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열일곱 살 되던 1959년에 남원국악원에서 전국대회를 준비하며 ‘남원여성농악단’을 결성한다. 나금추는 강초은(강백천의 손녀), 장홍도·김문선(이상 상쇠), 장성남·오갑순(이상 장구) 등과 함께 징수로 참여하여 전국농악경연대회(서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농악단원들은 대부분 남원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공부하는 여성들이었으며, 나금추는 대회를 준비
친정 식구들에게는 연락도 못 하고, 혼수품은 이불 한 채, 시어머니 옷 한 벌이 전부였다. 신태인에 있는 시댁에 들어가 살면서 고된 시집살이 끝에 1965년 결혼 3년 만에 큰딸을 출산한다. 이후 2남을 더 출산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이번 춤판에서 나금추 씨는 상쇠춤을 선보였다. 판굿에서 벌어졌던 민중적 춤사위가 아직도 개인
춤으로 승화되지 못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 씨의 쇠 치는 솜씨는 그 장단에 춤이 스며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선한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삶과 예술이 쇳소리 속에서 녹아들고 춤사위 속에
절도 있게 펼쳐진 상쇠춤은 진진몰이로 몰아나갈수록 그의 진가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는 억제의 효용을 알고 있어 부드러움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느끼게 했다.
- 1992.8. 문화저널-이상덕(전주일보 문화부 기자) 문화시평(제1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중에서
8. 금추예술단, 천하의 상쇠 나금추로 우뚝 서다
나금추는 전북도립국악원 퇴직 이후 2002년부터 전업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젊은 농악인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제자 양성에 입소문이 나서 2004년부터 서울·수원·안동·부안·광주·전주·여수 등지에서 찾아온 제자들 양성에 온 힘을 다하기 시작한다.
한평생 농악인으로서 살아온 삶과 예술을 전하는 데 혼신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 활동도 계속 이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공연이 2006년도에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13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상쇠춤 공연과 전주 한벽극장에서 열린 <전북농악명인전>,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 공연이다. 나금추는 1992년부터 2009년까지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에 총 6회 출연하였다.
2005년에는 부안농악의 활성화를 위해 거처를 부안군 행안면으로 옮긴다. 이후 옛 고성초등학교를 이용하여 마련된 부안우도농악전수관에서 부안농악 전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2011년도에는 부안군 무형 문화재 종합전수관이 개관되어 이곳에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전수생들을 위한 부안농악 전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70대 노익장 나금추의 명성을 듣고 한 가락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전수생들로 방학 때마다 북적였다.
2004년부터 나금추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이어온 제자들은 스승의 삶과 예술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이를 펼치기 위하여 2009년 ‘금추예술단’을 조직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금추예술단이 자리 잡기 전, 고창에 있는 (사)동리문화사업회의 기획으로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의 타이틀을 걸고 전주와 고창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호남우도농악 최고의 여성 상쇠의 진면목이 보였던 무대였다. 그동안에는 부포춤으로만 무대에서 선보여 왔었다면, 이 공연은 나금추의 전 레퍼토리를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판굿과 농부가, 그리고 부포놀이, 설장고로 구성된 무대는 관객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첫째마당에서 둘째마당의 오방진으로 굿이 진행되자 능란한 상쇠의 진두지휘 속에
치배들은 맘껏 놀기 시작했다. 치배들의 얼굴에 환한 신명이 피어올랐고, 그것은 곧 객석으로 전염되어
관객들은 손뼉을 치며 들뜬 고함을 쳐댔다. 자갈자갈한 음색에 늘였다 조였다 하는 상쇠의 쇠가락 때문에
나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배가 또 살랑살랑 간질간질’대고 있었다. (중략) 맑고 경쾌하고 재빠른 자진삼채 대목이 되면
나는 발가락이 살짝 오그라드는 가벼운 긴장감이 들었다.
살짝 소리를 죽여 치다가 어느 순간 벼락같이 매도지가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굿 하나가 끝날 때마다 묵은 것이 쑥 내려가듯 시원했고 관객들은 무대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2009.7. 문화저널-권은영(전북대학교 강사) 문화시평(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중에서
이와 같이 나금추의 무대는 관객은 물론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나금추와 금추예술단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고, 한 시대를 꽹과리와 부포춤으로 풍미했던, 70대 노익장의 관록은 무대에서 더욱 빛이 났다.
이후 서울 중앙 무대에서도 다시금 초청을 받게 되는데, 2010년 ‘춤추는 바람꽃, 상쇠’ 공연이 그것이다.
한국문화의집 기획공연으로 ‘춤추는 바람꽃, 상쇠’에 출연하여 호남우도농악 여성 상쇠로서의 공연을 금추예술단원들과 함께 했다.
2013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풍물한마당-풍물명인전(나금추·유명철) 무대에 올랐으며, 2015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 전북농악명인전(나금추·유명철·유지화) 공연으로 명품 굿판을 선보였다.
“나금추의 부포놀이는 너름새와 쇠가락이 일품이며, 장단과 춤과 소리가 하얀 부포의 움직임에 넘칠 듯이 묻어나며 여유로우면서도 경쾌하며 한의 정서와 신명이 멋드러지게 들어 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안농악을 이끌고 있는 나금추(77) 명인은 여성농악단의 초대 상쇠이자 최고의 상쇠로 평가받는다.
다채로운 꽹과리 타법으로 풍부한 성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품.
부드러움과 강함, 섬세함과 거칢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변주에 강하다.
명인이 이끌고 있는 부안농악(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은 우도가락인 부안지방의
유일한 농악보존회로, 호남우도농악과 경상 지역 농악 성격을 함께 지녀 음악과
춤사위의 짜임새가 탄탄하고 생동감 넘치는 가락이 많다
- 2015.10.8. 전북일보_[소리축제-전북농악 명인전] 농익은 광대들의 ‘명품 굿판’_김보현 기자
경력이 쌓이고 닦여진 그의 농익은 가락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 어느 치배든지 각자의 맡은 바가 소중하고 최선을 다해야 되겠지만은 그 상쇠라는 것은,
굿판에 어른은, 그 한 굿의 책임자이고 또 통솔하는 사람이고, 총 30명에서 50명을 다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야 상쇠를 해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상쇠예요.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그거 다 할 수 있는 것 같아도 그 통솔이라는 건 참 참 이상해요.
상쇠를 맡았으면 그 굿판에서 최대한 그 어른다운 그런 행동을 해줘야 되고, 그 치배들이 좀 힘들어하고
지치고 그럴 때는 빨리 그것을 상쇠가 알고, 빨리 그 치배들을 좀 걷어잡아서 빨리 끝내줄 줄 알아야
그 상쇠의 그 통솔력이 빛난다 그럴까, 또 그 사람이 아 자질이 있다 그럴까, 상쇠라는 것은 내가 뭣을 돌리고
무엇을 내가 좀 잘 보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통솔하는 데 전부 그 신경을 다 써야 돼요.
오방진 진을 쌓아야 된디, 저기 가서 이제 다 동그라미로 쌓으면, 삼십 명이면 삼십 명, 사십 명이면 사십 명이 전부
그 사람 꽁지를 따라서 지금 한 덩어리 만들어서 지금 달팽이를 싸야 되는데, 이 사람이 여기서부터 상쇠가 여기서부터
돌리고 뭣을 고개를 까딱거리고 이걸 부포를 세우고 갈 필요가 없어요. 그 사람은 빨리 가서, 자리를 딱 잡아서,
우뚝 장군처럼 서 갖고 부포 탁 세우고 섰으면, 그거를 그 사람을 기둥으로 삼아서 막 대원들이 싸고 돌고 들어와야 빛도 나는 것이고 굿판도 아~ 참~ 과연 잘한다~ 이런 소리를 하지, 여기서부터 상쇠가 그냥 돌리고 막 무엇을 꺼덕거리고 하면,
좀 뭐라 그럴까 좀 가볍게 보여요. 가볍게 보이고 그 사람이 그 기량이 좀 죽는다고 그럴까 난 항상 그렇게 가르치는데,
상쇠라는 것은 나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단원을 위주로 해서 전 단원을 갖고 놀 줄 알아야 되고,
전 단원을 살려줄 줄 알아야 되고, 그리고 상쇠가 그 굿을 딱 살려놓고, 내 기량은 개인놀이에서, 장고 개인놀이가 있고,
소고 개인놀이도 있고, 꽹과리 개인놀이도 있으면 거기서 최대한 내 것을 보여줘요.
그래야 상쇠가 ‘야~ 저 사람 참 잘한다, 참 여지가 있다, 큰사람 재목 되겠다’ 이렇게 표현해주지.
막 다른 사람 돌려놓고 내가 좀 잘해볼라고, 내가 좀 사람한테 보여 주려고 뭣을 막 하려고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죽어져.
자꾸 죽어. ‘아~ 저 자질이 없다. 저 뒤에 사람들 잘하게 잘하는 사람 보여주지, 왜 지가 앞에서 저렇게 저럴까’
그렇게 좀 마이너스가 돼요.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좀 위주로 해서 가르쳐주고 있고, 또한 제자들한테 공부시킬 때,
내가 교훈 삼아서, 또 내 경험담 삼아서 얘기해준 것은, 아무리 예술을 잘하고 남이 못한 가락을 하고 남이 못한 짓을 하고
해도 인간이 못되면 예술이 빛이 안 나요. 필요 없어요, 그 예술은. 어 진짜 바닥에 떨어지는 예술만 못해요.
그렇지만 인간이 잘되고 좋고 인간성이 좋아야 돼. 첫째는 인간이 돼야 돼.
첫째는 예술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먼저 돼라. 난 항상 제자들한테 그렇게 말하거든요.
인간이 먼저 돼라. 나도 성질 낼 줄 알고 나도 화낼 줄 알고, 나 제자들한테 욕 잘해요.
근데 정 부아 날 때는 욕을 안 해요. 근데 좀 사랑스러운 마음이 있고 예쁘게 할 때는 내가 욕도 해요.
에이~ 나쁜 사람들 욕도 하는데, 정말 내가 화났을 때는 욕 안 해요.
딱 돌아서버려요, 나 혼자. 근데 내가 그만치 제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욕도 하는 것이고 혼도 낸 것이고.
근데 지금 갈쳐 보면, 참 내한테 배운 제자들은, 너무 훌륭한 제자들이 많고 너무 잘한 제자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참 예쁘고, 또 어느 사람 어느 선생이 안 그럴까마는, 저는 정말로 저 제 수족의 일부로 생각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 제자들이거든요. 누구든지 우리 제자들한테 조금 이라도 좀 싫은 말을 하면,
정말 내 살을 깎아낸 것처럼 그런 아픔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랑하는 우리 제자들, 항상 내가 끝까지 나 죽을 때까지
땅속에 들어갈 때까지 사랑해주고 가르쳐주고 영원히 그럴 거예요.
긍게 여러분들도, 어느 예술이 소중하지 않을까마는, 이게 그냥 정말로 그냥 뛰고 땀 뻘뻘 흘리고
그냥 마당에서 그냥 다 돌고 그냥 하는 거, 우리 농악 예술들 예쁘게 봐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항상
거둬주시고 그러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예술이라는 것은 무겁게, 무거우면서도 경쾌하게 많이 구르고 많이 크게 하면서 무겁게 그냥 막 가볍게 막 까닥하는 거, 그건 아니거든요. 부포짓도 또 무용, 손 한번 들면 무용도 같은 것이면무겁게 멋있게. 멋을 빼면 이거는 예술이 아니거든요.
뭣이든지 하다못해 탈춤도, 아니면 농악도, 다 그 속에서 무게가 있고 멋있어야 되거든요.
그 분야 분야에서 그게 멋있게 무겁게 굼실거리고 해야 돼요.
절대 껍덕거리면 안 돼요. 많이 가르쳐보니까 진짜 여러 제자들이 납디다마는, 어떤 사람들은 그냥
자기 멋에 취해서 꺼득꺼득헌디, 절대 그건 안 되거든요. 안 되고 무겁게 굼실거리게, 참 이쁘다, 이 예술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말하자면.… 내 태도는 내가 못 봐요. 지금인게 뭐 카메라 찍어서 나중에 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제 모습을 절대 볼 수가 없어.
그렇지만 남이 봐요. 남이 보기 때문에 남이 봐서, 아~ 하고 나오면 아~ 저 사람 예쁘다. 참 잘하겠다. 너 정말 잘한다.
남이 평을 해주거든요. 예술이라는 것은 남이 평을 해줘야 잘된 것이지, 뭐 구렁이 지 몸에서 뭐 금빛 난다고?
내가 나를 추어선 안 되거든요.
절대 남이 평을 해줘야 그 사람이 성공할 수도 있는 것이고, 클 수도 있는 거예요.
나 혼자 내가 자신 있어, 나 혼자 내가 잘하는데? 니는 나보다 못하는데? 이런 생각 하면 그 사람은
아니에요. 예술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여.
- 나금추 구술_2017.2.14. 부안우도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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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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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2.14. 부안우도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신문기사>
2015.10.8. 전북일보_김보현 기자
2017.3.12. 새전북신문_이종근 기자
나금추(羅錦秋) 연보
1938(호적, 1941) 전남 강진읍 동성리 출생
1946 강진국민학교 입학
1953 광주 대성초등학교 졸업
1954 광주국악원 입문
1955 광주 수피아여중 2년 중퇴
1956 남원국악원 입문
1957 남원여성농악단 입문
1958 춘향여성농악단 활동
1962 결혼
1963~1972 아리랑여성농악단, 한미여성농악단, 전주여성농악단 등 활동
1986 전북도립국악원 교수
1987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상쇠 예능보유자
2001 전북도립국악원 정년 퇴임
2005 부안군으로 이거
2009 금추예술단 결성
2016 부안군립농악단 예술감독
2018 작고
수상
1957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남원여성농악단>
1976 전북농악경연대회 개인연기상
1983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
1985 제1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농악부문 장원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이리농악), 개인연기상
전라북도시자 표창장
1986 제4회 경주 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기악부문 최우수상(설장구)
전라예술제 농악부문 최우수상
1987 전북 영광의 얼굴상, 전라북도 문화상(음악부문) 수상
2013 팔도풍물굿쟁이전 감사패
공연
1957~1972 여성농악단 활동 공연
1970 오사카만국박람회
1972 제11회 전라예술제
1991 가고시마 공연
1983 한국명무전(국립극장)
1984 한국명무전(국립극장)
1992 제1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제12회 대한민국국악제 전주 공연(전북예술회관)
1999 제8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2001 제10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2004 전라도의 예인들_호남농악의 명인들(전주전통문화센터 한벽극장)
제13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05 제14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2006 제15회 2007 제33회 전주대사습 전야제 축하공연(전북교육문화회관)
2008 제17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
2009 제1회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고창문화의전당)
제35회 전주대사습놀이 전야제 축하공연 (전주덕진예술회관)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2010 춤추는 바람꽃 상쇠(한국문화의집)
2012 고창굿 한마당(서울 은평구 수색역 광장)
2013 전주세계소리축제 풍물명인전(한국소리문화의전당 놀이마당)
금추예술단 공연(춘천 공지천)
2014, 2016 전설의 설장고 이부산의 타의 향
2015 전주세계소리축제 전북농악명인전(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2017 제2회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국립극장 KB하늘극장)
문정숙의 색(남산국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