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경숙 전라북도립국악원 학예연구팀장

전라북도는 소리의 고장으로, 소리의 고장답게 소리꾼들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다. 여러 명창들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의외로 태생 자체가 이곳 출신은 드물다. 성준숙은 그중 몇 안 되는 전주 출생의 명창이다.
성준숙은 1944년 9월 16일 전북 전주시 완산동에서 부친 성홍근과 모친 김희순 사이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잠시 완주군 이서로 이사를 가서 살았는데, 그 이유로 그의 본적은 완주군 이서로 되어 있다고 한다.
성준숙의 아버지는 종종 딸 성준숙을 업고 다녔는데,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홀아비 딸이라고 부를 만큼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어머니 또한 성준숙이 커가는 동안 부엌일 한번 시켜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그렇게 어린시절 성준숙은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열 네 살 때였다. 임춘앵과 김진진 단체의 여성국극단이 전주를 찾아왔다. 50년대에 창극을 대표하는 단체는 이른바 여성국극단이었다. 여성국극단은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이들에 의해 남자 역할도 맡아 하기에 남녀혼성의 창극단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임춘앵과 김진진 국극단의 인기는 실로 지금의 아이돌스타와 버금가는 현상이었다. 성준숙과 판소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한창 감성이 풍부할 무렵이니 공연을 보고 난 후 소리의 매혹에 이끌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홍갑수, 임방울 단체가 이틀 동안의 공연일정으로 전주에 내려왔다. 첫날 공연을 보고 그날 밤 집에 들어와서 공연 장면만을 생각하며 설렘으로 잠들었다. 이튿날, 그렇게 겁도 없이 가출을 감행하여 홍갑수, 임방울 단체를 따라 나섰다. 그 단체에는 임방울, 홍갑수 외에 박도화, 성순종과 같은 소위 일류급 창극 배우가 몸담고 있던 제법 큰 규모의 단체였다. 갓 들어온 성준숙은 가장 어렸고 얼굴도 예쁘장했으며, 특히 소리목까지 타고났다며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57년 그는 단체를 따라다니면서 틈틈이 임방울 선생께 수궁가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창극 연습을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명씩 개인지도를 해주셨다. 녹음기가 없었던 때라 무슨 작품인지도 모른 채, 선생님께서 소리를 하면 가르쳐 준대로 사설을 공책에다 적어가며 연습을 했다. 기껏해야 두서너 장단의 토막소리들로 배움을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단에서는 어린 성준숙에게 흥보전의 돌남이 역을 시켰다. 첫 출연 날, 돌남이 역으로 분장한 성준숙은 무대 위에 서 보니 관객들의 머리가 마치 콩나물 시루에 꽉 차 있는 콩나물처럼 보일 정도로 까마득해 보였다. 그때부터 머릿속은 온통 하얗고 겁이 났다. 어찌나 긴장을 하고 떨었던지 공연이 끝나고 그대로 아파버렸다. 톡톡한 신고식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아버지가 찾으러 오셨으면 싶었다. 단체 생활은 말이 단원이었지 주연급을 제외하고는 봉급이란 없었고 그저 먹고 자고 배우며 공연하는 생활이 일상이었다.
성준숙은 단체 생활이 그가 꿈꿔왔던 일들과는 거리감이 있었다며 당시를 회고하였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국악이 싫어지더라고요.
단체에서는 간간히 소리 공부도 했지만 선생님들 수발을 들거나 심부름 하며 창극 연습하고, 공연을 하는 생활이었어요.
공연을 마치고 분장을 지울 때는, 석유기름을 사가지고 비닐봉투로 된 약봉지에 석유기름을 부어서 솜에 묻혀 화장을 닦았어요.
나는 그런 생활이 안 맞았더라고요. 좋아서 갔는데 얼른 오고 싶어진게지.
그렇게 지내다가 8개월 쯤 되어가지고 마산에서 공연하는데 정말 아버지가 오신 거예요.
“야가, 우리 딸이다” 며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까 단장이 안 된다고 했던 거예요.
우리는 공짜니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하니 아버지가 단장의 멱살을 잡고 막 싸우시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속으로 통쾌하고 좋았어요. 아이고 ‘내가 다시는 안따라 다닌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8개월 만에 아버지가 찾아와서 나를 끌고 내려왔어요. 집에 와서 얼마나 경을 쳤는지 몰라요.
집에 와서 보니까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어요.
한 공연이 끝나면 이틀 만에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전국을 유랑하며 다니는 생활이었으니 내 몰골이 알만했겠죠?"
어린 나이에 단체를 따라다니며 혹독한 생활을 경험했던 탓이였으리라. 극단하면 한동안은 쳐다보기도,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실망이 컸다. 더구나 아버지를 비롯해서 친척들은 판소리를 기생이나 광대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의 반대와 함께 성죽순은 자신의 힘든 단체경험으로 이제 판소리는 접고 평범하게 여느 학생들처럼 학업에 매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소리에 대한 그의 끌림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남원에 계시던 주강덕 선생님이 전주에 오시어 판소리를 잠깐 접하게 되었다. 이 계기로 강도근 선생님께 흥보가를 배우러 갔다. 판소리 배움에 대한 갈증이 다시금 살아난 그는 이번에도 역시 가족들 모르게 일주일에 한 번씩 버스를 타고 남원에 계신 강도근 선생님께 3개월 동안을 공부하러 다녔다.
그러다 김동준 선생님이 전주국악원에 강사로 오시게 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에 전주에서 국악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전주국악원이었다. 흔히 전동국악원으로 알려진 전주국악원은 지금의 전동성당에서 팔달로 건너편 쪽(남문시장)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주국악원은 일제강점기때 설립된 예기조합(권번)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국악인들이 후진을 양성하던 국악의 산실이었다.
"김동준 선생님은 전주국악원에 강사로 계셨지만 나는 그때 용돈을 쓰지 않고 그 돈으로 학채를 내고 선생님 댁으로 가서 1:1로 춘향가를 공부했어요. 선생님께선 참으로 목도 좋으시고 소리를 잘하셨던 분이에요. 그때는 전주국악원이 상당히 컸어요. 홍정택, 강도근, 김동준, 유대봉 같은 선생님들이 그곳에서 사범으로 가르치셨어요. 옛날에는 예술인들이 돈이 없어서 개인으로는 공부를 못 하고 전주국악원에서 단체로 그렇게 배웠어요."


성준숙은 어렵게 공부했던 것도 무색하리만큼 오랫동안의 공백기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1975년, 그동안 중단되었던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를 개최한다기에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판소리 공부를 해서 나도 저렇게 대통령상을 꼭 타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몰래 판소리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은아버지가 쫓아 오셔서 “대통령상 같은 것을 타면 뭐하냐. 내가 선산 묘 앞에서 꼬실라 버릴란다!”라며 내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협박을 할 정도로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렇듯 집안에서는 판소리를 못하게 극구 말렸지만, 이후 판소리 학습에 대한 집념과 갈망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다시 소리를 할 작정으로 이름을 ‘민소완’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가족들 몰래 이름을 바꿔 가며 선생님들을 찾아 다녔다.
일반적으로 문화예술인들 사이에는 이름 대신 호(號)를 부르기도 하지만 성준숙의 경우는 이름 대신 민소완이라는 예명(藝名)으로 더 알려져 있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호는 학봉(壑峰)이다. 골짜기 학자에 봉우리 봉자, 적벽가 화용도에 나오는 만학천봉에서 따왔다고 한다. ‘민소완’, 원래는 부모님 몰래 소리 공부를 하려고 지은 이름이 결국 성준숙의 예명이 되어 현재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서른두 살,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고자 결심한 그는 이일주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의 스승 이일주는 좋은 목구성과 서슬이 담긴 소리가 장점으로 알려져 있다. 목구성이 좋다는 것은 거친 맛과 부드러운 맛, 슬픔과 너그러움 그리고 깊은 그늘을 느낀다는 말이다. 서슬이 담긴 소리는 절망적 상황과의 대결이 두드러지는 부분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그는 이런 목을 가진 이일주 선생의 소리를 닮고 싶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소리를 다시 시작하니까 목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요. 아무리 소리를 해도 안 나와요. 그러니까 매일 밥만 먹으면 북 가져와서 소리연습을 했어요. 소리하려고 힘을 쓰면 무릎에 바람이 슬슬슬 들어가요. 그때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학원을 다녔어요. 혼자 북 놓고 소리연습하고, 선생님께 소리를 받아서 계속 연습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다리가 저리고 시린지 몰라요. 그러면 시장에 가서 천을 떠다가 다리를 막 묶어요. 그걸 떠다가 묶으면 다리가 조이니까 바람이 안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공부를 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어휴, 중앙동 파출소 순경이 쉬면 쉬었지, 너는 하루도 안 쉬고 공부하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일주 선생님께 공부할 때만 해도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산으로 올라갔어요. 여름에야 훤하지만 겨울에는 다섯 시면 깜깜해요. 새벽부터 소리를 지르며 공부를 하고 내려와야 해요. 우리 같으면 아침에는 목을 푸는 상태로 사설을 외우고 안 되는 것만 '살살살 해라' 그러거든. 그런데 옛날 선생님은 그런 말씀은 절대 없어요.
이일주 선생님은 생전 낮은 청으로는 공부를 하질 않으세요. 아침 새벽에만 한두 시간에 물 한 모금 잡수신가 몰라?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소리공부를 하신 분이에요. 그렇기때문에 제자들도 전부 다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그러다보니 이일주 선생님께 공부한 제자들은 다 목이 쉬어가지고 있어요. 선생님께선 지금도 그때 단련된 목으로 소리하시잖아요. 그렇지만 소리 연습을 많이 해서 목이 넘어갈 정도인 제자들은 없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그 정도 가면 자기가 깨우칠 거에요. '내가 청 조절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런데 요즘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은 없어 보여요.
이일주 선생님은 제자들이 상당히 많아요. 이일주 선생님이 많은 명창 제자들을 배출하는 비결은 다른 게 없어요. 선생님은 그저 소리연습을 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이일주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면 그때부터 소리하시니까. 그 선생님은 평생을 소리로 산 분이세요. 내가 아무리 소리 연습을 많이 했어도 선생님 1/3도 안될거에요. 다섯 시에 일어나면 그 양반은 산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질이 들어버린 거에요. 제자를 가르칠 때 학습시키는 비결이 있는데 어찌되었든간에 소리에 입문한 사람을 야무지게 가르쳐 놓거든요. 이일주 선생님은 당신의 방식대로 그대로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데 이일주 선생님한테 배우는 사람은 목이 약하면 안 맞아요. 우리 선생님은 요령이 없이 가르치시니까 공부를 할 때는 '그냥 질러라' 그 말씀 뿐이니까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이일주 선생님 모시고 조소녀 언니와 함께 남석사로 백일공부를 들어갔어요. 그때는 상을 안 탔을 때였어요. 거기서 인분을 먹었어요. 거기는 화장실이 수세식이 아니고 재래식이었어요. 공부하고 내려오니까 조리에다 딱 받쳐놨더라고요. 이만한 사발에다가 딱 담아 놓은 거예요. 그러더니 이일주 선생님이 '민소완, 조소녀!' 부르더니 와서 먹으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선생님이 약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좋은 약을 해 놓았다 하시더니 간을 보고 마셔요. 나중에는 그거라고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정말 환장하겠더라고요. 조소녀 언니는 끝까지 안 먹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내 앞에서 이렇게 휘저어서 맛을 보는 거예요. 맛을 보면서 나보고 마시라고 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안 마실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한사발 들이켰어요. 마셔보니까 짭짤해. 그게 효과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 먹었냐고요? 선생님이 먼저 드시고 맛을 봤잖아요. 사발을 드시고 '야! 암시랑토 안찮아' 그래요. 나는 그 모습이 진심으로 감사해서 먹은 거예요.
소리를 많이 하다 보면 갈비도 아프고 등도 쑤시고 몸이 많이 붓잖아요. 그때는 그렇게 심하게 공부했어요. 지금 같으면 음식도 잘 먹고 운동으로 몸을 풀어주고 했을텐데 말이죠. 재래식 화장실에서 금방 퍼다가 그릇에 받쳐서 막 주는걸 어떻게 먹겠냐고요. 더군다나 더운 여름인데. '예라, 체독이 걸리든 말든 먹자' 해서 먹었어요. 그리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약국에 가서 인분을 먹었다고 약을 좀 주라고 이야기하니까 '아이고 됐어요! 당신같이 무식한 사람한테는 약을 줄 수가 없으니 가세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약을 안 먹었어요. 다행이도 그 뒤에 아무 탈이 없었어요. 선생님들 말씀이 인분을 먹는 이유는 골병들지 말라고 먹는다고 하셨어요. 날이면 날마다 온 몸을 쥐어 짜듯이 소리를 하니까 골병들지 말라고 먹는다고."

"이일주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고 춘향가를 배운 도중 오정숙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오정숙 선생님께 네바탕 공부를 했어요. 15년 동안 공부하면서 이일주 선생님께 배운 심청가도 다듬어 가며 다섯바탕을 다 배웠어요. 그때는 밥만 먹으면 소리공부를 했어요. 나 같은 경우는 돈 벌러 다니는 일도 없고 하니 종일 소리공부만 정진한 거죠.
당시에는 오정숙 선생님이 국립극장에서 근무하고 계셨기에 오래 지도를 해주진 못했어요.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면 며칠씩 공부를 했어요. 밖에 나가서 밥은 사먹고, 잠은 선생님 댁에서 자고, 선생님께서 퇴근 하면 공부를 했죠. 보통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소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백일공부를 들어가요. 백일공부 들어가면 선생님께 답례는 여기서 공부하는 것보다 많이 드려야 했어요. 그때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돈이 많은 부자였어요. 그러니 그때부터 오정숙 선생님께 공부를 많이 했죠. 우리는 타고난 재질이 있어서 이일주 선생님께 공부할 적엔 혼나진 않았어요. 이일주 선생님이 소리를 잘 가르치시잖아요. 하나하나 잘 가르치시지. 그런데 오정숙 선생님은 쭉 가다가 못 받으면 혼을 내고 성질을 내셔요. 그래서 북에게 화풀이 하듯 북편을 막 때려요. 그럼 미치는 거죠.
옛 선생님들은 지금처럼 아니리를 안 하셨어요. 아니리는 무시하고 소리만 잘하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 그런데 동초 선생님은 아니리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창극이기 때문에 극적인 요소를 중시하거든. 그런 것들을 앞서서 생각하시고 소리를 하신 거예요. 동초제를 만든 연조는 짧잖아요. 시대를 엄청 앞서갔어요. 동초 선생님이 혜안이 있으셨죠. 그 양반이 춘향가를 정립해서 책을 내놓았잖아요. 합리적으로 되어 있고, 그에 따른 발음이 정확하고, 극적인 요소가 잘 정리되어 있고, 앞을 보고 소리를 짜신 것 같아. 그러니까 소리가 세상을 앞질러 갔어요.
사설이 정리가 잘 되어 있지만 아니리가 너무 길다는 단점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선생님이 목이 안 좋으시니까 아니리를 이렇게 길게 하셨다지만, 자진머리 대목이 많아. 근데 목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어요. 동초 선생님의 소리에 대하여 말들이 많았어요. “아니리가 너무 길다!” 그런데 그런 것은 후대의 제자들이 정립을 하면 돼요. 그 사설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우리 오정숙 선생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금쪽같은 동초제다” 라 하셨어요. 그러면 도대체 뭐가 금쪽같냐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보세요, 정말로 대단한 분이지 않아요? 오정숙 선생님은 늘 무대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시잖아요. 참 그런 분은 없으세요.
오정숙 선생님께 공부하러 갈 때는 내가 공부를 해서 다듬으러 가는 시간이에요. 그때 당시 오선생님 음반이 나오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소리를 한 시간 정도 녹음을 넣어서 주시니까 그걸 가지고 연습을 해요. 혼자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여름이나 겨울에는 선생님을 모시고 산공부를 들어가요. 나는 다섯 바탕을 다 할 때까지 선생님 옆에서 계속 공부를 했어요. 혼자 공부하는 것은 외우는 것 밖에 없어요. 지속적으로 선생님 곁에서 공부하며 다듬어야 하는 거죠. 오정숙 선생님한테는 이일주 선생님이 큰 제자이고 나랑 그리고 조소녀 선생님이 그 다음 정도일 거예요. 우리까지는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렇게 공부를 해왔으니까요."


백일공부를 들어가면 몸이 아파 버려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니까 몸이 부어버리더라고요. 워낙 몸을 혹사시키니 심지어 여자는 자궁을 드러내기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까 공부하다가 막 나와서 수술을 하는 일도 생겨요. 백일공부 동안 하루 일과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산으로 가 공부를 해요. 아침 6시나 6시 반에 식사하고 오전에 오선생님께 공부하고 또 산으로 나가요. 점심 먹고 오선생님께 공부하고 다시 산으로 공부하러 가는 생활이 반복 되었어요. 그리고 저녁 8시에 자요.
백일공부는 다 채우기가 쉽지 않아요. 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내려가게 되더라고요. 함께 들어갔던 방성춘, 정춘실은 중도 하차했고 조소녀 언니도 공부하다가 복막염으로 실려 나가 수술을 했어요. 그렇게 내려가는 사람이 늘 생기더라고요. 마지막까지 남아서 공부한 사람은 나하고 이일주 선생님하고 오정숙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만 남았으니까요.”


1986년 전주대사습대회에 출전을 했는데 대사습대회 결선에서 은희진 씨하고 올라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는 누가 보더라도 은희진 씨가 수상 하는게 당연해요. 은희진 씨는 서울에서 활동하잖아요. 나는 활동도 않고 공부만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은희진 씨가 탄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때 은희진 씨 순서가 1번이야. 그때는 대사습대회가 로테이션으로, 판소리하고 기악하고 무용하고 그렇게 돌아가며 순서대로 했어요.
전주 실내체육관에서 본선을 했는데, 사람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체육관에 꽉 찼어요. 밖에서는 풍물패가 농악을 하고, 안에서는 소리를 하고, 판소리하고 나면 한참 있다가 순서가 되니 나는 여관에서 좀 쉬었어요. 쉬면서 은희진 씨가 하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지요. 그런데 본선에 올라간 또 한 사람이 내가 대통령상 탄다는 소문을 듣고 기권하고 가버렸어요. 조남희 씨라고 지금은 일본에서 살고 있다고 해요. 민소완 씨가 1등 한다고 가버렸대. 결국 나하고 은희진 씨 둘이 경합을 벌인 거예요. 나는 1등을 포기한 채로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은희진 씨가 어사출도를 하는데, 부르고 또 부르는데 두 바퀴를 도는 거예요. 그러면 떨어지는거나 다름없죠. 저녁내 잠을 못 잤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은희진 씨하고 나하고 나이를 두고 경합에 올려놨어요. 그런 실수를 했던 사람을 올려놓고 연장자로 결정을 하더란 말이죠. 틀린 곳 하나 없이 소리를 한 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더라고요. 이미 은희진 씨는 떨어진 사람이지 붙은 사람이 아니거든. 그러는 반면 나는 무대에서 소리를 하는데 지르면 지르는 대로 소리가 나왔거든요. 소리같이 바람 타는 게 없어요. 누가 잘한 사람이 나왔다고 하면 주눅이 들어가지고 목이 탁 가버려요. 그러니 판소리는 대회에서 누구에게 1등을 주고 싶어도 못 주는 이유에요.
대통령상을 수상한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방송으로 나가자 방송을 본 가족들과 친척들도 그의 소리에 대한 일념과 열정을 드디어 인정하게 되었다.

"춘향가 완창할 때도 참 힘들었어요. 전주시청 강당에서 여섯 시간을 발표했어요. 그런데 후반부에 가서 어사출도를 부르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장이 꼬이는 듯하게 아파와. 목도 꽉 막혀버려요. 그래서 배를 부채로 가리고 손으로 문지르면서 했어요. 그렇게 여섯시간 동안 쉬질 않고 소리를 한 거예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의 고통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요. 춘향가 완창을 할 때는 방송국에서 녹음을 넣는 거야. 녹음을 하니까 소리가 내게 안 들어오고 신경이 자꾸만 쓰여서 목이 안 나와요. 목이 마르고 딱 조여져버린 상태였으니까요. 뱃심은 있는데 그래요. 완창을 위해서 매일 같이 서서 연습을 했어요. 앉아서 하면 소리가 안 돼요. 앉아서 소리하면 쉽잖아요. 서서 연습하면 곱절은 더 힘들어요. 그러니까 서서 연습을 해요. 그래도 혼자 공부할 때는 앉아서 연습을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주봉신 선생님을 모시고 완창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서서만 연습을 했어요."


판소리 적벽가는 삼국지연의 소설을 바탕으로, 조조와 유비, 손권과의 전쟁 장면인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완창 판소리 적벽가는 사설 중후반부터 이를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변형했다. 도원결의로 유비, 관우, 장비와 형제가 된 후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는 삼고초려부터 완창 판소리 적벽가는 시작한다.
동초제 적벽가는 김연수-오정숙-성준숙으로 전승되어 온 소리다. 동초 김연수는 소리의 이면뿐 아니라 극적인 면을 강조하여 짜임새가 합리적이고, 장단이 사설과 잘 맞아 떨어지게 구성하였다. 성준숙은 이를 바탕으로 통성을 구사하는 목구성 뿐만 아니라 정확한 가사전달과 박자에 뛰어나 ‘남성적’소리로 인식되는 ‘적벽가’를 소화하는 드문 여성 명창으로 꼽는다.

"적벽가는 오정숙 선생님께 2년 동안 공부를 했어요. 장수 이름을 외우는게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국립극장에서 적벽가로 완창을 하고 나서 1996년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어요. 적벽가는 한 바탕 소리 중에서 무대 소리는 서너군데 밖에 없거든요. 불 지르는 대목, 조자룡 활 쏘는 대목, 새타령, 조조가 패해서 도망 나가는 대목, 군사설움타령은 조금 쉬는 대목이에요. 나는 어디 가서 소리하려면 활 쏘고 불 지르고 새타령으로 가거든. 근데 다른 사람들은 군사설움 타령을 하더라고요. 적벽가도 잘하면 기가 막히게 좋아요. 그런데 버거워서 힘들죠. 특히 활쏘기 대목은 엄청 힘들어요. 그 대목이 8분에서 9분 정도 되는데 그 대목을 하고 나면 힘이 딸려서 주저 앉게 돼요. 적벽가를 제외한 판소리 네 바탕 소리는 아무래도 애원성도 좀 집어넣고 그러는데 적벽가는 매번 싸움하는 장면을 불러야 하니 그럴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음악적으로는 잘 짜져 있어요."

행원에 대한 설명은 여러 안내서에 나와 있기에 내용을 종합하여 소개한다.
전주 풍남문에서 전라감영 사이 골목 깊은 곳, 은행나무가 있는 정원의 뜻을 가진 행원(杏園)이 자리잡고 있다. 행원은 1928년에 ‘식도원(食道院)’이라는 조선요리 전문점으로 건축되었다가 1938년 ‘낙원’(樂園)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요정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1942년 당시 전주국악원이었던 ‘낙원권번’ 건물을 전주의 마지막 권번이자 여류화가인 남전(藍田) 허산옥(1926~1993)이 인수해 문을 열었다. ‘행원’은 전주를 대표하는 요정(料亭)으로 불리웠다. 건물 앞마당에 정원을 둔 우리나라와는 달리 ‘ㄷ’자 형태의 건물 안쪽에 작은 연못과 정원을 갖춘 일본식 한옥으로 설계되어진 것이 특징이다. 행원은 정치인과 기업인, 언론인 등 지역 유지들이 애용하면서 서울의 삼청각처럼 자연스럽게 전주의 대표적인 요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행원은 한편으로 예술가들로 북적였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생계 자체가 어렵거나 피난을 온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 화가, 음악인들을 불러들여 후원하고 창작활동을 북돋았다. 행원은 가난한 음악인들에게 연주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터전이자, 새로운 음악활동을 이끌어 준 장소였다.
1983년 무렵 행원의 주인은 성준숙으로 바뀌면서 한정식 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 성준숙은 전통음악과 춤의 명맥을 잇게 한 한정식집 행원으로 운영하다가 현재는 리모델링 후 ‘한옥카페 행원’으로 재개관한 상태다.

당시 행원을 인수하게 된 사연을 들어보았다.
“맨 처음에는 허산옥 씨가 아니고 그 전에는 집 주인이 장가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다음이 남전 허산옥 선생님이였어요. 그분이 자네는 판소리를 하니까 이집하고 자네하고는 참 적합하네! 그랬어요. 그때가 1980년 초쯤 인가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 집을 6억을 달라는 거에요. 그전부터 남전 선생님이 나에게 “이집은 자네 집이네, 사소! 사소!” 그랬어요. 그런데 집을 두 채를 팔아도 그 집을 못 살 정도로 비쌌어요. 결국 남전 선생은 나에게 팔려 했던 행원을 이런 일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로 넘겼어요. 그런데 그 분이 사서 감당을 못한 상태였어요. 그때 에너지 파동이 있었을 때였는데 빚을 상당히 졌나봐요. 자기도 집을 하나 팔아서 그 집을 샀는데 손님이 없어가지고 그 집(행원)이 은행으로 넘어가 버렸대요. 한 달에 은행에 사백만원씩 이자를 낸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도 행원을 살 정도의 돈은 없어서 형편이 안됐어요. 그래서 그 집을 다시 세무서에서 근무하는 사람한테 팔았더라고요. 본인이 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며 그 사람(세무서직원)한테 팔았는데 어떻게 그 집 이자를 내겠어요? 그래서 이번엔 새 주인인 세무서 직원이 나를 만나자고 해요. “여기는 선생님께 딱 맞는 집이니 선생님께서 사십시오!” 때마침 그때는 내가 조금 여유가 생겨서 내 집 두 채를 팔아 그 집(행원)을 샀어요. 내가 그 집을 사고 나니까 이젠 돈이 없는게지. 공부는 해야겠고, 그래서 장사를 한거에요. 거기서 장사해서 번 돈 가지고 공부를 하는 거예요. 당시에 행원터는 지금보다도 더 컸어요. 지금 주차장 자리가 모두 건물이 있었던 자리였어요. 내가 그 자리는 밀어버리고 마당 겸 주차장으로 쓰려고 변경을 했어요.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으니 그렇게 했어요. 이 곳 행원에서 주봉신 선생님의 북장단에 맞춰 함께 공부한 세월이 자그마치 15년이었어요. 소리공부 하다 말고 정원을 바라보던 주봉신 선생님께선 “또 꽃이 피네. 난 새로운 봄이 슬퍼. 또 이렇게 한 해가 시작되고 세월이 흘러가잖아”라며 이야기 하신 장면이 새록해요”
성준숙은 결국 판소리 다섯바탕 공부가 다 끝나고 나서야 행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렇다면 전주국악원과 행원과의 관계가 궁금하였다.
“권번 시대는 우리 시대가 아니에요. 권번이 해체되고 전주국악원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홍정택 선생님이나 김유앵 선생님 때지. 그 시절에 공부한 선생님들은 김동준 선생님 정미옥 선생님 최난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 권번을 통해서 공부를 했어요. 권번을 하다가 일제 침략전쟁 때문에 권번이 중단되어 버렸잖아요. 우리는 권번을 잘 몰라요. 우리 세대 전에 권번이 있었던거라. 권번에서는 소리뿐만 아니라 춤이나 악기를 두루 두루 배웠어요. 내가 들었던 건 권번에서 배우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 그랬대요. 권번이 없어지면서 이곳 행원에서 요리도 하고 음악과 춤 같은 공연이 곁들인 접대도 있었다고 해요. 당시에 요정이나 단체 같은 곳에서 예술인들이 먹고 살았지. 원래 행원 주인이 화가였던 남전 선생이잖아요. 그 분이 예술 쪽에 관심이 많고 멋도 있고 그래서 국악인들과 문인, 화가들이 모인 거예요.”

성준숙은 행원을 정리한 후 전주와 대전을 오가며 판소리 연구소를 마련하였다. 활발하게 제자를 양성하고 있을 무렵, 불현듯 전주대사습보존회 측으로부터 이사장직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홍성덕 이사장이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성준숙은 대사습대회에서 판소리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소리에 입문했기에 대사습에 대한 남다른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신경쓸 일이 많고 골치 아픈 이사장직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성준숙은 제13대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전통문화 발전과 전주대사습보존회 현안의 사업들을 처리하였다. 특히 전주대사습놀이 복원 40주년때인 2014년은 전주대사습을 현재에 맞게 다시 살릴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시도를 하고, 더불어 전통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천년 고도 전주에서 최고의 명인명창 자리를 놓고 겨루는 국악경연의 장으로 이끌었다. 전주대사습의 틀을 깬 또랑광대경연 부활, 시상의 격을 올리기 위해 상금을 상향 시켰다.
역대 전주대사습보존회 이사장에는 1대 손주항, 2대· 3대· 8대 김판철, 4대 김원술, 5대 송광섭, 7대 한선종, 9대 황병근, 10대 배기봉, 11대 홍성덕, 12대·13 성준숙, 14대 송재영이다.

어린시절 국극단의 동경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그의 판소리 인생은 치열했던 스스로의 의지를 불태워 완성하였다. 이젠 노장의 예인으로, 언제나 그러하듯이 그는 소리꾼의 지조를 잃지 않고 평생 걸어온 판소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동초제 유관순 열사가 중에서
열사가
(아니리)
이조말년 어지러워 왜적이 침입허니 간신이 득세로다. 보호조약 억제터니 억울한 일한합병 뉘 아니 분개허며 매국적 부귀탐욕 일시영화 꿈을 꾸니 조국을 어찌 돌아보랴. 반만년 우리역사 일조에 무너지고 삼천리 분한설음 삼월일일 폭발되니 피 끓는 독립투사 도처마다 일어나서 의를 세워 분투헐제 유관순은 누구든고 십육세 어린처녀 근본을 이를진데
출생과 성장 대목
(평중머리)
충남천안 삼거리에 수양청청 능수버들 우리나라 유망터니 지기상합 다시 푸려 구목천지령이 평화로운 유씨 가문에 관순 처녀 태어나서 일대명천 순국처녀 도움 없이 삼겼으랴. 계룡산세 장헌 기운이 어려 있고 금강수 흐르는 물은 낙화암을 돌고도니 삼천궁녀 후인인지 귀인자태 아름답고 월궁항아 환생허니 뚜렷한 그 얼굴 의열지심이 굳고 굳어 양미간에 어렸더라. 유시부터 출중허여 범사가 다른지라. 부모님께 효도허고 동기간 화목허기 예의염치 기거좌립 뉘랴아니 칭찬허리. 유다른 그 인정은 사랑옵고 따뜻허여 사람마다 정복되고 정대헌 그 마음은 신의가 분명허니 일세영향이 그 아닌가
아우내장터 대목
(아니리)
이렇듯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빌며 탄식허다 불놓아 군호헌 연후 집으로 돌아와 잠한숨 못이루고 밤을 세워 준비헐제
(자진머리)
날이 차아 밝어오니 음력 삼월 첫날이라. 아우내장 네거리에 십육세 어린처녀 무엇을 옆에 끼고 이리저리 갔다 왔다 수천명 군중들 연속허여 모여들고 한편 길 어구에서 태극기 선언서를 조용히 나눠줄 제 어느덧 오정이라 관순이 높이 서서 선언서를 낭독헌다. 선언문이 끝이 나자 수천명 군중들 태극기 높이 들며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천지가 뒤넘는 듯 강산이 뒤끓어서 매봉산이 떠나갈듯 수천명 군중들은 시위행렬 전진헐제 왜놈의 총소리 쾅 김구응이 꺼꾸러지니 군중은 더욱이 열이 북받쳐 네이 무도헌 왜놈들아 총은 너희가 왜 쏘느냐, 저놈들을 죽여라 우루루루루루 달려들어 파견소 문짝을 후다딱 직근직근 때려부시니 왜놈들이 겁을 내여 담 넘어 도망헐제 어데서 자동차소리 우루루루루루루 천안 헌병본부에서 응원대 쫓겨들어 오며 총소리 쾅쾅쾅 종환이 쓰러지고 유중권 내외가 꺼꾸러지니 관순이 눈이 캄캄허여 우루루루 달러들다 칼날이 번듯 관순이마져 쓰러지는구나. 무도헌 일헌병은 연속허여 총을 쏘니 죽엄이 여기저기 수라장이 되었구나.
옥중 투쟁과 순국 대목
(아니리)
이렇듯이 설리울다 분기가 북받치여 옥문을 두다리며 독립만세를 외쳐노니 그때에 독립투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판이라. 이 소리를 듣고 의분에 받쳐 같이 합창으로 독립만세를 불렀겄다. 감옥이 발근 뒤집히여 간수들도 정신을 잃고 어찌 헐줄을 모르다가 간신히 진압을 시킨 후에 선동자를 끌어낼 제
(중머리)
좌우에 일본간수들은 관순을 끌어내고 전옥이하 간수장들은 일제히 늘어앉어 추상같이 호령헌다. 네이년 너는 일국에 백성이 되어 대일본국법을 무시허는가. 무엇이 어쪄. 미친 도적놈들 말 들어라. 당초에 너희놈들이 보호조약을 억제허고 위협적 침략정책 우리나라를 짓밟아 빼앗고도 무슨 면목에 낯을 들어 그런 말을 감히 허느냐. 나는 대한사람으로 너희 법을 부인허노라. 허허 그년 당돌허다. 네가 어찌 당초 근본을 알겠느냐. 너희 나라 당파 있어 보전헐 길이 없었기로 우리 병력을 다허여서 일청일로 전쟁험이 모다 너희를 위함이라. 오 하하하 더욱이 그 일로 말헐진덴 너희놈들 간흉허여 일청일로 전쟁 끝이 나면 독립시켜준다 빙자허고 우리나라를 짓밟아서 도적허자는 근본이니 그건 더욱 흉측허지야. 무엇이 어쪄? 이년 또 들어봐라. 보호조약이 체결됨도 너희 군신이 합의허여 보호를 부탁했고 일한합병을 허잔것도 너희 조정만조백관들이 모다 합의허여 원한바다. 허허 뻔뻔허구나 왜놈들아. 그것은 너희놈들이 우리나라 역적들과 공모허여 너희 맘대로 허였기에 우리 의사 안중근씨는 이등박문을 죽인후에 여순감옥에서 원사허시고 이준 선생은 배를 갈라 만국회의석에 피를 뿌려 세계만국 경탄이요. 우리 동포 흘린 피는 도처마다 물을 들여 천추원한 맺힌 줄을 너희도 응당 알리로다. 간호독사 네놈들이 포악무도를 일삼으니 아니 망허고는 안 되지야. 응 그년 요망허다 당장 말을 못하도록 때려랴. 때리고 달고치고 발로 차고 밟고 물을 퍼씌워도 꼼짝달싹을 안허고 더욱 정신이 씩씩허여지며, 웠다 이 흉포헌 왜놈들아 너희가 나를 짝짝 찢어서 육장을 만들던지 동동히 갈르던지 너희 맘대로 허려니와 가슴 속에 일편단심은 갈라질리 없으리라. 옛말에 이르기를 적국지수는 아국지수요 아국지수는 적국지수라. 나를 너희가 죽이는 것은 너희놈들의 목적이요 나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나의 의무라 헐 것이니 당장에 목을 잘르렴으마. 에 그년 천하에 독헌년이로다. 화덕에 불을 활활 부쳐 쇠꼬치에다 불을 달궈 허벅지 살을 푹푹 찌르니 기름이 끓고 살이 타져도 꼼짝 달싹을 안허고 여전히 포악을 허는구나. 에 그년 단번에 쳐죽여라. 칼로 찌르고 살을 점점히 헛쳐노니 아깝구나 우리 처녀 악형을 못이기여 죽어가면서도 무엇이라 입만 딸싹딸싹 천추원한 품에 안고 아주 깜빡 숨이지는구나. 피는 흘러 땅에 가득차고 살은 점점이 흩어졌네. 장허구나 순국 처녀 몸은 육장이 되었으나 의열만은 살아 있어 깨끗헌 그 영혼은 만리창공에 높이 떴네. 창천도 느끼는 듯 일광도 빛이 없고 날아가는 새 짐승도 충혼을 슬퍼허여 허공중천에 떠서 운다.
주요 약력
1960년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졸업
1976년 이일주 선생 문하생 심청가 사사
1978년 오정숙 선생 문하생 판소리 사사
1980년 남원 전국명창대회 준우수상 수상
1984년 법우사 산공부
1984년 정주시 전국명창대회 준우수상 수상
1985년 심청가 완창발표회, 서울 국립극장
1985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 최우수상 수상
1986년 춘향가 완창발표회, 전주시청 강당
1986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1987년 흥부가 완창발표회, 서울문예진흥원 대강당
1989년 수궁가 완창발표회, 서울 국립극장
1991년 정읍 고내장 산공부
1992년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1994년 흥부가 완창 공연, 대전시민회관 소강당
1994년 적벽가 완창발표회, 서울국립극장
1996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2-10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1998년 국악협회 전북지회장
2000년 적벽가 발표회, 국립민속국악원
2000년 대전시민위안 창극마당 춘향전(월매역)
대전전통예술단 부이사장
2006년 유관순 열사가 발표회, 대전연정국악문화회관
2008년 우리 소리 어울 한마당, 순천문화예술회관 대강당
2012년 대전연정국악원 제134회 정기연주회 객원 출연
대전문화예술의 전당(춘향가 중 과거 시험 보는 대목)
2014년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회장 취임
2020년 완창판소리(성준숙의 동초제적벽가), 서울 국립극장
2021년 유관순 열사가 완창, 행원
2022년 완창판소리(성준숙의 동초제적벽가), 서울 국립극장
2022년 신광대가(동초제판소리 다섯바탕), 정읍 연지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