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능란한 기교, 거문고 연주가 강동일
글. 한정순(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 거문고 교수)
1. 나의 스승 강동일
거문고의 명인 강동일 선생은 1928년 11월 20일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하리 603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성품은 곧고 맑으며, 외모는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였으나 표정은 항상 천진난만하고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용모가 단정하여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흰 셔츠에 슈트 차림을 즐겨 입는 선생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격의(隔意) 없는 예술가였다.
무업을 하던 아버지 강남풍과 어머니 김월선 사이에서 출생한 선생은 3세 때 자손이 없는 작은댁에 양자로 들어갔다. 당시 작은댁 살림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양부모의 내력과 환경을 뒷받침할 만한 배경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양아버지가 음악을 매우 좋아해 자주 즐겨 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선생이 유년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듯하다. 여기에 무업을 하던 생부와 음악을 좋아하던 앙아버지의 영향까지 더하여 예술적 기질이 완숙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유년시절은 몹시 외롭고 고독했다. 일찍 친부모를 떠나 양자로 간 작은댁에서 선생의 삶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나 두려움으로 잦은 병치레를 해야 했고, 그럴 때면 며칠씩 본가에 들어가 몸을 다스리고 작은댁으로 다시 돌아오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시대적 불운이나 환경적 요소들은 선생을 더욱 진한 감성의 세계로 이끌어 들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이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강점기 통치하에 집안의 사업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학업을 중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낙향하여 그리운 어머니의 품, 완주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선생이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기생이었던 방금선 선생을 만나고부터였다. 삼례에서 유지였던 유성옥은 방금선의 형부로, 서울에서 내려오는 처제 방금선과 거문고를 즐겨 타곤 했다. 선생은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풍류 소리에 빠져 국악에 입문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청소년기의 감수성을 채워 나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과수원을 운영하던 유성옥은 1개월간 선생에게 거문고 풍류를 본영산부터 굿거리까지 전바탕을 전수하였다. 이때부터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며 밤낮없이 연습에 돌입한다. 풍류 전바탕을 1개월에 거쳐 습득할 만큼 연습량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을 느끼며 곤궁한 삶과 전환점의 시기에서 선생은 더욱 고뇌했다.
기초적인 거문고 풍류를 배운 강동일 선생은 방금선에게 1944년 3월부터 1946년 1월까지 거문고를 수련한다. 방금선은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인 백낙준에게 산조를 전수받은 신쾌동의 여제자로서, 스승의 선율을 곧바로 이어받은 인물이다. 선생은 방금선에게 전승받은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산조를 구사해냈다. 선생의 천재적 음악성을 익히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자기화를 통한 음악적 완성도는 전북 음악사에 크나큰 자산으로 남아 있다. 이후 자신과의 음악적 고뇌를 통해 음악 세계는 더욱 심오해졌고, 1948~1951년 20~24세 때 신쾌동과 한갑득을 만나 수련하고 자신만의 거문고산조를 정립해 나가면서 개성 있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선생은 1959년 32세에 성금연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1960년에 김윤덕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사사 받고, 1963년에는 아쟁을 혼자 수련하여 음악적 역량을 키워 나갔다. 조금행 국악원에서 3년, 임춘행 국극단에서 10년, 김진진 단체에서 3년, 박미숙 단체에서 1년 등 창극 반주로 활동하였다.
2. 소리는 간 곳 없고 흔적만 어지러이
선생은 16세 때 거문고에 입문하여 24세까지 스승을 모시고 풍류와 산조를 전수 받았다. 32세 이후 김윤덕과 성금연에게 가야금을 배웠으며, 독학으로 아쟁을 익혔다. 음악에 입문한 동안 다른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새로운 가락을 만들고 익히며 스스로의 기량을 연마했으며, 자신과의 음악적 고뇌를 통해 선생의 음악 세계를 더욱 심오하게 만들었다. 선생의 음악 세계는 초창기에는 유성옥, 방금선, 한갑득, 신쾌동을 거친 학습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는 스스로의 노력과 열정으로 재창조의 과정을 거쳐 일구어낸 것들이었다.
‘아버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문고와 동고동락하셨어요.’
‘아버님이 술대를 휘저을 때는 그 소리는 마치 귀신이 곡을 하는 듯했고, 거문고가 스스로 몸을 떨며 우는 것과 같았어요.’
‘한번 연습에 몰입하면 식사도 거르시고 해가 뜨는지 달이 기우는지 모를 정도로 거문고에 빠지셨어요.’
큰아들(법상)의 증언 (2019. 9. 21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에서)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아 마당에 평상을 펴고 그 위에 담요로 텐트를 치고 한밤중 소음을 염려하여, 담요로 거문고를 덮고 밤새 연습할 정도로 거문고와 매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한바탕 연습 후에는 기력이 쇠진하여 며느리가 한솥 끓여내는 호박국을 맛깔스럽게 드시고 ‘며늘아가야, 고맙다. 고맙다.’ 하시며, 다시 연습에 매진하셨다고 한다.
서재 벽에 산수화를 그려 붙이고,
그림을 보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그 소리가 그림 속에 퍼져 마치 여울물이 돌에 부딪히듯,
약한 바람이 솔 사이로 들어오듯 소리를 내고,
그림 속의 고기잡이 어부의 노래 소리와
절벽 위의 절간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숲속의 학 울음소리, 물속에서 울부짖는 용의 울음소리들이
거문고 소리에 이입되어 그림이 거문고인지,
거문고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경지를 맛봤다
- 강세황, 「산향제기山響䐡記」, 「표암유고豹菴遺稿」
강세황이 지은 「산향제기」처럼 선생은 삼례의 넓은 자연과 하늘, 황토집과 초가, 바람을 배경 삼아 폭넓은 음악 세계를 넓혀나갔다.
선생은 국악 단체에서 주로 창극 반주를 맡았다. 창극 반주 때에 거문고의 개방현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그 음색은 창자(唱者)의 노래를 더욱 구성지게 만드는 다양한 역할을 하게 하였다. 선생의 표정은 천진난만하고 왼쪽 어깨는 학이 날아가듯 치켜세우고, 오른손에는 술대를 거머쥐고 폭풍이 몰아치듯, 폭포가 쏟아지듯 연주했다. 그 소리는 맑고 청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무릉도원을 부럽지 않게 했다. 임춘앵 여성 국극단에서 정철호(국가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보유자)와 함께 연주 활동을 하였는데, 정철호는 선생의 거문고 소리는 열 번을 타도 같은 가락이 단 한 가락도 없었다고 감탄하였다. 거문고산조로 세상에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선생의 스승인 신쾌동도 선생처럼 휘모리 가락을 심금을 울리게 탈 수는 없다고 하면서 거문고산조의 명인으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거문고 연주자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동시대의 국악인들처럼 여러 국극 단체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정립해 나갔다. 궁중 정악에서나 연주되었던 거문고를 독자적인 민속 음악의 해법으로 구사하였고 신쾌동과 한갑득의 산조를 종합하여 선생만의 색깔을 지닌 음색을 만들었다. 선생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은 현재까지도 음악가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고 있다.
전태준(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6호 전라삼현육각 예능보유자)이 전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본다.
금산사 상설 무대에서 방송 촬영 당시 선생이 거문고를 연주하다 유현 줄이 끊어진 일이 있었다. 거문고는 거의 유현(遊絃)1) 줄(거문고 6현 중 두 번째 줄)과 대현(大絃)2) 줄(거문고 6현 중 세 번째 줄)로 연주를 하는데, 주로 유현 줄을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유현 줄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선생은 당황하지 않고 남은 대현 줄 하나로 완벽히 연주를 해내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율객(律客)들이 풍류방에 모여 벽면에 걸린 오래된 거문고를 놓고 원광호(1922~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 보유자)에게 연주를 청하자 ‘이렇게 썩은 거문고로 어떻게 연주해’ 하며 거절하자, 선생이 얼른 거문고를 집어 들어 맛깔스럽게 연주를 했다고 한다. 연주를 들은 그 자리에 있던 율객들이 모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후 선생의 천부적인 재능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거문고 배우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대중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했다.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거문고가 판소리나 다른 악기들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악기가 아니었고, 악기의 특성상 탄법의 어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생은 자질이 없는 학생에게는 자신의 기량을 전수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배우러 온 제자들에게는 무리하게 수강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예술적 기량과 자료를 경제적인 요건에 결부시키지 않았으며, 제자의 능력에 따라 바르게 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1) 거문고 6현 중 둘째 줄의 이름.
2) 거문고 6현 중 셋째 줄의 이름. 가장 굵은 줄이다.
3. 예술 활동의 그림자
오직 내 맘 알아주는 거문고 있어
줄기둥 어루만지며 한두 곡조 연주해보네
- 성현 「독좌獨坐」,「허백당집」제 8권
이 시구처럼 선생은 누굴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을까. 달을 위해서일까, 아니다. 바로 선생 자신이다.
1) 대회에 나가다
1978년 선생은 처음으로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에 출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던 전주대사습놀이는 1975년에 다시 부활하여 국악인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1977년 제3회 대회부터 기악부가 생겨 첫 장원의 영예를 대금산조의 서용석이 차지한다. 1978년 두 번째 대회인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에 처음으로 참가한 선생은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법으로 차하를 차지하고, 1979년 제5회 대회에서 기악부 2등인 차상, 1980년 제6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드디어 기악부 대상인 장원을 차지하여 비로소 명인(名人) 반열에 오른다. 선생은 다시 1984년 제20회 신라문화제 전국 국악 경연대회에 나가 2등인 최우수상을 받는다. 선생은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고자 신라문화재에 출전하였지만 아쉽게도 최우수상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의 뛰어난 자질과 기량에 대해 많은 이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대회에서는 선생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2)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
1984년 9월 선생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호 거문고 산조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선생의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 한갑득 등 모든 거문고 산조 가락을 모아 새로 재구성하였으며, 이것을 자신이 고안한 악보로 채보하여 만들었다. 선생의 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단모리(세산조시), 엇모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점점 몰아가며 우조와 계면조를 섞어 느긋한 리듬과 촉급한 리듬을 교차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희로애락의 표현에 능란한 기교를 부리는 연주가로 알려져 있다. 거문고 산조 중 휘모리 부분을 들을 때면 듣는 이마다 혀를 내두르며 거문고로 빠른 휘모리를 어떻게 저렇게 연주할 수 있는지 감탄했다고 한다. 거문고의 대가 신쾌동도 선생의 휘모리는 역대 거문고 산조 명인 중 전무후무하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 최동현외 8명, “완주군”「전통문화예술의 정리-전라북도 마을굿·산조」( 전주:전라북도 문화예술과, 2006), p 420.
3) 공연 작품
1992년 6월, 선생은 전북예술회관에서 전라북도 전주에 근거를 두고 있던 (사)마당 주최인 제1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에서 모습을 보인다. 이 공연은 명인, 명창, 명무들을 재조명하고 세상과 조우하게 하며 사라져가는 전라도의 춤과 가락을 보존하고 명맥을 잇기 위한 기획 공연이었다. 선생은 시나위 합주와 민요 반주에 출연하였다.
1997년 11월 4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가을 대공연
이때 출연한 명인과 작품에는 전태준(대금), 강동일(거문고), 이성근(장고), 강정열(아쟁), 정회천(가야금)의 「시나위 합주」, 나금추의 「상쇠춤」, 김이월의 「한량춤」, 김용순의 「소고춤」, 장녹운의 「살풀이」, 황귀언(설장고), 유만종(소고), 강대홍(소고)의 「고창농악 설장고와 소고춤」 등이 있었다. 이후 1994년 11월 인간문화재 제2호 홍정택 문하생 발표회에 출연하였고 1997년 11월 문화유산의 해를 기념으로 전라북도의 무형문화재 가을 대공연을 통해 선생의 거문고 산조를 주봉신의 장단과 함께 연주하였다.
- 김용호, 「거문고 산조 명인 강동일의 생애와 예술」 p 7.
4) 행원(杏園) 생활
선생의 예술 활동과 생업을 지탱해 준 곳은 바로 행원(杏園)이라는 요정이었다. 행원은 1942년 전주의 마지막 기생이었던 남전 허산옥(1924~1993년, 문인화가) 여사가 운영하던 요정으로 ‘살구나무가 있는 정원’이란 뜻이다. 행원은 일제 강점기 전에는 전주를 대표하는 국악원 자리였다. 1928년에 건립된 행원은 앞마당에 정원을 두고 ‘ㄷ’ 자로 지어진 건물로, 안쪽에 작은 연못과 정원을 갖춘 일본식 한옥 구조이다. 허산옥 여사는 전주 국악원이었던 낙원권번을 인수하여 '행원'이라 이름을 바꾸고 요정으로 운영하였다. 1983년 무렵에 다시 성죽순(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제2호)에게로 넘어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행원의 안내문 전문이다
1942년 전주국악원이었던 ’낙원권번‘ 건물을 전주의 마지막 기생으로 불리는 남전 허산옥이 인수해 문을 열었다. 당시 행원은 전주를 대표하는 요정(料亭)이었다. 보통 우리나라의 전통 한옥은 앞마당에 정원을 두는데, 이곳은 ’ㄷ자‘ 건물 안쪽에 작은 연못과 정원을 갖춘 일본식 한옥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풍남문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의 ’삼청각‘처럼 지방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유지들의 연회 장소로 활용되는 등 한때 밀실 정치의 상징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전주의 대표 요정으로 자리 잡은 행원은 한편으로 예술가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허산옥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을 불러들여 창작 활동을 도왔다. 그래서 행원에는 항상 예술인 식객들이 줄을 이었다. 1983년 무렵, 판소리 명인이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인 성죽순 명창으로 주인이 바뀌면서 전주를 대표하는 요정으로 명성을 이어 온 행원은 한정식 음식점으로 탈바꿈한다. 사라진 요정 문화를 현대에 맞게 되살리고, 전통음악과 춤의 명맥을 잇게 한 한정식집 행원은 국악 공연을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전주의 풍류 명소로 명성을 이어왔다. 2000년 초반에 이르러, 요정에서 한정식집으로 명맥을 이어온 행원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의미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스마트한 변신을 통해 옛 명성을 이어 가기 위해 소리 카페로 변신하여 그 의미를 지켜가고 있다.
안내문에서 알 수 있듯이, 행원은 건전한 국악 공연을 보며 식사할 수 있는 ‘전주의 풍류 명소’로 명성이 자자했다. 선생은 이곳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더욱 굳혀 나갔던 것이다.
‘내가 인수하기 전부터 강동일 선생님이 연주하고 계셨어.’
‘거문고 소리가 기가 막혔지.’
‘그분은 저녁 공연이었는데, 아침 일찍 출근하여 종일 거문고만 탔어.’
‘누구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 외출도 하지 않았어.’
‘한자리에 앉으면 몇 시간씩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문고만 타고 계셨지.’
‘딱 이 자리여, 지금도 눈에 선하네.’
‘하얀 도포에 술대를 거머쥐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줄을 긁어댔지.
- 성죽순의 구술 (2019. 9. 15. 행원 찻실에서)
생전에 선생이 행원에서 연습하고 공연했던 장소, 좌-마루, 우-내부
선생은 자신의 기량과 소질을 행원에서 연마하고 구상하여 새로이 정립해나갔다. 성죽순이
인수하기 전부터, 또 인수 후에도 계속 행원에서 연주 활동을 하였다. 전태준은 선생이
1986년 전북 도립국악원 입사 이후에도 행원 공연을 나가셨다고 한다. 25년 가까운 세월을
선생은 행원에서 눕고, 일어나고, 보고, 듣고, 연주했다. 행원은 선생에게 삶이고 안식처이며,
곤궁한 삶을 지탱해준 터전이었고, 새로운 음악 세계로 이끌어준 장소였다.
5) 강동일이 남긴 제자들
1965년부터 3년간 전주국악원 강사로 재직하였으며, 1974년부터 전주비사벌예술고등학교에서 근무하였으며, 1980년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거문고를 가르쳤다. 이후 1986년에 전라북도립국악원 교수로 임용되어 퇴직 때까지 국악원에서 근무를 하였다. 선생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자에게 큰 욕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음악 세계에 몰입하였으며 자신의 연주에 빠져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고 밀도 있는 기량을 연마하는 데 심취했다. 행원에서 연주할 때도 그랬지만,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를 받고 전라북도립국악원에 재직하면서도 제자 양성은 쉽지 않았다. 대중적이지 않았던 거문고를 찾는 사람도 적었지만, 그나마도 입문한 제자들은 끈기 있게 오랫동안 학습하는 이가 적었다. 선생의 공식적인 이수자로는 선생의 아들 강기웅(66년생), 서경(64년생), 장복례(64년생), 최영순(67년생) 강기웅과 서경은 우석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였고, 장복례와 최영순은 전라북도립국악원 연수생이었다. 강기웅은 1986년 우석대 국악과 3기로 입학하여 거문고 전공을 하였으나, 현재는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다. 서경은 결혼 후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장복례와 최영순도 거문고를 전공으로 살리지 못하고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다. 필자는 선생 제자 중 1인으로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선생으로부터 3년 동안 거문고를 학습하였다. 관현악단 단원이었던 필자는 선생이 전라북도립국악원 거문고반을 사직한 후 선생 자리에 시간강사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교육학예실 거문고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4. 제자를 양성한 전라북도립국악원
전라북도립국악원은 1986년 6월 19일 개원하였다. 이때 선생은 거문고반 교수로 부임하여 1990년 10월 31일 퇴직 전까지 연수생들을 가르쳤다. 선생은 자신이 직접 만든 육보(肉譜)3)와 오선보(五線譜)4)를 가지고 수업하였다. 10대부터 예순이 넘은 학생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거문고를 배우고자 찾아왔지만, 배우기가 어려운 까닭에 중도에 그만두는 이들이 많아 항상 연수생이 다른 반에 비해 적었다. 선생은 다른 반에 비해 연수 인원이 적은 것에 대해 늘 부담으로 생각하고 많은 고민을 하였다. 개원 당시 거문고반 제1기 연수생은 12명으로 타 과목의 연수 인원보다는 아주 적은 수였다. 선생이 빨리 국악원 생활을 정리하게 된 것도 연수생 확보의 어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깔끔한 성격에 연수생을 확보하라는 국악원의 방침에 많은 부담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선생은 애주가였다. 술은 선생의 예술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심금을 울리는 선생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은 애주가인 선생에게 술을 들고 방문하였다. 선생은 어떤 선물보다 술을 가져오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천부적인 예술가였던 선생은 음악으로 가득한 내면의 세계를 술로 대신하곤 하였다. 어느 해 필자가 명절에 세배를 드리러 방문하였을 때도 술 한 잔 드시고는, "내 가슴 속에 아직도 흥이 너무 많아." 하고 흥얼흥얼 읊조리시며 심금을 울리는 가락을 구성지게 토해내셨다. 아직도 그 선율이 귓가에 쟁쟁하다.
3) 국악에서, 악기의 소리를 흉내 낸 구음(口音)으로 기록한 악보. 거문고의 경우 ‘딩, 동, 당, 둥, 덩’ 따위로 적는다.
4) 오선지에 음의 고저, 음이나 휴지(休止)의 장단 따위의 악곡의 구조나 연주법을 나타낸 악보. 17세기에 유럽에서 완성한 기보법으로, 오늘날 널리 사용한다.
1987년 국악원 연수생 제2기 기초과정 수료 및 학습발표회 모습
선생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했다. 수업 도중 과거에 자신이 공부했던 방식을 많이 이야기하며, 당신 스스로 대단한 연주가라고 자랑처럼 슬쩍 말씀하시곤 하였다. 제자를 많이 두지는 않았지만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많아서 제자들이 학습을 게을리 하거나, 가르침이 잘 전달되지 않을 때는 직접 손을 잡고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거문고에 필요한 도구(골무, 술대)를 직접 만들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곤 하였다. 선생의 거문고 가락은 기분과 감정에 따라 매번 달랐다. 그때마다 악보가 바뀌어 학습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술을 드시면 혼신을 다해 연주하였는데, 그 성음(聲音)이 더욱 고조되어 좋았다고 제자들은 말한다.
선생은 당시 음악 교사인 제자에게 오선보 그리는 방법을 배워, 자신의 감정과 표현력을 알기 쉽게 전승하고자 기호표를 달아 상세히 기록해주었다. 자신에 대한 음악적 열망을 악보화한 것이다. 다음은 선생이 수기로 만드신 육보와 오선보이다.
<육보> <오선보>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강동일 선생의 육보와 오선보 중 일부
국악원 제1기생 수업 때는 구전심수(口傳心授)5)와 육보를 사용하였고, 이후 오선보를 수기로 만들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후일에는 한갑득의 거문고 긴 산조 오선보를 교재로 사용하였다. 필자 역시 선생이 직접 만든 오선보와 한갑득의 악보로 학습하였다. 선생은 한갑득의 가락에 선생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량과 기교를 밀도 있게 접목시켜 독창적인 성음을 만들어 이를 전수하였다. 하지만 술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오른손의 기교는 많은 시간과 연습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이어서 연수생들은 선생의 소리를 학습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필자 역시 선생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선생만의 독특한 성음에 흠뻑 젖어 들곤 하였다. 당시 전라북도립국악원 초대 원장이었던 황병근 님이 필자를 선생께 데리고 가서 실력이 좋으니 잘 가르쳐 인재로 성장시켜주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그 계기로 선생께 한갑득 산조와 선생의 탄법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선생의 탄법은 왼손의 섬세한 농현(弄絃)6)과 술대를 줄에 밀착시켜 연주하는 방식의 주법으로, 맑고 힘 있는 소리에 중점을 두었다. 거문고 주법 중 하나인 ‘뜰표(V : 술대로 거슬러 뜯는 표)’을 선생은 술대를 대모(술대로 내려치는 부분)에 밀착시켜 원을 그리듯 돌려 말아 치켜세워 연주하였다. 필자가 가장 중요시 생각하며 학습했던 주법 중 하나이다. 선생은 거문고는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심성의 표현임을 항상 강조하였다. 제자를 두는 데 큰 욕심은 없었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의 음악 세계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음악을 전수하고자 하였다. 필자가 선생에게 학습하게 된 동기는 황병근 원장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선생이 휴강을 할 때면 관현악단에 근무하던 필자가 선생 대신 연수생들 수업을 맡아 학습시킨 점을 좋게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생은 기분이 내키고 좋으실 때면 숨겨둔 보물을 하나씩 꺼내어 주듯 기교와 방법 등을 필자에게 전수해 주었다. 필자가 들었던 선생의 거문고 소리는, 독특한 주법으로 고음의 맑고 청아한 선율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마치 사람이 육으로 말하고 흐느끼고 노래하는 것 같았다.
선생의 스승인 신쾌동도 선생의 거문고 소리를 극찬하였지만 아쉽게도 선생은 제자를 많이 양성하지 못했다. 그러한 까닭에 악보나 음원 등 다양한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다.
소량의 음원 “전라북도지정문화재” 비디오테이프 (전주: 전라북도 문화예술과, 1997)와 1978년 선생이 대사습놀이에 출전해 연주한 16분 정도의 가락을 필자가 오선보로 채보하여 가지고 있으며, 2017년 필자의 여섯 번째 거문고 독주회 때 선생의 거문고 산조를 한국소리문화전당에서 연주하여 그 가락을 음원으로 제작하여 소장하고 있다. 그 외 1992년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공연 실황 장면을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하여 스승의 손을 면밀하게 학습하고자 자료로 제작·소장하고 있다.
5)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도록 가르침을 이르는 말.
6) 국악에서 현악기를 연주할 때에, 왼손으로 줄을 짚고 흔들어서 여러 가지 꾸밈음을 냄. 또는 그런 기법.
1989년 전라북도립국악원 교수 위촉식 장면. 좌측에서 두 번째가 강동일 선생이다.
선생은 당대 최고의 거문고 명인으로 그 명성을 날렸으나 명성만큼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다. 선생의 음악 세계를 극찬했던 국악의 명인들도 선생의 거문고 소리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그나마도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모두 고인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선생의 음악 세계를 영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다각적인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역시 스승 강동일 선생의 혼과 맥이 오롯이 전승되길 바라며 다음 글은 필자가 선생 영전에 올린 시 한 편이다.
선생님!
그곳에서 왕산악과 백낙준을 만나셨는지요.
선생님을 봐온 지도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해 설날 세배를 드리러 댁을 방문하였을 때
흥얼흥얼 가락을 읊조리시며
"내 가슴속엔 아직도 흥이 너무 많아"라고 하셨죠.
하루는 대사습 사무실에 일이 있다 하여 오셨는데
양복 윗저고리에 술대를 반쯤 나오게 꽂고 오셨어요.
아직도 그 모습이 멈추지 않는 강물이 되어
제 가슴 속에 굽이쳐 흐르고 있습니다.
굽이쳐 흐르는 그 강물의 물줄기를 따라
오늘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선생님 슬하에서 학습하던 시간과 선생님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제 자신의 과거,
감히, 제 작은 그릇이지만 가르침에 용기 내어
선생님의 그림자가 되어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부디 먼 길 오셔서 굴곡진 삶 앞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오늘도 거문고의 일지를 써내려가는 부족한 제자에게
격려와 무언의 찬사를 보내주십시오.
거문고 역사의 한 산맥을 수놓고 계시는 선생님!
오늘 밤 저의 거문고 소리가
그곳까지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평안히 쉬시길 기원드립니다
- 한정순 6th 거문고 독주회 팜플렛 수록 시 전문
5. 강동일(1928~2002) 프로필
이름: 강동일(예명: 강동완)
생년월일: 1928년 11월 20일
본적: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하리 603
본관: 진주
사사
1944.03.01 ~ 1946.01.03. 유성옥, 방금선 거문고 사사
1948.01 ~ 1951.12 신쾌동, 한갑득 거문고 사사
1960.05.25 ~ 1961.05.01. 성금연, 김윤덕 가야금 사사
경력
1961.08.20 한국 국악협회 전북지부 회원 가입
1974.03.01 ~ 1976.05.17 전주비사벌예술고등학교 전임강사
1979.04 전주시립민속예술단 기악 부감
1984.09.20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호 거문고 산조 보유자 지정
1986.10.15 전라북도립국악원 거문고 시간강사
1988.06.01 전라북도립국악원 거문고 전임교수
1990.10.31 전라북도립국악원 사직
1997.12.31 전라북도립국악원 명예교수
수상경력
1978.06.11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 기악부 차하(전주시장상)
1979.05.31 제5회 전주대사습놀이 기악부 차상(전라북도지사상)
1980.11.04 제6회 전주대사습놀이 기악부 장원(문공부장관상)
1984.10.10 제20회 신라문화재 전국 국악경연대회 기악부 최우수상(문공부장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