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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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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 2024-06-28 17:06
  • 조회 437

본문 내용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이명훈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6호 고창농악 이수자



나금추(羅錦秋, 1938~2018, 본명 나모녀)는 1957년 남원에서 결성된 남원여성농악단에서 징수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농악에 입문하게 된다. 농악뿐만이 아니라 판소리와 창극, 춤에도 뛰어난 예능인이었다. 한평생 꽹과리 가락에 한을 담아 신명으로 풀어내고 부포짓에 서러움을 날리면서 살아온 인생이었다.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지만, 명인의 인생살이는 달 밝은 밤이면 담벼락에 기대어 눈물 바람에 소리 한 대목 흥얼거리는, 한도 많고 서러움도 많은 전라도 굽이굽이 산과 강을 닮은 삶이었다.

1. 전남 강진에서의 유년 시절

1938년 음력 1월 16일, 전남 강진읍 동성리에서 아버지 나봉희, 어머니 함부영 사이에서 4남 4녀 8남매 중 막내 유복녀로 태어났다.(호적에는 1941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나금추가 태어나기 4개월 전에 작고했다. 나금추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님이 시골에서 큰 집을 사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주위에서 ‘오구삼살방’이 들어 이사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지만, 아버지는 이를 무시하고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제일 먼저 돌아가시고, 큰오빠는 매미 잡으러 나무 위에 올라가 떨어져 죽고, 나머지 오빠들도 사고와 마마(손님)로 다 잃었다. 어머니는 딸 넷을 데리고 나와 다른 집에 살면서 농사지으며 어려운 시골살이를 하게 된다. 강진초등학교에 다니던 열네 살 무렵에 어머니마저 4월 초파일 날 해남 대흥사 가는 길에 트럭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넷을 잃은 후 형편이 어려워 강진에서 살기 힘들어지면서 광주에 시집와서 사는 셋째 언니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2. 광주; 국악의 길로 들어서다

열네 살에 광주로 이사 나온 후에는 언니네 집에서 조카를 봐주면서 생활하였으며 광주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여섯 살에 수피아여중에 입학하였다. 당시 셋째 언니의 집은 광주 사직공원 옆에 있었으며, 인근 광주천 변에서 가설극장 공연이 자주 있었다. 가설극장에서의 공연을 보고 국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 사직공원에서 국악 하는 아가씨들이 머리 길게 따고 목 틔우러 간다고 사직공원에 가. 요렇게 
지나가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그걸 보면. 나도 저런 걸 배웠으면. (중략) ‘저런 걸 배웠으면 
좋겠다’ 하고 있었는데, 광주천 변에 가설극장이 되어갖고 약장수 판도 들어오고, 임방울 선생님도 
초빙해서 판소리도 가르치고, 줄 타는 김영철 선생님도 와서 줄도 타시고, 그때 사람들이 많이 모 
여 선전을 허면서 약을 팔고, 잠깐 무대에서 사극이나 연극도 좀 하고, 또 중간에 약을 팔고 그런 식 
이었고, 노래하고, 화려한 옷 입고 춤추는 것이 너무 좋아 보였던 거야.

-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나금추)_2011. 전북도립국악원

한번은 임춘앵 창극단이 들어왔어, 광주 태평극장에서, 여성국극단, 사직공원 옆, 우리 언니네 집 옆 
에서, 손님들 모이라고 입구에서 몇 명이 나와가지고 꽹과리 치고, 장고 치고, 징 치고. 
그렇게 좋게 들리는 거여, 그 소리가. 그래서 그리고 몰래 갔어, 하여튼 극장이 끝날 때까지 갔어, 
학교도 안 가고 계속, 아침밥 먹으면 거기 가서 쪼그리고 앉아서, 그래가지고 내가 바람이 난 거야, 국악 쪽 바람을.

-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나금추)_2011. 전북도립국악원


이렇게 국악 쪽에 바람이 나서 학교에 간다고 나와서 몰래 국악을 배우려고 정광수 선생이 소리를 가르치고 있던 광주국악원에 3개월을 다녔다. 정광수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한애순(소리꾼)의 오빠 한진옥에게 승무를 사사했다. ‘금추’라는 예명도 이때 얻게 된다. 사직공원 옆에 있던 향교의 어떤 어르신이 국악을 하려면 예명이 있어야 한다면서 ‘금추(錦秋)’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정광수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는데 판소리가 어렵고 잘 안되었다. 빨리 배워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그러다가 집에 탄로가 나서, 사촌 오빠한테 불 지피는 장작개비로 죽지 않을 만큼 맞기도 하였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어차피 집안 사정상 고등학교 진학도 어려우니 제발 국악원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해도 소용이 없는 날들이었다.

3. 남원; 여성농악단의 길을 가다

1956년 광주 수피아여중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1957년 광주 태평극장에 들어온 임춘앵 여성국극단과 약장수 극을 보고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함께 살고 있던 셋째 언니네가 전업사를 하고 있어 집에 늘 현금이 있었기에 돈을 훔친 후 옷만 겹으로 입고 밤에 남원으로 향하던 약장수를 따라나선다. 약장수 일행은 나금추를 남원국악원에 떼어 놓게 되고, 나금추는 아무 연고도 없는 남원국악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남원국악원에는 김용훈 선생이 소리를 가르치고 있었고, 강도근 선생은 향교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 남원국악원과 향교에서 밥해 주고, 청소해 주고, 먹고 자면서 강도근에게 흥보가, 김영훈에게 춘향가를 1년 정도 배웠다.


나도 내가 참 좋아서 내가 미쳐서, 내가 집도 내방쳐 놓고 내가 도망가서 내가 배왔는디, 정말로 정 
말로 힘들었어요. 가락도 안 되죠,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지요, 어디 막 객지 나와서 뭐 아는 
사람도 없고, 연고도 없고, 남의 집 밥해 주고 청소해 주고 먹고 얻어먹고 있어야 되죠, 정말 힘들어요. 
막 손이 다 갈라지고 막 찢어지고 헐 정도로 막 일은 해야 되고, 울면 운다고 혼나니까. 
또 학원에, 큰 항아리가 옛날에는 좀 조금 살았다는 집은 다 있더구먼요. 양식 항아리가 뭔 항아리가, 
하여튼 우리 같은 사람 셋 넷 들어가도 안 차는 그런 큰 항아리가 있어. 거기다가 반절 들어가서 고개를 
처박고 울었어요. 거기서 울면 바깥으로 음이 많이 안 새 나가니까, 그거다 대고 울었어도, 그만두려고 막상 생각하면 
또 그 지나갔던 그 세월이 너무 억울해요. 그래서 지나고 지나다 보니까 이제까지 왔네요. 
근데 권태기가 분명히 있어요. 하다 보면 아이 못 하겠다.
남들은 다 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안 되는가 이런 거가 있어요. 근데 그걸 넘기면은 해요.

- 나금추 구술_2017.2.14. 부안우도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나금추의 초창기 삶은 배고프고 서러운 삶의 연속이었지만 국악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이겨 냈다. 
그 이후 로도 수도 없는 신산 고초를 겪어 내서인지 그의 쇠가락과 소리에는 눈물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열일곱 살 되던 1959년에 남원국악원에서 전국대회를 준비하며 ‘남원여성농악단’을 결성한다. 나금추는 강초은(강백천의 손녀), 장홍도·김문선(이상 상쇠), 장성남·오갑순(이상 장구) 등과 함께 징수로 참여하여 전국농악경연대회(서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농악단원들은 대부분 남원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공부하는 여성들이었으며, 나금추는 대회를 준비 

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악에 입문하게 되었다. 대회 이후 ‘남원여성농악단’은 해체되고 다시 결성된 ‘춘향여성농악단’의 여성 상쇠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춘향여성농악단은 오갑순의 수양어머니가 오갑순을 위해 결성한 단체였으며, 단원들은 남원여성농악단 단원들과 오갑순의 동생, 안숙선, 안옥선, 정영자, 신영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단장은 오갑순의 수양어머니(강금순_강도근의 여동생)가 단장을 맡았다. 그때 강도근 선생이 단체를 따라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판소리를 가르쳤다. 춘향여성농악단에서 3년간 활동하면서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여성농악단의 공연 레퍼토리는 농악, 토막극 등이었다. 여성농악단은 인기를 많이 얻게 되었고, 이후 여성 농악의 붐이 일어나 전주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한미 여성농악단, 김제 백구여성농악단, 정읍여성농악단, 호남여성농악단 등이 결성되어 활동하게 된다. 1963년 미국 공연을 위해 전국의 각 여성농악단체에서 선발된 여성 연주자들이 서울 비원에서 3개월 동안 합숙을 하게 된다. 전라도의 농악 명인들을 초빙하여 지도를 받았다. 이때 정오동에게 열두발을, 광주의 김재옥에게 쇠와 부포춤을, 정읍의 김병섭에게 장구를 사사했다.


그리고 이제 그 최종적으로 이제 그 끝에 하고 온 것은, 미국에서 잘하는 사람들을 전라북도에서 
뽑아서 선수를 좀 키워갖고 미국에서 초빙을 해 간다고, 그런 소문을 들었던가 봐요, 남원에서 있을 때. 
그래갖고 남원에서 오갑순이, 나, 또 누구 하나가 이름을 이제 잊어버렸는데, 그 셋이 뽑히고, 
전주에서 고법 치는 김동준 씨, 그분 동생이 행옥이라고 있어. 막냇 동생, 뚱뚱하니, 가가 꽹과리 쳤어. 
가하고 유지화하고 또 뽑혀 오고, 정읍에서도 누구누구 뽑혀 오고, 또 뭐 그때 한참 막 여성농악 
단이 붐이 일어날 때 뽑혀 오고, 뭐 어디 어디서 또 뽑혀 오고, 한 열댓 명이 뽑혀 왔어, 서울로. 
그래 갖고 그 사람을 그 남원에 그 김광식 씨라는 그분이 좀 건달 비슷한 그런 분이에요. 근데 참 사람 괜찮은데, 
그런 분이 단장을 맡았고, 그분이 이제 서울에다 우리를 데려다 놓고, 이제 합숙을 시키면서 그때 처음으로 
그 선생님들 초빙해다가 배워요. 처음으로 김병섭 씨 데려다가 장구 배우고, 정오동 씨 데려다가 12발 배우고, 
김재옥 씨 모셔다가 우리 꽹과리 배우고, 이런 식으로 이제 연습을 하는데, 거기서 한 달 보름 정도 연습을 했어요.
깨진 쇠 갖고, (소리) 나는 쇠 갖고는 혼난게, 시끄럽다고 혼난게, 다다다다 깨진 쇠 갖고 다 쳐봤어요. 
그러면 깨진 쇠에서 막음쇠 하다 보면 살이 찍혀, 사이에 손도 비고 피도 나고 하면서도 그렇게 연습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선생님이 그랬어. 그래~ 백한 번 연습한 사람하고 백 번 연습한 사람하고 한 번 더 한 사람이 훨씬 낫더란다,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알고 지금까지 배웠고.
이렇게 연습을 하고, 먹고 자는 것은 이 여관에서 먹고 자고. 
아~ 근데, 한 달 보름이 가도 연락이 없어. 두 달이 가도 연락이 없어.
초빙한다는 사람이 아무 연락이 없어요. 그럼 서울에서 계속 경비만 나지, 갈 수가 없잖아요. 
연락 안 하면, 초빙을 안 한게. 그래 이러면 안 되겠다. 우리 기왕에 와서 이렇게 연습했으니까, 
민문화관, 문화관에서 공연이나 한번 하고 내려가자. 그래서 거기서 공연을 한 번 하는디, 정말로 거기서 호평받았어요. 
시민회관에서 공연할 때, 글 안해도 뭐, 여성농악 다니면서 다 잘한다 소리 듣는 사람들인데, 거기서 연습하고, 
거기서 맘먹고 했으니 얼마나 잘하겠어요? 정말 잘한다고 호평받아 갖고 거기 그 뭉친 사람들이 흐트러지면 안 되게 
생겼으니까, 그 사람을 잡았어요. 그 전주 사람 하나가. 그 사람이 누구냐면, 그 유지화 남편 이방근이라는 사람이 잡아갖고,
그래도 간 사람은 가고 안 간 사람은 안 가고 전주서 모이는디, 이제 나는 갈 데가 없었어. 집이 없응께, 
또 도망 왔응께. 도망갔으니까 집을 못 들어가니까 전주로 떨어졌어요. 그래갖고 이방근 씨란 분이 우리 애기 아버지 
친구하고, 나를 안 보낼려고, 말하자면 중신을 한 거여. 그래갖고 결혼이 됐어요. 그래서 계속 그 뒤로 같이 있었지.

- 나금추 구술_2017. 부안우도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그러나 미국에서 초빙을 취소하게 되고 단체가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연습한 것을 한번 무대에 올려보자 해서, 서울 시민회관에서 고별 공연을 하게 된다. 고별공연 후 단원들은 서울에 남을 사람들은 남고 각자 고향으로 내려간다. 나금추는 전주로 내려왔다. 이때 아리랑여성농악단의 단장이었던 이방근(유지화의 남편)의 권유로 아리랑여성농악단 상쇠로 합류하여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당시 여성농악단의 공연을 보고 신기남(장구 명인)은 다음과 같이 나금추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 쇠로는 나금초가 잘 치거던. 참 잘 쳐. 지금도 나금초 쇠 치는 것 보고 싶어. 상쇠짓 허는 것이 
나 모든 것 다 보고 싶어. 참 그짓말 아니라 잘 쳐. 갸들 서이 시방 잘 치는만. 나금초 밑이 부쇠고. 
갸들이 전주에 있는 아리랑 농악대 단원들이고만.

- 신기남, 『어떻게 하면 똑똑헌 제자 한놈 두고 죽을꼬?』 , 뿌리깊은나무, 1992


4. 결혼, 고된 시집살이, 생계와 육아를 위해 농악 강습 활동

이방근의 중매로 이방근의 친구인 국악 동호인 장금동과 결혼하였으며, 결혼 이후 2년간 시집살이로 활동을 중단했다.
이방근의 중매로 장금동(당시 29세)과 21세에 약혼식을 하고, 22세에 신태인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친정 식구들에게는 연락도 못 하고, 혼수품은 이불 한 채, 시어머니 옷 한 벌이 전부였다. 신태인에 있는 시댁에 들어가 살면서 고된 시집살이 끝에 1965년 결혼 3년 만에 큰딸을 출산한다. 이후 2남을 더 출산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큰딸 출산 후 시댁으로부터 전주로 분가하면서 국악 동호인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이 있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남편 장금동은 소리북을 잘 치는 국악 동호인이었는데,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비번인 날에는 나금추의 부포도 만들어주고 단체 일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때부터 전주에서 농악을 하면서도 홍정택에게 적벽가와 수궁가를, 김동준에게 심청가를 배웠으며, 오정숙과 남해성에게도 판소리를 사사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대외적으로 활동의 어려움을 겪는다.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면서 어려운 살림을 위해 전주농고 농악팀 강습과 개인 강습을 통해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전주농고 농악팀을 가르쳐서 대통령상도 받고, 1970년에는 일본 공연(오사카 만국박람회)까지 다녀오기도 하였다. 판소리와 농악을 병행하면서 판소리를 부전공으로 하고 농악을 전공으로 택해 활동을 이어간다. 판소리를 좋아하고, 국악 전반을 좋아해 국악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서 판소리, 가야금, 춤을 배웠으며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농악의 꽹과리 소리가 제일 좋아 농악인, 상쇠로서 활동을 중심에 두었다.

5. 전주; 판소리와 농악경연대회 대상 수상
1976년, 나금추의 나이 38세에 전북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상쇠로서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에는 전주에서 
열린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에서 심청가 중 주과포혜 대목을 불러 장원을 받게 된다. 그동안 홍정 
택과 김동준 등으로부터 배운 판소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소리 잘한다는 그런 소리도 많이 들었어.
왜냐면 어디 부산 같은 데, 아니면 어디 큰 공연장에 판소리하는 사람들 오고, 농악 하는 사람들 가고, 
줄 타는 사람도 오고, 막 그렇게 큰 공연장에, 그러면 옛날에 박초월 씨가 많이 왔어, 많이 왔다 만났어, 
박초월 씨는, 우리는 공설 운동장에서 부산에서, 공설운동장에다 이렇게 우리 노는데 잡아놓고, 
박초월 씨는 이제 조그마한 무대 하나 지어놓고 거기서 한디, 우리가 농부가를 하잖아? 농부가를 허면,
‘아이고~ 불쌍한 인간아, 가시나야, 목구녁이 그렇게 이쁜데 왜 소리를 안 하고, 마당에서 그걸 뛰고 있어, 
마당에서, 소리 아무리 잘한다는 사람도 마당에서 한바탕 뛰고 나면 목이 갈리는디, 갈리도 않고 저렇게 목이 좋을 때는, 
소리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왜 소리하지, 왜 저거 농악을 한가’ 박초월 씨가 맨날 그랬어.
근데 난 이것이 좋아. 일단은 좋아. 내가 좋아서 배운 것이기 때문에 좋고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그냥 응. 
근데 소리도 한참 잘한다고 했어. 나한테. 왜냐하면 잘한다기보다 목이 너무 예쁘다고 했었어. 
그래서 소리도 할려고도 했는디….
그래갖고 소리를 하면서도, 또 남들이 잘한다고 하고 나도 좋아서 하면서도, 아, 나 이거 배우면 몸도 크고 얼굴도 안 이뻐서 그거는 안 되고 그냥 농악이 내가 내 전공이고 이거는 부전공으로 한다, 
이렇게 생각했어. 그래도 소리도 좋아. 너무 좋아. 소리도.

- 나금추 구술_2017.2.14. 부안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그리고 저도 뭐 판소리 5바탕 다 띄고(떼고), 또 가야금도 다 성금연류 가락도 띄었고(떼었고), 뭐 승무도 췄고, 
뭐 살풀이도 했고, 무용도 잘 띄었었어요(떼었었어요).
판소리 정말 나도 판소리 좋아하거든요. 
근디는 농악이 더 좋아요. 
농악이 더 좋아서 지금까지 농악만 이렇게 붙들어 잡고 있는 것이 어떻게 지금, 
지금 뭐 정말로 나는 보람되고 또 자랑스럽고 잘 했다라고 난 지금도 생각해요.
나이가 80이 다 됐는데 정말로 자랑스럽다고 생각해요. 
너무 우리 제자들 훌륭한 제자들이 제 옆에 많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정말 좋아요.

- 나금추 구술_2017.2.14. 부안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1982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일보사와 일간스포츠사의 공동 기획으로 전국의 명무들을 발굴하여 초청한 한국명무전이 국립극장에서 열린다. 나금추는 30대 후반에 이 한국명무전 무대에 호남우도농악 뻣상모 상쇠춤으로 네 번이나 출연하여 여성 상쇠, 부포춤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다. 당시 한국명무전에는 춤, 농악, 탈춤, 궁중무용 등의 여러 명무들이 무대에 서서 큰 호응을 받았다. 농악에서는 우도농악의 전설적인 쇠 명인, 장구 명인들이 대거 출연하였는데, 여성 상쇠로서는 유일하게 출연하였다. 쇠 부포놀이를 완성된 형태로 무대화한 최초의 개인 놀이였으며, 네 번이나 출연할 정도로 큰 인기가 있었다.


그때가, 서울에서 처음 공연하는 것은 명무전이라고, 예, 명무전을 내가 네 번을 나갔었어요. 
처음 나갔는데, 그때가 몇 년도인지는 모르겄고, 나이가 한 서른 칠 팔, 그 정도로 나갔고.
그 전에도 한 번 나갔었고, 그 후에도 나가서 김병섭 씨가 장구 치고 내가 또 한 번 했고, 또 그 후에 
한 번 더 나가서 또 뭐야, 이리 김형순 씨가 장구 쳤고, 유지화가 징 치고, 또 한 번 했고, 네 번이나 나갔었거든요.
예~ 그때 나는 이제 시골에 사니까 거기가 어디인지는 모르는데 국립극장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맛도 모르고, 내가 솔직히 말해서 맛도 모르고 멋도 모르고 그냥 막 젊은 혈기로 
그 기운만 넘쳐서 그냥 했어요. 했는데, 그때는 털도 닭털, 닭털을 이어가지고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털도 안 좋고, 근데도 그때는 그 농악 한 사람들이 많이 없었는지 하여튼 구경하는 사람도 많았고, 
서울이 좀 까다롭거든요. 그 예술 보는 눈이 잘하는 사람 다 모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잘한다고 참 많이 호평을 해줬어. 그래서 계속 나가다 보니까 네 번을 나갔고….

- 나금추 구술_2017.2.14. 부안우도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그의 상쇠춤은 탄력과 부드러움 속에 넘보지 못할 힘이 있다. 쇠가락이 노련한 데다가 일생 판놀음에서 
겉보기 모양새에 신경을 써야 했던 여자 상쇠의 단련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발 디딤새가 무술로 단련된 사람마냥 정확하고 재빠르며 힘차고 부포를 돌리는 고갯짓에도 낭비가 없다. 
장단 사이마다 펼쳐지는 팔 사위에 타이밍이 정확하고 시원하다. 이름다움과 힘의 조화가 뛰어나고 
드러움 속에 내비치는 예쁘고 고운 맛이 인색하지 않다. 나이보다 앳되게 보이는 얼굴, 무심한 듯 
푸근한 자태에 쇠가락 춤사위가 화려하다. 
무(武)와 무(舞)를 한가지로 본 한국의 전통적인 춤사위의 개념이 그의 발디딤에서 탄력·가벼움·힘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 한국의 명무_1985, 한국일보사, 구희서의 글 중에서


위와 같이 나금추는 한국명무전에 상쇠춤으로 네 번이나 출연하여 쇠가락은 물론 춤사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펼치면서 여성 상쇠로서 큰 호평을 받았다.
1985년 강릉에서 열린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전북 대표 이리농악단(단장 김형순) 단원 80여 명을 지도하고 
상쇠로 출전하여 대통령상과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전라북도에서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전라북도 
대표로 상을 한번 타보자고 작정하고 이리농악을 출전시킨다.



여성농악단 상쇠 나금추는 1985년 강릉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이리농악단>의 상쇠로 참가하는데, 
이 단체는 여기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이후 활발한 활동으로 현재 호남우도 농악을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1985년 당시 <이리농악단>에는 그해 말에 김형순(설장고)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농악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김문달(상쇠)과 유명한 꽹과리 공연자 강기팔이 있었으나 정작 경영대회에는 나금추를 데려다 
출전시킬 정도로 나금추의 기량이 인정되었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단체상인 대통령상 외에 나금추에게 
개인연기상이 동시에 주어졌는데 이와 같이 대통령상 수상팀의 개인에게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고 한다.

- 유장영, 「호남우도 여성농악」, 『한국의 농악-호남편』, 한국향토사연구회 전국협의회, 1994



김형순을 단장으로 한 이리농악단원들과 금마 기세배 단원들, 그리고 부녀자들 80여 명을 나금추가 4, 5개월 출퇴근하면서 
가르치게 되었고, 80여 명을 통솔하며 지도하는 일이 힘들어 가르치면서 몇 번이나 쓰러졌다고 한다. 
그런 데다가 남편은 병환 중이어서 정신은 집에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전라북도 대표팀으로 왔으니까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대회에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상을 받아주고. 도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우리 풍물 한 사람들을 그날 경연 끝나고 심사발표도 보지 못하고 
다시 그 차로 우리는 바로 와 버렸어. 도청 직원들하고 몇 명만 거기에 남아있고. 
버스로 내려오고 있는디 버스 속에서 뉴스 들으니까 전라북도가 대통령상 먹고 개인상까지 먹었더라고. 
박순호 교수님이 옆에서 들응게 ‘저 상쇠가 대체 여자냐 남자냐?’ 이러면서 너무 잘한다고 
신들린 사람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하겠냐고 그 심사하신 분들이 그러면서 대통령상 준 데는 역대 개인상이 없어.
근데 ‘뭔 소리냐, 잘하는 사람을 주게 되어 있는디 저 사람같이 잘한 사람이 또 어디 있냐?’라고 그때 내가 개인상을 받았어.

-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나금추)_2011. 전북도립국악원


이 대회를 계기로 이리농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되었으며, 김형순(설장구)이 개인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금추는 이리농악과 지역적인 연고가 없기도 하였지만 가정 형편상 이리농악으로 활동하기도 어려웠고 같이 활동할 여력이 없어서 이리농악으로 문화재 지정을 거절하였다고 한다.그리고 전주에서 열린 제11회 전주대사습놀이 농악 부분에서 상쇠로 출전하여 장원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가 40대 중반 나금추 농악 인생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원인 모를 신경통을 앓고 있던 남편 장금동이 30만 원짜리 월세방만 남겨 놓은 채 작고하게 된다.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진짜 힘들더만, 정말 그때 많이 울고 살았네. 그때 정말 많이 울고 살았어. 애 아빠가 죽고 나니까 막막한 거야. 
그때 큰딸이 전북대학교 시험 봐놓고, 우리 큰아들이 상산고 3학년,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고 그랬어. 
어떻게 해서 갈쳐야 하는데, 돈은 없고.

-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나금추)_2011. 전북도립국악원



남편이 작고한 후 살림과 삼 남매의 교육을 위해 전주 농림고, 전주 비사벌예술고, 군산 동중, 김제 농림고, 정읍 감곡초, 김제 봉남 등에서 강습으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면서도 판소리 공부와 농악 활동을 계속 이어가던 중, 1986년에 경주에서 열린 제4회 전국국악경연대회 기악 부문에서 설장구로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6. 전라북도 최초, 최연소 상쇠 예능보유자 지정되다

나금추는 1987년에 전라북도 최초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이 된다. 당시 전라북도에서는 농악 부문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단체나 개인이 없었다. 이리농악에서 활동을 권유받고 문화재 제안도 받았지만, 가정 형편과 전주에서의 활동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거절하였는데, 전라북도에서 농악으로 개인 예능보유자를 처음으로 지정한 것이다. 당시 나금추의 나이가 불과 40대 후반이어서 문화재 지정이 너무 이르다는 평이 있었는데, 워낙 농악에 대한 기량이 탁월하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과 개인상, 전북농악경연대회 개인연기상,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농악 부문 장원, 전국국악경연대회 기악 부문 최우수상 수상 경력과 한국 명무전 최다 출연 등의 업적을 인정받아 40대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어 전라북도 영광의 얼굴상 수상, 전라북도 문화장상 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긍게 나는 마흔여섯인가 일곱인가에 문화재가 되었어. 이리농악으로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막 받고.
런디 전주 와서 이리농악과 같이하겠냐고 물어보는데, 집이(애 아빠 병석으로) 이렇게 생겼는디, 
내가 또 어떻게 떨어져 있어서, 뭐 정신이 없더라고. 
난 필요 없다고, 안 한다고, 그냥 여기서 집에서 애들하고 활동할 텐께 거기서 하라고 했더니, 거기서(이리)도 
어떤 상쇠 치시는 분(김문달)이 문화재를 받았는데 얼마 못 가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장구 치는 김형순 선생 혼자 
문화재로 계실 거야. 그리고 나는 여기 있응께, 박순호 교수님이 문화재 위원에 있었응게, 그때 내 나이가 50도 
안 되었는데 문화재를 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세상에 이렇게 화려하고 경력이 좋은 사람이 되는디, 이런 사람 안 주면
누굴 주냐’고, 막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셨나봐. 다 늙어서 그렇게 주면 되느냐 해서 일찍 받았어. 
내가 기록을 깬 거여. 나이가 안 찼는데, 40대에 내가 문화재를 받았으니까. 
내가 그걸 40대에 받았고, 받고 나서야 그 문화재가 말하는 쇠, 장구 묶어줘야 되는데, 장구가 없으니까 
부안농악하고 김제농악, 박판금 씨하고 했으면 어쩌겄냐, 그런데 나는 별로 뜻이 없었어. 
그러면 부안에 이동원 씨하고 했으면 어쩌겄냐 그래서, 안면도 있고 많이 본 분이니까 ‘그럼 그렇게 하자’ 해서 
문화재는 내가 먼저 받고 인제 이 사람들은 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가서 1등 한 번 하고 그것으로 해서 
문화재 올려서 이동원 씨가 된 거야. 근디 같이 받았는디, 받고 나서 같이 활동을 한 번도 못 했어. 
그냥 병석에 계셨다가 가셨으니까. 그래서 그냥 계속 내가 맥을 잇고 있는 거지.

-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나금추)_2011. 전북도립국악원

7. 전라북도립국악원에서 농악 교육에 앞장서다

1986년 7월에 전라북도립국악원이 개원한다. 도립국악원은 전라북도 도민들을 위하여 판소리, 기악, 춤, 농악 등을 교육하여 국악 발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나금추는 1987년에 교수실 민요 2반 강사로 임명되어 민요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당시 농악반 전임강사로 이리농악 설장구 예능보유자 김형순이 재직하고 있어서 농악반이 아닌 민요반 강사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농악반 강사로 옮겨 농악 교육 활동을 이어갔고, 연수생들과 동료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하는 재담과 푸근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우리 국악의 멋을 알리는데 앞장서 왔으며, 2001년 6월에 정년퇴임을 했다. 나금추는 교육 활동 이외에도 도립국악원 교수 일행 등과 함께 공연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 초청공연, 1991년 일본 가고시마 공연, 1992년 <제1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상쇠춤 공연, 전라예술제, 전주대사습놀이 축하공연, 도립국악원 교수부 정기공연 등이 대표적이다.


1992년도에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린 <제1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무대에서 선보인 나금추의 상쇠춤 공연을 보고 당시 전주문화일보 이상덕 기자는 다음과 같이 평을 했다.


이번 춤판에서 나금추 씨는 상쇠춤을 선보였다. 판굿에서 벌어졌던 민중적 춤사위가 아직도 개인 

춤으로 승화되지 못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 씨의 쇠 치는 솜씨는 그 장단에 춤이 스며있다는 

실 하나만으로도 신선한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삶과 예술이 쇳소리 속에서 녹아들고 춤사위 속에 

절도 있게 펼쳐진 상쇠춤은 진진몰이로 몰아나갈수록 그의 진가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는 억제의 효용을 알고 있어 부드러움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느끼게 했다.


- 1992.8. 문화저널-이상덕(전주일보 문화부 기자) 문화시평(제1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중에서



 8. 금추예술단, 천하의 상쇠 나금추로 우뚝 서다


나금추는 전북도립국악원 퇴직 이후 2002년부터 전업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젊은 농악인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제자 양성에 입소문이 나서 2004년부터 서울·수원·안동·부안·광주·전주·여수 등지에서 찾아온 제자들 양성에 온 힘을 다하기 시작한다. 

한평생 농악인으로서 살아온 삶과 예술을 전하는 데 혼신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 활동도 계속 이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공연이 2006년도에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13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상쇠춤 공연과 전주 한벽극장에서 열린 <전북농악명인전>,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 공연이다. 나금추는 1992년부터 2009년까지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에 총 6회 출연하였다.

 


 

2005년에는 부안농악의 활성화를 위해 거처를 부안군 행안면으로 옮긴다. 이후 옛 고성초등학교를 이용하여 마련된 부안우도농악전수관에서 부안농악 전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2011년도에는 부안군 무형 문화재 종합전수관이 개관되어 이곳에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전수생들을 위한 부안농악 전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70대 노익장 나금추의 명성을 듣고 한 가락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전수생들로 방학 때마다 북적였다.

2004년부터 나금추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이어온 제자들은 스승의 삶과 예술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이를 펼치기 위하여 2009년 ‘금추예술단’을 조직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금추예술단이 자리 잡기 전, 고창에 있는 (사)동리문화사업회의 기획으로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의 타이틀을 걸고 전주와 고창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호남우도농악 최고의 여성 상쇠의 진면목이 보였던 무대였다. 그동안에는 부포춤으로만 무대에서 선보여 왔었다면, 이 공연은 나금추의 전 레퍼토리를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판굿과 농부가, 그리고 부포놀이, 설장고로 구성된 무대는 관객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첫째마당에서 둘째마당의 오방진으로 굿이 진행되자 능란한 상쇠의 진두지휘 속에 

치배들은 맘껏 놀기 시작했다. 치배들의 얼굴에 환한 신명이 피어올랐고, 그것은 곧 객석으로 전염되어 

관객들은 손뼉을 치며 들뜬 고함을 쳐댔다. 자갈자갈한 음색에 늘였다 조였다 하는 상쇠의 쇠가락 때문에 

나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배가 또 살랑살랑 간질간질’대고 있었다. (중략) 맑고 경쾌하고 재빠른 자진삼채 대목이 되면

나는 발가락이 살짝 오그라드는 가벼운 긴장감이 들었다. 

살짝 소리를 죽여 치다가 어느 순간 벼락같이 매도지가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굿 하나가 끝날 때마다 묵은 것이 쑥 내려가듯 시원했고 관객들은 무대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2009.7. 문화저널-권은영(전북대학교 강사) 문화시평(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중에서 



 

 

이와 같이 나금추의 무대는 관객은 물론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나금추와 금추예술단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고, 한 시대를 꽹과리와 부포춤으로 풍미했던, 70대 노익장의 관록은 무대에서 더욱 빛이 났다.

이후 서울 중앙 무대에서도 다시금 초청을 받게 되는데, 2010년 ‘춤추는 바람꽃, 상쇠’ 공연이 그것이다. 

한국문화의집 기획공연으로 ‘춤추는 바람꽃, 상쇠’에 출연하여 호남우도농악 여성 상쇠로서의 공연을 금추예술단원들과 함께 했다.

 

2013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풍물한마당-풍물명인전(나금추·유명철) 무대에 올랐으며, 2015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 전북농악명인전(나금추·유명철·유지화) 공연으로 명품 굿판을 선보였다.

“나금추의 부포놀이는 너름새와 쇠가락이 일품이며, 장단과 춤과 소리가 하얀 부포의 움직임에 넘칠 듯이 묻어나며 여유로우면서도 경쾌하며 한의 정서와 신명이 멋드러지게 들어 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안농악을 이끌고 있는 나금추(77) 명인은 여성농악단의 초대 상쇠이자 최고의 상쇠로 평가받는다. 

다채로운 꽹과리 타법으로 풍부한 성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품. 

부드러움과 강함, 섬세함과 거칢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변주에 강하다. 

명인이 이끌고 있는 부안농악(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은 우도가락인 부안지방의 

유일한 농악보존회로, 호남우도농악과 경상 지역 농악 성격을 함께 지녀 음악과 

춤사위의 짜임새가 탄탄하고 생동감 넘치는 가락이 많다

 

 

- 2015.10.8. 전북일보_[소리축제-전북농악 명인전] 농익은 광대들의 ‘명품 굿판’_김보현 기자


 


2014년에는 국악방송에서 기록사업 일환으로 나금추의 판굿 가락과 부포춤 가락, 그리고 구음을 녹음했다. 70여 년 세월의 

경력이 쌓이고 닦여진 그의 농익은 가락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2017년에는 금추예술단 기획으로 제자들과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공연을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가졌 
다. 나금추의 나이 80세가 되던 해였다. 16년 동안 길러낸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선 마지막 무대였다. 600여 석의 객석은 
만석이었으며, 여성농악 상쇠로서의 곰삭은 가락과 춤이 펼쳐 진 거침없는 무대에 아낌없는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금추예술단이 19일 오후 4시 KB국민은행 청소년 하늘극장에서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를 갖는다. 
(중략) 이에 여성농악 상쇠 나금추 선생 80세를 기념, 제자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많은 이들에게 선보인다. 
상쇠 나금추는 부포놀이의 명인으로 너름새와 쇠가락이 일품이다. 

 

장단과 춤과 소리가 하얀 부포의 움직임에 넘칠 듯이 묻어나는 그의 부포놀이를 보고 있으면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8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상쇠춤으로 풍미했던그의 
명성에 부족함이 없는 기량을 선보인다. 부포를 쓰고 꽹과리를 들고 무대에서 보여주는 그의 

 

카리스마는 평생을 꽹과리 가락에 한을 담아 날리고 부포짓에 서러움을 던져버리며 살아온 인생의 참 
멋을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될 터이다.

 

- 2017.3.12. 새전북신문_여성농악 상쇠 나금추 기린다_이종근 기자


나금추는 말년에 부안에 정착하여 13여 년간 생활하면서 부안농악의 발전을 위하여 힘써 왔다. 그리고 부안군립농악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18년 6월 향년 81세에 지병으로 작고했다. 작고 직전까지도 제자들을 교육하는 일에 열정을 아끼지 않은 모습이었다.

9. 글을 마치며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가 우리 곁을 떠난 지 5년이 흘렀다. 나금추의 꽹과리 가락과 부포춤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무대를 기억하고 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마냥 국악이 좋아 시작하게 된 국악 인생, 배고픔과 서러움의 삶을 꽹과리 가락과 부포춤으로 견뎌온 인생, 진정한 농악예술인으로 칭송을 받아온 인생, 농악을 사랑하고 굿판을 사랑하고 제자들을 사랑했던 여성 상쇠로서의 예술 인생은 길이길이 후대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금추가 제자들에게 교육하면서 강조했던 이야기를 전하며 마치고자 한다.

 



그 어느 치배든지 각자의 맡은 바가 소중하고 최선을 다해야 되겠지만은 그 상쇠라는 것은, 

굿판에 어른은, 그 한 굿의 책임자이고 또 통솔하는 사람이고, 총 30명에서 50명을 다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야 상쇠를 해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상쇠예요.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그거 다 할 수 있는 것 같아도 그 통솔이라는 건 참 참 이상해요. 

상쇠를 맡았으면 그 굿판에서 최대한 그 어른다운 그런 행동을 해줘야 되고, 그 치배들이 좀 힘들어하고 

지치고 그럴 때는 빨리 그것을 상쇠가 알고, 빨리 그 치배들을 좀 걷어잡아서 빨리 끝내줄 줄 알아야 

그 상쇠의 그 통솔력이 빛난다 그럴까, 또 그 사람이 아 자질이 있다 그럴까, 상쇠라는 것은 내가 뭣을 돌리고 

무엇을 내가 좀 잘 보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통솔하는 데 전부 그 신경을 다 써야 돼요.

오방진 진을 쌓아야 된디, 저기 가서 이제 다 동그라미로 쌓으면, 삼십 명이면 삼십 명, 사십 명이면 사십 명이 전부 

그 사람 꽁지를 따라서 지금 한 덩어리 만들어서 지금 달팽이를 싸야 되는데, 이 사람이 여기서부터 상쇠가 여기서부터 

돌리고 뭣을 고개를 까딱거리고 이걸 부포를 세우고 갈 필요가 없어요. 그 사람은 빨리 가서, 자리를 딱 잡아서, 

우뚝 장군처럼 서 갖고 부포 탁 세우고 섰으면, 그거를 그 사람을 기둥으로 삼아서 막 대원들이 싸고 돌고 들어와야 빛도 나는 것이고 굿판도 아~ 참~ 과연 잘한다~ 이런 소리를 하지, 여기서부터 상쇠가 그냥 돌리고 막 무엇을 꺼덕거리고 하면, 

좀 뭐라 그럴까 좀 가볍게 보여요. 가볍게 보이고 그 사람이 그 기량이 좀 죽는다고 그럴까 난 항상 그렇게 가르치는데, 

상쇠라는 것은 나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단원을 위주로 해서 전 단원을 갖고 놀 줄 알아야 되고, 

전 단원을 살려줄 줄 알아야 되고, 그리고 상쇠가 그 굿을 딱 살려놓고, 내 기량은 개인놀이에서, 장고 개인놀이가 있고, 

소고 개인놀이도 있고, 꽹과리 개인놀이도 있으면 거기서 최대한 내 것을 보여줘요. 

그래야 상쇠가 ‘야~ 저 사람 참 잘한다, 참 여지가 있다, 큰사람 재목 되겠다’ 이렇게 표현해주지. 

막 다른 사람 돌려놓고 내가 좀 잘해볼라고, 내가 좀 사람한테 보여 주려고 뭣을 막 하려고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죽어져. 

자꾸 죽어. ‘아~ 저 자질이 없다. 저 뒤에 사람들 잘하게 잘하는 사람 보여주지, 왜 지가 앞에서 저렇게 저럴까’ 

그렇게 좀 마이너스가 돼요.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좀 위주로 해서 가르쳐주고 있고, 또한 제자들한테 공부시킬 때, 

내가 교훈 삼아서, 또 내 경험담 삼아서 얘기해준 것은, 아무리 예술을 잘하고 남이 못한 가락을 하고 남이 못한 짓을 하고 

해도 인간이 못되면 예술이 빛이 안 나요. 필요 없어요, 그 예술은. 어 진짜 바닥에 떨어지는 예술만 못해요. 

그렇지만 인간이 잘되고 좋고 인간성이 좋아야 돼. 첫째는 인간이 돼야 돼. 

첫째는 예술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먼저 돼라. 난 항상 제자들한테 그렇게 말하거든요.

인간이 먼저 돼라. 나도 성질 낼 줄 알고 나도 화낼 줄 알고, 나 제자들한테 욕 잘해요. 

근데 정 부아 날 때는 욕을 안 해요. 근데 좀 사랑스러운 마음이 있고 예쁘게 할 때는 내가 욕도 해요. 

에이~ 나쁜 사람들 욕도 하는데, 정말 내가 화났을 때는 욕 안 해요.

딱 돌아서버려요, 나 혼자. 근데 내가 그만치 제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욕도 하는 것이고 혼도 낸 것이고. 

근데 지금 갈쳐 보면, 참 내한테 배운 제자들은, 너무 훌륭한 제자들이 많고 너무 잘한 제자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참 예쁘고, 또 어느 사람 어느 선생이 안 그럴까마는, 저는 정말로 저 제 수족의 일부로 생각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 제자들이거든요. 누구든지 우리 제자들한테 조금 이라도 좀 싫은 말을 하면, 

정말 내 살을 깎아낸 것처럼 그런 아픔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랑하는 우리 제자들, 항상 내가 끝까지 나 죽을 때까지 

땅속에 들어갈 때까지 사랑해주고 가르쳐주고 영원히 그럴 거예요.

긍게 여러분들도, 어느 예술이 소중하지 않을까마는, 이게 그냥 정말로 그냥 뛰고 땀 뻘뻘 흘리고 

그냥 마당에서 그냥 다 돌고 그냥 하는 거, 우리 농악 예술들 예쁘게 봐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항상 

거둬주시고 그러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예술이라는 것은 무겁게, 무거우면서도 경쾌하게 많이 구르고 많이 크게 하면서 무겁게 그냥 막 가볍게 막 까닥하는 거, 그건 아니거든요. 부포짓도 또 무용, 손 한번 들면 무용도 같은 것이면무겁게 멋있게. 멋을 빼면 이거는 예술이 아니거든요.

뭣이든지 하다못해 탈춤도, 아니면 농악도, 다 그 속에서 무게가 있고 멋있어야 되거든요. 

그 분야 분야에서 그게 멋있게 무겁게 굼실거리고 해야 돼요.

절대 껍덕거리면 안 돼요. 많이 가르쳐보니까 진짜 여러 제자들이 납디다마는, 어떤 사람들은 그냥 

자기 멋에 취해서 꺼득꺼득헌디, 절대 그건 안 되거든요. 안 되고 무겁게 굼실거리게, 참 이쁘다, 이 예술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말하자면.… 내 태도는 내가 못 봐요. 지금인게 뭐 카메라 찍어서 나중에 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제 모습을 절대 볼 수가 없어.

그렇지만 남이 봐요. 남이 보기 때문에 남이 봐서, 아~ 하고 나오면 아~ 저 사람 예쁘다. 참 잘하겠다. 너 정말 잘한다. 

남이 평을 해주거든요. 예술이라는 것은 남이 평을 해줘야 잘된 것이지, 뭐 구렁이 지 몸에서 뭐 금빛 난다고? 

내가 나를 추어선 안 되거든요.

절대 남이 평을 해줘야 그 사람이 성공할 수도 있는 것이고, 클 수도 있는 거예요.

나 혼자 내가 자신 있어, 나 혼자 내가 잘하는데? 니는 나보다 못하는데? 이런 생각 하면 그 사람은 

아니에요. 예술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여.


- 나금추 구술_2017.2.14. 부안우도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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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노치에, 「1970년대 일본 연구자 고이즈미후미오 자료 중 나금추 설장구 녹음분석」, 서울대학교 동양 

음악연구소, 2017

조미연, 「우도농악 설장구의 명인 김병섭에 관한 연구」, 국립국악원, 2018 

<구술자료>

나금추 구술, 2008.6.26. 고창농악전수관

--------------, 2017.2.14. 부안우도농악전수관(구 고성초등학교) 

<신문기사>

2015.10.8. 전북일보_김보현 기자

2017.3.12. 새전북신문_이종근 기자

 

 

나금추(羅錦秋) 연보

 

1938(호적, 1941) 전남 강진읍 동성리 출생

1946 강진국민학교 입학

1953 광주 대성초등학교 졸업

1954 광주국악원 입문

1955 광주 수피아여중 2년 중퇴

1956 남원국악원 입문

1957 남원여성농악단 입문

1958 춘향여성농악단 활동

1962 결혼

1963~1972 아리랑여성농악단, 한미여성농악단, 전주여성농악단 등 활동

1986 전북도립국악원 교수

1987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상쇠 예능보유자

2001 전북도립국악원 정년 퇴임

2005 부안군으로 이거

2009 금추예술단 결성

2016 부안군립농악단 예술감독

2018 작고

 

수상

1957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남원여성농악단>

1976 전북농악경연대회 개인연기상

1983 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

1985 1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농악부문 장원

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이리농악), 개인연기상

전라북도시자 표창장

1986 4회 경주 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기악부문 최우수상(설장구)

전라예술제 농악부문 최우수상

1987 전북 영광의 얼굴상, 전라북도 문화상(음악부문) 수상

2013 팔도풍물굿쟁이전 감사패

 

공연

1957~1972 여성농악단 활동 공연

1970 오사카만국박람회

1972 11회 전라예술제

1991 가고시마 공연

1983 한국명무전(국립극장)

1984 한국명무전(국립극장)

1992 1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12회 대한민국국악제 전주 공연(전북예술회관)

1999 8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2001 10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2004 전라도의 예인들_호남농악의 명인들(전주전통문화센터 한벽극장)

13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05 14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전북예술회관)

2006 152007 33회 전주대사습 전야제 축하공연(전북교육문화회관)

2008 17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

2009 1회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고창문화의전당)

35회 전주대사습놀이 전야제 축하공연 (전주덕진예술회관)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2010 춤추는 바람꽃 상쇠(한국문화의집)

2012 고창굿 한마당(서울 은평구 수색역 광장)

2013 전주세계소리축제 풍물명인전(한국소리문화의전당 놀이마당)

금추예술단 공연(춘천 공지천)

2014, 2016 전설의 설장고 이부산의 타의 향

2015 전주세계소리축제 전북농악명인전(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2017 2회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국립극장 KB하늘극장)

문정숙의 색(남산국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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