒤집히여 간수들도 정신을 잃고 어찌 헐줄을 모르다가 간신히 진압을 시킨 후에 선동자를 끌어낼 제

 

(중머리)

좌우에 일본간수들은 관순을 끌어내고 전옥이하 간수장들은 일제히 늘어앉어 추상같이 호령헌다네이년 너는 일국에 백성이 되어 대일본국법을 무시허는가무엇이 어쪄미친 도적놈들 말 들어라당초에 너희놈들이 보호조약을 억제허고 위협적 침략정책 우리나라를 짓밟아 빼앗고도 무슨 면목에 낯을 들어 그런 말을 감히 허느냐나는 대한사람으로 너희 법을 부인허노라허허 그년 당돌허다네가 어찌 당초 근본을 알겠느냐너희 나라 당파 있어 보전헐 길이 없었기로 우리 병력을 다허여서 일청일로 전쟁험이 모다 너희를 위함이라오 하하하 더욱이 그 일로 말헐진덴 너희놈들 간흉허여 일청일로 전쟁 끝이 나면 독립시켜준다 빙자허고 우리나라를 짓밟아서 도적허자는 근본이니 그건 더욱 흉측허지야무엇이 어쪄이년 또 들어봐라보호조약이 체결됨도 너희 군신이 합의허여 보호를 부탁했고 일한합병을 허잔것도 너희 조정만조백관들이 모다 합의허여 원한바다허허 뻔뻔허구나 왜놈들아그것은 너희놈들이 우리나라 역적들과 공모허여 너희 맘대로 허였기에 우리 의사 안중근씨는 이등박문을 죽인후에 여순감옥에서 원사허시고 이준 선생은 배를 갈라 만국회의석에 피를 뿌려 세계만국 경탄이요우리 동포 흘린 피는 도처마다 물을 들여 천추원한 맺힌 줄을 너희도 응당 알리로다간호독사 네놈들이 포악무도를 일삼으니 아니 망허고는 안 되지야응 그년 요망허다 당장 말을 못하도록 때려랴때리고 달고치고 발로 차고 밟고 물을 퍼씌워도 꼼짝달싹을 안허고 더욱 정신이 씩씩허여지며웠다 이 흉포헌 왜놈들아 너희가 나를 짝짝 찢어서 육장을 만들던지 동동히 갈르던지 너희 맘대로 허려니와 가슴 속에 일편단심은 갈라질리 없으리라옛말에 이르기를 적국지수는 아국지수요 아국지수는 적국지수라나를 너희가 죽이는 것은 너희놈들의 목적이요 나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나의 의무라 헐 것이니 당장에 목을 잘르렴으마에 그년 천하에 독헌년이로다화덕에 불을 활활 부쳐 쇠꼬치에다 불을 달궈 허벅지 살을 푹푹 찌르니 기름이 끓고 살이 타져도 꼼짝 달싹을 안허고 여전히 포악을 허는구나에 그년 단번에 쳐죽여라칼로 찌르고 살을 점점히 헛쳐노니 아깝구나 우리 처녀 악형을 못이기여 죽어가면서도 무엇이라 입만 딸싹딸싹 천추원한 품에 안고 아주 깜빡 숨이지는구나피는 흘러 땅에 가득차고 살은 점점이 흩어졌네장허구나 순국 처녀 몸은 육장이 되었으나 의열만은 살아 있어 깨끗헌 그 영혼은 만리창공에 높이 떴네창천도 느끼는 듯 일광도 빛이 없고 날아가는 새 짐승도 충혼을 슬퍼허여 허공중천에 떠서 운다.

 


주요 약력 


1944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3가 94 출생

1960년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졸업

1976년 이일주 선생 문하생 심청가 사사

1978년 오정숙 선생 문하생 판소리 사사

1980년 남원 전국명창대회 준우수상 수상

1984년 법우사 산공부

1984년 정주시 전국명창대회 준우수상 수상

1985년 심청가 완창발표회서울 국립극장

1985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 최우수상 수상

1986년 춘향가 완창발표회전주시청 강당

1986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1987년 흥부가 완창발표회서울문예진흥원 대강당

1989년 수궁가 완창발표회서울 국립극장

1991년 정읍 고내장 산공부

1992년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1994년 흥부가 완창 공연대전시민회관 소강당

1994년 적벽가 완창발표회서울국립극장

1996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2-10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1998년 국악협회 전북지회장

2000년 적벽가 발표회국립민속국악원

2000년 대전시민위안 창극마당 춘향전(월매역)

대전전통예술단 부이사장

2006년 유관순 열사가 발표회대전연정국악문화회관

2008년 우리 소리 어울 한마당순천문화예술회관 대강당

2012년 대전연정국악원 제134회 정기연주회 객원 출연

대전문화예술의 전당(춘향가 중 과거 시험 보는 대목)

2014년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회장 취임

2020년 완창판소리(성준숙의 동초제적벽가), 서울 국립극장

2021년 유관순 열사가 완창행원

2022년 완창판소리(성준숙의 동초제적벽가), 서울 국립극장

2022년 신광대가(동초제판소리 다섯바탕), 정읍 연지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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