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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현대무용의 대중화에 앞장선 무용가, 김화숙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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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무용의 대중화에 앞장선 무용가, 김화숙
  • 2024-07-01 14:23
  • 조회 736

본문 내용



 


 

 

 

 

 

 

 

 

 

 

현대무용의 대중화에 앞장선 무용가, 김화숙

- 한국 현대무용 정착과 사회적 위상 제고에 기여하다

 

 

 

윤대성 월간「댄스포럼」편집장




“이제야 무용 작품이 공연되는 ‘바로 그 순간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을 접는다. 

영원은 순간이고 순간은 영원이라는 이 단호한 명제.”


- 김화숙, 2010



김화숙은 “영원은 순간이고 순간은 영원”이라는 역설을 전주에서 한 무대를 꾸미면서 깨달았다고 말한다. 춤은 음악의 악보, 연극의 희곡처럼 영구히 보전되는 것과는 속성이 다른 참으로 독특한 예술. 추어지는 즉시 사라지며, 그럼에도 순간을 영원처럼 불태우는 생명력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그날 김화숙의 깨달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전에, 춤에 대한 이끌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전주에서의 새로운 개안처럼 찰나를 살면서 영원을 희구하는 인생과 무던히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50년 넘게 서정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온 김화숙은,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 한참 전부터 우리 현대무용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특유의 문장력으로 문필가로서도 인정을 받아 월간 ‘춤’에 에세이를 연재하는 등 ‘글 쓰는 무용가’로 수많은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춤 지성화’와 사회적 위상 제고에 기여했다. 아울러, 무용의 저변 확대를 위한 무용교육혁신위원회를 결성해 무용의 대사회적 뿌리내리기 캠페인을 해왔다.

예술 인생의 전반부엔 서울, 후반부엔 전주와 익산을 비롯한 전라북도에 거점을 두어 온 그의 인생을 돌아본다. 무용가, 안무가 겸 교육자로서 춤에 인생을 바치면서, 무려 93편의 작품을 발표해 왔다.

 

 

1. 현대무용의 길에 들어서기까지(1949~1970)


김화숙은 1949년 12월 2일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나 유치원은 군산에서, 그리고 광주광역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쓰러지기 일쑤였던 그는 여수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아버지에게로 요양을 가야 할 만큼 체질이 허약하였다 한다. 초등학교 졸업을 두 달 남긴 시점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를 타지에서 보내야 했지만, 어린 시절 자연과의 교감과 함께 당시 보았던 여수 선창가에서의 서커스단 공연과 여성 국극단 공연은 이후 그의 창작에 영향을 미친다. 이후 광주로 돌아와 광주여자중학교 무용반 활동을 하였으나 전문적인 수업을 받기 시작한 건 광주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다. 당시 광주여고에는 ‘광주 무용계 대모’로 불리다 사후 옥관문화훈장(2021)을 수훈한 고 엄영자가 있었다. 엄영자의 전공은 발레. 김화숙은 하교를 위해 강당을 지나가다 몸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타이즈를 입고 바 운동을 하는 선배들 모습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 타이즈 차림의 발레는 충격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빨려 들어갔다는 그는, 이를 “운명적인 만남”으로 회고한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얼른 자리를 떠날 법도 한데, 나는 한없이 빨려 들어갔어요. 

그 생소한 차림의 선배들의 몸짓에서 한참 눈을 뗄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건 말하자면, 운명적인 순간이었어요.”



광주여고 무용반에 들어간 뒤 한 달은 매일 코피가 났다. 두 달째엔 이틀 걸러 한 번, 이후엔 일주일에 한 번, 1학년을 마칠 즈음엔 피를 보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김화숙은 이를 “훈련을 이겨내는 힘”이 생겼다고 표현한다.

엄영자가 요구하는 훈련의 강도는 “햇빛을 볼 수도 없는” 정도였다. 새벽같이 등교해서 밤 11시가 되기 전에는 집에 가는 경우가 드물었고, 소풍날은 반(半)공식적인 무용반 연습 때문에 학교에 머무는 것이 당연했다. 콩쿠르 때면 최소 두 달 합숙이 당연지사. 광주여고 무용반에서 3년의 연습량이 통상의 10년 치와 맞먹는다는 것은 대학에 가서야 깨달았다. 덕분에 고등학교 재학 동안 무용반은 이화여대 무용 콩쿠르에서 3년 종합우승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화여자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박외선, 육완순에게 현대무용을 사사했다. 입학 당시 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기에 입학시험은 창작 발레로 보고, 후에는 현대무용을 택한다. 현대무용의 자유로움에 희열을 느낀 김화숙은 대학교 1학년 시절 박외선 교수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발레를 할 땐 단점이었던 긴 발이 현대무용을 하자 선이 더 길어 보이는 무기가 된다.

 

박외선은 일본에서 발레·현대무용을 배운 뒤 국내 최초 대학(이화여대) 무용과 신설에 기여한 인물이다. 창작성이 뛰어난 만큼 현대무용 초보자에게는 수준이 높고, 매시간 수업 내용이 달라지곤 해서, 기초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육완순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한다. 육완순은 공연이 있으면 새벽 5시부터 연습을 시킬 정도로 훈련을 중시하는 스승이었다. 당시 평론가들이 “그렇게 연습만 해서야 되겠느냐!”라고 할 정도로 이화여대 현대무용 팀에겐 연습이 일상이었다. 김화숙의 대학 시절은 연습 아니면 음악이었다. 틈날 때마다 명동의 ‘크로이첼’이라는 음악감상실을 찾아 음악적 자양분을 쌓는다. 대학교 1학년 땐 유행하는 팝송을 주로 들으며, 이후엔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클래식 음악에 빠져 들어간다. 그는 선율에서 연상되는 춤의 잔상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흘러나오는 이 음악에 맞출 안무에 대한 구상까지도 수년을 구체화해 나간다.


2. 춤의 르네상스 그 중심에서 :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으로 20년(1971-1991)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은 대학 ‘졸업’이라는 해금과 함께 쏟아져 나온 창작 의지의 실체였다. 대학교 2학년 때 휴학하고 돌아온 김복희를 만나고, 마음이 맞는 그와는 이듬해부터 공동 안무를 시작한다. 재학시절부터 동반자로서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것. 재학 중 두 사람은 ‘귀로’(1969), ‘어느 날 오후에’(1970), ‘탑’(1970) 세 작품을 선보인다. 이 중 ‘탑’은 이화여대 무용과 지방 공연에 오를 레퍼토리로 선정되기도 한다. 김복희·김화숙 듀오의 대학 시절 ‘베타 테스트’가 만족스럽게 이루어진 셈이다.
두 사람 이름을 건 창단 공연은 졸업 직후인 1971년이 된다. 김화숙은 조교로, 김복희는 대학원에 들어간 학생으로서 스승 육완순의 곁에 남았을 때이다. 주변에선 너무 이르다고 만류했으나 당장 개인 발표회를 열겠다는 그들의 당돌함은 추진력을 겸비한 것이어서, 주위의 몇 마디 충고로 멈출 수가 없었다. 만들어둔 작품을 하루빨리 세상에 내놓고 싶은 마음에, 스승의 발표회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명동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을 불과 한 달 차이로 대관하여 ‘김복희 김화숙 현대무용 발표회’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1971년, 스물두 살의 김화숙은 첫 현대무용 발표회 공연 프로그램 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약동하고 있는 젊음이 무언가 영원을 향해 줄달음치고 싶은 심정에서……”

- 김화숙, 2010, 재인용


그리고 2023년, 일흔네 살의 김화숙은 “영원을 향해 줄달음치고” 싶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돌이켜보면 발표회를 열겠다며 대학 갓 졸업생이 예술의전당을 빌린 것과 다름없었지요. 
오로지 창작 의욕에 불타 공연을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선생님들께선 적당히 좀 하라며 말리셨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격려가 따라올 줄 알았던 그때는 저지하는 손길들이 섭섭하기도 했지요. 
지금은 선생님들의 그 마음이 백번 이해되지만요.(웃음) 그저 젊음이 좋았지요. 
무용계 자체가 열악하고 현대무용은 초창기였지만, 둘이었기에 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발표회는 6편의 소품(작은 작품)과 1편의 야심작으로 이루어진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순서였던 30분 길이의 ‘법열의 시’(1971). 현대무용은 ‘서양의 것’이란 인식이 강했던 시기에 불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 것’을 담아냈다. 대학 졸업 작품에 선보였던 ‘탑’은 바로 ‘법열의 시’ 마지막 장으로 들어간다. 
아울러, 김화숙은 내용뿐 아니라 음악에 있어서도 우리의 것을 접목하려 한다. 알렉산더 스크랴빈의 동명의 곡을 비롯해 절에서 들을 수 있는 종소리, 염불소리, 단소 연주를 함께 사용하는데, 이 음악 계획서를 본 방송국 관계자가 “웬 수학 문제를 가져왔느냐”고 할 정도로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이처럼 그는 서양의 춤과 정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김화숙’이란 렌즈로 토착화하여 ‘한국적 현대무용’의 지평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평론가 이병임은 그의 첫 발표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금년도 후반기 무용계를 흐뭇하게 해준 의의 있는 무대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관념적이고 도식적인 기성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물고 나온 이들의 생명적인 시도가 그 나름대로 ‘한국 현대무용의 전진’을 뜻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집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들의 공연에서 신인 하나하나의 기교와 빛나는 어떤 순간의 재치까지도 평가되는
무대였기에 더욱 강렬한 환영을 받을 수가 있다.”

- 이병임, 1971


이듬해인 1972년, 그는 금란여자중학교의 무용교사가 되고, 다시 1년 뒤 금란여자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직에서 1979년 2월까지 학생들을 만난다. 그러는 중에도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석사과정을 밟으며 육완순의 무용극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에서 막달라 마리아 역을 맡아 미국 7개 도시 순회공연을 하고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 창단 공연에 참여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간다. 이 시기에 배명균으로부터 ‘산조’, ‘무당춤’, ‘농악’을 사사하기도 했으며, 후에 한국춤 전수의 필요성을 느껴 김진걸 ‘산조’를 습득하게 된다.


“공연도 정말 많이 했지요. 1979년 대한민국무용제가 처음 생겼을 때 작품 지원비를 분야별(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차등 지급을 했어요. 그중 현대무용이 가장 적은 100만 원이었습니다. 후배가 전화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언니들이 발표회를 너무 자주 하니까 현대무용은 돈 안 드는 줄로 안다는 겁니다.
(웃음) 그만큼 적극적이었지요. 대구, 부산, 광주 MBC에 무작정 찾아가서, 우리가 더 유명해지기 전에 
초청하는 게 좋을 거라고 설득했어요.(웃음) 그러다 보니 많게는 1년에 열 번씩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강한 애착을 보이는 작품은 고등학교 교사를 뒤로하고 불확실성 속에 뛰어든 프리랜서 시절 이후에 나온다. 특히,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출품한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1979)은 ‘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는다. 지금은 서울무용제로 이름을 바꾼 대한민국무용제의 제1회 경연은 개인발표회 형식으로 참가하여 공연들이 서로 다른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김화숙과 김복희는 10월 12~13일에 1부 ‘빛과 그늘’, ‘덫’, ‘Come Out’, ‘겨울 가지’, 2부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을 선보였고, 그중 마지막 작품으로 제1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들의 작품력과 활동력은 그해 겨울에만 앙코르 공연이 서울과 대구 두 곳에서 열릴 정도였다.
평론가 김경옥과 이성은 우수상을 받은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人間心理(인간심리)의 내면을 파고들려는 超現實主義的(초현실주의적)인 시도를 함으로써 
그 抽象化(추상화)되고 압축되어 表現(표현)된 아름다움이 마치 肉體(육체)로 表現(표현)된 
詩(시)를 보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하였다.”

- 김경옥, 1979


“무대 위에서 춤추는 金和淑氏(김화숙씨)는 그들이 프로그램에서 밝혔듯이 처음에는 땅 위에서 춤을 추었으나 
나중에는 地上(지상)을 탈출하여 구름 속에서 하늘 위를 걷고, 뛰고, 나르고 소리를 지른다. … 
한국의 여인들의 內面(내면)에 드리워 있었던 환희, 슬픔, 기다림, 외로움, 욕망 등을 表現 
(표현)하려고 했던 作品(작품)으로서 주제 면에서 ‘現代舞踊(현대무용)의 韓國的(한국적)인 土着化 
(토착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놓은 重要(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 이성, 1979


두 평문에서 보듯 김화숙과 김복희의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은 억눌려 온 한국 여인들의 내면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표출한다. 감정을 건드리는 호소력 있는 춤, 사실성을 덜어낸 추상과 압축의 미, 한국 소재를 현대무용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그들의 참신함에서 김경옥은 “육체로 표현된 시를 보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고 말하는데, 정서가 풍부한 김화숙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화숙은 또한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으로 활동하는 20년 동안 주역 무용수의 역할을 하며 춤꾼으로서의 기량을 발산했다. 김화숙은 우수상을 받은 제1회 경연의 비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래된 일임에도 구술이 매우 구체적이다. 그에 따르면,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는 지금의 장소인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이 생기기 전에 열렸다. 그때는 마땅한 극장이 없으니 참가자들이 각자 개인발표회를 하면 심사위원들이 찾아가서 보는 식이었다. 김복희·김화숙 팀은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1부는 자유 공연으로 꾸미고, 2부에 심사받을 작품 즉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을 선보였다.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 송범은 1부를 보고 난 뒤 “정작 경연 작품은 어쩌려고 처음부터 세게 나가느냐”며 염려를 전할 정도로 열의 넘치는 무대였다고 한다. 당시 심사위원은 송범을 비롯한 18명이었고, 각자 최고라고 생각되는 두 작품을 선정, 제출하여 표를 많이 받은 팀이 수 
상자가 되었다. 그런데 시상식이 끝나고 전해 들은 바로는, 김복희·김화숙의 작품이 모든 심사위원의 표를 받았음에도 최우수상(대통령상) 없는 우수상을 4팀이 공동으로 수상하게 되었다. 억울한 마음에 김복희와 김화숙은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평론가 박용구의 자택을 찾아간다. 박용구는 “최고상을 받기엔 너무 젊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 그랬다”며 두 사람을 다독인다. 그 일을 계기로 박용구와 친분을 다지게 되었다. 김화숙은 2년 뒤, 제3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징깽맨이의 편지’(1981)를 출품한다.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 시절 만들어진 작품 중 그의 애정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으로 꼽힌다. ‘징깽맨이의 편지’와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은 모두 백병동의 곡에 맞추었다. 또한 이 두 작품이 탄생한 즈음인 1980년을 전후로 남자 무용수를 대거 영입하기도 했다.


‘징깽맨이’는 징을 만드는 장인이 스스로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그러니 징깽맨이의 편지엔 징을 만드는 혼신의 과정이 담겨 있다. 시인 이형기가 발표한 시를 동명의 춤으로 만들었다. 평론가 김영태는 이를 “忍​苦(인고)를 ‘울음’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며 “세계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작품 수준이 향상됐다고 생각한 쪽은 역시 현대무용”이었다고 적는다.
(김영태, 1981.10.21.)​


‘징깽맨이의 편지’는 무용제에서 수상하진 못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치열한 연말결산에서 김화숙을 그해 ‘무용계를 빛낸 5명’ 중 한 명으로 만든다. 동아일보에서 매년 발표하는 ‘문화계 81 인물 5’ 무용 분야선정에 참여한 평론가 박용구, 이순열, 정병호, 조동화, 채희완은 “제3회 대한민국 무용제 출품작인 ‘징깽맨이의 편지’를 통해 올해 공연된 무용 작품 중 가장 우수한 경지를 보였다”(홍찬식, 1981.12.19.)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이 작품은 곧 해외로 나간다. 일본무용작가협회 주최 ‘83 무용작품전’에 특별 초청되어 동경 관객을 만날 뿐 아니라, 국내 무용단 최초로 1985년 파리국제무용제에 초청되어 프랑스 리옹, 콜마르, 파리 순회공연을 가진다. 특히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는 10월 30일부터 11월 6일까지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작품을 선보이도록 넉넉한 기간이 주어졌다.
김화숙은 이미 1977년 프랑스 파리 국제대학촌(Cité international Universitaire de Paris)에서 ‘춘향 이야기’로 첫 해외 공연을 가졌다. 이후 앞서 언급한 두 공연 외에도 1987년 파리 피에르가르뎅극장에서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 1990년 중남미 최대 규모 문화예술제 멕시코 ‘세르반티노 국제 축제’(Festival International Cervantino)에서 ‘요석, 신라의 외출’, 1994년 중국 상해예술제에서 ‘거울 속의 카르멘’과 ‘그들은 꿈꾸고 있었다’를 선보였다. 아울러, 로스앤젤러레스, 암스테르담, 브뤼셀 등에서도 공연을 가졌다고 김화숙은 회고한다.​

 


주역 무용수로서 사랑했던 출연작으로는 ‘마른 풀’(1988)을 빼놓을 수 없다. 드뷔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 맞춘 이 솔로는 바로 몇 해 전 대한민국무용제 ‘연기상’을 받은 김화숙의 연기력과 기량을 독무로서 오롯이 보여주는 자리가 된다. 그런데 사실 그는 ‘마른 풀’ 공연 전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여 1년이​나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다시는 춤출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던 중에,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의 작가로 참가하게 되면서 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른 풀’이 곧 자신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는 되살아날 것 같지 않은 메마른 모습. 그러나 한 줄기 생명의 빛이 비추길 바라는 염원과도 같은 무대였다.

 

‘마른 풀’ 공연을 마치고 불과 몇 개월 후, 김화숙은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서울국제무용제’에 안무자 겸 주역 무용수로서 참가해 ‘요석, 신라의 외출’(1988)을 선보인다. 남자 무용수를 대거 출연시켜 남성 출연자 부족에 시달리던 당시 무용계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독창성 면에서도 호평을 받는다. 평론가 이상일의 글을 통해 공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요석, 新羅(신라)의 외출’은 그야말로 특이하게 해석된 元曉(원효) 이야기였다. 
요석공주의 개성을 보편적인 女人像(여인상)으로 深化(심화)시킨 이 작품 片頭(편두)에서 의지와 
金和淑(김화숙)의 춤은 ‘외출’의 의미를 현대적 감각으로 확대했다.
元曉(원효)는 해골바가지 덕분에 道(도)를 통한 것이 아니라 ‘요석’이라는 여인을 통해 건강한 본능 
과 거침없는 자유의 경지에 이른다. 살색 타이츠의 무용수들이 고전과 현대의 고뇌를, 사랑과 해탈의 경지를 
그리고 에로스의 미학에 대한 무용예술가들의 번뇌를 직접적으로 특이하게 그렸다는 뜻에서 
이 作品(작품)은 계속 언급될 만하다.”

- 이상일, 1988.9.30.


앞서 자세히 소개한 작품 외에도, 뉴욕과 파리 여행 당시 길모퉁이 카페에서 영감을 받은 ‘카페’(1977), 김영태 시인의 시를 처음 무대화했던 ‘덫’(1978), 피아노 라이브 연주에 맞춘 솔로 ‘아침 비’(1980), 대한민국 무용제 연기상을 받은 ‘비나리’(1987),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첫 공연예술창작활성화 사업에 선정되어 1천만 원 이상을 받아 장편으로 꾸민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1987) 등 수많은 작품을 이 시기에 선보였다.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의 20주년 기념 공연(1990)은 그간의 행로를 돌아보는 무대로 마련된다. ‘징깽맨이의 편지’, ‘하늘에 있는 친구에게’를 비롯한 10개 작품을 11월 18일부터 21일까지 총 4일에 걸쳐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선보인다. 이들의 마지막 공연은 그 뒤로 1년도 되지 않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 오른다. 광주 금호문화재단 후원으로 1991년 6월 27일 선보인 ‘뒤로 돌아 이 소리를’과 ‘요석, 신라의 외출’이다.

3.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와 전주에서의 활동(1985-현재)

김화숙이 전라북도 최초의 무용과가 들어선 원광대학교에 부임한 건 1981년이다. 그마저도 불과 1년 전 신설되었기에, 전주를 비롯한 전북은 그야말로 현대무용의 불모지였다. 최초의 현대무용 전공자는 “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 보세요!”라는 말에 빼꼼히 팔을 올렸는지의 여부로 결정되었고, 그 숫자는 1, 2학년을 합쳐 18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졸업생이 배출되는 이듬해 1985년부터 김화숙은 예술적 목적과 교육적 목적을 겸한 ‘전북가림다 현대무용’을 창단해 활동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전북가림다현대무용’은 1991년에 ‘현대무용단사포’로, 2005년에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로 이름을 바꾼 전북 최초의 현대무용단이다. 당시는 한양대 교수 김복희와 함께 활동할 때였기에 한양대 제자들로 구성된 ‘가림다무용단’과 짝을 이루는 이름을 붙였다.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이하 ‘사포’)는 활동의 공간적 배경을 전주에 주로 두어 왔다. 1985년부터 2023년까지 치른 총 36회의 정기공연 중 절반인 18회를 전주에서 선보이며, 단원 기량 향상을 위한 ‘소극장 공연’은 네 번에 세 번꼴로 대다수를 전주에서 치렀다. 가장 큰 이유는 극장이었다. 익산엔 마땅한 극장이 없고, 가까운 전주엔 전북예술회관, 이후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들어서 공연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사포의 공연 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정기공연’, ‘소극장 공연’, ‘야외 공연’, 그리고 ‘특별초청공연’이다. ‘정기공연’이 매년 정기적으로 치러진 가장 주요한 공연이라면, ‘소극장 공연’은 단원들의 창작 역량을 기르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건 개인 공연의 형태를 띤다. ‘야외 공연’은 극장 밖으로 관객을 찾아 가며, ‘특별초청공연’은 주로 외부 공연에 초청되어 다양한 지역을 누비는 형식이 되었다.
사포 무용단 시기 김화숙의 대표작은 광주민중항쟁 무용 3부작이다. 이는 사포의 존재감을 전북 지역뿐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전역에 보여주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특히 지역 기반의 무용단으로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세 편을 모두 소개하는 저력을 보여주는데, 1부 ‘그해 오월’은 오페라하우스(1998, 초연은 1995년 광주 문예대극장), 2부 ‘편애의 땅’(1997)은 자유소극장, 3부 ‘그들의 결혼’(1998)은 토월극장에 올리면서 이 3부작을 대, 중, 소극장을 아우르는 연작으로 완성했다.
김화숙은 이름난 객원 무용수 쓰길 거부하고 전북에서 기른 제자들로 출연진을 구성해 왔다. 결과적으로 이 3부작의 서울 공연은 김복희와 결별한 김화숙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포의 무용수들을 중앙무대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대본은 모두, 오랜 기간 김화숙과 협업해 온 경성대 교수 한혜리가 맡았다. 김화숙이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제자로 만난 한혜리는 광주민중항쟁 무용 3부작뿐 아니라 사포의​작품 상당수에 대본 작가로 참여한다.
3부작 중 첫 번째 ‘그해 오월’(1995)은 금호문화재단의 3천만 원 후원을 받아 80분가량의 대작으로 탄생한다. 김화숙은 1980년 5월 광주를 춤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5·18 기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통신과 교통 차단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고, 광주항쟁 이후 도시 통제가 해제된 첫날 들어간 광주가 죽음의 도시처럼 온통 잿빛이었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마당에 핀 장미를 한가득 덮은 채, 동생이 이끄는 수레로 동네 야산에 묻히셨다. 잿빛 도시는 영화 속에만 존재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왜 그 징한 오월은 자꾸만 들먹이냐는광주 사람들의 깊은 탄식이 내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머니, 이제 그만 우세요‘라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춤으로 풀어보련다. 
우리들의 영원한 파라다이스 ‘참 좋은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께 
그리고 아버님 영전에 이 작품을 바친다.”

- 김화숙, 1995


‘그해 오월’의 프로그램에 김화숙이 적어 내린 글이다. 이 공연의 음악은 클래식을 사용한 나머지 연작과 달리 중국 상해음악원 교수 윤명오가 맡는다. 사포가 한 해 전 ‘상해예술제’(1994)에 참가하면서 맺게 된 인연이다. 일반적으로 심포니 한 곡이 30분 정도인데, 80분짜리 작품을 의뢰했으니 악보가 윤명오 교수의방에 한가득 쌓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해음악원에서는 작곡에 몰두하라고 수업까지 빼주었다고 하니 이 작업에 들인 음악가의 노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게 ‘그해 오월’은 상해오케스트라 최고의 연주자들로 녹음한 음악에 맞춘 작품이 되었다.

 


‘그해 오월’이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시각에서 “사나운 분노를 처음으로 예술로 절제”(이상일, 1995.6.2.)시켰다면, 두 번째 ‘편애의 땅’은 실험성과 예술성을 한층 높인다. 블랙박스 극장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1층 객석을 모두 없애고 오로지 2층과 3층 난간에서만 작품을 내려다보도록 한 것. 작품 의도에 맞추어 과감한 결단을 내리긴 했지만,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공간 구성이 완벽해야 했기에 작업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안무가에게도 무용수에게도 정면이 없는 무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명실공히 김화숙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무용사에 남는다.

 

 

평론가 이상일, 김영태, 김태원은 ‘편애의 땅’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내려다보는 시각좌정으로 입체적 형상이 평면화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은 일종의 실험이다. 
내려다보면 입체성이 가려지는 대신 바닥에 밀착되는 동작은 점선이 되고 선화(線華)를 이루어 바닥에 

 

깊이가 생긴다. ‘편애의 땅’이 의도적으로 외면당했던 소외의 땅임을 증명하기 위한 슬픔과 아픔과 
한(恨)의 정감(情感)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여인들의 맨살 때문에 에로스의 미학으로 
아름답게 승화되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 이상일, 1997



“무엇보다 춤이(특히 군무가) 침묵으로 웅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편애의 땅’ 안무를 높이 사고 싶다. 
주먹질은 그러니까 소용없는 짓이다. 그것은 객기이다. 
김화숙의 춤 연륜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나는 광주의 분노에 공감을 보낸다.”

- 김영태, 1997


“현대적 감각의 짙은 시정성(詩情性)과 함께 관객의 특수한 위치를 고려하는 안무자의 치밀한 
산(많은 등 돌림의 포즈가 있다)은 이제 우리 현대춤의 안무가 명실공히 하나의 세계적인 수준을 
확보하고 있다는 신뢰감을 준다. 이 공연은 같은 장소에서 최소한 2주일간은 보여질 필요가 있다.”

- 김태원, 1997


연작의 마지막 ‘그들의 결혼’(1998)은 화합의 의미를 담아 응어리를 씻어내는 춤으로 꾸몄다. 김화숙은 광주 망월동에서 한 신부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샘솟는 아이디어를 안무로 옮기기 시작한다. 평론가 김태원은 ‘그들의 결혼’이 전작 ‘편애의 땅’만큼 흥미나 완성도가 크지는 않다면서도 “특유의 투명한 날카로운 서정성과 세련된 춤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십분 발휘된 작품”(김태원, 2004)이라고 찬한다. 공연직후 다음과 같은 평을 적기도 했다.


“공연을 통해 김화숙은 일종의 ‘김화숙 스쿨(派)의 탄생’이라고 칭해도 좋을 만큼 군더더기 없는 
련된 서정적 몸동작을 만들어내면서, 듀엣과 군무의 활용을 통해 댄서들이 계속 무대 공간의 이곳 
저곳을 이동하도록 했다. 그 이동이 때론 나선형이나 원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어서 일종의 최면적 
인 효과를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공간은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의 대립감에 의해 일종의 거울 반 
사적 기능을 가졌다. 따라서 공연의 전체적 효과는 반사적(reflexive)이면서, 동시에 최면성과 초현 
실성이 뒤섞인 효과를 만들어내었다.”

- 김태원, 1998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전주 지역의 무대에 올린 주요 작품은 ‘달이 물속을 걸을 때…’(2001), 20주년 정기 공연작 ‘그대여 돌아오라’(2005), 30주년 기념 ‘사포의 겨울 숲’(2016) 등이 있다.
‘달이 물속을 걸을 때…’는 서울시무대공연지원작품으로 전북 지역에 기반을 둔 사포가 선정되면서 무대화된다.


초연은 2001년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제16회 정기공연으로, 이듬해엔 전북무대공연지원작품으로 선정되어 작품을 더욱 다듬어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제17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다. 작품의 주제는 그리움과 고독이다. 안무자 김화숙과 먼저 하늘로 떠난 그의 딸 김솔, 역시 세상에 작별을 고한 애제자 신용숙이 한 무대에 출연했었던, 회한 가득한 서정시의 드라마였다.
‘그대여 돌아오라’(2005)는 극도의 충격과 비탄 속에 무대화된다. 대본은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대본작가 한혜리가 이미 1년 전 마무리한 것이나, 2005년 봄에 딸 김솔을 잃으면서 비탄에 젖어 예정된 20주년 신작을 만들어간다. 김화숙은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참으로 긴 세월 인간은 원래 혼자였음을… 왜 이제야 깨닫는 것일까. 
그래도 33년 함께 웃고, 함께 지낼 수 있어 감사하라고? 
이 모진 슬픔을 감내하라고?
말은 참으로 쉽기도 하지.
내 슬픔의 감옥이 어떤 곳인지 누가 알랴.”

- 김화숙, 2010


‘그대여 돌아오라’는 본래 동학교도의 초혼을 부르는 노래. 특히 전봉준의 내면세계를 7개 장으로 엮어 춤사위로 풀어냈다. 전북일보 기자 도휘정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의 공연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차곡차곡 쌓아온 현대무용단 사포의 성장은 20주년 무대에서 그 빛을 발했다. (중략) 무용수들의 

발에 짓밟히는 국화로, 농민의 함성과 같은 북으로, 지식인의 정신적 상징인 대나무로, 삶의 무게 

인 보따리로, 당시 백성들이 처한 현실을 소품으로 나타냈다.

(중략) 가야금으로 연주한 동요 ‘따오기’가 흐르고 강강술래를 도는 듯 여자 무용수들이 나섰다. 

붉은 드레스의 치마폭을 이용한 ‘해 돋는 나라’는 아름다움으로 줄곧 힘 있는 무대를 펼쳐왔던 사포의 새로움이었다.”


- 도휘정, 2005.6.13.



다시 세월이 흘러, 30주년 기념 신작 ‘사포의 겨울 숲’(2016)이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 오른다. 앞서 발표한 ‘뷰티풀 메모리즈’(Beautiful Memories, 2006)와 ‘지나가리라’(2008)에서 정서가 이어져 내리는 작품이다. 김화숙은 ‘겨울 숲’을 통해 사포만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 했다고 말한다. 무용단이라는 숲 안의 단원들. 오랜 기간 무용단 대표였던 신용숙을 잃은 슬픔을 견디어내며, 새로운 봄의 소리를 듣고 깨어나는 강인한 정신을 곧 ‘겨울 숲’으로 본 것이다. 이 작품은 예산도, 여건도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30주년 기념으로 ‘사포의 시간 1985-2015’ 도서 발간과 함께 2016년에 ‘겨울 숲’을 선보이게 된다. 이 공연은 30 

년간 전북을 지켜왔지만 지원금 없이 자력으로 치르는 무상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화숙은 포기하지 않고, 사포의 춤을 사랑하는 후원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자력으로 ‘사포의 겨울 숲’을 전주 무대에 올린다.

30주년 공연을 관람한 전 원광대 유럽문화학부 교수이자 시인 정옥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연이 보여주는 생명의 순환성, 그 사이클 속에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개체의 생사를 뛰어넘 
어 공동운명체다. 이미지4에 이어 에필로그까지의 군무는 그 공동운명체의 춤을 보여주며 영원한 
생명력을 찬미한다. 그 속엔 더 이상 그 어떤 슬픔도 절망과 좌절도 고독과 광기도 없다. 
오직 매 순간 새로운 탄생에 대한 설렘과 희망과 환희가 있을 뿐이다. 
무용수들은 그것을 부단한 도약과 발돋움의 몸짓으로 활기차게 표현해 낸다.”

- 정옥상, 2016




굵직한 현대무용 공연으로 전주 예술계의 한 축을 짊어지는 데서 나아가, 김화숙은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져 온 ‘소극장 운동’을 전주에 이식하며 다양성을 넓히는 역할을 한다. 서울 소극장 운동의 터전이 된 산울림소극장 개관 공연(1985)에 작품 ‘幻(환)’과 ‘덫’, 산울림 현대무용의 밤에 작품 ‘카페’로 참여했던 그는, 사포 단원들의 기량이 홀로 공연을 선보일 정도가 되었다고 판단한 1990년부터 전주 예루소극장, 우진문화공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명인홀을 중심으로 단원들의 이름을 건 현대무용 공연을 전개해 나간다.


“창작이 생명이지요. 현대무용은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는 데에서 나아가 주체적으로 작품 
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소극장 공연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자기 이름을 걸고 공연을 해보아야 자신의 특성을 알게 되고, 작품도 만들 수 있게 되지요.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량이 늘면 군무의 힘도 전체적으로 커지는 겁니다. ‘아우라’가 큰 
사람들이 모이면 단 몇 명만 있어도 무대가 꽉 차요. 
그런데 문제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전주 예루소극장은 거의 창고 수준으로 조명 기구까지 
공수해 와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듬해 ‘우진문화공간’이 생기면서 조금은 나은 환경이 되었고, 장소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요. 또한 공연 날이면 땀 흘리는 무용수들을 위해 조용히 간식 
까지 준비해 주는 이런 작은 배려가 젊은 신진 무용수들에게 큰 힘이 되었지요.”


사포 활동의 또 다른 큰 축은 ‘야외공연’이다. 이 야외공연은 단지 실외가 아니라, 극장이 아닌 특별한 공간에서의 춤 예술 행위를 말한다. 첫 번째 야외 춤판 ‘7월의 소리’는 1990년 여름, 전주 인터체인지 총화탑 잔디밭에서 이루어진다. 이후 부안 변산해수욕장, 원광대학교 노천극장, 광주 금호문화재단 앞뜰, 중원공원 야외무대, 국립전주박물관, 서울 토탈미술관 등 6곳에서 11번의 시리즈로 1997년까지 관객을 만난다. 그러고는 한참을 극장 공연에 집중하던 차에 2012년, 전주 한옥마을 카페 ‘봄’에서 공연을 제안해 온다. 카페 안에서 50분가량의 서로 다른 공연을 한 달에 한 번씩, 5편 올리게 된 것이다. 김화숙은 이를 ‘사포, 말 
을 걸다 시리즈’로 이름 붙인다. 관객을 직접 찾아가 춤으로 말을 걸자는 의미이다. 관객과의 가까운 만남, 나아가 마지막엔 관객과 함께 춤을 추는 공연으로 이루어진다. 이후 갤러리, 사찰, 레스토랑, 전통 누원 등 다양한 장소에서 2019년까지 11번의 시리즈로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야외 공연의 상당수가 가장 비중 있는 공연인 ‘정기공연’ 타이틀을 달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김화숙은 매우 현실적인 부분을 짚는다. 원광대학교 무용학 전공 폐과가 2012년 발표되고 김화숙이 2015년 2월 정년퇴임을 하면서, 원광대 연습실을 사용하던 사포는 공간적 기반을 잃는다. 지원금 제도에서는 외면받기 일쑤. 선정되더라도 프로시니엄 무대에 공연을 올리기엔 금액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열악한 전북에서 현실을 타개할 대안으로 야외 공연으로 눈을 돌린다.
‘사포, 말을 걸다’ 시리즈를 전주 한옥마을 ‘봄’에서 만난 전 원광대 교수 정옥상은 그날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아티스트들은 카페의 모든 것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작은 뜰 담장 높이에 맞춰 구부정히 몸을 낮추어 선 앙상한 나무에게도 말을 걸었고, 사람들의 발치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풀꽃들에게도, 스쳐가는 한 점 바람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자신의 벽과 마주하며 고뇌하는 이의 몸짓으로 세상에게 말을 걸고자 절규하는 듯한 아티스트. 그 표정, 그 몸짓 
하나하나에 관객은 몰입했다. 무대로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조명 하나 없는 곳에서 아티스트에 홀린 듯 
그 움직임에 집중하는 관객들. 그 몰입과 동화의 느낌은 아티스트가 바로 
관객 곁에서 춤추며 흘리는 땀방울과 숨소리 때문만이었을까?”

- 정옥상, 2012.5.30.


이후 ‘사포, 말을 걸다’ 시리즈는 ‘사포의 공간탐색 프로젝트’로 발전한다. 전자가 골격을 유지한 하나의 작품을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한 것이라면, 후자는 창작의 시작부터 공간과 분리될 수 없는 장소특정적 공연을 매번 신작으로 선보인다. 전북의 알려지지 않은 공간을 발굴해 춤으로 풍성함을 더하려는 취지다. 
첫 번째 공간탐색 프로젝트는 2020년 완주의 ‘산속등대’에서 펼쳐졌다. ‘산속등대’는 제지공장을 재생시킨 복합문화공간으로 약 8천 평 규모의 산속 공간이다. 조성된 지는 불과 1년 남짓. 김화숙은 그 주소를 제목으로 삼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제지공장 시절의 기억을 불러내는 몸짓으로 꾸민다. ‘기억 저편_해월리 362’가 첫 공연 후 호응을 얻으면서 사포는 2020년과 2021년 2년에 걸쳐 ‘산속등대’를 누빈다.


두 번째 공간탐색 프로젝트는 정읍 ‘영모재’에서 이루어진다. 정읍 진산동 영모재는 본래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었던 것을 부호가 매입해 풍류방으로 바꾸고 일제강점기에 중수한 가옥이다. 정읍예기조합과 정읍권번 기생들이 기예를 연마하고 심사를 받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춤이 들어가면 죽은 공간이 살아난다는 김화숙은 영모재 공연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의 연출·대본을 맡아 ‘프롤로그_시작도 없고’, ‘이미지1-사라진 기억’, ‘이미지2-바람에게 묻는다’, ‘이미지3-그곳엔 없습니다’, ‘에필로그-끝도 없는 그곳에’로 이어지는 뼈대를 만든다. 아울러, 사포 단원 김옥·박진경·김남선·조다수지는 안무자로서 무용수들 
과 각 장면을 풀어낸다.
그 현장을 방문한 평론가 이태주는 영모재에서의 잔상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영모재 공연은 눈부신 색(色)의 향연이었다. 그것은 자연의 색이요, 인간의 색이었다. 청명한 가을 
날, 온 세상은 색의 축제를 펼치고 있었다. 가을에 접어들어 나무들은 황색으로 물들고, 고가(古家) 
는 더욱더 흑색으로 깊어가며, 적색과 흑색과 자줏빛 의상을 걸친 무용수들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 
들 그림 속에 표현된 적(赤), 흑(黑), 백(白), 녹(綠), 황(黃)색의 파노라마와 중복되어 인간의 애환(哀 
歡)으로 상징되어 전달되고 있다. 마네(Manet)의 그림 ‘검은 모자를 쓴 어마 브루너의 초상’이나 르 
누아르(Renoir)의 ‘테라스에서’를 보면 프롤로그에서 김남선이 보여준 적과 백과 흑의 조화는 이들 
과 다름없는 미(美)의 극치(極致)인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첫 장면 하나만으로도 영모재 공연은 끝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이 장면은 압권(壓卷)이었다. 불과 물이요, 음과 양이다. 
자연과 인간이요, 선과 악이다. 우주(宇宙) 만상(萬象)을 나타내고 있다.”

- 이태주, 2022


사포의 세 번째 공간탐색 프로젝트는 2023년 10월 14일 남원 ‘서도역’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서도역의 낡은 역사와 주변 풍경이 작품 ‘간이역’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 대본과 연출을 맡은 김화숙 그리고 각 이미지의 안무를 맡은 김옥·박진경·김남선·조다수지는 지난봄부터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 많은 날들을 서도역에서 보내며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공연은 ‘프롤로그-떠나다’, ‘이미지1-시간의 기억’, ‘이미지2-보이지 않는 그곳에’, ‘이미지3-돌아올 수 있을까…’, ‘에필로그-텅 빈 이곳’으로 구성되었다. 서도역에서 몇 번씩 작품을 감상한 이태주와 한혜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역사와 자연에 대한 새롭고도 다양한 조망(眺望)을 실험했던 김화숙은 춤의 공간을 극장에서 야외로 옮기면서 
눈부신 무용의 변화를 도모했다. 서도역에서의 무용은 맹렬하고 청명(晴明)했다. 8명의 무용수들 김옥, 박진경, 
김남선, 조다수지, 문지수, 박주희, 윤정희, 김천웅 등은 몸으로 모든 것을 말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어지는 비극적 역사를 포함해서 개인의 사연과 가족들의 과거사도 전달되었다.”

- 이태주, 2023


“바람도, 빛도, 소리도 인공적으로 조절하였던 극장 무대에서의 무용은 엘리트 혹은 전문가 시대의 정점이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연주의 무용은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 중심의 무용을 시도했다. 
그때 작품과 맞지 않는 바람과 빛과 소리들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자연보호의 이데올로기가 제시되었을 때 
우리의 자연에는 이미 과학기술이 만든 인공물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환경보호라는 말이 부적합하게 느껴지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간이역’은 모방할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는 완전히 달라진 지구의 한 생명체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 한혜리, 2023


또 하나 언급해야 하는 작품은 불과 몇 년 전, 일흔의 김화숙이 직접 무대에 올라 독무로 펼쳐낸 ‘인생’(2019)이다. 
서울무용제 개막공연에 초청되어 스스로의 삶을 회고하는 특유의 서정성 짙은 솔로를 선보이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도 회자될 만큼 감동 있는 춤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는다. 평론가 심정민의 서술에서 그날의 공연을 엿볼 수 있다.


“‘인생(Life)’은 김화숙 춤 인생을 짧지만 ‘커다란’ 작품에 응집해 놓은 듯하다. 
영상 속에 주옥같은 대표작들이 흐르는 가운데 특히 ‘광주민중항쟁 무용 삼부작’이 짙은 인상을 남긴다. 
김화숙의 독무는 자신의 영혼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슬픔을 고요하게 인내하는 모습을 그린다. … 기념 갈라 
로 흐르기 쉬운 이러한 무대에서 예술성 높은 작품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아직 소진되지 않은 김화 
숙의 창작적 자산을 확인할 수 있다.”⑴

 

 

4. 무용 교육자로서의 활동(1989~현재)


김화숙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 겸 안무가로서 미국 게일리서치의 ‘세계현대무용사전’(1998)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옥스퍼드무용사전’(2000)에 등재되었다. 그만큼 예술적 업적이 큰 인물이기도 하지만, 교육자로서 국내 무용계의 염원이었던 ‘무용교사자격증’의 산파 역할을 한 공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이를 간단하게 덧붙이려 한다.

 

 

“한국무용교육학회를 창립하고 초등학교 무용 교과서를 발간해 낸 일은 큰 보람이지만, 

더 나아가 예술교육으로서 무용 교과가 확립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어요.” 



김화숙은 교육자로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차례로 재직하며 국내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체계 안에서의 무용 교육을 두루 경험했다. 그러나 1980년대 당시는 무용과 교수라고 해도 예술가로서의 활동에 골몰하던 시기. 고등학교 무용 교사 세 사람을 포함하여 마음 맞는 여덟 명과 함께 ‘한국무용교육학회’를 1989년 만들고, 18년 동안 학회장을 맡아 무용교육학회지 발간 및 무용지도자 강습회와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주관했다.

무용은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 장르임에도 스포츠를 다루는 체육 교과목의 일부로 수록되어 있을 뿐 독립된 교과목이 아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그는 2002년 12월 심포지엄과 결의대회를 시작으로 ‘무용 교육혁신위원회’(구 무용교과독립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킨다. 공동위원장을 맡아 교육정책 세미나와 국회 공청회 등을 추진하여 무용 교육 행정제도 개선을 주도한 결과, 중등 교원자격증 표시과목에 ‘무용’이 들어가면서 2015년 무용교사자격증이 신설된다. 2015년 입학생부터 체육교사자격증이 아닌 무용교사자격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화숙은 예술강사지원사업(구 강사풀제)에 무용이 포함되는 데에 또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국악, 연극, 영화 세 분야가 운영되던 상황에서, 이 사업에 무용 분야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문화부에 보내는 등 문제의식을 피력한 것이다. 그 결과 2005년부터 무용 분야도 예술강사지원사업을 시행하게 된다. 당시, 사업 진행은 무용교육혁신위원회에서, 교재 개발은 한국무용교육학회에서 담당했기에, 두 단체를 모두 설립한 김화숙은 교재 개발에 있어서도 책임연구원으로서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초, 중, 고등학교 무용교수-학습과정안’, 초등학교 학년별 교과서, ‘전국아동복지시설 무용교수-학습과정안’, ‘소년원학교 무용교수-학습과정안’ 등의 개발을 맡았다. 그는 2015년 2월까지 40년 이상을 대학에 재직하면서 안식년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무용 교재 개발과 ‘무용교사자격증’ 문제 해결에 쏟았다.

김화숙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초대 무용교육위원장(2005~2008)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한국무용교육원을 만들어 “정신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재창조하며, 감정을 정화하는 무용을 연구함과 동시에 교육적 실천을 제시”해 오고 있다. 현재까지 13년간 이사장직을 맡아왔다. 아울러, 교육자 겸 무용학자로서 20여 권의 저서와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 심정민(2019.12.), 서울무용제 40주년의 의미와 가치를 높이는 무용가들. <춤>, 44(12), 126-130.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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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동아일보, 10.



김화숙(金和淑, Kim Wha-suk) 연보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졸업(1971)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1976)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업(Ph.D., 1990)

 

경력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예술감독(1985-현재)

한국무용교육학회 명예회장(2009-현재)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이사장(2010-2013)

한국무용교육원 이사장(2010-현재)

원광대학교 명예교수(2015-현재)

문화예술멘토원로회의 멤버(2015-현재)

무용교육혁신위원회 명예위원장(2019-현재)

 

수훈

 

황조근정훈장(2015)

 

수상

 

1회 대한민국무용제 우수상(1979), 연기상(1985), 안무상(1989)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무용 부문 ‘87 최우수예술가’(1987)

월간 객석 ‘97 올해의 무용가’(1997)

한국춤비평가협회 ‘97 춤비평가상’(1997)

이화여자대학교 선정 올해의 이화인’(2001)

한국토목학회 문화부문 토목문화대상(2013)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아름다운 무용인상’(2016)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세계무용의 날 특별상’(2018)

광주여고 100주년 기념사업회 자랑스러운 광주여고인상’(2023)

대한무용협회 대한민국 최고무용가상’(2023)

 

등재

 

<International Dictionary of Modern Dance>(세계현대무용사전). 미국: 세인트제임스프레스(ST. James Press), 426-429. 1998.

<The Oxford Dictionary of Dance>(옥스퍼드무용사전). 영국: 옥스퍼드대학출판부, 271. 2000.

 

저서

 

<현대무용테크닉>, <무용교육론>, <김복희·김화숙 춤 20>, <김화숙의 춤길 40, 춤이 있어 외롭지 않았네>, <김화숙, 무용교육의 지평>, <사포의 시간 1985-2015> 10여 권

 

논문·프로젝트

 

<무용즉흥법에 대한 실험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6.

<무용창작 능력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의 개발 및 적용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안무의 요소에 관한 연구. <한국무용교육학회지>, 6. 1996.

브레인댄스(Brain Dance)의 교육적 의미에 관한 연구. <한국무용교육학회지>, 17(2). 2006.

뇌 기반 무용교육 기초연구. <한국무용교육학회지>, 22(2). 2011.

Slow warmup 개발의 구성 요인. <한국무용교육학회지>, 23(2). 2012.

특수무용교육 기초연구. <한국무용교육학회지>, 24(2). 2013. 40여 편.

 

주요 무용 창작품

 

法悅’(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Cafe’(1977.12.17. 국립극장 소극장, 서울)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1979.10.12.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서울)

징깽맨이의 편지’(1981.10.15.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비나리’(1985.10.18.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1987.3.14. 호암아트홀, 서울)

마른 풀’(1988.4.25.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요석瑤石, 신라의 외출’(1988.9.29.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뒤로 돌아 이 소리를’(1989.10.14. 문예대극장, 서울)

그해 오월’(1995.5.31. 문예회관 대극장, 광주)

‘9의 신부’(1995.9.14.-15. 중외공원 야외무대, 광주)

편애의 땅’(1997.4.30.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서울)

손을 주세요’(1997.10.25. 중외공원 야외무대, 광주)

그들의 결혼’(1998.5.13.-14.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서울)

기억의 강’(1999.12.19. 덕진공원, 전주)

달이 물속을 걸을 때....’(2001.12.8.-9.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서울)

그대여 돌아오라’(2005.6.12.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사포의 겨울 숲’(2016.10.15. 대본·연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인생’(2019.11.13.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서울)

 

, 말을 걸다 시리즈 1-11

2012년 전주 한옥마을 카페 봄에서 시작된 사포 말을 걸다시리즈는 2019년까지 8년 동안

W갤러리, 광안루, 군산 파라디소, 김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등 다양한 장소에서 가변형 작품으로 공연됨.

 

사포의 공간탐색 프로젝트

2020년부터 시작된 사포의 장소특정적 공연

1. ‘기억 저편_해월리 362’(2020.9.26. 대본·연출, 산속등대, 완주)

2.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2022.10.15. 대본·연출, 영모재, 정읍)

3. ‘간이역’(2023.10.14. 대본·연출, 서도역, 남원) 7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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