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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한국의 산하를 그리는, 길 위에 선 화가, 천칠봉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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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하를 그리는, 길 위에 선 화가, 천칠봉
  • 2024-06-28 10:55
  • 조회 411

본문 내용



 

 

 

 

 

 

 

 

 

 

 

 

 

 


한국의 산하를 그리는, 길 위에 선 화가 천칠봉



​문리 미술평론가


1920년, 일제강점기 한복판에 태어나 붓을 허리에 차고 평생을 살아간 화가. 전주 완산칠봉이 보이는 고사동에서 천대갑 (千大甲)과 이성녀(李性女)의 2남 3녀 중 장남. 그래서 이름도 천칠봉(千七峰, 1920~1984). 천생 전주에 뿌리를 둔 화가다. 후손과 후학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래 잘하고, 음주와 가무에도 능하고, 훤칠한 키에다가 호방한 성격과 지도력, 지극히 사교적 성격을 가진 팔방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타고난 미술적 재능과 뜨거운 열정으로 불혹의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뒤로하고 전업 화가로 길 위에 선 남자. 유화로 그린 풍경화를 거의 100% 현장에서 완성해 내는 우직한 뚝심까지 겸비했다. 그 힘으로 다루기 버거운 녹색을 부여잡고 힘겨운 승부를 펼친 풍경 화가다.



장남이자 식구가 많은 가장으로서 자신의 말대로 ‘생계형 예술가’였던 천칠봉. 전업 미술가 길을 스스로 걸었던 그의 활동 무대는 국전과 목우회였다. 동광미술연구소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김영창이 박득순(1910~1990)⑴의 권유로 서울 수유리 박득순 집 맞은편에 이주했던 때가 1956년경이다. 몇 년 후 1960년경, 천칠봉도 수유리에 정착한다. 그 당시 국전과 목우회에서 강한 영향력이 있었던 박득순이 김영창과 천칠봉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으로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목우회 사무국장을 지내는 등 정규 미술대학을 거치지 않고 지방에서 올라온 화가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해 낸 예술가이다.



천칠봉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국전(國展)’ 작가, 구상 계열 화가 모임인 목우회(木友會) 작가다. 돌이켜 보면, 천칠봉 화업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했다. 1949년, 천칠봉 나이 30세일 때 시작한 국전은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81년에 막을 내린다. 국전에서 천칠봉은 1961년 <고궁>으로 처음 입선한 후 1969년까지 9년 동안 해마다 입·특선하고 1981년까지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로 초청되었으며, 1977년에는 심사위원을 했다. 또한,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말까지 국책(國責)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민족기록화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천칠봉은 정물화도 많이 그렸다. 복숭아 먹는 걸 좋아했고, 많이 그리기도 했다. 모란, 장미 그리고 포플러를 즐겨 그렸는데, 포플러는 강천사 가는 길에 선 것을 즐겼다.
본 논고에서는 천칠봉의 미술적 터를 다진 전주의 동광미술연구소, 1950년대 서울로 거처를 옮겨 활동했던 시기, 1970년대 화가로서 명성과 재정적 기반을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생했던 시기를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동광미술연구소

“1925년, 모리린페이(森麟平)가 전주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했고, 1937년 전주사범학교가 세워지면서 일본인 미술교사로 동경미술학교 출신인 우라자와히로시(卜澤廣), 이토마사아키(伊藤正明)가 있었다. 이들에게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순재, 김영창, 오지호, 유경채, 고화흠, 김해, 정석용, 이경훈, 정용식, 문윤모, 권영술, 한소희, 김현철, 추교영, 김용봉, 서정조, 윤후근”⑵ 등이다. 일본이라는 제한된 통로로 미술을 접하고 유화 작업을 했기에, 다양한 실험적 작품보다는 당시 신미술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돋보였다. 
1940년경, 동광미술연구소(東光美術硏究所)는 수강료를 받지 않는 사설 미술교육기관 역할을 했다. 연구소를 개설한 박병수(1914~1973)는 임실 출신으로 많은 농토를 가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임실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쳤으며, 1931년 일본으로 유학해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대학을 마치고, ‘스즈끼치구마(鈴木千久馬) 회화 연구소’에서 근대 미술교육에 자극받아 그와 비슷한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박병수는 그림보다는 민족해방운동에 열을 올렸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전주지부장을 했고, 1948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남조선 대표로 참여하기 위해 월북하는 등 현장 정치 활동에 집중했다. 그래서 동광 미술연구소는 전북 최초로 일본 유학을 경험한 청람 이순재(1094~1958),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금릉·김영창(1910~1988)이 깊게 참여했다.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았던 이순재는 생활고에 붓을 꺾고, 술을 벗 삼았다. 해방 후 그는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적이 없고, 작품도 전해지지 않는다.
동광미술연구소는 고사동에 있었다. 연구소는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높은 지붕을 올려 지붕에서 자연 채광이 내리고, 북쪽 유리창을 크게 내어 많은 빛을 받을 수 있었으며, 구조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해서 전국적으로도 가장 크고 세련된 공간이었다. 이곳은 해방과 함께 시작된 전북현대미술운동의 산실이자 중심이었다. 미술의 흐름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장소에 너무 많은 의미와 맥락을 주입하는 건 무리가 있지만, 그 시기에 신미술을 감행했던 젊은 세대의 열정과 활동이 주목을 받았고, 그 시작과 중심에 동광미술연구소가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일본 유학을 한 선배들에게 그림을 배운 국내 화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천칠봉. 그는 동광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의 기초를 다지고 성장해서 일가를 이룬 서양화가이다. 연구소 문하에서 이의주(1926~2002), 천칠봉(1920~1984), 이준성, 허은, 하반영(1922~2015), 배형식(1926~2002), 소병호(1931~1988) 등의 화가를 배출했다.
1945년 10월, 제1회 동광미술전람회가 해성성심소학교(現 전주성심여자중학교)에서 열린다. 이는 전북 신미술 태동으로 지역 미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 당시 서울 지역 화단은 혼란이 극심했다. 해방 후, 강대국 패권으로 민족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토가 분단되면서 미술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가득했다. 따라서 미술 단체는 결성 단계에서부터 정치집단과 연계함으로써 미술은 정치적 선택 단위였다. 하지만 전주에서는 1946년 자연주의적 미감을 탐구하는 녹광회(錄光會)를 결성해서 김영창, 허병, 이의주, 천칠봉, 김용봉이 참여했다. 그러나 녹광회는 창립전을 마친 두 달 뒤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별다른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1954년 6월, 동경제국미술학교 출신 이경훈(1921~1987)을 중심으로 신상회를 결성한다. 서양화의 질적 향상과 지역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결성한 신상회에 이경훈, 권영술, 김용봉, 김현철, 김용구, 문윤모 (1919~1980), 소병호, 이복수(1922~2004), 이병하, 천칠봉, 한소희, 박두수가 참여했다. 신상회는 전북 지역에 서양화가 뿌리를 내린 시점으로 큰 의미가 있다. 전북은 지금까지도 자연주의적 미감을 추구하는 구상양식 회화를 구사하는 미술인 수가 압도적이다.
전라도(全羅道)는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호남의 큰 고을이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 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전주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을’이라면,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의 고을’이다. 고려 현종은 거란과 전쟁이 한창일 때 곡창지대에서 효율적인 군량 확보를 원했고, 지방 호족들이 날뛰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행정조직을 일사불란한 전시체제로 바꿔야 했다. 더불어, 전주는 후백제 정서와 견훤 세력이 그때까지 강하게 남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해서 전쟁 수행과 왕권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현종은 거란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왕건의 ‘훈요십조’ 중 제8훈을 강조한다. ‘금강 이남의 산형 지세는 배역한 형세이니, 인심도 그러할 것이므로 그쪽 사람을 중용하지 말라’고 한 거다. 이는 과거 후백제 수도였고, 당시 공공연하게 반란 기운이 짙었던 전주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현종은 단호하게 조치(措置)했고, 그가 내세웠던 명분이 ‘훈요십조’였다. 한편, 이성계 이후 조선 임금들도 전주에 신경은 쓰되 관심은 두지 않았다. 그들의 발상지인데도 직접 들른 임금이 한 명도 없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정치권의 호남배제론과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전라도에는 아름다운 산, 끝없이 펼쳐진 곡창지대, 드넓은 남·서해안 갯벌이 있다. 이것들이 주는 풍요로움은 축복인 동시에 침략과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라인은 가혹한 역사의 부침 속에서 강인한 끈기로 이 땅을 지켜냈다. 중앙 권력에는 무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꿋꿋하게 살아온 거다. 전라도는 천년의 역사 속에서 항상 변두리였다. 중앙 권력에 무심할 수밖에 없었고, 묵묵히 지켜보고 가슴속으로 삭이면서 은근하고 ‘아그똥한’ 기질로 관조하는 걸 본의 아니게 체득했을 거다.

비원에 머물다

‘비원파’로 불리는 서양화가 손응성(1916~1979), 천칠봉(1920~1984), 변시지(1926~2013), 1960~1970년대, 궁의 정원을 소재로 한 풍경화를 주로 그린 화가들이다. 도심 속 한가운데 일상 풍경과는 다른 유적, 그 안에 스민 역사적 향기가 화가의 심상을 자극한 곳이다. 또한, 그것을 소재로 그리면 미술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1920년대 근대미술 형성기에 <조선미전> 서양화 출품작 중에 풍경화가 차지하는 비율이 50%가 넘었다. 1948년부터 시작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도 궁원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아주 많다. 이는 근대 일본 서양화단의 흐름과 비슷하며 조선에 거주한 일본 화가들의 성향과 식민정치의 기제가 서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궁 건축물과 풍경이 한국을 대표하는 시각적 이미지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게 일제강점기부터다. 조선총독부 관리, 일본인 상인들은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 평양 대동문, 경복궁 근정전·경회루·향원정, 창덕궁 부용정 등을 사진엽서로 대량 제작해서 잡지 등을 통해 조선 명소로 널리 홍보했다.



그 당시 수많은 화가가 비원을 사생했지만, 유독 이들만을 비원파라 부르는 건 다른 이들에 비해 이곳에 더 많이, 진심으로 머물면서 예지를 불살랐기에 당사자가 아닌 타자에 의해 불린 것으로 추정한다. 당사자들의 특별한 조형 이념이나 선언 내지는 조형 운동을 제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손응성(1916~1979)은 강원도에서 태어나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유학했다. 해방 전에 <선전>에서 특선을 받으면서 주목받았고, 1958년 6월에는 <목우회>⑶ 창립전에 참여했다. 한참 동안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홍익대학에도 출강했다. 변시지(1926~2013)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나 해방 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 광풍회 등에 출품해서 대상을 받았고, 1950년대 후반에 귀국해서 화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의 출생이나 성장 배경을 톺아봐도 특별한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걸 고려할 때, 자연주의적 미감과 현장을 중시하는 화가로서 열정만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거다. 한편, 천칠봉은 고향 전주에서 많은 풍경화를 그렸지만, 송응성과 변시지는 인물과 정물을 주로 그렸고, 굵직한 수상 작품도 인물화이다. 하지만, 천칠봉은 온통 풍경에 몰입해서 질박해 보일 정도의 기교로 순박한 정취를 담아냈다. 약간은 헐렁하고 느슨하게 화면을 구성하고 묘사해서 대상들 사이로 공기가 감돌게 했다. 그래서 관자가 더 편안하게 작품 앞에 설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
천칠봉은 국전 출품작처럼 대작이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만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했고, 대체로 현장에서 작업을 마무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원하는 풍광을 찾을 때까지 수많은 화구를 짊어지고 움직여야만 하는 현장 사생 작업에서는 응당 육체 힘을 써야 한다. 여러 날 작업을 해야 하니 사찰이나 산촌 민가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우이동 북한산이나 도봉산은 자주 찾아가 그림을 그리는 곳이라 아예 그곳에 초가를 빌려 도구와 재료들을 두면서 숙식을 해결하는 방책을 찾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에 따르면, “우리 고유의 기물을 치밀한 묘사로 다루면서 우리 고유한 정서의 구현을 이루어 간 점에서 송응성은 비원을 통해 더욱 내밀한 방법을 이룩해 갔다고 할 수 있으며, 천칠봉은 비원의 자연이 우리 자연의 모태로서의 원형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터득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시지는 비원의 자연을 통해 우리 자연의 마음을 자신 속에 육화하면서 독자적인 화풍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들에게 비원은 단순한 묘사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고유한 정성의 세계로 안내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을 사생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동호인들을 지칭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자연 속에서 우리의 정신 근원에 접근해 가려고 했다는 점이야말로 비원파가 비로소 우리 미술에 하나의 의미를 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천칠봉은 1963년 <비원⑷의 승재정>⑸으로 사실주의 구상 계열의 화가 모임인 목우회가 주최하는 《제1회 공모전》에서 ‘합동통신사장상’(2등 상)을 받는다. 이후 목우회의 회원으로 추대되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그는 60년대부터 비원에 매일같이 출근(?)하며 비원의 여러 곳을 그렸다. 승재정은 창덕궁 후원의 애련정을 지나 두 개의 연못과 정자가 있는 존덕정 근처 정자다. 천칠봉은 특히 존덕정 영역을 즐겨 그렸는데, 관람정과 존덕정, 승재정을 주로 그렸다. 제1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작인 <비원>이 존덕정 근처를 그린 것이다. 천칠봉에게 고궁은 단순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 자연의 반영으로 한국 감각의 원형을 탐구하려 한 제재였다. 고궁에 가지 않는 날이면 서울 근교로 자주 나갔다. 주로 북한산과 도봉산을 찾았고, 겨울에는 북한산 아랫마을 수유리를 즐겨 그렸다. 그는 판매를 위해 비원의 승재정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했고, 아래 작품도 그중 하나다.



한편으로, 1960년대에 천칠봉은 호수 풍경을 소재로 한 <임간(林間)의 못>, <애련정>, <반도지> 등을 제작하면서, 호반 풍경을 탐구했다. 천칠봉은 1953년 <덕진의 못>이라는 작품을 그려 《전북유화가합동미술전람회》(1953)에 출품했다. 1970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매해 초대작가가 되면서 선정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1969년대 말을 경계로 서울 인근뿐만 아니라 전국의 산야를 두루두루 다니며 전국 자연 풍광을 그리기 시작한다. 《제2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북한산(비봉)>은 전주에서 즐겨 그렸던 ‘山길’⑹ 소재를 북한산으로 연장한 것이다. <북한산(비봉)>은 한여름 마른 더위의 공기를 담고 있다. 더 위를 피해 관람자가 산길을 따라 녹음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그는 “수구초심(首丘初心) 이라고, 고향을 떠나 살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이 더욱 그리워진다. 나는 지금도 작업이 잘 안되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면 만사 제쳐놓고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고향 전주는 아직도 옛것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좋다. 고향에 내려가면 나는 또 인근 시골로 나간다. 스케치도 하고 흙냄새도 맡기 위해서다. 뒤로 모악산을 지고 있는 고향 시골 풍경은 항상 즐겨 그리는 풍경의 하나다.”⑺라고 말했다.
1970년대, 천칠봉은 전업 화가로서 화단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자리를 잡으면서 고궁을 벗어나 더 자유롭게 자연 풍광을 탐구한다. 서울 북한산, 도봉산, 광릉 등. 분주하고 버거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고향을 찾아 모악산을 비롯해 전라의 산천을 찾아 나선 거다. 여기에 더해, 경상남도 해인사, 부산, 제주도, 강원도 오대산, 설악산, 한탄강 등 전국의 명산과 절경을 찾아 품에 안았다. 이들 작품에서 천칠봉은 실제 풍경과 상상 풍경을 오가며 한국적 정취를 탐구하고 있다. 자연 풍경에의 천착은 비원 사생에서 추구한 한국의 원형 감각을 탐구했던 것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천칠봉의 풍경화는 초목, 돌, 물, 계절 같은 자연의 기초 요소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인간의 발길이 드문 장소의 정적인 공기와 동적인 물의 조화는 고궁 시리즈 이후 천칠봉이 탐구한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인적이 드문 고요한 장소의 정적인 공기와 동적인 물의 조화는 고궁을 벗어나 그가 탐구한 중요한 주제였다. 현장 사생을 중시한 그의 작업은 빛이 강하고 선명하다. 전체적으로 묵직하게 녹음이 짙을지라도 화면의 한쪽은 강한 빛을 받아내는 양지가 존재한다. 이는 현장의 공기와 감동을 화면에 반드시 묶어 두고자 하는 그의 우직한 조형적 문법이다. 세부적 묘사에 매이기보다는 다소 거친 붓질로 호연지기와 여유로움을 담아 넉넉함이 감돈다.
미술사학자 김현숙은 “1975년 24회 국전 출품작 <한탄강>과 1977년 26회 국전 출품작 <한탄강 계류>는 봄과 여름이라는 다른 시간대에 동일 풍경이 동일 시점으로 포착되었다. 굽이치는 강줄기, 수석과 물거품,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 멀리 삼각형의 주산으로 구성된 한탄강 풍경은 산단 구성의 전형성에 변형이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수직으로 내리지른 절벽 형상으로 강력한 중심성과 균형미를 확보했다. 주상절리 암벽의 형질과 풍광의 이색미, 시원한 공간감과 균형감이 조화를 이룬 천칠봉의 한탄강 풍경화는 한국의 풍경화 중에서 탁월한 수작으로 평가할 만하다.”라고 기술했다.
천칠봉은 사생을 나가지 않는 날에는 정물을 그렸다. 꽃으로는 목단과 장미, 가끔은 목련을 그렸고, 과일은 토기에 담긴 포도, 감, 사과, 석류, 참외를 그렸다. 천칠봉이 공식적으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첫 정물은 1953년 작 <석류>다. 하지만 그가 석류보다도 화폭에 많이 담았던 건 복숭아다. 복숭아를 좋아했던 그는 복숭아를 즐겨 그렸고, 잘 그렸다.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천칠봉은 복숭아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종을 즐겼다 한다. 1967년에 그린 <수밀도(水密桃)>가 첫 작품이다. ‘수밀도’는 중국 우시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데, 문자 그대로 과즙이 풍부하고 꿀처럼 단 과일인 복숭아를 ‘수밀도’라 부른다. 정물로 놓인 복숭아는 작품이 끝나기 전까지 가족 중 누구도 손댈 수 없었고, 정물화 작업을 마치고 사생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이 가져가 먹었다고 한다.​



나가며

천칠봉의 나이 30세일 때 시작한 국전은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81년에 막을 내린다. 국전에서 천칠봉은 1961년 <고궁>으로 처음 입선한 후 1969년까지 9년 동안 해마다 입·특선하고 1981년까지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로 초청되었으며, 1977년에는 심사위원을 했다.
1980년대, 한국미술은 단선적인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색채 회복, 서사성 부활, 사회적 발언, 포스트 모던 등 탈형식, 탈논리, 탈경계로 점철한 시대였다. 전북미술은 한국미술의 흐름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도 독자적인 미감을 구현했다. 후기인상주의적인 구상 계열, 서정성 짙은 반구상 계열, 실험성을 모색하는 추상 계열, 참여미술 등을 다양하게 탐색했다. 또한, 전문 미술교육을 받은 미술가들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으로 전북화단의 구조 자체에 변혁이 일었다. 이들은 고답적인 미술에 저항하고, 도전하고, 다른 지역과 교류·연대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렇게 도도하게 흐른 미술사적 맥락에서 비켜날 수밖에 없었던 천칠봉. 현란한 동시대 미술 안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생계형 예술가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 그의 내밀한 열정과 도전, 예술적 지향점과 가치를 제대로 발견해서 합당한 좌표를 설정해야 하는데, 후학으로서 어깨가 무겁다. 이제부터라도 타자에 의한, 혹은 타자로서의 예술가가 아니라 내밀한 자기 언어에 집중하며 지평을 넓혀가는 진정한 발걸음들을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



(1) 본관은 영해(寧海), 호는 소성(素城)·소리(素里).함경남도 문천 출신.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에 열중해서 1934년 일본 도쿄[東京]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193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다가 다음 해 서울로 가서 당시 경성부(京城府) 도시계획과에 근무하며 그림을 담당했다. 1941~194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소녀상 주제의 작품으로 입선을 거듭했다. 1942년의 <소녀 좌상>은 특선을 받았다. 1955~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58년 목우회(木友會) 창립 회원, 1974년 한국신미술회 창립 회원 및 회장, 1961~1965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1966년 상명여자사범대학 교수, 1972~1976년 영남대학교 교수 및 예술학부장, 1978~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2) 이창규, '전북 서양화의 전개-태동에서 70년대까지', 미술세계 9월호, p.171, 1999

(3) 덕수궁 고목 아래에서 이종우(李鍾禹), 도상봉(都相鳳), 손응성(孫應星), 이종무(李種武), 이병규(李昞圭) 등 사실주의 화가들이 주축이 되어 ‘우리의 미술은 아카데미즘의 토대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면서 창립한 미술 동호회이다.​

(4)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인 창덕궁 정원이다.

(5) 1960년대, 천칠봉은 직장인이 매일 출근을 하듯 비원을 찾아 그림을 그렸다. 승재(勝在)는 '빼어난 경치가 있다'는 뜻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승재정은 경치가 일품이다.

(6) 1952년 천칠봉은 전주미국공보원에서 주최한《전라북도미술전람회》에 <山길>을 출품했고, 1954년 《신상미술회 창립전》 
에 <山길>(12호)을 출품하여, ‘산길’은 그의 ‘전매특허’라는 평을 듣는다.

(7) 신동아 1981년 6월호.

참고문헌

『전주 미술사 연구 및 편찬』, 전주시, 2021
<천칠봉, 풍경에 스미다>, 전북도립미술관, 2021
<전북미술 모더니티 역사전>, 전북도립미술관, 2016 
문리, 『현대미술, 개판 오 분 전』, 출판하우스 짓다, 2020 
『전북미술근대사』, 한국미술협회 전라북도지회, 1997​

천칠봉 연보

 

19201215일 전북 전주 고사동 173번지에서 출생

천대갑(千大甲)과 이성녀(李性女)23녀 중 장남

1935-1940년 전주고등보통학교(전주북중학교)에서 수학

1940년 만주(滿洲) 여행

동광미술연구소(東光美術硏究所)에서 수학

금릉 김영창(1910-1988)을 은사로 모심

194510월 동광미술연구소 주최 1회 동광미술전람회(해성성심소학교(전주성심여중), 전주)

1946-1955년 전주지방전매청 총무국 주사(主事) 근무

195041회 녹광회(錄光會) 미전(장소 미상, 전주)

19526월 전주미국공보원 주최 전라북도 미술전람회(전주미국공보원, 전주)

1953101회 개인전 천칠봉 양화 개인전(전주미국문화관, 전주)

19546신상미술회(新象美術會) 창립전(전주미국문화관, 전주)

19559, 2회 개인전 천칠봉 양화 개인전(전라북도 공보관, 전주)

195655회 신상미술전(전라북도 공보관, 전주)

195943회 개인전 천칠봉 양화 개인전(전라북도 공보관, 전주)

1960년 서울 상경(미아2632-128)

94회 개인전 천칠봉 양화 개인전(중앙공보관, 서울)

19611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고궁(古宮)> 첫 입선

196211회 국전에서 <고궁> 입선

196312회 국전에서 <어수문(魚水門)> 입선

61회 목우회 공모전에서 <비원의 승재정> 합동통신사장상 수상(수도화랑, 서울)

196413회 국전에서 <주합루(宙合樓)> 입선

목우회 신입 회원

196514회 국전에서 <부엌> 입선

일요화가회’(서울) 창립 회원, 지도교수 활동

196615회 국전에서 <비원(祕苑)> 첫 특선

196716회 국전에서 <녹음(綠陰)> 특선

민족기록화 <국립묘지>(500) 제작

115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전(신문회관() 한국프레스센터, 서울)

196817회 국전에서 <호반(湖畔)> 특선

196918회 국전에서 <궁정> 특선 / 국전 추천작가

197019호 국전추천작가 부문 <해인 계곡>

46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 개인전(신문회관, 서울)

197167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 개인전(반도화랑, 서울 반도호텔)

197221회 국전추천작가 부문(도봉산록)

1973년 민족기록화 ‘1차 경제편부문 <경지정리>(300) 제작

38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 개인전(신문회관, 서울)

1974년 민족기록화 ‘2차 경제편부문 <대단위 뽕밭>(300) 제작

6회 전라북도미술전람회심사위원

197539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전(미술회관, 서울)

12월 전북미술회관건립추진위원회 주최 한국원로중진작가미술전(국립공보관, 서울)

19761110회 개인전 천칠봉 도불(度佛)유화초대전(()화랑, 서울)

1977911회 개인전/귀국 특별전 천칠봉 도불유화초대전(변화랑, 서울)

1978312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 개인전(화랑다실, 광주)

1013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전(미술회관, 서울)

1979년 남원 만인의총 <만인의사 기록화>(300) 2점 제작

314회 개인전 천칠봉 유화전(국제화랑, 부산)

198012회 전라북도미술전람회초대작가

1981315회 개인전 천칠봉 회갑기념 유화전(덕수미술관, 서울)

198214회 전라북도미술전람회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1983116회 개인전천칠봉 초대전(전북예술회관, 전주)

1984375:30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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