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란국죽을 수렴한 김광숙의 춤 인생
양옥경 (전북대학교 학술연구교수)
프롤로그
2015년 7월 어느 날, 김광숙은 저물녘 석양빛에 불그스레 물든 갈대숲에 선 한 마리의 해오라기처럼 약간의 처연함과 고고함이 공존하는 묘한 얼굴로 필자를 맞아들였다. 그녀의 작고 가는 몸은 경추에서 출발해 그 말단인 미추에 이르기까지 한 치도 꺾일 수 없다는 듯 흠 없이 꼿꼿하였다. 그 위로 길고 곧게 뻗은 콧날과 커다란 눈은 세상 모든 감정을 품은 얼굴인 듯 그 도량(度量)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금 필자는 천생 무녀(舞女)의 얼굴과 몸을 가진 예기무 보유자 김광숙을 처음 만났을 때 각인된 인상을 말하고 있다. 이후로 너무 늦은 만남이 안타까워 하루빨리 간극을 좁히고픈 갈증을 느끼며 본론인 춤은 잊고 대화에 빠져들고는 했다. 그렇게 선생과 사귀어 온 지 여덟 해째 늦여름, 필자는 올해로 여든을 맞은 그녀가 완성한 만다라의 일각(一角)이나마 짧은 글로 풀어내는 일을 시작했다.
1. 쟁이의 딸, 그 아찔하고 짜릿했던 날들
“우리가 쟁이 딸이잖어. 울 엄마가 눈물 찍으며 ‘아가, 지발 허지 마라’고 했는데, 내가 청개구리같이 그 말 안 듣고
춤춰서 평생을 이렇게 힘들게 사나 싶어.”
김광숙은 1945년 9월 18일 서울 외곽(성동구 왕십리가 가까운 곳)의 한 민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화약(다이너마이트)을 다루는 사업체의 기술자로 일하고 있어서 모친과 함께 세 식구가 서울살이를 했다. 본디 친가는 전주 토박이로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에 자리 잡은 ‘백두산장집’이란 상호의 제법 큰 장(醬) 제조 공장을 운영하였다. 전주에서는 제일의 규모였으며, 집안 장남의 맏딸이라 온통 귀염을 받는 말괄량이로 어린 날을 유복하게 지냈다. 소녀 광숙에게 하늘로 우뚝 솟은 듯한 노란 장통은 숨바꼭질에 최적의 구조물이었다. 건장한 청장년들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일하는 장통 뒤에 숨어 시간도 잊은 채 노래를 부르면 저녁 먹으라고 이름을 불러대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내가 소리를 배운다고 하니까 엄마가 펄쩍 뛰셨어. 얌전한 집안인데 왜 기생이 될라 그러냐, 피는 못 속인다고 니 아부지 닮아 그러냐, 절대 안 된다 했어. 우리 아부지가 집 안 금고의 돈다발 싸 지고 나가서는 맨날 천날 여기저기로 극단 데리고 공연 다니고 그러셨거든. 그래도 엄마가 한 번도 큰 소리로 만류하는 걸 못 봤어.
그래도 원한이 졌겄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한 부친은 가업(家業)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친의 애정은 온통 딴따라로 일축되기도 했던 유랑극단 운영이었다. 당시만 해도 단장의 운명은 칠흑 바다를 상대하는 항해사처럼 극단 살림의 키를 거머쥐고 돌진하는 선봉장이자, 어떤 후과(後果)에도 전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이기도 했다. 꽤 두둑한 장집 운영 이윤을 번번이 거덜 내는 주범이 되고 마는 부친이었다. 그렇게 전주 연극사의 중추적 인물인 극작가 박동화와도 교우로 어우러지고, 이름난 배우들을 조합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산 한량 부친은 집안에서는 공동의 적(敵)이 되었다. 모친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가솔의 고통 어린 원망을 한 몸으로 견디는 세월을 보냈으며, 급격히 기운 가세에 김광숙의 삶도 안팎으로 부침(浮沈)의 세월에 내몰렸다.
모친은 용모가 수려하고 유교식 범절을 강조하는 이였다. 입성(의복)은 늘 단정했고, 말소리는 나직하였지만 비단으로 지은 옷을 서랍장에 고이 넣어두었다가, 나이 어린 김광숙이 공연을 하는 날에 아낌없이 내어주며 은근히 응원하는 모친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말 없는 응원은 성년을 한참 지나 중견의 무용가로 서는 무대의 분장실에까지 이어졌다.
2. 기쁨은 오직 춤밖에
“플리에~ 를르베~ 아라베스크~ 피에루트~~ 그랑주~~~~테!
긴 눈밭을 발레를 하며 달리면 그 기분은 말로 다 할 수 없지. 공주가 된 것 같고.”
온통 설국이 되어 흰빛으로 반짝이는 겨울날, 김광숙은 학원에서 익힌 발레 동작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나 즐거웠다고 한다. 1950년대 무렵 경원동 중심으로 전주 시내에는 서양 춤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었다. 전주 무용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인 박애리와 김세화가 어린 김광숙에게 발레와 여러 창작무용을 가르쳐 준 선생이다. 토슈즈(toeshoes)를 구할 수 없어 버선이나 양말을 신고, ‘튜튜’라고 하는 멋진 연습용 발레 치마는 없었지만 나일론 소재로 만든 치마를 두르고 발끝을 한껏 세워 바(bar) 기본동작을 무한 반복했다. 최선(전라북도 무형유산 제15호 호남살풀이 보유자)과의 첫 만남도 김세화 학원 수강생이었을 때였다. 초등학교 시절 전라북도 공보관(현 ‘가족회관’ 건물)에서 쾌자를 팔랑이며 민요춤을 추었던 날 무대에 스며든 가는 햇빛까지도 기억이 선연하다.
당시는 교회나 성당 같은 종교시설의 행사에서 예술공연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던 때다. 10대의 김광숙은 ‘전주태평교회’에서 같은 발레학원 수강생들과 함께 창작무용 공연을 하곤 했다. 또한 당시는 경원동을 비롯하여 전동성당 그 주변으로 판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던 때였다. 전동성당 옆 골목에는 국악원으로 이름이 바뀐 이전 전동권번이 위치했고, 그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나이 어린 소녀들이 춤이며 판소리를 학습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김광숙도 오가는 길에 흠모하는 마음으로 국악원의 풍경을 한참씩 구경하곤 하였다.
마침내 마음을 굳힌 김광숙은 모친에게 소리를 배우겠다고 뜻을 알렸다가 아주 크게 혼났다. 호랑이같이 무서운 평양 기생 출신 김옥진 선생에게 줄풍류 한바탕을 익히고 있을 때는 아주 크게 혼쭐나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물집이 잡혀 쓰린 손을 호호 불다가 선생에게 크게 야단맞은 뒤로는 본인이 가야금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굳은 결심과 함께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오직 춤이다!
3. 정형인, 은방초, 박금슬로 이어진 운명의 춤 사슬
“하늘에 28수가 있다면, 내게는 땅 위로 내린 은하수 같은 선생님들이 계셨지.”
[정형인과 김광숙]
김광숙이 고풍 그대로의 전통춤에 입문하게 된 데는 정형인이란 재인 계통의 전통춤 거장이 있다. 김광숙은 전주농고 이기주 교사와의 앎을 통해 전주농고 춤 선생 정형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초로의 정형인은 둥그렇게 안으로 말린 어깨에 일부러 가슴 쪽으로 모은듯 수굿하게 구부러진 몸맵시가 범상찮은 자태였다. 선생은 그녀에게 승무를 비롯해 여러 전통춤을 가르쳐 주었다. 언젠가는 친구 (시민병원 딸, ○은숙)집 작은방에 놓인 법고를 제 신명대로 “후려치고 있는” 김광숙을 “네 이노옴! 네 이노옴!” 하고 연신 혼을 내고서는 “그렇게 후려 패지 말고, 낙화동동 낙화동동, 이렇게 얼러가며 쳐야 하니라.” 하며 구음 장단을 곁들여 다정히 시범을 보여주신 분이었다.
[은방초와 김광숙]
10대가 꽉 찰 나이까지 전주에서 한참 전통춤의 매력을 알아가는 중에 전주살이를 접고 과감히 서울로 거처를 옮긴 계기는 전라북도 청사에서 열린 행사에서 본 정인방(정읍 출생, 1926~1984)과 은방초의 춤에 “홀리었”기 때문이다.
당시 은방초는 서울역 근처의 제자 서정님(은방초춤보존회이사장, 님 무용예술원 대표) 집안 소유의 건물에서 춤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미 김광숙의 가세는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어서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에 별도로 거처를 구할 수 없어 학원과 서정님의 집에 신세를 지며 춤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동향 출신으로 서라벌 예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있던 김조균(금파, 전주 출생, 1940~1998)이 은방초의 학원을 방문했고, 김광숙에게 대뜸 “네게는 박금슬 선생 춤이 잘 맞어.”라고 말하며 박금슬 선생의 학원으로 친히 안내해 줬다.
[박금슬과 김광숙]
“나도 지적해 주고 모를 때, 질문할 수 있는 선생님이 사무치게 그리워.”
올해로 여든이 된 김광숙에게 아직도 스승의 이름은 절절한 아픔이다. 박금슬(본명 박길남, 여주 출생, 1925~1983)의 첫인상은 예민하고 가냘픈 체구에 병색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만큼 약해 보였다. 그런데 장구채로 박과 장단을 짚어가며 제자들에게 입춤(立舞)을 지도하는 선생의 목소리는 성량이 풍부하였고, 카랑했으며, 정확한 지시와 실체를 요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기본 춤의 짜임새가 놀라웠다. 이후로 눌러앉게 된 김광숙은 그야말로 무언가에 홀린 듯 오로지 춤으로만 살았다.
김광숙의 스승, 박금슬은 한국춤 동작의 개념화 및 체계 이론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광숙의 스승 박금슬은 이른바 ‘신여성’이란 말이 출현하고 독특한 사회적 현상으로 지목되던 시기인 1939~1943년간 일본의 이시이 바쿠(石井漠)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무용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일찍부터 불심이 깊어 생활에서도 예술세계에서도 불가의 가르침과 교리를 수행하는 무용가였다.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를 김광숙을 통해 들었다. 한국 전통춤의 명문가이자 그 자신 대가를 이룬 한영숙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간 박금슬이 환자 침상 옆에 앉아 한참을 송경(誦經)해 주며 쾌유를 빌어주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박금슬은 보통 ‘귀국 공연’을 통해 데뷔하는 유학파들의 선택과는 달리 전국의 숨은 명무들을 찾아 춤을 배우고, 연구하는 데 몰두하는 한편, 불교의 사상과 예술을 모티브로 한 춤 창작에 빠져 지냈다. 이름을 얻는 데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재력 있는 집에서 태어나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란 때문인지 천상 해맑은 소녀였다. 그런 선생을 다 이해하기에는 제자들은 아직 어린 나이었다.
공연이 있어 남산에 위치한 국립극장에 가는 날은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버스를 탔으며, 오는 길은 버스가 끊겨 다 함께 걸어 학원으로 돌아왔다. 다른 스승 문하에 있는 젊은 춤꾼들이 택시며 자가용을 타고 삼삼오오 사라지는 광경을 본 제자들의 심란한 마음을 모르는지 박금슬은 맨 앞에 서서 걷다가 불현듯 기본 춤동작을 지시하는 용어를 외쳤다. “장전 학채!” 주문에라도 걸린 듯 일제히 스승의 주문을 따라 길 위에서 긴 호흡을 머금어야 할 학채를 시전하였다. 몸 가득 달빛을 받아 길게 늘어진 여러 학(鶴)의 그림자가 차도 위까지 펼쳐졌다. 가난한 ‘쟁이’들의 보름달만큼이나 충만한 거리 춤 풍경이다.
“허기지면 수돗물로 배 채우고 다시 또 다시…. 박금슬 선생님은 소리 높여 화낸 적이 없어. 그냥 장구를 앞에 두고 앉아서 다시, 또 다시…. 그놈의 ‘다시’ 소리가 나중엔 진력이 나서 설 기운이 없어도 얼른 잘하고
그놈의 ‘다시’ 소리 듣지 말자며 이를 악물고….”
박금슬의 연습실에서 춤을 익히며 보낸 시간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로 어려웠다고 한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도 끼니를 건너뛰며 춤을 췄다. 춤을 추기 위해 끼니를 잊은 날보다 시장기를 이기기 위해 춤을 추는 날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땀으로 범벅이 되고 스승의 “다시!”를 스무 번 남짓 듣고 헤어난 뒤에는 앞서거라 뒤서거라 수돗가로 달음질쳤다. 수도꼭지에 한껏 입을 벌려 들이대고 수직 낙하밖에 모르는 물을 아무런 저항 없이 들이켰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허기를 잊을 수 있었다. 가끔은 행복한 날도 있었다. 평소에는 먹기 힘든 귀한 음식들이 오는 날이다. 박금슬에게 춤을 배우는 자은 스님은 종종 절에서 행사에 쓴 제물을 바랑 가득 담아 와 허기진 젊은 ‘쟁이’들의 배를 채워주고는 했다.
4. 생존을 위한 춤이 더욱 붉은 꽃이 되던 시절
김광숙은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한 일본어와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 살아남기 위한 신경세포가 가장 활성화 될수밖에 없는 ‘만리타향’이었기 때문이다. ‘삼소나이또’(Samsonite 브랜드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 가방을 마련하여야 출입국 심사에서 보다 수월하게 통과한다는 것이 당시 해외 공연을 함께 한 이들의 암묵적인 믿음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해외로 출국할 수 있는 경우가 매우 희소한 특정인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시기였고, 해외 불법 이민자도 많아서 소위 한국의 ‘여권 파워’가 아시아에서도 하위국에 속했던 때였다.
1969년 8월 20일, 첫 해외 공연을 앞두고 규합한 한국무용 팀이 홍콩발 비행을 앞두고 있었다. ‘국위선양’이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손을 흔드는 이들의 배웅을 받는 무리 중에 김광숙과 스승 박금슬도 있었다. 홍콩 주재 영사관 초청으로 홍콩-대만-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로 이어지는 순회공연 길에 오른 것이다.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송범과 함께 한국 신무용의 선구자로 칭송받은 이인범과의 첫 만남도 홍콩에서 이뤄졌다. 이인범과의 인연은 1977년 완전히 귀국길에 오르기 전까지 이어졌다.(이인범은 결국 귀국이 아닌 필리핀에 체류하는 쪽을 택하였다.) 김광숙은 이인범이 이끄는 공연단에 합류하여 아시아 여러 국가의 유명 호텔을 상대로 예술공연을 이어갔다.
이인범공연단은 모두 신무용을 추는 이들이었고, 유일하게 김광숙만 한국 전통춤을 추는 무희였다. 캉캉, 찰스턴Charleston) 같은 ‘양춤’은 거부했다. 작은 그녀의 체구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김광숙이 생각하는 춤세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품 넓은 이인범은 농악 가락을 짜고 손수 악보를 그려 호텔의 전속 밴드 드러머에게 주고 김광숙의 설장구춤과 열두 발 상모놀이를 반주하게 했다. 그렇게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을 아시아 여러 나라를 제집 드나들 듯하며 무희(舞姬)로 사는 삶은 1977년, 스승인 박금슬의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길에 오르게 됨으로써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오랜 해외 체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후, 김광숙은 얼마간 고향인 전주에 내려와 새로운 삶의 방향을 꿈꾸고 계획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일찍이 부모 곁을 떠나 서울살이와 타국살이로 유랑하며 춤만 붙들고 살아왔기 때문에 매너리즘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여하간 스승 박금슬은 그녀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새 삶을 살겠다는 제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두 차례 전주를 찾고 수 편의 편지를 보내왔다. 심정이 굳은 상태라 쉽게 뜻을 물리지 않았지만 스승은 동년배인 모친의 손을 잡고 설득했고, 최후통첩처럼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출전하려 본인이 안무한 작품이 있고, 여주인공은 너를 염두에 둔 것이니 하루바삐 상경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태초>가 바로 그 작품이다. 김영동 작곡가가 음악 작업을 하고, 박금슬이 안무한 이 작품은 태곳적 인간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윤회를 모티브로 한 일종의 불교 신화와 같은 서사를 춤으로 묘사하는 무용극인데, 인간이란 존재 그 자체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유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8. 이별과 회향(回鄕), 결국 소명이 된 춤
김광숙에게 1983년은 영원히 삭제하고 싶은 해이다. 박금슬 선생이 갑자기 별세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불과 1년 전, 약 40년의 세월에 걸쳐 전국을 돌며 직접 듣고 모은 춤 전통과 구술 기억을 종합하여 춤 이론서 『춤동작』을 출간하고 ‘명무전’ 무대에 서며 큰 깃을 펼칠 때를 맞이한 듯했던 스승이 별안간의 사고로 다른 세계로 건너갔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김광숙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꼈다. 온 세상이 폐허로 뒤바뀌었고, 더 이상 스승이 없는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녀는 스승의 춤과 용어를 품고 전주로 돌아왔다.
스승은 가셨지만 이제 춤 없는 인생은 그녀도, 그녀를 아는 타인들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스승의 사후 이매방, 강선영 같은 원로 무용인들의 러브콜이 계속되었지만 한사코 사의를 표했다. 이를 두고 이매방은 “내가 니 오장을 다 아니라. 길남이, 박길남(박금슬)이 땜시 못 오는 거지?”라고 말하여 끝내 김광숙을 눈물짓게 했다. 한영숙 선생의 제자로 태평무 보유자였던 강선영 역시 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계 제자들을 피해 멀찍이 서 있는 김광숙을 손짓으로 불러 가까이 들인 다음, 오늘이라도 당장 그녀 곁으로 올라오라 말씀하시고는 했다.
1986년은 김광숙의 춤 인생에 또 다른 지평이 열렸다. 1985년 1월 첫 삽을 뜬 전북도립국악원은 이듬해 준공해 초대 원장으로 황병근이 취임하고, 삼백 명이 넘는 수강생을 모집하여 교육하였다. 그다음 해인 1987년은 수석 심인택(전 우석대 국악과 교수)을 비롯하여 기악 단원 27명, 판소리 단원 5명, 무용 단원 3명으로 구성한 국악단을 출범시켰다. 김광숙은 이 기관의 운영 초창기에 결합하여 무용 교수와 무용단장을 합하여 십수 년을 재직하며 명실공히 전라북도 무용사의 어제와 오늘에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과 교우(交友)와 사제(師弟)로 연결되어 있다.
“늘 기도하지. 미워하지 말고 살자, 욕심 갖지 말자 하고. 가진 건 몸뿐인데 사지 멀쩡한 육신 가지고 춤추고, 춤추는 일로 이렇게 식구들도 많이 생기고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 그런데 어떤 날은 마음이 질정 없이 흔들릴 때도 있어.
그럼 그 다음 날은 또 기도하고, 또 다음 날 바뀌고, 그럼 또 다음 날 다시 기도하면서 후회하고….”
전주로 돌아온 이후의 노정에서 읽히는 김광숙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의지와 태도는 그녀의 신앙과도 깊게 공명하고 있는 듯하다. 유년기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모친을 따라 전동성당을 출입하던 그녀는 1991년에 영세를 받음으로써 일단의 완결성을 갖추었다. 이후 성당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성당 내 커뮤니티에도 참여하면서 자신이 재능을 나눌 기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신자들 중 비교적 젊은 세대 여럿이 모여 그녀로부터 춤을 배우고, 성당 행사에서 공연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가톨릭예술단’이란 이름으로 해외 공연까지 할 만큼 성장했다. 전동성당에서 인연이 된 문정현, 문규현 두 신부님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소명의식과 실천 방식을 매우 존경하였고, 자신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춤”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구현하겠다는 생각을 품으며 살아왔다.
7. 향제 궁중정재 ‘진안 금척무’와의 40년 동행
김광숙과 진안 금척무(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 전승사는 떼어서 말하기 어렵다. 현재 지역 축제에서 지역 문화를 상징하는 공연 프로그램으로 자리한 금척무는 김광숙의 재능 그리고 끈기가 없었다면 완성을 못 보고 영영 불시착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1981년 김광숙은 향토사학자 황안웅, 마이산 운수사의 주지 스님 황순필 등과 함께 정도전이 태조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은 악장(樂章) 『몽금척』의 사실적 장소가 진안 마이산이란 점에 착안하여 궁중정재 <몽금척>이 역사적 장소인 진안에서 현시(現示)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궁중정재를 익히기 위해 궁중무용 예능보유자 김천흥 선생과, 국립국악원 이홍구 선생을 찾아 춤의 전모를 학습하는 한편으로, 진안 지역민을 조직하여 교육하고 마침내 1984년 공식적으로 ‘진안 궁중정재 몽금척’이란 이름을 달고 군민의 날 행사에서 첫 공개를 하였다. 이후로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지역 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삼십 년 넘게 금척무를 지도하였다. 현재도 김광숙은 매주 1회 진안을 오가며 지역민으로 구성한 금척무 전수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무형문화재가 됐다고 한들 그전에나 이제나 내 생각이 달라진 것 없어.
나는 우리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칠 때, 선생님 따라 여기저기 다니고 사람들 만났을 때, 짠한 일이 많았어.
우리 선생님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학식 있고 교양 있고 평론가 선생들이 우리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하면 너무 좋아했어. 그런데 춤추는 사람들은 또 시기도 많이 해서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그러면 내가 너무 약 오르고 선생님이 짠해서 언젠가는 선생님한테 막 그렇다고 이르니까 선생님은 웃기만 하고….
그저 선생님은 사람들이 뭐라건 간에 춤 연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살았으니까.
그러다 너무 어처구니없게 돌아가셨으니까….”
2013년 5월 24일, 김광숙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8호 예기무 보유자로 선정된다. 박금슬의 춤을 이을 사람, 대단한 춤 예기무를 세상에 더 널리 알리고, 계속해서 전승될 수 있도록 전승 체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 지 한참 지나서야 성사된 일이다. 일이 더뎌지게 된 데는 사실 김광숙의 내적 저항이 컸다. 한국 전통춤에 대해서는 궁중정재에서부터 불교 범패와 작법, 교방무, 민속춤까지 모두 섭렵하고 연구하여 체계적인 용어를 정리해 놓은 지식인이었던 스승이 제 때에 마땅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가신 데 한이 맺혀 있던 그녀였기에 사람들의 권유는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문화재라는 말만 나와도 절로 뒷걸음질 치게 했다.
김광숙이 보유자로 지정된 무형유산 예기무는 전주 전동권번의 춤 선생을 지낸 정자선으로부터 그의 아들 정형인에게 이어지는 춤을 한국 전통춤을 총망라하여 연구하고 교육과 안무에도 탁월한 행보를 보인 박금슬에 의해 무대예술 춤으로 다듬어진 내력을 가진 춤이다. 예기무 외에도 김광숙은 박금슬이 수혈받고 다듬은 전통춤의 여러 양식은 물론 박금슬 창작무용 작품 또한 오롯하게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박금슬류 교방춤인 살풀이와 수건춤, 박금슬류 승무와 바라춤 등이 그것이다. 특히 마음이 가는 창작품은 <번뇌>다. 박금슬의 사상이 깊게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창작물보다 마음이 쏠린다고 한다.
9. 춤도 삶도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처럼!
“춤은 성품으로 잡는 거야. 오장(五臟)에서 우러나와야지.”
춤은 기술이 아니라 평소에 쌓아온 것을 몸을 통해 드러내는 것으로, 성품이 곧고 바를 때 몸을 바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이 김광숙의 첫째가는 춤론이다.
“춤추는 사람이라 그런지 눈에 보이는 대로 관찰하는 걸 좋아해. 매화는 춥디추운데 꽃이 피잖어. 은근한 향도 좋고 꽃잎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운지 몰라. 난초는 제 몸을 길고 곧게 뻗어내지.
서리 오도록 색이 저물지 않고 피어 있는 국화도 좋고, 흰 눈밭에 푸른 몸이 솟구어서 질긴 듯해도 바람에 자태 좋게 남실거리는 대나무…. 매·란·국·죽, 이 사군자를 생각하면 난 절로 춤이 생각나.
‘아, 이렇게 해야겠구나!’ 깨닫는 거지. ‘몸은 곧고 바르게, 사지 관절 마디마디를 다 써서 유연하게,
보기 좋으면서 너무 넘치지 않게 해야겠구나!’ 깨닫는 거지. 사는 것도 똑같지.
사실 우리 선생님이 늘 말하던 거야.”
춤과 인생을 사군자에 비견한 것이 김광숙의 두 번째 춤론이다. 객관 세계에서 들리는 김광숙의 춤 인상론(印象論)은 변화무쌍하면서 동작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동작과 동작의 연결 과정이 걸리는 매듭 하나 없이 매끈하게 흘러간다는 평(評)이 크다. 이러한 평에 필자도 크게 동의한다. 특히, 김광숙의 예기무 공연은 교방을 장식한 병풍 속에 한껏 피어오른 붉은 목단처럼 선연(鮮姸)한 인상을 남긴다. 홀부채, 수건, 접시 등의 무구를 활용해 총 4장으로 구성된 예기무는 다양한 무구(舞具)와 함께 번연(蕃衍)하고 수려한 춤사위가 결 고운 비단처럼 잘 짜여 있어 춤이 시작되어 마침내 끝에 다다르면 백 폭(幅)의 진경화(珍景畵)를 펼쳐 본 듯 충만하다. 이러한 인상론은 비단 이 춤의 구조적 완성도에서만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김광숙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지다. 김광숙은 15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단구의 몸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가 사지를 펼치고, 돋음으로 설 때 누구도 그녀의 실제 키를 체감하지 못한다. 무대 위의 그녀는 길고, 곧고, 섬세하다. 있어야 할 위치에 정확하게 가 있는 사지는 물론 시선의 방향, 이마와 턱의 각도를 치밀하게 조절해서 만드는 감정선, 서로 분리해서는 기억할 수 없는 몰아 상태의 춤사위와 음악까지, 이 모든 것의 종합을 통해 그녀는 단구의 핸디캡을 철저히 은폐하고 거인을 보는 듯한 압도감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여기서 필자나 독자의 시선은 춤 자체가 아닌 ‘어떻게 그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춤 주체를 향해 주목되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자신의 몸에 대해 수천수만 번 냉정히 훑고, 연구하고, 실행하기를 거듭해 온 김광숙의 몰입과 집념의 세월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도 선생님이 살아서 잘못하면 혼도 내고 물어보면 대답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그립고 너무 안타까워.
우리 선생님은 언제나 동작의 원리를 정확한 말로 설명하면서 가르쳐줬어. 왜 그때는 그게 그렇게 귀한 줄 모르고 ‘말씀을 왜 이리 많이 하시나’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그랬나 몰라.
이제는 그 ‘다시’ 소리 듣고 싶어도 듣지도 못하고….”
김광숙의 춤 수업은 정말 엄하고 까다롭기로 자타가 인정한다. 한 차례 추는 데만 십 분이 넘는 박금슬류 기본춤은 동작 한 마루를 무사히 넘어가기가 어렵다. 한 동작, 한 박(拍)이라도 정격(正格)에 당하지 못하면 음원 재생을 멈추고 “다시!” 하고 소리치며 장구채를 잡기 때문이다. 스승에게 배울 때 진절머리가 나도록 들었다던 그 ‘다시’를 김광숙 또한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 그 방식을 못 견뎌 그만두는 제자도 있었다 한다. 굿거리춤 교육과 연습은 박금슬이 자신이 정리한 춤 용어로 장단에 맞춰 전개할 동작을 앞서 지시하는 육성이 녹음된 음원을 사용한다. 그리운 스승의 낭랑한 목소리는 언제나 추상(秋霜)같이 작용하여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한 동작, 한 용어도 허투루 가르쳐선 안 된다’고 맘을 다잡게 하기 때문이라 한다.
김광숙의 이름은 한 차례 변경되었다. 빛 ‘광(光)’에서, 초결명 ‘광(茪)’으로. 빼어난 실력을 가졌음에도 신고(辛苦)의 삶을 사는 그녀를 안타깝게 여긴 어느 스님의 위로를 담은 선물이었다. 빛 ‘광’ 자가 뿜어내는 기가 너무 세어 운이 잘 안 풀린다는 말이 과연 예지(叡智)가 있었던 건지 판명할 수는 없으나, 그녀 자신 그런대로 아쉬움 없이 거둔 세월이라고 회고한다. 흔치 않은 파고를 맞기도 했고 굴곡이 없는 삶이었다고는 말 못 하지만 춤을 출 수 있어 병이 되기 전에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었으니 다행이고 괜찮은 인생이라 한다. 여전히 만나면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사지 육신 건강한 게 최고니까 건강 조심해. 춤도 그다음이야.”라는 말부터 내놓지만 정작 본인께서는 몸살을 앓는 날조차 연습실에 나와 계신다. ‘병원 가는 것보다 춤으로 다스려야 낫는다’니 염려되면서도 이내 수긍이 간다. 맘과 몸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여든 인생을 살아온 그녀 아닌가! 백 말이 필요 없다. 님이여, 그저 무병장수하시라!
연보
19475. 9. 18 출생
1950~1964 박애리·김세화에게 발레 및 창작무용 학습 및 공연
정형인에게 전통무용 학습
1964~1965 은방초에게 전통무용 학습
1965~1982 박금슬에게 전통무용, 창작무용 학습
1969~1977 홍콩·대만·말레이시아·마닐라·필리핀·일본 등 아시아 국가 순회 및 체류 공연
1972 PATA 공연
1975 EXPO 초청공연
1980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 <태초> 공연
1981~1984 김천흥·이홍구에게 궁중정재 금척무 학습
1984~현재 진안군 향토무형유산 진안 금척무 재연 및 교육
1984 故 박금슬 선생 추모공연
1984 최선과 창작무용 <나그네> 공연
1986~2001 전북특별자치도 도립국악원 무용교수로 재직
전북특별자치도 도립국악원 상임안무자 겸 무용단장 등역임
1996 KBS FD-TV 개국 10주년 기념 공연 ‘전주명인의 밤’ 예기무 공연
1998 제15대 대통령 취임 행사 전북팀 금척무 공연
제7회 전국무용제전위원회 부위원장
2000 한국 명인명무전 예기무 초청공연
2001 가톨릭예술단 필리핀 초청공연
2005 ‘꽃처럼 붉은 춤 김광숙 춤판’ 공연
2006 제15회 전국무용제 초청공연 ‘전라도 춤 전라도 가락: 김광숙 춤 맥과 선의 율동’ 예기무 공연
2007 익산시립무용단 주최 ‘전라도의 춤가락 나들이’ 초청공연
2008 우리춤 우리 한마당 명인의 밤
2013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초청 ‘춤 전라북도’ 공연
2014 국립국악원 예악당 ‘한국춤제전’ 초청공연
국립국악원 우면당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스물셋-슬픔은 힘이 되고’
2014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출강
2015 제24회 전국무용제 자문위원
2016 제15회 전주세계소리축제 ‘산조의 밤’ 산조춤 공연
2017 미주 한인협회 초청공연
2018 부산국립국악원 주최 영남춤축제 ‘명무열전’ 초청공연
제17회 전주세계소리축제 예기무 공연
2019 천안시립예술단 주관, 천안삼거리 토요상설무대 ‘명인명무전 객반위주’ 초청공연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 산조전통무용단 ‘춤 It 수다! 선화당에 꽃이 피었습니다’ 찬조공연
2020~2024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한마당축제’ 예기무 공연
2021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두댄스 무용단 주최 ‘한국춤의 향연 누(樓)’ 초청공연
2023 국립국악원 ‘한국의 명인명무전’ 초청공연
<수상 내역>
1967 제8회 전국민속놀이경연대회 출전작 ‘위도띠뱃놀이’ 참가, 개인상
1980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 개인연기상
1983 전국무용경연대회 <할매주머니> 안무상
1884 전라북도 문화상
1989 제30회 전국민속놀이경연대회 궁중정재 ‘금척무’ 단체 수상
2007 제18회 전주 예술인상
2013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8호 예기무 예능보유자 지정
2014 제21회 창무포럼 전통무용 분야 예술상
2016 전북예총 하림예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