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무대서 살고싶었던 배우, 이덕형
- 살아서도 죽었던 삶, 죽어서도 오를 무대
김미진 전북도민일보 문화교육부 부장
“이덕형을 처음 봤던 곳이 막걸릿집이에요. 제가 1982년도에 극단 ‘황토’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생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이덕형을 그곳에서 만난 거죠. 그 친구가 막걸릿집에
서 노래하고 노는데, 그 모습이 참 예술인 거예요. 극단 ‘황토’의 연출가 박병도 선생님이 덕형이에게
‘너 졸업하면 연극 해라’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한 것이 진짜가 되어 버렸죠.
이덕형이 전주대학교에 입학하더니만 대학극회 ‘볏단’에 입단해 활동을 시작했어요.”
- 권오춘
“제가 기억하는 이덕형은 울보였어요. 마음이 여리다는 반증이지요. 사실은 그가 순탄한 삶을 산 것이 아니고,
굉장히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 사는 꼴이었는데요, 이 남자가 겉보기에는 굉장히 멋져요. 잡기에 능해요.
당구도 잘 치고, 노래도 잘하고, 춤추는 것도, 탬버린을 다루기도 잘 다루었으니까요.
애초에 가진 재능 자체가 너무 많았어요. 그 와중에 연극까지 하게 된 것이죠.
결국 그가 가진 여러 재주가 많고도 많아 그것을 풀어내 담기에 적합한 것이
연극이란 장르로 귀결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조민철
2. 여름, 영혼의 단짝 권오춘과 함께했던 청춘의 날들
이덕형은 1983년 전주시 다가동에 자리해 있던 문예소극장(갈채소극장) 살리기 운동을 함께 하면서 권오춘과 동행하게 된다.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소극장을 살리기 위해 연극인들이 마련한 자리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썩 잘 맞았다. 평생 인연의 끈을 맺게 된 시기였다.
당시 대학극회 ‘볏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덕형은 군대에 가게 되고, 제대 후 1985년부터 극단 ‘황토’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극단 ‘황토’의 창립 멤버로, 연극 무대에도 꾸준히 서고 있었던 권오춘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밤무대에서 코미디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덕형이 ‘황토’에 합류했을 즈음에 권오춘이 원래 하고 있던 ‘한신엽 풍수’라는 팀이 깨졌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권오춘은 등록금 문제로 휴학 상태였던 이덕형에게 연극을 하면서 같이 밤무대에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둘은 의기투합해 코미디 연습을 시작했다. 듀엣 코미디 ‘오성과 한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코미디 공 연은 전주 한아름백화점 옆 사파리 나이트클럽 5층 레드옥스에서 출발했다.
“그래야 연극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땐 연극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게 지금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생활고는 늘 높은 벽이었지요. 낮에는 연극 연습을 하고, 저녁에 공연을 한 뒤 10시 이후부터는
야간업소에서 돈을 벌어야만 했어요. 덕형이와는 그렇게 하루 종일 함께 붙어 있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거죠.”
- 권오춘
청춘은 늘 갈증에 허덕였다. 한 번 태어난 인생 더 큰물에서 한판 걸판지게 놀아보아야 하지 않겠나. 푸르른 청춘이기에 꿈꿀 수 있었고, 실행할 수 있었다. 돈도 더 벌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갔다. 뚝섬 근처 구이동에서 2년 정도 한방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면서 돈을 벌었다. 매일 밤 9시에 시작된 활동은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이태원에서 끝났다. 둘은 그렇게 이태원에서 쇼를 마치고 뚝섬 한강 유원지 포장마차로 향했다. 새벽 4시부터 기울이기 시작한 술잔은 해가 뜰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집에 들어가서 쪽잠을 청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나름 주머니를 채울 수 있어서 만족할 만한 생활이었다.
“서울에서 밤무대를 할 때 한 알프스 관광호텔이라는 업소에 8개월 이상 출연을 했는데, 지금은 이
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개그맨이 포함된 팀이 그 업소에서 오디션만 보면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성과 한음’은 건재했지요. 그러니까 우리 팀을 매우 궁금해하더라고요. 한번은 그 팀을
마주치게 됐는데, 자신들은 그 업소에서 유난히 떨어진다면서 ‘당신들은 뭐 하는 사람이요?’라고
묻더라고요. ‘우리는 연극배우 출신이다’고 했죠. 연극배우는 표정과 동작이 들어가고, 무대를 알
고, 드라마를 뚝딱 만들어 내니 우리 무대가 달랐던 모양이에요. 사람들이 쫓아와 궁금해서 물어볼
정도로 서울에서 정말 잘나갔던 때였죠. 그때가 최고 전성기였죠.”
- 권오춘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밤무대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야간업소들의 운영 시간이 자정으로 시간제한에 묶이면서 이들이 설 무대가 점점 없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올나이트를 했을 때는 하루 평균 5~7곳의 업소를 다녀 매니저와 기사 월급까지 해결되었는데, 시간제한에 묶이니 업소 2~3곳을 소화했을 뿐인데도 하루가 마감되고 말았다. 이 정도 활동으로는 서울에서 살아갈 자금을 모으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짐을 쌌다.
이덕형과 권오춘은 20대 언저리에 만나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서까지 그렇게 손발을 맞춰 살았다. 전북 연극계에서도 연극 무대와 밤무대에서 동고동락한 두 사람의 인생을 거의 하나의 인생처럼 평가한다. 성격도 입맛도 다르지만 말투와 제스처, 외모까지도 닮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살았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터다. 2000년대 들어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벤트사 ‘사랑 레크리에이션’을 운영했다. 사무실은 필요 없었다. 전국 곳곳을 누비는 활동이다 보니 그들이 함께 있는 현장이 곧 사무실이 되었다.
이 시기 이덕형은 연극은 물론, 방송과 각종 콘텐츠 대회, 이벤트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덕형은 2001년 9월 27일 전주 MBC 공개홀에서 치러진 ‘제1회 전주 MBC 전라도 사투리 경연대회’에서 총 11개 출전 팀 중 당당히 금상을 수상했다. 정겨운 전라도 토속어를 되새길 수 있었던 이 무대 이후 이덕형은 ‘전라도 사투리’의 대명사 ‘거시기’를 찰지게 잘하는 연극인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지역 방송계에서도 그를 찾았다. 이덕형은 2003년부터 전주문화방송의 ‘얼쑤! 우리가락’ 고정 패널로 참여했고, 각종 특집 방송의 단골 게스트로 불려 나갔다. 전주 MBC 라디오 방송 ‘여성시대’의 MC를 맡아 주부들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명 DJ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MBC 관계자들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이덕형은 진짜 끼를 타고났다고 말이죠. 천성적으로 타고
난 끼에, 노래도 잘하고, 딕션도 기가 차다고 평가했어요. 언어 구사력은 물론, 리얼리티와 자연스러움,
이런 것들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요. 그런데 이 녀석이 가진 재능이 너무 많다 보니
나태해지는 경향도 없진 않았지 않나 싶어요. 모든 극의 재미 부분, 특히 인생의 희로애락 중에 ‘희’
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덕형이라는 배우가 단연 최고였어요.”
- 권오춘
그러다 드디어 잭팟이 터졌다. 듀엣 코미디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 1월 24일 설맞이 ‘SBS 대한민국 사투리 대회’에 출전했다가 덜컥 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과 명작 ‘햄릿’의 대사를 표준어와 전라도 사투리로 메기고 받는 형식의 공연을 펼쳐 100명의 방청객과 시청자들의 배꼽을 뺐다. 100초 동안 50명 이상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탈락되는 형식이었는데, 본선 진출 17팀 중에서 연극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첫 번째 팀으로 출전한 ‘오성과 한음’에 97명이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작가는 첫 번째 출전자였던 이들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백스테이지에서 결선 무대를 준비하라고 귀띔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종 결선 무대에서는 햄릿의 유명한 문장 ‘투비 오어 낫투비(TO BE OR NOT TO BE)’를 “죽어야 혀~ 살아야 혀, 그것이 쪼까 문제가 되겠고만”이라는 한 문장으로 감칠맛 나게 표현하면서 황금 2냥을 받아 설을 잘 쇠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는 지역 일간지는 물론, 지역 방송, 전국 방송까지 도배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덕형이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었어요. 사투리 경연대회를 앞
두고 대본을 같이 쓰는데, 저는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그 녀석은 늘 ‘그냥 대충 혀. 우리가 이겨’라고
말하면서 천하태평 모습이질 않나, 연습하자고 하면 ‘그냥 대충 혀, 그래도 되야’라고 하고 말이죠.
이덕형과 권오춘의 ‘케미’는 전파뿐 아니라 무대 위에서도 꾸준히 발현됐다. 2004년 3월 7일부터 열흘 동안 소극장 ‘판’에서 성인 코미디 ‘야한 코미디가 좋아’를 코믹 쇼로 꾸며 선보였다. 이덕형은 무대를 위해 자료 수집부터 연출, 기획, 연습, 홍보까지 손수 해내면서 지역에 또 다른 개성의 공연을 선보이고 공연예술 시장의 활성화를 꿈꾸었다.
이덕형은 전주시립극단에도 입단해 동고동락했다. 이덕형이 전주시립극단에서 근무한 기간은 1997년 1월 10일부터 2002년 2월 10일까지다. 이덕형은 전주시립극단 단원으로 재직하면서 다수의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어렵게 가지고 온 작품이었고, ‘장사의 꿈’의 1인 다역은 덕형이 형이 적격이었어요.
공연이 너무 대박이 나서 그해는 물론 다음 해, 또 다음 해에도 순회공연까지 계속되면서 롱런을 했던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 극단의 살림이 좀 폈죠. 첫해 공연에서 창작소극장에 모인 관객은 무대
위까지 올라와 앉을 정도였어요. 1회 평균 100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차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말이죠.
또 그런 작품은 없어요.”
- 홍석찬
사실, 이덕형도 생전에 ‘장사의 꿈’을 인생 공연으로 꼽았던 적이 있다. ‘장사의 꿈’을 공연한 뒤 4년이 흐르고 제26회 전북연극상 대상을 받았던 그가 2009년 새전북신문과 진행한 짧은 인터뷰에서다. 당시 이덕형은 “지난 2005년 황석영의 ‘장사의 꿈’을 각색한 작품을 통해 1인 10역에 도전한 적이 있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열정적으로 했던 공연이기에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하는 배우가 되겠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해당 인터뷰에서 이덕형은 지역 연극계에 40대 배우들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연기의 감을 기억하고자 작품에 임해 왔다”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무대 위에 반드시 서야만 숨을 쉴 수 있었던 배우 이덕형의 모습을 남긴 몇 되지 않을 소중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배우 이덕형의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는 2005년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덕진예술회관에서 열린 전주시립극단 ‘동문거리 여자는 아름다웠다’(연출·작 조민철)에도 출연했고, 2005년 11월 1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공연된 극단 ‘황토’의 ‘꿈꾸는 나라’(총연출 박병도, 작 김정수)에도 참여했다. ‘꿈꾸는 나라’는 월북작가이자 탈북작가, 시대의 굴곡과 함께한 극작가 함세덕의 인물극이다. 이덕형은 함세덕의 손자인 함선식 역으로 분했다.
2006년 5월 11일과 12일 정읍천변 야외무대에서 선보인 창무총체극 ‘천명 – 황토현의 횃불’(연출·각색 박병도, 작 김용옥, 곡 박범훈)에서 이덕형은 익살스러운 연기로 극의 재미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북연극협회가 2006년 9월 2일과 3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 올린 연극 ‘가인 박동화’(연출 류경호, 작 최기우)에도 이덕형은 함께했다. ‘전북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동화의 삶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주제로 3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가 시작된 해였다.
극단 ‘황토’는 2006년 12월 28일과 29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오브제 태’(연출 박병도, 작 오태석)를 선보였다. 권력 유지를 위해 대살육을 감행했던 세조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 가문의 대를 이으려는 한 여인의 몸부림이 기본 뼈대를 이루는 작품이다. 극단 ‘황토’로서는 1986년 제6회 전국연극제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안겨줘 남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1986년 당시 공연했던 배우들이 다시 그 역할을 맡아 출연해 초창기 ‘황토’의 연극 정신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덕형은 사관 역으로 출연했다.
“코믹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어서 그런지 진지한 이덕형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만,
‘태’라는 작품에서 사관 역을 맡았던 이덕형이 소리를 질러대면서 무대를 누비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연극사적으로 이덕형은 어떤 존재일까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광대인데, 슬픈 광대다.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그런 광대이지요.”
- 조민철
연극계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을 이어간 이덕형은 이를 인정받아 2007년 전북예총이 수여하는 ‘전북예술상’ 공로상을 수상한다. 2008년 12월 10일 고창문화의전당에서 선보인 극단 ‘황토레퍼토리시스템’의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연출 정두영)는 옛 노래와 트로트 음악이 함께 어우러지며 전통 악극과 뮤지컬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다. 이덕형은 변사 역으로 극을 이끌었다.
2008년 이덕형은 전북연극협회가 수여하는 ‘제25회 전북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한다.
2009년 11월 25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선보인 극단 ‘황토’ 120회 정기공연 연극 ‘물보라’(연출 박병도, 작 오태석)는 남해의 한 어촌이 배경으로, 전통 연희 등 토속적 소재를 현대극에 접목한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만선제의 모습과 풍물, 굿 등이 실제 무대 위에서 펼쳐져 화제를 모았다. 전북 최초의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수상 작품(제4회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과 연출상)을 다시 볼 수 있었던 점도 화제였다.
2009년 이덕형은 연극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제26회 전북연극상’ 대상을 수상한다. “배우로 평생 연극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이덕형이 신념이 단단한 배우로 인정을 받았던 날이다. 시상식은 2009년 12월 29일 전주창작소극장에서 이뤄졌다.
2016년 11월 16일과 17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선보인 ‘황토레퍼토리컴퍼니’의 ‘태 2016’(연출 박병도)에도 이덕형은 사관 역으로 출연했다. 권오춘은 “이덕형은 딕션이 좋았다. 사관은 대사의 분량도 많고 몰아치는 역사에 대한 해석으로 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이덕형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황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힌 이 작품은 3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시국과 정서에 맞게 새롭게 각색되어 ‘황토’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무대화시키면
“이덕형 배우는 두말이 필요 없는 배우죠. 방송 진행자나 전문 이벤트 MC로 활동하면서,
그리고 특유의 희극적인 장기를 살린 배역이 많아진 탓에 그를 보면서 밝고 즐거운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비극적인 서사에 잘 어울리는 정통 연기파 배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웃는 표정이 더 살가웠지만, ‘그래 이 ×××놈아!’라는 욕을 던지면서도 눈물과 웃음을
자유자재로 끌어낼 줄 아는 배우, 쓴 소주잔을 연거푸 가볍게 비울 줄 아는 배우였습니다.”
- 최기우
“선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고, 자식을 잃었고, 그로 인해서 훨씬 더 술을 자주 접하면서
사회생활 자체가 영향을 받았지만,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연극 작업에 동참하고자 애를 썼던 천생 연극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황토, 창작극회, 기타 다른 극단의 작품에도 섰던 거죠. 쾌활하고 주변을 웃게 만들었던 이덕형이 그립네요.”
- 조민철
“20년 전에 군산에서 ‘탁류’라는 작품에서 덕형이 형을 처음 봤었죠. 젊은 사람인데 연기 목소리부
터가 딱딱 들리면서 우리 지역에서 보기 힘든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에 그런 재능을
보고 연출자들이 주인공으로도 많은 무대에 세웠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무대 위의 연극인, 아
티스트로서 이덕형의 세계가 더 커질 줄 알았는데, 다른 쪽이 커지면서 시기를 놓쳐 버린 것 같아 안타깝죠.”
- 홍석찬
“이덕형은 정말 ‘위’ ‘대’한 사람이었어요. 밥을 엄청 많이 먹었죠. 보통 우리는 한 공기 먹으면 족한데,
덕형이는 세 공기 정도 먹어야 기별이 가네 마네 했던 게 기억나요. 주변에서 병원에 가보라고 할 정도였다니까.”
- 조민철
“덕형이는 특히 동치미를 가장 좋아했어요. 찬합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었는데,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도 잘 관리해서 풍채가 좋았었죠.”
- 권오춘
“모르긴 몰라도 덕형이 형에 대한 연극인들의 에피소드가 각자 다 있을 거예요.”
- 홍석찬
이덕형은 끼가 넘쳤다. 그를 담기엔 지역이라는 그릇이 작았을지 모른다. 젊은 날에는 방송으로 진출하면서 돈과 사람이 모이는 서울로 눈을 돌리기도 했으나, 진한 연극 무대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발걸음을 다시 고향으로 향하게 했다.
이덕형은 울보였다. 너무도 사랑하고 분신처럼 여겼던 아들을 잃고, 일순간에 무너진 그는 어둠과 싸웠다.
살아서도 죽었던 삶이었다.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고 싶어 했으나 끝내 설 수가 없음을 누구보다 힘들어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가 지금 하늘에서 그 좋아하던 연극 무대에 서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병원에 있으면서 ‘오늘 연습 몇 시에 있어요?’라고 전화가 와요. 죽기 얼마 전의 일이죠.
혼수상태에 이르니 현실과 작품이 혼재되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날도 본인은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였나 봐요.
코로나19로 병문안도 불가능했던 때엔 링거를 꽂은 채로 병원 밖으로 나와서는 한참 동안 들어가지를 못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나 언제 무대에 세워주느냐’고 묻더군요.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연극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닌데 창작소극장 연습실에 찾아와서 후배들에게
저녁을 사겠다며 나서기도 했어요. 끝까지 연극에 대한 애틋한 정과 관심, 사랑을 쏟아냈던,
그렇게 무대에 서고 싶어서 곁에 있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연극 곁에 머물고 싶어 했던 거였어요.”
- 조민철
이 원고는 하늘에서도 그 좋아하는 연기를 계속하고 있을 이덕형을 위한 헌사다. 자신의 삶을 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생을 마감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한 연극인의 발자취를 뒤쫓았다. 지역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수집했다. 죽은 자에게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누락된 이야기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게 확인된 진실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이 지금도 연극계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덕형’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뜨거워진 눈시울과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던 이들 모두가 바로 ‘이덕형’이었다.
이덕형 연보
1964년 전주 출생
1983년 전주대 ‘볏단’ 입단
1983년 극단 ‘황토’ 입단
1988년 듀엣 코미디 ‘오성과 한음’ 결성(With 권오춘)
1997년-2002년 전주시립극단 단원
2001년 제1회 전주MBC 전라도 사투리 경연대회 금상
2004년 SBS 대한민국사투리경연대회 대상
2005년 제21회 전북연극제 최우수연기상(전북연극협회)
2007년 전북예술상 공로상(전북예총)
2008년 제25회 전북연극상 연기상(전북연극협회)
2009년 제26회 전북연극상 대상(전북연극협회)
2014년 제1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박람회 - 전국사투리경연대회 1위(안전행정부장관상)
2022년 전북예총하림예술상 공로상
2023년 별세
2023년 고 이덕형 ‘제26회 박동화연극상’ 대상 수상
주요 출연작
1987년 극단 황토 제5회 전국연극제 축하공연작
1988년 극단 황토 사랑의 비행선
1988년 극단 황토 제6회 전국연극제 우수상 ‘태’
1988년 극단 황토 제27회 전라예술제 초청공연 ‘햄릿’
1990년 극단 황토 제29회 전라예술제 초청공연 ‘비닐하우스’
1991년 극단 황토 ‘햄릿 6’
1992년 극단 황토 ‘춘풍의 처’
1994년 극단 황토 ‘언챙이 곡마단’ 전북 5개 지역 순회공연
1997년 전주시립극단 제43회 정기공연 ‘맹진사댁 경사’
1998년 전주시립극단 ‘시집가는 날’
1998년 전주시립극단 제46회 정기공연 ‘견훤대왕’
1999년 전주시립극단 제48회 정기공연 악극 ‘이수일과 심순애’
1999년 전주시립극단 제49회 정기공연 ‘이 풍진 세상의 노래’
2000년 전주시립극단 제51회 정기공연 ‘흉가에 볕 들어라’
2001년 전주시립극단 제52회 정기공연 ‘춤추는 모자’
2001년 전주시립극단 제53회 정기공연 ‘불타는 소파’
2002년 극단 황토 전북 도내 순회공연, 전주세계소리축제 초청공연 ‘춘풍의 처’
2003년 창작극회 제106회 정기공연 ‘선비 그리고 칼’
2004년 남원시립국악단 ‘남원뎐’
2004년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38회 정기공연 ‘흥부전’
2004년 극단 황토 103회 정기공연 ‘카레이스키’
2005년 극단 하늘 ‘남자충동’
2005년 창작극회 ‘장사의 꿈’
2005년 전주시립극단 ‘동문거리 여자는 아름다웠다’
2005년 극단 황토 ‘꿈꾸는 나라’
2006년 정읍시립국악단 ‘천명 - 황토현의 횃불’
2006년 극단 황토 ‘오브제 태’
2008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시스템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
2009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시스템 ‘물보라’
2012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컴퍼니 창단 30주년 기념작품 ‘천년의 달’
2013년 문화기획집단 얘기보따리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
2015년 창작극회 ‘발톱을 깎아도’
2016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컴퍼니 ‘태 2016’
2017년 극단 황토레퍼토리컴퍼니 ‘천년의 달’
2017년 남원시립국악단 ‘월매를 사랑한 놀부’
2019년 창작극회 ‘아부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