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전북 제일의 명고수 이성근
김정태(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학예연구사)
필자는 1996년 9월 전라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으로 입단하여 소리꾼이자 창극배우로서 몇 년간 활동한 바 있다. 필자는 1998년 문치상 원장 재임 시절 당시 판소리고법반 담당 교수였던 이성근 선생에게 판소리 박봉술제 적벽가 중 군사설움 대목을 남자 단원들과 함께 학습한 인연이 있다. 특별히 학습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선생께서 의치(義齒)로 말미암아 발음의 어려움을 호소하셨고, 젊었을 때 열심히 예능을 학습하여 공부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리고 늘 성실히 연수생들을 지도하시고 후배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인상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성근(1936~2019)의 삶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1936년 출생부터 1954년(19세)까지 정읍 중심의 고달팠던 청소년기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배고픔과 서글픔 속에서 성장하고 이를 면하기 위하여 자원입대하여 군대 생활을 한 시기이다. 둘째 시기는 1955년(20세)부터 1984년까지로 판소리 학습과 협률사, 유랑극단, 여성국극 단체와 함께 유랑 생활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김동준·박봉술·강도근 선생으로부터 판소리를 학습하고, 박록주 선생을 따라 유랑극단과 여성국극 단체를 따라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를 마련하던 시절이다. 셋째 시기는 1985년(50세) 전주에 정착하고 1988년 전라북도립국악원에 입단한 이후부터 2019년 타계하기까지 정착 생활의 시기로, 당대 전라북도 제일의 명고수로서 활동한 시절이다.
이성근은 젊었을 적에는 소리꾼이자 일류 창극 배우로서 활약했고, 50세 장년의 나이에는 명고수로서 활약했다. 그의 삶은 국권 침탈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겪으며 척박하고 외로운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 위에서 한국 전통예술의 명맥을 처절하게 지키려 했던 몸부림과 갈구는 후학들에게 본보기이자 예술인의 좌표로서 존경해 마지않는다.
1.정읍 감곡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이성근은 1936년 아버지 이태화와 어머니 윤점례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전북 정읍군 감곡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국악 애호가로서 새납의 명인이었으며, 어머니가 국악인들과 친분이 있던 관계로 어려서부터 국악과 가까이 접하며 살았다. 그러나 늦게까지 국악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나무껍질이나 풀대죽을 쑤어 먹고, 산에 가서 나무 생채 베껴다가 찌어서 개떡 만들어 먹고, 논에 가서 자운영 풀을 뜯어 먹으며” 궁핍하게 살았다.
이성근의 소년 시절은 먹고살기 힘든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고달픔을 모면하기 위하여 18세에 경찰 전투대대 별동대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 8사단 16연대 수색대대로 지원했다. 그는 군 복무 중 최전방으로 올라가서 중공군들과 전투 중 포위를 당하고 왼쪽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결국 대구의 27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제대했다. 이후 22세에 혼합단체 공연 중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생계를 위해 유랑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농악단이나 연극단체뿐만 아니라 돈이 되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
실은 우리 집사람도 여성 국악단에 있었어. 여성 국악단에 있다가 어떻게 요상시럽게 나하고 연애를 하게 되갖고, 그래갖고 너무 일찍 결혼을 했지. 긍게 인자 가족이 생겨. 그러고 맥여 살려야지. 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어. 그때만 해도, 나 한참 소리 공부허고 댕길 적에는 솔직한 얘기가 판소리도 나만큼 허는 사람이 없었어. 그때만 해도 최하 시간적으로 따지면은 한 두어 시간, 그러지 않으면 보통 세 시간, 두어 시간만 전부 소리가 다, 이렇게 다 갖고 있었어. 적벽가도 다. 그러게 해갖고 흥보가도 거진 다 알고 있었고, 수궁가도 거짐…. 내가 제일 못한 것이 <춘향가>, 오바탕 판소리보다는 거인자 <열사가>, 열사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써갖고, 그래가지고는 뭐 극단도 다 부서져버리고 여성극단도 다 부서진 동기는 저놈의 텔레비전이 나오는 바람에 다 부서져버렸어.
여성단체도 부서지고 혼합, 남녀 혼합단체도 부서져버리고, 그러고 나니까 뭐가 있어야지.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라북도립국악원 30년사』, 원로교수 탐방 <이성근 편> 중에서
2. 김동준·박봉술·강도근 선생께 판소리를 익히다
이성근이 본격적인 국악 수업에 임하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되던 1954년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살길을 모색하던 중 전주시 전동에 있던 전동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는 광경을 보고 거기에 이끌려서 당시 국악원 소리 선생으로 있던 김동준에게 <심청가> 등을 배우게 되면서 본격적인 국악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 이성근에게 판소리 배우기를 적극 권한 사람은 김동준의 막내 숙부인 김복남이었다. 이성근이 이 권유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본래 어려서부터 늘 국악을 접하여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그 길이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곤궁한 때였으니 포부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생존이 최우선의 과제였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가 경찰 전투대대 가기 전부터 아버지 어머니 모르게 집에서 도둑으로 예술을 좀 했지. 도둑으로 예술을 하고, 들은풍월을 갖고 정읍에 와 있음서 정읍권번… 정읍내장지서에서 있음서나 지서장이 본서에 갖다주라고 허먼 본서에 문서 가지고 가서 갖다주고는 정읍권번서 조금씩 배우고 들어가고 그랬지. … 전주에 와갖고 그때 내 동생이 전주 가 있어서 지금 중앙 성당 앞에 거기가 전북국악원이라고 거기가 있었어. 그래가지고 거기서 내가 이걸 배우기 시작했지 전문적으로. 아, 그때 거기서 김동준 선생님이 인자 오래 계셨고 내 첫 선생이여. 김동준 선생한테 심청가, 춘향가, 열사가를 배웠지. 그때 내가 소리허먼 선생님 소리인지, 내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허더라고. 그리고 거기서 한 삼 년 공부허다가, 단체 국극사 박녹주 씨 있는 국극사로 갔다가, 또 공부하러 들어와가지고 또 나갔다가 아! 공부만
하면 단체서 와 가지고 자꾸 성가시게 하고 소리를 조금 헝게, 그때만 해도 남자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바로 와서 서울 가 조금 있었지.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4, 이성근』(협성출판사, 2011) 중에서
이성근은 본래 판소리로 전통예술계에 입문했다. 이성근이 김동준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운 기간은 약 2년여 동안이었다. 그동안 이성근은 김동준으로부터 <심청가> <춘향가> <열사가>를 배웠다. 특히 열사가는 박동실 명창이 만들었다는 창작 판소리로서 이순신·안중근·이준·윤봉길·류관순 등의 전기를 판소리로 만들어 해방 후 1950년대까지 인기를 끌었다. 이때 이성근은 김동준 선생의 소리제를 그대로 받아 불렀기 때문에, 문밖에서 들으면 김동준의 소리인지 이성근의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국극사 생활을 하며 유랑하던 이성근은 1958년 무렵 동편 판소리 대가인 박봉술 선생을 모시고 스승인 김동준 선생과 함께 김제 금산사 심원암에 들어가 적벽가 전 바탕을 이수했다. 이후 강도근 선생으로부터 김정문제 흥보가를 배우기도 했다.
3. 생계를 위해 유랑극단을 따라나서다
1957년 이성근은 박록주 명창을 만나 그녀의 권유로 국극사(國劇社)를 따라나섰다. 국극사는 본래 1948년 조상선·정남희·김재선·강장원·장영찬·신숙·박귀희 등으로 조직되어 <선화공주> <만리장성> 등을 공연하면서 인기를 누리던 창극 단체였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해체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1953년 국극사는 박록주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이때의 단원들은 박동진·이용배·한농선·박병두 등이었다. 그러나 국극사는 흥행에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명맥을 유지하다가 1958년 해체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성근이 따라나설 때의 국극사는 이미 별다른 인기도 없어 해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성근은 다시 생활을 위해 국극단 생활을 했다. 대체로 1962년경까지는 박봉술·이용배·임준옥·신봉학 등의 중앙국극단과 여성단체인 이일파의 낭자국악단, 문민화의 송죽국악단 등에 몸을 담고 활동을 계속했다. 여성국극단에서 이성근은 주인공을 주로 맡았는데, 후에는 작창을 맡아 단원들의 소리 지도를 하기도 했다. 1960년대 여성국극마저 참담하게 파탄이 나버린 이후, 국악인들은 그야말로 아사지경의 비참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성근 또한 생계를 위하여 이름 없는 지방 단체의 가설무대에 의탁하기도 했고, 익산·신태인·여수·전주·오수 등지의 국악원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에 국극단 생활도 했었지. 유랑극단도 있었고, 인제 나허고 주로 많이 하신 분들은 전라북도에서 김영자 씨, 김일구 선생님, 김영자 선생님은 나하고 주로 이제 많이 저기 했고 이순단 씨가 했고, 그리고 인자 은희진 그리는 국극단 국극세계로 많이, 유랑극단 거시기 쪽으로 많이 댕겼지. … 그 젊은 기운으로 걍 이제 … 재미었고, 지금은 이제 가만 생각하면 그때 시절이 좋았는데 내가 인자, 내일모레면 가겄구나! 싶은 생각이 드니까 자꾸 슬픈 생각이 들어. 솔직한 얘기가 원은 없어. 나 하고 싶은 것 다 해봤고 설장구도 잡았고 거시기도 해봤고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응게.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라북도립국악원 30년사』, 원로교수 탐방 <이성근 편> 중에서
이성근은 유랑극단에서 <사도세자>, <신라야화>, <이조야화>, <열녀가>, <권백가>, <단양공주>, <유관순전>, <전설의 고향>, <울어라 새벽종> 등의 작품과 혼합단체에서 <춘향전>,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렸다. 공연이 인기가 많아 하루에 공연을 많게 할 때는 3회까지도 공연하며 무대 세트는 한 트럭씩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국극 생활을 접게 되었고, 생계를 위하여 약장사 판으로 돌아다녔다. 이때 이성근은 연극도 할 줄 알고 소리도 하고 장단도 칠 수 있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유랑 생활을 하면서도 이성근은 젊은 시절 전주의 전동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전주는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자주 드나들었다.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라북도립국악원 30년사』, 원로교수 탐방 <이성근 편> 중에서
사실 전북은 민속악 종가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도세의 낙후와 관심의 부족으로 인하여 전통예술에 관한 여건은 참담한 형편이었다. 당시의 실정으로 국악계의 명망 있는 예인들 대부분이 그 활동 무대를 중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고향에 남아 고향의 예맥을 지키는 일은 마지못하여 하는 일쯤으로 전락 됐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후진 양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악인들의 생활고와 상대적인 박탈감 속에서 평생을 연마한 전통예술을 포기하는 일이 속출했고, 구전심수(口傳心授)라는 국악의 속성상 전승의 위기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때에 1986년 전라북도립국악원의 개원은 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 일반인들에게는 국악을 누구나가 쉽게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직업인 국악인들에게는 안정적으로 정착 생활을 가능케 했다. 이성근 역시 1986년 전주에 정착하여 ‘전라국악원’을 개원하여 운영하다가, 1988년 10월 5일 전라북도립국악원 국악단이 창단되자 창극단 수석으로 선임되었다. 1991년 6월 1일에는 홍정택 선생이 정년으로 퇴임하자 판소리고법반 교수로 자리를 옮겨 연수생을 교육했다.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4, 이성근』(협성출판사, 2011) 중에서
5. 의치로 인해 고수의 길로 전환하다
이성근은 한때 1990년 국립창극단 전속 고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라북도립국악원 판소리고법반 교수였던 홍정택 선생이 정년을 맞이함에 따라 후임으로 고향의 국악 발전을 위해 황병근 원장의 신신한 부탁에 뿌리치지 못하여 곧 국립창극단을 그만두고 다시 전라북도립국악원의 판소리고수반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 1990년 6월에는 전국고수대회 대명고수부 장원에 입상함으로써 고수로서 새로운 출발을 했고,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유산 제9호 판소리고법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문화재보유자인정서(1992)
소리꾼으로서의 이성근에 비해 고수로서의 이성근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성근이 북을 잘 못 쳤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꾼으로서의 활동이 더욱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에도 여러 명창의 완창발표회 고수를 맡기도 했으며, 판소리 경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고수를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성근의 북 솜씨는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는 고법으로 돌아설라고 해서 돌아선 게 아니고 소리를 허다 보니까 자꾸 나이는 먹어지고 밑에서 진짜 참 … 승승허는 제자들, 후배들이 자꾸 올라오고 힘도 부치고 목도 잘 안 오는 데다가 첫째 조건은 이 치아 때문에 내가 소리를 작파를 헌 거여. 아! 내가 살아나갈 길은 소리를 허믄 어렵고, 예술 방면에 자리를 디뎠으니 소리로는 살아나가기는 어렵고, 명창 되기는 틀렸고… 고법으로 신경을 써봐야겠다. 그래갖고 북으로 돌리게 된 과정이지.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4, 이성근』(협성출판사, 2011) 중에서
이성근의 북은 누구에게 따로 특별히 배운 것은 아니다. 소리를 하는 중에 보고 배운 것이 대부분이며,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여성국극단에서 장단을 담당하면서 장고로 반주를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다만 이성근의 소리 선생인 김동준이 명고수였기 때문에, 김동준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은 소리와 달라서 소리꾼의 경우 특별한 수업을 따로 거치지 않고도 잘 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성근은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리장단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스승인 김동준은 본래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며 20~30대에 권번기생과 전주국악원의 소리사범으로 제자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마흔 살이 되면서 목이 갔다.
“내가 소리를 못 허고 있는디, 소시적부터 선생님으로 모시던 김연수 씨가 하루는 찾어. 내가 소리헐 때도 그 냥반 북은 자주 쳤응게. 그 냥반이 동아방송으다 춘향전 한 바탕을 녹음을 헌디야. 근대 북이 맘에 안 맞아서 못 치겄다고, 날보고 허라고. 누구든지 그 냥반 북을 치문 ‘에이, 상놈의 자식, 그따우로 북을 치냐!’고 욕을 바가지로 먹는디 나는 안 그랬어. 그려서 내가 참말 온바탕 북을 그때 처음 쳤제.”
그때부터 김동준은 고수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가 북을 배운 이들은 정정열의 동생 정원섭과 승무로 유명한 한영숙의 아버지인 한성준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북채를 왼손에 쥐고 치는 좌고수로서 북으로 ‘귀신이 들고 나게’ 할 만큼 기막힌 명고수들이었다. 그의 북소리는 큰 편은 아니나 음전하고도 섬세하며, 소리를 떠받드는 데에 더없이 정중해서 누구나 그에게 북을 맡기면 푸근하게 소리에만 마음을 쏟을 수가 있다고 한다.
6. 이성근 판소리고법의 음악적 특징을 말하다
이성근의 북은 명고수 김동준의 북가락과 매우 닮았다 볼 수 있다. 그것은 이성근이 김동준 선생으로부터 판소리 <심청가>와 <열사가>를 학습했고, 그의 북가락에 의해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의 북가락을 모방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성근은 소리가 주였기에 김동준 선생에게 북을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고, 조금 배웠다. 김동준 선생님은 ‘접궁(북채를 쥔 손의 반대쪽 손바닥으로 북을 두 번 쳐서 소리를 내는 소리북 연주 방식)’을 자주 활용하며 ‘두리둥(접궁의 북소리를 글로 표현한 것)’이 기가 막히게 절묘했다. 또한 전동국악원 시절 강사로 있었던 박창을의 북가락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 이성근의 타고난 솜씨에다 전문적인 고수로 활동하면서 쌓은 기량이 당대 최고의 명고수가 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북이라는 건, 소리음과 북과 음각을 맞춰가지고 나가야 허며, 따라주고 소리, 북 소리라는 건 가사가 힘이 부쳐서 까라질 적에는 강하게 해주고 소리가 북을 칠라머는 소리를 알아야한 데다 소리 가사가 맥힐라고 허믄 그 북으로 메꿔도 주고, 그러고 고정적으로 해주는 것이 딱 저기 (고정)된 것이 아니니까 북을 칠라믄 소리를 알어야 헌다. 소리가 약간 늘어지믄 늘어진 대로 때려주고 떨어지믄 떨어진 대로 이렇게 잘해주는 게, 몰리믄 몰리는 대로 소리꾼 보필을 잘해주는 게 그게 명고지.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4, 이성근』(협성출판사, 2011) 중에서
판소리고법 또한 전승 예술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전승되는 것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성근은 자기 나름의 변이를 훌륭하게 수행했고, 이것이 대다수 청·관중에 의해 인정받았다. 그간의 노력과 실력을 바탕으로 이성근은 1990년 전주에서 열린 전국고수대회 대명고수부에서 장원을 했고, 1992년 6월 20일 전북무형유산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음으로써 고수로서 제2의 예술가적 삶을 시작했다.
대명고는 직업선수로 가는 거고 완전히 저 명창들 북을 칠 수 있는 실력이라는 거고, 명고는 문화재로 말허자면 준문화재 그 정도로 봐야지. (명고부라고 해서) 별지장은 없는데 같은 북이라도 소리 안 허는 사람이 북 치는 것과 소리를 허던 사람이 북 치는 거하고는 달라. 왜 달른가 허면 소리 흐림(흐름), 그 흐림에 따라 소리가 느려질 수도 있고, 조꼼 몰아질 때도 있고, 명창들도 (그럴 때가 있어). 그래서 순간의 포착을 잘혀줘야 혀 명고들은. 그래서 인자 아! 저 사람이(소리꾼이) 어드 가서 말이(소리가) 떨쳐지겄다 허는 것을 알아야 ‘북 잘 친다! 과연 명고다!’라는 소리가 나오지. 어쨌든간 소리꾼도 마찬가지지마는 북 치는 사람도 명창들 소리를 많이 쳐봐야 혀. 많이 쳐서 많이 접촉을 해가고 아! 저 선생님은 호흡이 어느 정도다 (허는 것을 알아야 하고) (중략) 저 선생님은 호흡이 기니깐 늘여 빼는 대로 막 빼가지고 와서 거 와서 맨들어 가지고 떨어진단 말여. 그럼 고걸 알아서 안 때려주고 있다가 눈대목에서 때려주고 붙여주고 허는 거, 그러고 인자 소리가 명고들은 대부분, 상대방하고 얼매나 많이 했냐는 것이 문제고, 상대방이 상청 지르는데 기운이 부쳐가고 보대낀다 그런 걸 보면은, 또 더 가야는디 그거 더 못가고 헐 때는 고수가 소리를 확 살려주는 그런 기교가 있고 명고들은 그런 차이들이 있지.
(북을 칠 때는) 인자 태도, 자세가 중요허고 또한 추임새를 잘 넣어 줘야 하고, 북 치는 어떤 사람들을 보면 촐랑거리는 거시기(자세와 태도)는 안 되야. 무거웁게 앉아서 무거웁게 엄중허게 소리꾼이 고수를 보고 떨린다는 정도로 그렇게 엄중허게 북을… 한 번 딱 추켜들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쳐야 혀. 엄중허게.
-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4, 이성근』(협성출판사, 2011) 중에서
아들이자 제자인 이상호 명고수가 말하는 아버지 이성근은 어렸을 때부터 북 잘 치시는 아버지로 생각했고, 조금 커서는 북가락이 약간 푸지다고 여겼다. 특히 아버지는 접궁이 특이했고, 추임새가 다른 사람과 달리 전체적으로 다양하게 이면과 상황에 맞게 가져갔다. 그래서 ‘얼쑤!’라는 추임새조차 사용하지 않고, ‘얼씨구다! 아먼, 그렇지! 좋다!’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무엇보다 소리북 장단은 소리를 따라다니며 꽃받침으로서 역할이 보비위라고 강조하셨다 한다.
소리북 장단은 소리를 따라다녀야 한다. 물론 연습할 때는 장단의 기본 한배를 지켜가면서 연습하지만, 무대에 올라가게 되면 소리가 우선이니까 소리를 따라다니면서 쳐야 한다. 빠르기가 너무 아니다 싶으면 컨트롤해야겠지만, 장단을 달고 칠 때는 소리꾼도 모르게 조용하게 달아라! 현재 다는 것이 너무 시끄럽다 싶으면 소리꾼도 모르게 짚어만 주기도 해야 한다. 노상 가락만 친다고 해서 잘 치는 것이 아니고 너무 비워도 아니다, 적절하게 한배를 맞춰라. 고수로서 한배조차도 소리꾼이 편하게 갈 수 있게끔 따라다니며 쳐 줘라! 따라다니면서 쳐라. 고수는 꽃받침으로서의 역할이고 그게 보비위다.
- 필자와 이상호의 구술대담 녹취,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 전주시 송천동, 2024.9.3.
평소 이성근은 집에서는 과묵했으나, 국악원에서 근무했던 최승희 선생과는 친분 있게 농담도 자주 했다고 한다. 기호식품으로는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고 담배만 피웠고, 취미는 낚시가 유일할 정도였다. 사회생활 중에 화가 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그냥 마음 비우고 혼자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여 낚시를 종종 다녔는데, 이때는 항상 막내아들인 이상호를 데리고 다니며 짐꾼 노릇을 하게 했다고 한다.
이성근은 1999년 12월 전라북도립국악원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후에는 전라국악원을 운영하면서 일반인들에게 판소리고법을 가르치면서 텃밭을 일구고 나무도 다듬고 여가를 즐겼다. 하지만 젊었을 때 전국의 지방을 다니면서 천막을 뜯거나 짐을 나르는 동안 허리를 혹사하여 말년에는 오랫동안 허리 디스크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7. 아들 이상호가 고법의 대(代)를 잇다
오늘날 국악계에서 판소리를 직업적으로 하는 소리꾼은 대(代)를 이어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리꾼과 달리 소리북으로 대(代)를 이어서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전의 박근영이나 전주의 이상호나 조용안과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소리북을 치고 있는 정도이다.
이성근의 제자로는 아들이자 제자인 이상호 말고도 여러 명의 제자가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호수, 정읍에 활동하고 있는 배상철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소리와 북을 전수받고 수양딸 노릇을 한 이태영과 전주시립국악단에 있는 김민영이 열사가를 전수받았다.
이성근은 아들이자 당신의 북가락을 잇는 제자인 이상호를 보며 늘 짠한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이왕 소리북을 잇게 되었으니 북이든 인간관계든 원만하고 분명한 처세와 항상 겸손할 것을 당부했다. 이상호는 정식으로 북을 배우기 앞서 아버지께 판소리 기본기를 다듬었다. 그것은 장단은 소리하는 사람이 기본으로 알아야 소리하는 데 편하기 때문에 소리북을 배운 것이다.
이상호 명고수는 서른 살까지의 학습기는 아버지 북가락이 전부였는데, 이후 본격적인 고수 활동 시기에는 김동준 선생님 것으로 바꾸어 완성했다 한다. 그의 북가락은 홑진 것이 아니라 풍성한 북가락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북을 배울 동안 아들로서 아버지 명고수 이성근에 대해서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크다.
자식 입장에서 아버지로서는 빵점이죠. 옛날 분들은 워낙 단체를 많이 다니시고 그러셔서 제가 중학교 때 전주에 정착하면서 함께 생활하게 된 거죠. 막내아들인 내가 그나마 혜택을 받은 편이죠. 큰형님은 아버지와 다니면서 음악을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아버지가 가시는 길은 가지 않고 형제들이 안 하시고 다른 길을 가고 있지?’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한테는 안 가르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고법을 잇겠다고 했을 때 속으로는 좋아하실 수도 있었으나 표현력이 없으셨어요. 그냥 항상 얼굴에서 가만 웃기만 했어요. 1985년도에 전주에 정착하셨고, 전라북도립국악원 정년 후에는 사설학원인 전라국악원을 운영하시어 일반인이나 전공자를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 필자와 이상호의 구술대담 녹취 중에서,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 전주시 송천동, 2024.9.3.
이상호는 아버지 이성근의 유랑생활이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로서의 아쉬움이 많았다. 하지만 전통 예인으로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걷는 동안 배고프고 힘든 시절에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나가서 공연하러 다녔기에 아버지를 존경해 마지않는다. 이성근은 늘 아들이자 제자인 이상호에게 항상 “자만하지 말라. 너도 나이 먹으면 손도 안 돌아가고 그런다. 젊었을 적에는 화려하고 손도 잘 안 돌아간다. 추임새와 접궁 활용을 많아 하라! 김동준 선생님 가락을 따서 널리 보급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시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성근은 자신의 길을 걷는 아들인 이상호를 묵묵히 바라봐주되, 칭찬에는 인색했다. 이상호는 아버지한테 칭찬을 갈망했었다 한다. 잘한다는 말씀도 없으시고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쳐!”라며 더욱 연습하고 연구하여 실력을 연마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들인 이상호는 항상 칭찬에 목말라했다. 이성근은 아버지로서 행여나 아들이 자만하고 목이나 어깨에 힘주고 거들먹거릴까 봐 칭찬에 인색했지만, 자식이 판소리고법 보유자로 당신의 북가락을 잇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늘에서 기뻐할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최동현, 『판소리명창과 고수 연구』, 신아출판사, 1997.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4, 이성근』, 협성출판사, 2011.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라북도립국악원 30년사』, 열린커뮤니케이션, 2016.
이상호 구술대담 녹취,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전북 전주시 송천동, 2024.9.3.
연보
1936 전북 정읍군 감곡면 출생(아버지 이태화, 어머니 윤점례)
1952 (17세) 자원입대 경찰 전투대대(8사단 16연대)
1954 (19세) 대구 27육군병원 삼덕동 상이군인으로 제대
1955 (20세) 김동준 선생께 심청가·춘향가 학습, 열사가 학습(전동국악원에서 2년)
1957 (22세) 박록주 주최 국극사 <선화공주> <만리장성> 협률사 공연(4년)
1957 (22세) 결혼
1958 (23세) 큰아들 득남
1958~1959 박봉술 선생께 송판 적벽가 백일공부(금산사 심원암)
1960~1962 여성국극단 활동(3년간), 강도근 선생께 흥보가 학습
1961 (26세) (부안) 호남전국명창대회 1등상
1985 (50세) 전주 정착
1986 (51세) 사설학원 전라국악원 개원
1988 (10월 5일) 전라북도립국악원 국악단 창극부 수석단원 입단
1990 국립창극단 전속 고수(7개월)
1990 (6월) 전국고수대회 대명고수부 장원
1990 목정문화상 수상
1990 강도근 흥보가(고수) 음반(신나라) 발매
1991 (6월 1일) 전라북도립국악원 교수실 판소리반 교수 임용
1991 (10월 9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적벽가 완창(고수 이상호)
1992 (6월 20일) 전북무형유산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인정
1993 열사가 음반 발매
1998 전라북도립국악원 교수실장
1999 (12월 30일) 전라북도립국악원 정년퇴임
2011 (12월)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이성근 편 발간
2019 (7월 2일) 영면
공연보
1989 (6월 1일) 전라북도립국악원 국악단 창단공연 창극 <심산의 별들>(작창, 촌장 역)
1991 (10월 7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최승희 춘향가 완창(고수)
1992 (3월 18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최승희 흥보가 완창(고수)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조통달 수궁가 완창(고수)
1992 (11월 13일) 제2회 전라북도립국악원 교수의 밤, 전북예술회관(고수, 놀부 역)
1993 (3월 16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최승희 심청가 완창(고수)
(3월 17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이일주 흥보가 완창(고수)
(3월 18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전정민 수궁가 완창(고수)
1996 (4월 8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김일구 적벽가 완창(고수)
(4월 10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김영자 춘향가 완창(고수)
1997 (1월 28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이임례 심청가 완창(고수)
1998 (2월 24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이난초 춘향가 완창(고수)
(2월 25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유영애 흥보가 완창(고수)
1998 (12월 16일) 제3회 <전라북도립국악원 교수의 밤>, 전라북도예술화관(고수)
1999 (3월 25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김일구 심청가 완창(고수)
2000 (2월 21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안숙선 심청가 완창(고수)
2001 (10월 16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김일구 적벽가 완창(고수)
(10월 17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이일주 흥보가 완창(고수)
2002 (8월 29일) 우진문화공간 <판소리 다섯 바탕의 멋> 이일주 심청가 완창(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