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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평생 무대서 살고싶었던 배우, 이덕형 | 자화상
전주문화재단 평생 무대서 살고싶었던 배우, 이덕형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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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무대서 살고싶었던 배우, 이덕형
  • 2024-07-0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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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평생 무대서 살고싶었던 배우, 이덕형

- 살아서도 죽었던 삶, 죽어서도 오를 무대

 

 



 

 

 

김미진 전북도민일보 문화교육부 부장 


 


배우 이덕형은 연기를 매우 잘했다. 애초에 가진 재능이 남달랐다. 어떤 배역을 맡겨도 말 그대로 ‘이덕형화’시켰다. 믿고 보는 배우, 이덕형이었다. 연출가들은 곧잘 그에게 1인 다역을 맡겼다. 무대 위에 선 이덕형은 큰 역할을 맡든 작은 역할을 맡든지간에 객석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여러 역할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참, 재주였다.
방송인 이덕형은 끼가 넘쳤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대로 연습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어슬렁어슬렁 기웃기웃하며 기만 했던 것 같은데 ‘큐’ 사인만 있으면 술술 자신의 역할을 해 냈다. 생방송 중에도 감각 있는 말솜씨로 청취자들의 배꼽을 빼놓았고, 구름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찬 공연장에서 사회를 볼 때도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걸쭉하고 찰진 사투리는 큰 웃음을 선사했다.
인간 이덕형은 술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술을 함께 나눌 사람을 좋아했다. 한 잔의 술은 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독이 되었다. 아들을 앞서 보내고, 무너져 버린 이덕형은 회복하질 못했다. 살아서도 죽었던 삶이다. 이덕형은 그 좋아했던 술로 자신을 더욱 망가뜨리는 길을 걷게 된다. 그를 사랑하는 연극인들은 안타까워하며 그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기다렸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걸어왔던 탓일까? 너무 일찍 이승과 이별하게 된 이덕형. 사람들은 그가 죽어서도 그 좋아하던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봄, 이덕형의 타고난 끼를 알아본 사람들

이덕형은 1964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내용이 없지만,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어렵지 않은 형편에 구김살 없이 자랐던 소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이덕형은 영혼의 단짝, 권오춘 씨에게 멋쟁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덕형은 아버지에게서 당구를 배웠을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다고 한다. 너무 잘 가르쳐 놓아서인지 그 실력이 월등해 500점을 쳐 연극계에서는 초절정 고수로 통했다. 그런데 집안이 기울기 시작해 전주대학교 1학년 때는 휴학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했다. 주변에 워낙 사람이 많았던 이덕형에겐 등록금을 대신 내주겠다고 나서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으나 이덕형은 남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결국엔 대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연극뿐이었다. 1983년 전주대 ‘볏단’ 대학극회에서 연기를 시작한 이덕형은 그해 전문예술극단 ‘황토’에 입단해 평생 사모하던 그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 나그네가 되었다.



“이덕형을 처음 봤던 곳이 막걸릿집이에요. 제가 1982년도에 극단 ‘황토’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생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이덕형을 그곳에서 만난 거죠. 그 친구가 막걸릿집에 

서 노래하고 노는데, 그 모습이 참 예술인 거예요. 극단 ‘황토’의 연출가 박병도 선생님이 덕형이에게 

‘너 졸업하면 연극 해라’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한 것이 진짜가 되어 버렸죠. 

이덕형이 전주대학교에 입학하더니만 대학극회 ‘볏단’에 입단해 활동을 시작했어요.”


- 권오춘



“제가 기억하는 이덕형은 울보였어요. 마음이 여리다는 반증이지요. 사실은 그가 순탄한 삶을 산 것이 아니고, 

굉장히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 사는 꼴이었는데요, 이 남자가 겉보기에는 굉장히 멋져요. 잡기에 능해요. 

당구도 잘 치고, 노래도 잘하고, 춤추는 것도, 탬버린을 다루기도 잘 다루었으니까요. 

애초에 가진 재능 자체가 너무 많았어요. 그 와중에 연극까지 하게 된 것이죠. 

결국 그가 가진 여러 재주가 많고도 많아 그것을 풀어내 담기에 적합한 것이

연극이란 장르로 귀결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조민철



2. 여름, 영혼의 단짝 권오춘과 함께했던 청춘의 날들


이덕형은 1983년 전주시 다가동에 자리해 있던 문예소극장(갈채소극장) 살리기 운동을 함께 하면서 권오춘과 동행하게 된다.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소극장을 살리기 위해 연극인들이 마련한 자리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썩 잘 맞았다. 평생 인연의 끈을 맺게 된 시기였다.

당시 대학극회 ‘볏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덕형은 군대에 가게 되고, 제대 후 1985년부터 극단 ‘황토’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극단 ‘황토’의 창립 멤버로, 연극 무대에도 꾸준히 서고 있었던 권오춘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밤무대에서 코미디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덕형이 ‘황토’에 합류했을 즈음에 권오춘이 원래 하고 있던 ‘한신엽 풍수’라는 팀이 깨졌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권오춘은 등록금 문제로 휴학 상태였던 이덕형에게 연극을 하면서 같이 밤무대에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둘은 의기투합해 코미디 연습을 시작했다. 듀엣 코미디 ‘오성과 한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코미디 공 연은 전주 한아름백화점 옆 사파리 나이트클럽 5층 레드옥스에서 출발했다.

 

 

“그래야 연극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땐 연극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게 지금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생활고는 늘 높은 벽이었지요. 낮에는 연극 연습을 하고, 저녁에 공연을 한 뒤 10시 이후부터는 

야간업소에서 돈을 벌어야만 했어요. 덕형이와는 그렇게 하루 종일 함께 붙어 있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거죠.”


- 권오춘



청춘은 늘 갈증에 허덕였다. 한 번 태어난 인생 더 큰물에서 한판 걸판지게 놀아보아야 하지 않겠나. 푸르른 청춘이기에 꿈꿀 수 있었고, 실행할 수 있었다. 돈도 더 벌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갔다. 뚝섬 근처 구이동에서 2년 정도 한방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면서 돈을 벌었다. 매일 밤 9시에 시작된 활동은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이태원에서 끝났다. 둘은 그렇게 이태원에서 쇼를 마치고 뚝섬 한강 유원지 포장마차로 향했다. 새벽 4시부터 기울이기 시작한 술잔은 해가 뜰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집에 들어가서 쪽잠을 청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나름 주머니를 채울 수 있어서 만족할 만한 생활이었다.

 

 

“서울에서 밤무대를 할 때 한 알프스 관광호텔이라는 업소에 8개월 이상 출연을 했는데, 지금은 이 

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개그맨이 포함된 팀이 그 업소에서 오디션만 보면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성과 한음’은 건재했지요. 그러니까 우리 팀을 매우 궁금해하더라고요. 한번은 그 팀을 

마주치게 됐는데, 자신들은 그 업소에서 유난히 떨어진다면서 ‘당신들은 뭐 하는 사람이요?’라고 

묻더라고요. ‘우리는 연극배우 출신이다’고 했죠. 연극배우는 표정과 동작이 들어가고, 무대를 알 

고, 드라마를 뚝딱 만들어 내니 우리 무대가 달랐던 모양이에요. 사람들이 쫓아와 궁금해서 물어볼 

정도로 서울에서 정말 잘나갔던 때였죠. 그때가 최고 전성기였죠.”


- 권오춘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밤무대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야간업소들의 운영 시간이 자정으로 시간제한에 묶이면서 이들이 설 무대가 점점 없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올나이트를 했을 때는 하루 평균 5~7곳의 업소를 다녀 매니저와 기사 월급까지 해결되었는데, 시간제한에 묶이니 업소 2~3곳을 소화했을 뿐인데도 하루가 마감되고 말았다. 이 정도 활동으로는 서울에서 살아갈 자금을 모으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짐을 쌌다.

이덕형과 권오춘은 20대 언저리에 만나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서까지 그렇게 손발을 맞춰 살았다. 전북 연극계에서도 연극 무대와 밤무대에서 동고동락한 두 사람의 인생을 거의 하나의 인생처럼 평가한다. 성격도 입맛도 다르지만 말투와 제스처, 외모까지도 닮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살았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터다. 2000년대 들어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벤트사 ‘사랑 레크리에이션’을 운영했다. 사무실은 필요 없었다. 전국 곳곳을 누비는 활동이다 보니 그들이 함께 있는 현장이 곧 사무실이 되었다. 

이 시기 이덕형은 연극은 물론, 방송과 각종 콘텐츠 대회, 이벤트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덕형은 2001년 9월 27일 전주 MBC 공개홀에서 치러진 ‘제1회 전주 MBC 전라도 사투리 경연대회’에서 총 11개 출전 팀 중 당당히 금상을 수상했다. 정겨운 전라도 토속어를 되새길 수 있었던 이 무대 이후 이덕형은 ‘전라도 사투리’의 대명사 ‘거시기’를 찰지게 잘하는 연극인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지역 방송계에서도 그를 찾았다. 이덕형은 2003년부터 전주문화방송의 ‘얼쑤! 우리가락’ 고정 패널로 참여했고, 각종 특집 방송의 단골 게스트로 불려 나갔다. 전주 MBC 라디오 방송 ‘여성시대’의 MC를 맡아 주부들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명 DJ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MBC 관계자들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이덕형은 진짜 끼를 타고났다고 말이죠. 천성적으로 타고 

난 끼에, 노래도 잘하고, 딕션도 기가 차다고 평가했어요. 언어 구사력은 물론, 리얼리티와 자연스러움, 

이런 것들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요. 그런데 이 녀석이 가진 재능이 너무 많다 보니 

나태해지는 경향도 없진 않았지 않나 싶어요. 모든 극의 재미 부분, 특히 인생의 희로애락 중에 ‘희’ 

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덕형이라는 배우가 단연 최고였어요.”


- 권오춘 



그러다 드디어 잭팟이 터졌다. 듀엣 코미디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 1월 24일 설맞이 ‘SBS 대한민국 사투리 대회’에 출전했다가 덜컥 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과 명작 ‘햄릿’의 대사를 표준어와 전라도 사투리로 메기고 받는 형식의 공연을 펼쳐 100명의 방청객과 시청자들의 배꼽을 뺐다. 100초 동안 50명 이상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탈락되는 형식이었는데, 본선 진출 17팀 중에서 연극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첫 번째 팀으로 출전한 ‘오성과 한음’에 97명이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작가는 첫 번째 출전자였던 이들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백스테이지에서 결선 무대를 준비하라고 귀띔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종 결선 무대에서는 햄릿의 유명한 문장 ‘투비 오어 낫투비(TO BE OR NOT TO BE)’를 “죽어야 혀~ 살아야 혀, 그것이 쪼까 문제가 되겠고만”이라는 한 문장으로 감칠맛 나게 표현하면서 황금 2냥을 받아 설을 잘 쇠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는 지역 일간지는 물론, 지역 방송, 전국 방송까지 도배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덕형이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었어요. 사투리 경연대회를 앞 

두고 대본을 같이 쓰는데, 저는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그 녀석은 늘 ‘그냥 대충 혀. 우리가 이겨’라고 

말하면서 천하태평 모습이질 않나, 연습하자고 하면 ‘그냥 대충 혀, 그래도 되야’라고 하고 말이죠. 


 


일산 방송국에 가야 하니까 전주에서 일찌감치 출발해 전날 인근에 도착해서는 감자탕에 소주 한 잔 걸치면서 
‘연습은 내일 하자’고 미루죠. 아침에 일어나서 연습하자고 하면 ‘아이, 대충 혀’라고 말해요. 
그런데 본 무대에만 들어가면 잘 요리해요. 표현력이 정말 기가 차죠. 같은 말이래도
이덕형이 이야기하면 더 재미있어했죠. 참 타고난 녀석이었어요.”

 

- 권오춘


이덕형과 권오춘은 2004년 9월에 전주문화방송의 추석특집 ‘도전 가요열창-MC열전’에도 도전해 ‘잘났어 정말’을 불러 대상을 받았다. 이덕형은 방송 리포터로, 이벤트 기획자이자 진행자로 종횡무진 활동 반경을 넓혔다. 회갑, 칠순, 동창회 등 사적인 행사에서부터 시립예술단의 순회공연과 각 예술단의 공연 사회까지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의 사회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전주시립극단을 그만두고서도 시립예술단의 모든 공연의 사회를 맡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TV에도 고정으로 출연하던 때였으니 이덕형을 모르는 시민이 없고, 시립예술단 출신으로 각 단의 사정을 세세하게 아는 데다 두루두루 단원들과 친하고, 사회도 잘 보고, 관객도 좋아하니 이덕형을 쓰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었던 것이다.

이덕형과 권오춘의 ‘케미’는 전파뿐 아니라 무대 위에서도 꾸준히 발현됐다. 2004년 3월 7일부터 열흘 동안 소극장 ‘판’에서 성인 코미디 ‘야한 코미디가 좋아’를 코믹 쇼로 꾸며 선보였다. 이덕형은 무대를 위해 자료 수집부터 연출, 기획, 연습, 홍보까지 손수 해내면서 지역에 또 다른 개성의 공연을 선보이고 공연예술 시장의 활성화를 꿈꾸었다.

이들의 사투리 개그는 10년이 지나서도 인정받았다. 2013년 9월 28일부터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박람회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전국 사투리 경연대회’에 전북 대표팀 ‘오성과 한음’으로 출전해 최우수 상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선보였던 사투리는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마지막 연설 장면과 햄릿의 명대사를 차용해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풀어낸 레퍼토리 그대로였다.


“조금 있으면 마빡 터지는 쌈박질이 시작돼부러…. 나가 죽었다고 생각해불고 싸와불면 살길이 생겨분다고. 
한 발짝도 물러서덜 말고 갖다 앵겨부러…. 요래 뒤지나 조래 뒤지나 뒤지는 것은 매한 가지고, 
긍게 열심히 해부러라 그 말이여.”(여기는 전쟁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살길이 생긴다.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워라…. 죽음은 한 번뿐, 두 번 다시 죽지 아니한다.)
“살아야 혀, 말아야 혀, 고거이 쪼까 껄적지근하고마잉.”(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총 15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오성과 한음’은 심사위원과 관람객들을 압도해 1위를 차지, 안전행정부장 관상과 부상으로 200만 원을 받았다. 당시 이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구수한 사투리로 어려운 이웃에게 웃음을 전하는 게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음번엔 드라마 ‘대장금’이나 ‘허준’을 패러디한 작품을 들고 나오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이덕형의 건강 악화로 지켜지지 못했다. 두 사람의 콤비여야만 완성되는 ‘오성과 한음’의 마지막 무대였다.

3. 가을, ‘슬픈 광대’ 연극인 이덕형

연극인 이덕형은 매우 진지한 사람이었다. 매해 빠짐없이 연극 무대에 서면서 성실한 모습을 세간에 각인시켰다. 무대에 서는 것 자체를 좋아했고, ‘넌 할 수 없다’라는 선고를 받을 때까지 무대에 섰던 배우다. 
서울과 전주, 밤무대를 오가는 생활고형 예술인으로 살아갔던 1980년대에도 이덕형은 극단 ‘황토’의 정기공연과 순회공연 등에서 얼굴을 내밀려고 노력했다. 많은 작품에 꾸준히 참여한 그의 프로필이 이를 증명한다.
1990년대 초반 전주에 다시 내려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덕형은 지인들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잠시 연극을 등한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뼛속까지 배우임을 잊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황토’와 ‘창작극회’ 등 여러 극단 다양한 작품에서 얼굴을 알렸다.

이덕형은 전주시립극단에도 입단해 동고동락했다. 이덕형이 전주시립극단에서 근무한 기간은 1997년 1월 10일부터 2002년 2월 10일까지다. 이덕형은 전주시립극단 단원으로 재직하면서 다수의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이덕형은 1997년 12월 제43회 ‘맹진사댁 경사’(연출 이술원, 작 오영진)에서 맹진사 역을 맡았고, 이듬해 6월과 7월 한 차례씩 다시 선보인 ‘시집가는 날’(연출 이술원)에서도 맹진사 역으로 무대에 섰다. 1998년 12월에는 백제얼찾기 시리즈 Ⅲ 제46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 ‘견훤대왕’(연출 안상철, 작 김정수·안상철)에서 배현경 역으로 분했다.


1999년 4월에는 제47회 정기공연으로 ‘굿나잇, 굿닥터!’(연출 조민철, 작 쥘 르나르 닐 사이먼)에서 은행지점장 역을 맡았고, 5월에는 제48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 악극 ‘이수일과 심순애’(연출 안상철, 작 조중환)에서 막간가수(幕間歌手)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6월에 열린 군산 유월의 연극축제 무대에도 올랐다. 또 11월에 올린 제49회 정기공연 ‘이 풍진 세상의 노래’(연출 안상철, 작 장성희)에 출연했다.
2000년 11월에는 제51회 정기공연 ‘흉가에 볕 들어라’(연출 정경선, 작 이해제)에서 판수 역을 맡았다. 2001년 4월에는 제52회 정기공연 ‘춤추는 모자’(연출 고금석, 공동 창작)에서 할아버지 역으로, 같은 해 5월 제53회 ‘불타는 소파’(연출 고금석, 작 오태영)에서는 할아버지 역으로 무대에 섰다. 이 작품이 기록상 전주시립극단 단원으로서는 마지막 작품이었다.​
1990년대 후반 전주시립극단에서 체급을 쌓은 이덕형은 2000년대 들어서 연극인으로서의 ‘본캐’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극단 ‘황토’의 초창기를 일궜던 이덕형은 2002년 ‘춘풍의 처’로 합류하면서 매년 ‘황토’의 정기공연에는 빠짐없이 출연하는 성실함을 보인다.
이 시기 전북의 중견 배우들 사이에서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르는 전북연극의 황금기를 다시 일으켜 보자는 목소리가 일었다. ‘황토’가 새로운 활로를 찾아 예전의 왕성했던 전북의 여건을 찾는 데 길을 터​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이러한 지역 연극계의 분위기에 상승해 이덕형의 연기도 물이 오르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2000년대 중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덕형은 ‘황토’와 ‘창작극회’, 전주시립극단과 공립예술단의 크고 작은 배역을 가리지 않고 매년 두세 작품씩 꾸준히 출연하면서 연극인으로서의 프로필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2003년 10월 11일과 12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선보인 ‘창작극회’ 106회 정기공연 ‘선비 그리고 칼’(연출 류경호, 작 임정용)은 이석용 의병장과 주변 인물들의 업적을 소재로 옛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고자 만들어진 작품이다. 조민철 씨가 이석용 의병장 역을 맡고, 이덕형 씨는 민초 역으로 출연했다. 이 작품은 남자배우가 귀했던 당시 전북 연극계에서 출연진 대부분이 남자인 특별한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덕형은 코믹한 캐릭터와 연기 내공으로 국악인들이 다소 어렵게 여겼던 지점을 보듬었다. 덕분에 여러 창극에도 곧잘 캐스팅되는 배우였다. 남원시립국악단이 2004년 4월 17일과 18일 춘향문화예술회관 공연장에서 펼친 창작 창극 ‘남원뎐’(연출 오진욱, 작 최기우)에 변사또 역할로, 8월 5일부터 7일까지 춘향문화 예술회관에 올린 국악 뮤지컬 ‘맹진사댁 경사’(연출 오진욱)’에는 참봉 역으로 출연했다. 2004년 6월 30일에는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의 38회 정기공연 작품 창극 ‘흥부전’(연출 류경호)에 참여했으며, 그 꾸준함은 2017년 남원시립국악단의 창극 ‘월매를 사랑한 놀부’(연출 류경호, 작 최기우)로 이어졌다.
2004년 12월 17일과 1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창작 초연된 극단 ‘황토’ 103회 공연작 ‘카레이스키’(연출 박병도)에서 이덕형은 고국을 떠나온 초로의 이주민으로 연기했다. 이 작품은 1992년 극단 내분으로 단원들이 뿔뿔이 흩어진 지 10여 년 만에 선보인 공연이라는 점에서 화제였으며, 한민족의 방랑의 역사를 담아낸 줄거리였다는 점에서도 ‘황토’의 상황과 겹쳐 연출진과 배우 모두에게 특별한 공연으로 기억되었다.
2005년은 이덕형의 연기에 그야말로 물이 올랐던 해다. 이덕형은 당해 제21회 전북연극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는다. 극단 하늘이 선보인 ‘남자충동’(연출 조승철, 작 조광화)이라는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인 것이다. 이 작품은 무능력한 가부장적 존재를 통해 남성 폭력의 다양한 심리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1997년 극단 ‘하늘’의 창단 공연작이기도 했다. 이덕형은 이 작품에서 아버지 ‘이 씨’ 역으로 분했다. 조승철 연출가는 “술과 노름에 취해 팔이 잘리는 남자 역할로, 덕형이 형만큼 소화해 낼 배우는 없었다고 생각해 함께 했었다”라고 회고했다. 이덕형과 함께 많은 작품을 했던 오진욱 연출가도 ‘남자충동’ 에서의 배우 이덕형을 최고의 연기자로 기억했다.


“‘남자충동’이라는 작품에서 아버지 역할을 했던 이덕형 배우는 그야말로 미친 남자였어요. 
코믹 연기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덕형이 형이 그 작품에서 연기하는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었거든요. 
젊었을 때도 연기 잘했다고들 하던데, 정말 연기를 잘하더라요. 저도 배우로 무대에 서봤지만, 
정말 배우적 입장에서 봤을 때 이덕형의 연기력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었던 작품으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요.”

- 오진욱


같은 해 전주 창작소극장에서 선보인 창작극회의 ‘장사의 꿈’(연출 류경호)을 기억하는 연극인들도 많았다.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연기에서는 최고였다는 것이다. 최기우 극작가는 이덕형의 대표 작품 중 한 편으로 ‘장사의 꿈’을 꼽았다. 
소설가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2인극으로 각색한 이 작품은 간척사업으로 설 자리를 잃은 부안 계화도 출신 청년 차일봉(배건재 분)이 ‘몸뚱이’ 하나 믿고 무작정 상경했다가 겪는 좌충우돌을 담았다. 이덕형은 ‘따루마’(영화감독), ‘똘마니’, ‘웨이터’, ‘한의사’ 등 1인 10역을 소화하며 극을 이끌었다.
이 작품 팸플릿에는 무대 연습 첫날의 모습을 담은 최기우 극작가의 글이 있다. 공연을 일주일 앞둔 2005년 3월 23일 오후 7시 30분, 장구 소리에 어울린 이덕형의 젓가락 장단이 곳곳으로 스며들던 창작소극장의 분위기를 옮겨놓았다. 당시 이덕형·배건재 두 배우는 예고 없이 쳐들어간 행인들이 머쓱하게 무대를 휘저었단다. ‘느그들 왔다고 우리가 떨기라도 헐 것 같으냐?’ 하는 식이었다. 최기우 작가는 그날 풍경을 “소극장이 아니라 한 상 걸게 차려진 대폿집과 다름없었다.”라고 표현했다.


관객이 또 왔으니 처음부터 다시 가자는 류경호 연출가의 말에 두 배우는 익숙하게 매무새를 다듬는다. 
그러고는 기어이 내뱉는 덕형 씨의 농 한마디.
“으미 쓰봉, 올라믄 일찌감치 연락히서 같이들 오등가. 시작허믄 오고, 헐만허믄 오고. 후딱 끝내고 한잔 꺾어얀디. 
오늘은 시종일관 시, 시, 시작만 허다 끝나벌겄네. 어쩐다냐. 기냥 한잔 먼저 빨고 시작허까? 다들 어뗘?” (중략)
이번 공연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대사가 많아 여러 번 공연을 본다고 해도 손해 볼 일이 없다. 
‘애드리브의 제왕’ 덕형 씨가 있기 때문이다. 한 무대에서 수없이 많은 역할을 능청맞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래서 <장사의 꿈>은 1인 11역의 배우 이덕형에게 꼭 맞는 옷이다.

- 최기우 극작가의 산문 「오감으로 맛보는 두 배우의 푸진 살판」 중에서


연극인 홍석찬도 이덕형이 ‘장사의 꿈’과 같은 레퍼토리 작품이 좋았다고 기억했다. 이 작품은 영호남연극 
제를 비롯해 사회복지시설을 찾아가는 연극 등에서도 자주 선보였다. 2인극으로 출연진이 단출했기 때문 
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렵게 가지고 온 작품이었고, ‘장사의 꿈’의 1인 다역은 덕형이 형이 적격이었어요. 

공연이 너무 대박이 나서 그해는 물론 다음 해, 또 다음 해에도 순회공연까지 계속되면서 롱런을 했던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 극단의 살림이 좀 폈죠. 첫해 공연에서 창작소극장에 모인 관객은 무대 

위까지 올라와 앉을 정도였어요. 1회 평균 100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차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말이죠. 

또 그런 작품은 없어요.”


- 홍석찬 



사실, 이덕형도 생전에 ‘장사의 꿈’을 인생 공연으로 꼽았던 적이 있다. ‘장사의 꿈’을 공연한 뒤 4년이 흐르고 제26회 전북연극상 대상을 받았던 그가 2009년 새전북신문과 진행한 짧은 인터뷰에서다. 당시 이덕형은 “지난 2005년 황석영의 ‘장사의 꿈’을 각색한 작품을 통해 1인 10역에 도전한 적이 있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열정적으로 했던 공연이기에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하는 배우가 되겠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해당 인터뷰에서 이덕형은 지역 연극계에 40대 배우들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연기의 감을 기억하고자 작품에 임해 왔다”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무대 위에 반드시 서야만 숨을 쉴 수 있었던 배우 이덕형의 모습을 남긴 몇 되지 않을 소중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배우 이덕형의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는 2005년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덕진예술회관에서 열린 전주시립극단 ‘동문거리 여자는 아름다웠다’(연출·작 조민철)에도 출연했고, 2005년 11월 1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공연된 극단 ‘황토’의 ‘꿈꾸는 나라’(총연출 박병도, 작 김정수)에도 참여했다. ‘꿈꾸는 나라’는 월북작가이자 탈북작가, 시대의 굴곡과 함께한 극작가 함세덕의 인물극이다. 이덕형은 함세덕의 손자인 함선식 역으로 분했다.

2006년 5월 11일과 12일 정읍천변 야외무대에서 선보인 창무총체극 ‘천명 – 황토현의 횃불’(연출·각색 박병도, 작 김용옥, 곡 박범훈)에서 이덕형은 익살스러운 연기로 극의 재미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북연극협회가 2006년 9월 2일과 3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 올린 연극 ‘가인 박동화’(연출 류경호, 작 최기우)에도 이덕형은 함께했다. ‘전북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동화의 삶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주제로 3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가 시작된 해였다.

극단 ‘황토’는 2006년 12월 28일과 29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오브제 태’(연출 박병도, 작 오태석)를 선보였다. 권력 유지를 위해 대살육을 감행했던 세조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 가문의 대를 이으려는 한 여인의 몸부림이 기본 뼈대를 이루는 작품이다. 극단 ‘황토’로서는 1986년 제6회 전국연극제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안겨줘 남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1986년 당시 공연했던 배우들이 다시 그 역할을 맡아 출연해 초창기 ‘황토’의 연극 정신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덕형은 사관 역으로 출연했다.

 

 

“코믹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어서 그런지 진지한 이덕형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만, 

‘태’라는 작품에서 사관 역을 맡았던 이덕형이 소리를 질러대면서 무대를 누비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연극사적으로 이덕형은 어떤 존재일까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광대인데, 슬픈 광대다.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그런 광대이지요.”


- 조민철 



연극계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을 이어간 이덕형은 이를 인정받아 2007년 전북예총이 수여하는 ‘전북예술상’ 공로상을 수상한다. 2008년 12월 10일 고창문화의전당에서 선보인 극단 ‘황토레퍼토리시스템’의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연출 정두영)는 옛 노래와 트로트 음악이 함께 어우러지며 전통 악극과 뮤지컬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다. 이덕형은 변사 역으로 극을 이끌었다.

2008년 이덕형은 전북연극협회가 수여하는 ‘제25회 전북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한다.

2009년 11월 25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선보인 극단 ‘황토’ 120회 정기공연 연극 ‘물보라’(연출 박병도, 작 오태석)는 남해의 한 어촌이 배경으로, 전통 연희 등 토속적 소재를 현대극에 접목한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만선제의 모습과 풍물, 굿 등이 실제 무대 위에서 펼쳐져 화제를 모았다. 전북 최초의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수상 작품(제4회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과 연출상)을 다시 볼 수 있었던 점도 화제였다.

2009년 이덕형은 연극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제26회 전북연극상’ 대상을 수상한다. “배우로 평생 연극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이덕형이 신념이 단단한 배우로 인정을 받았던 날이다. 시상식은 2009년 12월 29일 전주창작소극장에서 이뤄졌다.

 

 


2011년에는 창단 50주년을 맞은 ‘창작극회’ 기념 연극 ‘아리랑은 흐른다’(연출 류경호)에 출연했다. 원작영화 ‘아리랑’을 대중 악극의 틀에 맞게 본극과 막간극으로 변사, 코러스, 만담, 춤, 노래 등으로 극을 구성하고 선보인 작품으로, 끼가 많은 이덕형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2013년 4월 27일부터 9월 7일까지 매주 토요일 전주부채문화관에서는 문화기획집단 ‘얘기보따리’가 주관한 거리마당극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연출 정진권, 작 최기우) 공연이 있었다. 이덕형은 이 작품에서 뻥튀기 장수 역으로 출연했다.
이덕형은 2014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공연된 전주시립극단의 제 100회 봄 정기공연 ‘김태수의 No.1 서민극 시리즈 - 피래미들(minnows)’(연출 류경호)에 출연했다. 세상이라는 피라미드에 밑바탕이 되는 서민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리얼하게 무대화한 작품으로, 이덕형은 동네 깡패 역을 맡았다. 류경호 연출가의 기억에는 “시장 사람들을 겁박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무섭지 않은 캐릭터로 코믹하게 역할을 잘했다”고 남아 있다. 시립극단을 관두고 한참이 지나서도 찾게 되는 배우, 작은 역할을 맡아도 최선을 다했던 배우가 바로 이덕형이었다.​


“이덕형은 웃음 코드가 많았던 배우였어요. 희극배우로 특화된 배우였죠. 전주대 대학극단 출신인데, 
권오춘 배우와 ‘품바’를 하면서 정말 많은 인기를 끌었어요. 배역을 한번 맡으면 그에 몰입하는 
속도가 빨랐고, 그래서 대사도 빨리 외웠죠. 공연이 임박해서 연습시간이 짧게 남았을 때 긴급하게 요청하면 뚝딱 해내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우였어요. 그리고 연습에 빠지는 법이 없었던 성실한 배우이기도 했죠.”

- 류경호


2015년 9월 11일부터 24일 창작소극장에 올려진 창작극회 ‘발톱을 깎아도’(연출 조민철, 작 박숙자)는 핵가족화와 개인주의로 살아가기 더욱더 어려워지는 현대 노인들의 삶,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자연스럽고 잔잔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이덕형은 이웃에 사는 춘식 역을 맡아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 투혼으로 무거울 수 있는 극에 웃음과 활력을 더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았던 조민철은 당시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제가 기억하는 한도에서 이덕형은 정말 끊임없이 무대에 서고, 연기하는 것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넌 할 수 없어’라는 선고를 받을 때까지도 무대에 서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으니 말이죠.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면, ‘발톱을 깎아도’라는 소극장 작품을 하는데 이 사람이 연습을 4시부터 
한다고 하면 2시부터 미리 와 있더라고요. 심지어 어느 날에는 점심에 맞춰 올 때도 있었어요. 
당시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수전증이 있었는데, 점심에 반주(飯酒)를 마시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하더라고요. 
공연 날짜가 임박할 즈음에 가서는 술을 먹지 말라, 한 잔만 먹고 해보자 했죠. 
얼굴이 빨개져서 무대에 올라갈 수는 없으니 말이죠. 결국 술을 먹지 못하고 공연에 올라갔는데, 
이거 사람이 완전히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예요. 다음 날 잽싸게 한 잔 먹으라고 했지요. 
그래서 공연 잘 하자고. 어디에서나 연기를 하고 싶은 의지와 의욕은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선후배들이 
함께하고 싶어도 상황이 되질 못하니 손을 놓을 수밖에요. 너무 안타까웠죠.”

- 조민철

 

 

2016년 11월 16일과 17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선보인 ‘황토레퍼토리컴퍼니’의 ‘태 2016’(연출 박병도)에도 이덕형은 사관 역으로 출연했다. 권오춘은 “이덕형은 딕션이 좋았다. 사관은 대사의 분량도 많고 몰아치는 역사에 대한 해석으로 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이덕형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황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힌 이 작품은 3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시국과 정서에 맞게 새롭게 각색되어 ‘황토’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무대화시키면

서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30일과 31일 전주대 JJ아트홀에서 선보인 ‘혈맥’(연출 장제혁)은 1940년대 후반 광복 직후의 혼란스러운 세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빈민의 삶을 극사실주의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방공호 구덩이를 집 삼아 살아가고 있으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탈출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좁은 고시원과 원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2016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쳤다.


2019년 창작극회가 선보여 ‘제35회 전북연극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아부 조부’(연출 조민철, 송지희 작)에서 이덕형은 만복과 마을 사람 역을 맡았다.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을 3대에 걸쳐 묘사한 이 대하드라마는 6월 11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전북연극의 위상을 드높였다. 
배우 이덕형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기록이기도 하다.​

4. 겨울, 하늘에서도 무대 위에 서 있을 이덕형

이덕형은 선후배들로부터 ‘참말로 거시기하게’ 사랑을 많이 받았던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촛불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을 즈음에도 그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몸이 아파 무대에 제대로 설 수 없었던 시기에도 늘 그를 기억하고,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덕형은 2022년 12월 21일 전북예총하림예술상 공로상을 수상하게 되며, 고인이 되어서도 2023년 6월 24일 ‘제 26회 박동화 연극상’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연극협회 전북지회가 주최하고 ‘박동화 연극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해 수여하는 ‘박동화 연극상’은 생전 투철한 연극운동으로 전북연극의 중흥기를 이끈 박동화의 열정을 기리고 그 참뜻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선생을 기리는 뜻을 담아 그의 작고 일인 양력 6월 22일 전후로 매년 1회 시상하고 있다. 사실 ‘박동화 연극상’을 바라보는 후배들도 많고, 연극인들이 사랑하는 상이다 보니 고인을 추천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창작극회는 그 누구보다 그의 이름을 먼저 생각해 그를 추천하게 됐다.


“생각해 보면 선배들이 종종 무대에서 죽고 싶다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 그렇지 
솔직히 아프면 아무 생각도 안 나지 누가 무대에서 죽고 싶겠어요. 
그런데 이 양반은 끊임없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박동화 연극상 추천 의뢰를 받자마자 떠오른 이름이 이덕형이었어요.”

- 홍석찬


故 이덕형 배우는 처음 연극 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1984년부터 지난 2월 작고하기까지 연극에 대한 열정과 소명의식으로 지역 연극 발전을 위해 뛰었다. 연극판에서 몸부림친 4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고인은 150여 편에 이르는 작품에 참여했다. 관객과의 만남을 위해 다양한 접근 방법을 개발하며, 선후배의 귀감이 되는 등 전주연극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연극문화의 발전을 위해 분투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예술인이라는 평가다.(제26회 박동화 연극상 시상의 변)


“배우 이덕형의 장점은 대사를 아주 빨리 외웠다는 점이죠. 이덕형과 이부열 배우는 대본을 주면 
이틀 사흘 만에 대사를 다 외워 와요. 집중력이 얼마나 좋은지, 이덕형이 시내버스를 타고 대본을 
보기 시작하면, 종점까지 갔다가 탔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거의 다 외워 있었더래요. 
다 외워서 틀리지도 않고, 아주 정확해요. 게다가 상대 배역 대사까지도 다 외워 버리더라고요. 
암기력 하나는 기가 막혔고, 집중력이 정말 대단했어요. 
시내버스에 앉아서 있는 시간이 최고로 집중할 수 있는 장소라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나네요.”

- 조민철


이덕형과 꽤 많은 작품에서 만났던 최기우 극작가는 그를 “선한 욕심이 차고 넘치는 배우”라고 정의했다. 무대이든, 무대 뒷자리이든, 어디에서든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고, 더 많이 웃기고 싶고, 더 많이 울리고 싶고, 박수받고 싶어 하던 천생 배우라고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덕형과 무대는 천생의 인연이었음을 확신한다.

 

 

“이덕형 배우는 두말이 필요 없는 배우죠. 방송 진행자나 전문 이벤트 MC로 활동하면서, 

그리고 특유의 희극적인 장기를 살린 배역이 많아진 탓에 그를 보면서 밝고 즐거운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비극적인 서사에 잘 어울리는 정통 연기파 배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웃는 표정이 더 살가웠지만, ‘그래 이 ×××놈아!’라는 욕을 던지면서도 눈물과 웃음을 

자유자재로 끌어낼 줄 아는 배우, 쓴 소주잔을 연거푸 가볍게 비울 줄 아는 배우였습니다.”


- 최기우



“선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고, 자식을 잃었고, 그로 인해서 훨씬 더 술을 자주 접하면서 

사회생활 자체가 영향을 받았지만,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연극 작업에 동참하고자 애를 썼던 천생 연극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황토, 창작극회, 기타 다른 극단의 작품에도 섰던 거죠. 쾌활하고 주변을 웃게 만들었던 이덕형이 그립네요.”


- 조민철



“20년 전에 군산에서 ‘탁류’라는 작품에서 덕형이 형을 처음 봤었죠. 젊은 사람인데 연기 목소리부 

터가 딱딱 들리면서 우리 지역에서 보기 힘든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에 그런 재능을 

보고 연출자들이 주인공으로도 많은 무대에 세웠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무대 위의 연극인, 아 

티스트로서 이덕형의 세계가 더 커질 줄 알았는데, 다른 쪽이 커지면서 시기를 놓쳐 버린 것 같아 안타깝죠.”


- 홍석찬



“이덕형은 정말 ‘위’ ‘대’한 사람이었어요. 밥을 엄청 많이 먹었죠. 보통 우리는 한 공기 먹으면 족한데, 

덕형이는 세 공기 정도 먹어야 기별이 가네 마네 했던 게 기억나요. 주변에서 병원에 가보라고 할 정도였다니까.”


- 조민철



“덕형이는 특히 동치미를 가장 좋아했어요. 찬합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었는데,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도 잘 관리해서 풍채가 좋았었죠.”


- 권오춘



“모르긴 몰라도 덕형이 형에 대한 연극인들의 에피소드가 각자 다 있을 거예요.”


- 홍석찬 



이덕형은 끼가 넘쳤다. 그를 담기엔 지역이라는 그릇이 작았을지 모른다. 젊은 날에는 방송으로 진출하면서 돈과 사람이 모이는 서울로 눈을 돌리기도 했으나, 진한 연극 무대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발걸음을 다시 고향으로 향하게 했다.

이덕형은 울보였다. 너무도 사랑하고 분신처럼 여겼던 아들을 잃고, 일순간에 무너진 그는 어둠과 싸웠다. 

살아서도 죽었던 삶이었다.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고 싶어 했으나 끝내 설 수가 없음을 누구보다 힘들어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가 지금 하늘에서 그 좋아하던 연극 무대에 서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병원에 있으면서 ‘오늘 연습 몇 시에 있어요?’라고 전화가 와요. 죽기 얼마 전의 일이죠. 

혼수상태에 이르니 현실과 작품이 혼재되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날도 본인은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였나 봐요. 

코로나19로 병문안도 불가능했던 때엔 링거를 꽂은 채로 병원 밖으로 나와서는 한참 동안 들어가지를 못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나 언제 무대에 세워주느냐’고 묻더군요.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연극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닌데 창작소극장 연습실에 찾아와서 후배들에게 

저녁을 사겠다며 나서기도 했어요. 끝까지 연극에 대한 애틋한 정과 관심, 사랑을 쏟아냈던, 

그렇게 무대에 서고 싶어서 곁에 있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연극 곁에 머물고 싶어 했던 거였어요.”


- 조민철



이 원고는 하늘에서도 그 좋아하는 연기를 계속하고 있을 이덕형을 위한 헌사다. 자신의 삶을 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생을 마감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한 연극인의 발자취를 뒤쫓았다. 지역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수집했다. 죽은 자에게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누락된 이야기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게 확인된 진실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이 지금도 연극계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덕형’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뜨거워진 눈시울과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던 이들 모두가 바로 ‘이덕형’이었다.

 

 

이덕형 연보

 

1964년 전주 출생

1983년 전주대 볏단입단

1983년 극단 황토입단

1988년 듀엣 코미디 오성과 한음결성(With 권오춘)

1997-2002년 전주시립극단 단원

2001년 제1회 전주MBC 전라도 사투리 경연대회 금상

2004SBS 대한민국사투리경연대회 대상

2005년 제21회 전북연극제 최우수연기상(전북연극협회)

2007년 전북예술상 공로상(전북예총)

2008년 제25회 전북연극상 연기상(전북연극협회)

2009년 제26회 전북연극상 대상(전북연극협회)

2014년 제1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박람회 - 전국사투리경연대회 1(안전행정부장관상)

2022년 전북예총하림예술상 공로상

2023년 별세

2023년 고 이덕형 26회 박동화연극상대상 수상

 

주요 출연작

1987년 극단 황토 제5회 전국연극제 축하공연작

1988년 극단 황토 사랑의 비행선

1988년 극단 황토 제6회 전국연극제 우수상

1988년 극단 황토 제27회 전라예술제 초청공연 햄릿

1990년 극단 황토 제29회 전라예술제 초청공연 비닐하우스

1991년 극단 황토 햄릿 6’

1992년 극단 황토 춘풍의 처

1994년 극단 황토 언챙이 곡마단전북 5개 지역 순회공연

1997년 전주시립극단 제43회 정기공연 맹진사댁 경사

1998년 전주시립극단 시집가는 날

1998년 전주시립극단 제46회 정기공연 견훤대왕

1999년 전주시립극단 제48회 정기공연 악극 이수일과 심순애

1999년 전주시립극단 제49회 정기공연 이 풍진 세상의 노래

2000년 전주시립극단 제51회 정기공연 흉가에 볕 들어라

2001년 전주시립극단 제52회 정기공연 춤추는 모자

2001년 전주시립극단 제53회 정기공연 불타는 소파

2002년 극단 황토 전북 도내 순회공연, 전주세계소리축제 초청공연 춘풍의 처

2003년 창작극회 제106회 정기공연 선비 그리고 칼

2004년 남원시립국악단 남원뎐

2004년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38회 정기공연 흥부전

2004년 극단 황토 103회 정기공연 카레이스키

2005년 극단 하늘 남자충동

2005년 창작극회 장사의 꿈

2005년 전주시립극단 동문거리 여자는 아름다웠다

2005년 극단 황토 꿈꾸는 나라

2006년 정읍시립국악단 천명 - 황토현의 횃불

2006년 극단 황토 오브제 태

2008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시스템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

2009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시스템 물보라

2012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컴퍼니 창단 30주년 기념작품 천년의 달

2013년 문화기획집단 얘기보따리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

2015년 창작극회 발톱을 깎아도

2016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컴퍼니 2016’

2017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컴퍼니 천년의 달

2017년 남원시립국악단 월매를 사랑한 놀부

2019년 창작극회 아부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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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where  art  becomes  everyday   life  where  art  brings  happ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