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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인의 자화상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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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애를 품은 따뜻한 목각, 김윤환
  • 2025-04-08 10:17
  • 조회 61

본문 내용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애를 품은 따뜻한 목각김윤환 

 

 

김미선(전북대학교 초빙교수)

 

 

 

 

 

 


"기존 가구의 형태 틀에서 벗어나 오브제의 가구 개념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의 오브제는 자연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나 가까이 느끼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곳에 우리의 씀씀이가 놓여있다.”

 

“I'm trying to escape from the framework of the existing furniture, and seek a concept of furniture as an objet. My objet is about nature and the objects that we encounter in our everyday lives, and that is where our uses lie.”

 

(청주공예비엔날레조직위원회 아카이브 )

 

 


 

김윤환(金潤煥, 1942.6.19.~2024.1.18.)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에서 태어났다.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디자인학과 및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가구디자인 전공)을 졸업하였다. 1975년부터 32년간 원광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지난 2007년 정년퇴직을 하며 전북 디자인 발전 및 인재 양성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디자인 1세대이자 목공예와 목칠 분야의 원로로서, 한국 근현대공예 분야를 관통하는 인물이었다.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친 교육자 김윤환의 또 다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목공예 작가로서의 면모 역시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다작(多作)의 작가인 김윤환은 자신의 고유한 예술관을 국내외 전시를 통해 지속적으로 선보임으로써 정체되지 않는 작가적 행보를 보였다. 근현대공예는 근대공예와 현대공예를 함께 일컫는 말인데, 한국의 근대공예와 현대공예의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학계 의견에 따라 19세기 말 이후 전통공예가 붕괴하고 식민지를 거치면서 일본의 영향으로 변용되어 가는 단계를 근대공예, 1960년대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교육의 시작과 서구의 영향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경향을 현대공예라고 구분하겠다.

 

 

1. 공예, 근대와 현대의 기점에서

 

1929년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의 저서 조선의 소반에는 일제강점기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쓴 발문이 있다. 이 글에서 야나기는 자신이 최근 5, 6년간 조선민족미술관’(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을 위해 소반들을 모았다고 회상하면서, 일본 집에서도 세끼 식사를 조선의 소반에서 하고 있다며 그 애정을 피력하였다. 그는 조선의 목공예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반듯하게 나무를 켜지 않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밑바닥도 조금 평편하게 해두면 그만이고, 마무리도 꼼꼼하게 하지 않는 그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서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소반은 조선인들에게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갖게 하는, 조선인의 민족의식, 민족주의를 고무시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아울러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조선이여,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기보다 지니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현재 예술가에게 있어서 요구되는 가치관(values)으로서, 야나기는 우리의 전통과 이어지며 과거로 향하게 한다면, 다쿠미의 지니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그 상태에서 미래를 지향한 현대 예술가의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의 목공예는 역사적으로 과거와 미래 지향 사이에서 갈등해 왔다. 그리고 공예를 현대적인 예술 분야로 이룩해 낸 시대가 바로 김윤환의 활동 세대들부터였다.

 

 

2. 어린 시절 전주에서, 그리고 홍익대학교 진학

 

 



김윤환은 전주 다가동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 그가 자란 다가동은 전통적인 전주 구도심으로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집성촌이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어린 시절 김윤환은 강점기 시기에 지어진 근대식 건물들을 보며 자랐다. 그러나 이곳은 전주의 전통적인 중심지로서 조선 시대 유적지인 객사·경기전과 가까웠고, 다가동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전주천에는 수양버들이 흐드러지고, 다가교 외에도 작은 돌다리 등 다양한 모습의 다리들이 정겨운 아름답고 평온한 동네이기도 했다.

 

 

김윤환은 이곳 다가동에서 당시 전주중앙공립국민학교(현 전주중앙초등학교)에 다녔다. 김윤환은 7남매 중 장남으로, 집안의 장손으로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흥학교 시절 김윤환은 누구보다도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고, 미술 선생님의 눈에 띄어 미술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시절 전주 시내에 제대로 된 미술학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행히 인근에 있던 전주성심여고 교장의 배려로 학교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부인 이예순 씨의 회고에 따르면 김윤환은 미술에 소질을 발견한 당시 신흥고등학교 미술 교사로부터 권유를 받고, 당시 성심여고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문인표 선생에게 미술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고등학생 김윤환이 한창 문인표 선생의 문하에서 미술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갈 무렵 전주 예술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전주 성심여고의 미술 교사들은 일제강점기 동경 유학파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서울 유명 미술대학 출신의 엘리트들로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작가로서도 활동한 지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들이었다. 당시 1950~1960년대 성심여중·고의 미술교사로는 김용봉, 이경훈, 소병훈 등이 근무하였는데, 이들은 서울 학교의 미술 교사들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실력파들이었다. 이들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풍부한 예술적 토양은 미래 미술학도에게 훌륭한 성장의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전주에서는 이경훈 화백을 중심으로 미술 교사들이 전북 최초의 서양화 그룹이었던 신상미술회(1954)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10여 년간 매회 전시회를 개최하며 전북 미술을 이끌었다. 신상미술회 동인은 후일 김윤환을 원광대학교로 이끌었던 조각가 배형식 교수와 친분이 있었던 교사들이었다. 배형식은 1957년 홍익대를 졸업하고, 서울과 전주에서 미술 교사를 하며 1968년부터 1973년까지 홍대 등 시간강사를 하다가 1972년부터 원광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재직하였다. 따라서 김윤환은 아마도 전주 신흥학교 시절부터 배형식 교수와 친분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홍대와 원광대로까지 인연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 무렵 헌칠한 키에 서구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의 남학생이 신흥고 교복을 입고 성심여고 미술실을 드나들 때는 여학생들의 주목을 받으며 제법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성격이 얌전하고 내성적이며 오직 미술대학 진학만을 위한 목표가 확실했던 김윤환은 한눈팔지 않고 착실히 실력을 쌓아 단번에 홍익대학교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김윤환에게 있어 대학 시절은 예술과 디자인에 대한 생각의 토대를 형성하게 된 시기이다. 그는 청년 시절 책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계적 건축잡지 ‘Domus’ 등 각종 외국잡지와 예술서적을 탐독하며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키워나갔다. 또 이 시기에 김윤환은 도안, 목공, 가구, 도자, 금속, 흙 등 다양한 분야를 배웠다. 다채로운 재료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감성을 표현하게 된 시기이며, 평생 사랑하게 될 나무를 작업 재료로 처음으로 접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홍익대학교 후배이면서 제자이기도 한 김윤환의 차녀 김희선 씨의 회고에 따르면 바깥 세계로부터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 새롭게 접하게 되는 재료들에 둘러싸여 미학과 작품에 있어 기능의 가치 등 디자인적인 사고를 하게 된 시기였을 것이며 미술학도에서 작가로서 거듭나기 위한 중요한 기간이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미술을 전공한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순수회화나 공예를 떠올렸고, 둘 가운데 하나를 전공으로 택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당시 학교에서 교수들의 지도 방향은 현대산업적이고 기능적인 실용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공예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이유는 공예가 역사적으로 기술과 예술의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근대기 공예는 전통 수공예 기술의 계승과 발전 개념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입된 산업생산의 메커니즘을 아우르면서 공업과 공예를 혼용하여 하나의 문맥에서 언급되었다. 다시 말해서 초기의 공예는 생산과 창작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숙련된 기술의 관점에서 미술과 공예를 하나의 개념으로 보았다. 그러나 점차 공예의 기술적 문명적 측면이 공업으로 인식되며 그 갈래가 분명히 나뉘었고, 수공예의 미술적 측면이 미술공예라는 이름으로 변별되면서 장르화되었다. 결국 공예는 전근대와 근대, 전통수공업과 근대산업, 공업과 미술의 경계를 아우르고 분화하면서 공업미술문화로의 장르화를 이루었다.

여기에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시기를 거치면서 물질문화보다는 정신문화, 실용문화보다는 순수미술을 상대적 우위로 간주하는 모더니즘의 장르적 위계 관념이 일본을 통해 수용되었고, 공예는 공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특별하게 예술적 미술공예로 분화한다. 이후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한동안은 서구의 직접적 개념 유입이 아닌 일본에서 들여온 미술 개념과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근대적 유산에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결국 초창기 대학에서 응용미술(應用美術, applied arts)이라는 명칭으로 순수한 미적 탐구와 더불어 미술과 디자인에 관한 통합 교육이 이루어졌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은 1948년에 설립되었고, 김윤환은 한홍택(韓弘澤, 1916~1994), 한도룡(韓道龍, 1933~2021), 유강렬(劉康烈, 1920~1976) 교수 등에게 지도받고 응용미술학과 16회로 졸업한다. 한편 김윤환과 함께 1982년 홍림회를 창립하며 이후 홍익대 교수로 활동한 최승천, 곽대응 등은 김윤환의 대학 시절 학과 조교를 하거나 같이 다녔던 선배들이었다.(도판 6, 9) 또 김윤환보다 연배가 세 살 위였지만 대학 동기로서 가까이 지낸 김관중이 있었다. 그는 졸업 후 서울에서 가구회사 예랑을 운영하며 청와대 가구까지 제작했다.

 

 



당시 홍익대 응용미술학과는 전공을 분리하지 않고 여러 분야를 섭렵할 수 있게 했다. 이에 김윤환은 다양한 공예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는데, 대학 시절 처음 참가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일명 국전)에서 목공예가 아닌 동으로 제작한 <과반>으로 입상하게 된다. (도판 7. 8) 그의 공식적 첫 작품인 <과반>은 공예가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작가적 사고와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스틱(Minimalistic)한 디자인적 스타일을 볼 수 있다.

 

 





 

1966년 김윤환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내 이예순(李禮順, 1945년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이후 두 딸(기태와 희선)을 낳았다. 이른 결혼이었지만 그는 가족과 따뜻한 보금자리를 빨리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결혼과 함께 김윤환은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가난한 학생 부부로 신혼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김윤환은 비로소 대학원에서 목공을 전문적으로 전공하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당시 목공예 선택에 대해 그의 딸 희선이 물었다

아빠는 그때 왜 나무를 선택했어?” 따뜻해서.”

 

김윤환은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초기부터 그는 나무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낸 작품을 만들었다. 나무는 그와 정서적 교감을 하는 생명체였다. 작가의 감성과 언어를 표현하는 주요한 매체이자, 단순한 재료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다른 재료에서 느낌이 없는 따뜻한 온기가 나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김윤환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한편 자택 2층 거실에는 신혼 시절 제작한 서랍장이 있다.(도판 11) 부인 이예순씨가 기억하기로는 1971년도 한국공예디자인협회전에 참가하면서 만든 작품으로, 당시 형편에 재룟값이 없어 빚을 내서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태어날 큰딸에 대한 선물이었을까. 서랍장은 고유한 나뭇결을 살리면서 서랍마다 무쇠 장석으로 장식성을 높였고 현대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정교하게 만들었다.

1975년 김윤환은 원광대에 임용되었다. 원광대로 오기 전까지는 홍익대에서 강의하면서 인덕전문대 전임강사로 근무했다. 김윤환은 원광대에 임용되고도 홍익대와 전남대에서 강의하며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1977년경 가족들까지 모두 전주로 이사하면서 고향에 정착했다.

 

 

 

3. 원광대학교에서(예술과 기술의 교차점: 바우하우스를 꿈꾸며)


 



김윤환은 1975년 원광대학교 응용미술학과에 부임하였다. 원광대학교에는 1972년 처음 사범대에 소속된 미술교육학과와 1973년 종교미술과가 신설되었는데, 이후 종교미술과는 2회 신입생 모집부터 응용미술과로 학과 명칭을 변경하였다. 초창기 응용미술학과 교수로는 김윤환(목공예), 오윤경(금속), 한봉림(도자)이 활동하며 전공으로서 공예 분야만 존재했다. 그러나 이후 김윤환의 주도로 시각디자인 분야를 신설하여 학과를 확장하게 된다. 당시 원불교 창시자의 아들이자 원광대 초대 총장을 지낸 박길진(朴吉眞, 1915~1986) 총장은 김윤환을 신뢰하여 학교의 디자인 관련 모든 행정을 그에게 전담하게 했다. 김윤환의 제자로서 1980년대 초반 학과 조교를 담당했고 이후 원광보건대학에서 퇴직한 김상경 교수는 당시 김윤환 교수가 원광대 버스 디자인, 원광사, 원광 잡지 신문 인쇄 등 관련 일을 모두 도맡아 하면서 학교 본부로 얼마나 불려 다녔는지 그때 학과에서는 그를 포스터 교수라는 별호로 불렀다고 즐겁게 회상했다.

 

원광대학교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교육 개편을 통해 미술대학을 단과대학으로 승격시켜 확장하였다. 이때 미술교육과의 서양화, 조소, 한국화, 서예가 각각의 학과로 분과되었고, 1978년도에는 응용미술과에서 먼저 금속공예과가 분과하고, 다음 해 도예과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때 목공예는 따로 분과하지 않고 디자인과에서 잔류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목공예는 독립학과로 분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김윤환은 끝까지 산업디자인과에 남는 것을 택했다. 교수로서 얻을 수 있는 개인의 영달보다 제자들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다. 이 같은 선택은 디자인의 가치가 세계적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시대의 필연적 흐름을 일찌감치 간파해낸 앞서간 판단이었다.

 

당시 김윤환은 목공예학과를 신설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고, 학교 측의 인정을 받으며 안정적 지위를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디자인과에 남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후에 김윤환과 제자들이 나눈 교수의 진심에는 현대디자인의 개념이 부각되는 시기에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성향의 목공예를 전공한 제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껏 학과에서 다양한 디자인 분야를 전공한 제자들은 인테리어나 디자인 쪽으로 다양하게 진로를 개척할 수 있었지만, 만약 그가 분과를 했었다면 졸업생들이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게 보였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미술을 전공하려는 작은딸이 대학 진학과 전공을 선택할 때도 공예가 아닌 디자인 분야로 선택하길 권했다. 그 당시에는 여전히 미술대학에서 공예 전공자가 많이 배출되고 수요가 있었던 시기였기에 진학한다면 동일 계통 전문가이자 교수로서 실질적인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공예의 쇠퇴와 디자인의 새로운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윤환은 디자인계의 변화를 직감하고 목공예의 미래를 고민하며 학과 제자들의 진로가 목공예로 한정되는 것을 우려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잔류 선택을 한 것이다. 이를 두고 김상경은 김윤환 교수님께서 작품에서도 시대적으로 앞서나가는 부분이 있었고 훌륭하지만, 이러한 그의 결단력, 스승으로서 제자에 대한 애정을 높이 사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디자인에 대한 인식 변화는 1963년 한국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고 정부 주도의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다. 정부는 1960년대 초기 생활필수품 공급과 국산화 및 수출 산업화가 용이한 경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산업화를 이루었고, 이를 기반으로 1970년대 중후반부터는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산업화의 축을 전환하였다. 초기 산업화를 통해 비약적 성장을 이루면서 이후 산업 물품에 대한 디자인적 인식이 달라졌고 한국의 디자인산업 정책은 지난 50여 년간 정부 주도의 디자인 진흥 정책이 수립·진행되었다. 다시 말해서 1970년대를 전후해 국가 차원의 수출과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도입돼 통용되기 시작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외관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넘어 수요자 중심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해 다양한 분야의 제품 및 서비스의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정부는 한국디자인진흥원을 설립(1970)하고 디자인 진흥을 위한 법을 마련(산업디자인진흥법, 1977)하는 등 정부가 디자인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1980년대는 엑스포,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이라는 국제적인 국가 행사가 이루어지면서 국가 주도의 전통 민예품 개발과 가구 제품 개발 사업 추진, 다양한 목공예 개발 사업이 이루어졌다.


김윤환은 그런 흐름이 시작되던 초기 단계에서부터 디자인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이른바 우리나라 디자인 1세대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민예경진대회에 출품하도록 하고, 아카데믹한 권위의식과 관점에서 벗어나 소병진 소목장 등 전통공예가나 전승자들과 교류하였고, 시계 디자인 제품 개발을 위해 도내 기업인 익산 국제전광사창원전파사와 적극적으로 협업하였다. 미술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활동들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93~1994년의 미술대학 학장 시절에는 캐나다 퀘벡대학 및 중국의 학교와 자매결연을 통해 학생들에게 글로벌한 가치관을 갖도록 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일찍이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주도로 이루어진 학문적 연구에 참여하며, 1975년 재단법인 한국디자인포장센터 학회지(Vol.6)에 논문을 기재하기도 했다.(도판 15) 이러한 경험은 김윤환 작가 자신의 공예에 있어 예술과 기술의 교차점에서 현대적 디자인에 관한 더욱 심도 있는 세계관을 갖게 했다. 바로 바우하우스를 통해서이다. 바우하우스에게 영향을 받은 김윤환은 작가로서 모더니스트적 경향을 본격적으로 표출하게 됨과 동시에 교육에 있어서도 다각적 시도를 펼쳐나간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독일 바이마르에 있던 조형학교이다.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쳐, 건축과 순수예술 그리고 기술 분야의 모든 조형 분야를 종합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당시 독일은 정부 주도의 교육개혁운동이 진행되어 예술의 서열을 반대하고 예술가와 장인 간의 협력을 권장했으며, 산업계에 예술적 정신이 깃들도록 예술과의 연합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였다. 또 국가적으로 강조된 응용미술은 100여 개의 교육시설 계획에 포함되었는데, 이 교육시설 중 절반은 산업 분야로 전문화되었고, 한 도시 또는 지역의 산업 활동의 일환을 이루게 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전통적인 예술을 산업미술과 분리하지 않았고 예술적인 교육은 곧바로 기술의 응용, 즉 전문적인 직업교육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이곳에서 생산된 디자인은 자연물에서 볼 수 없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이전보다 현대적이고 모던한 디자인으로 폭발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다.

 

 

 


 

 

1978년 원광대학교 기획위원회 건축 미화분과 상임위원회 위촉되어 건축학과 개설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윤환은 독일에서 바우하우스가 지역의 산업과 학교를 연계하며 전문화되었듯이, 이때부터 구체적으로 예술교육과 건축, 공예, 산업을 종합한 지역을 만들고자 꿈꾸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계획은 현재의 익산산업단지를 꽃피우게 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김윤환이 전북으로 내려온 1970~1980년대 시기는 한국 공예가 다양한 소통 구조를 형성하지 못하여 공예에 대한 지역의 무관심과 몰인식은 심각했다. 그는 전북에서 적극적으로 공예를 알리면서 수도권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예 활동의 중앙집중화 현상에 대해서도 경계했다. 그는 전북산업디자이너협회(JSID)를 조직하여 1990년 대표를 지내면서 회원 전시와 회보 발간,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전북산업디자인의 체계적인 발전을 이끌어냈다. 또한 1982년 전북 최초의 목공예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19913월에는 안덕춘(전주대), 임승택(전북대)과 함께 전북 목공예가 3인전을 전북예술회관에서 개최하면서 서울에 집중된 공예문화를 지방에 확산,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공예문화의 지방 활성화에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자처했다.

 

 



4. 작품세계

 

 

 나의 작품 모티브는 한국의 산과 나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은 동산으로부터 출발한다.

엄마의 품과 같이 포근한 고운 선을 기하학적 형태로

반복하고 무수히 많은 숲이 곱게 리듬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기능적으로는 작은 서랍을 넣어 씀씀이가 있는 개성 있는 조형을

표현하고자 한다.” 

 - 작가노트 에서

 

 

  

 



김윤환은 오랜 경험과 집요한 연구를 통해 나무의 물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였다.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나무가 품은 따뜻함과 가족으로 상징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결합해 새로운 조형 언어를 발화하는 작품들로 완성해 나갔다. 김윤환의 작품들은 산과 들로 둘러싸인 그의 일상과 긴밀하게 호응한다. 작업실이 있는 전주 대성동 자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윤환이 40대에 지은 이 집은 마치 숲속의 집처럼 꽃과 나무, 새들과 하늘이 가깝게 어울리는 장소다. 그가 말년에 쇠락해가는 몸을 이끌고 앉았던 작업 테이블이 있는 공간이자, 제자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장소였으며, 작가로서의 노고와 가장의 행복이 묻어 있는 곳이다.

 

김윤환의 초기 작품 경향은 조각으로서 미학적 접근이 두드러졌다. 형태와 부피, 재료의 질감 등에 기반을 둔 감정 전달에 집중한 시기로 간주된다.

중기에 접어들어서는 공예에 기능을 접목하는 데 몰두했다. 이즈음 작품에 서랍이 등장했다. 다양한 나무의 자연적 색감을 살리는가 하면, 일본 교환교수 시절 배운 옻칠과 아크릴 등 이질적 재료들과의 접목 시도와 같은 다양한 시도를 꾀했다. 이는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 요소의 대조를 통해 조형미를 확보하고 디자인적인 균형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김윤환은 이 무렵 모더니스트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기 이후에는 실용적 디자인을 통한 실용성과 조형미의 조화를 강조했다.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동시에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말기 작품들은 지병으로 인한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작업 방식이 적극 고안되었다. 작은 나뭇조각들을 사용했고 나무를 태우거나 절단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자연 그대로의 날것의 아름다움을 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상징적 아이디어로 표현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자신의 생애를 고찰했다.

 

김윤환은 총 4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이래와 같다.

 

  • 1982년 전북예술회관
  • 1992년 일본 교토 마로니에 화랑
  • 1993년 일본 교토예술대학 화랑
  • 2006년 원광대학교 미술관

 

1982년 전북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제1회 개인전은 전북 최초의 목공예 작품전이었다. 당시 초창기 공예가들의 작품은 말 그대로 예술성을 담은 하나의 미술작품으로, 그들의 작업은 공예라기보다는 목-조각(wood sculpture)에 가까웠다. 김윤환이 기고한 글을 확인하면, 그는 1980년대 몇몇 아티스트들이 시도하고 있는 비기능주의 예술(nonfunctional art)에서, 벤델 캐슬(Wendell Castle)유기적인 형태로부터 탈피한 하나의 물()은 조각적 요소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나의 작업은 조각적 행위인 동시에 가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라고 언급한 내용을 인용하며 같은 방향성에서 실험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오브제라고 불리는 김윤환의 초기 작품은 공예의 기능성보다는 예술성에 무게를 두고 나무의 무늬, , 자연 그대로의 나무, 나무의 감성 등에 집중한 예술적 작업을 선보였다. 특히 그는 고사목(枯死木)과 같은 죽어서 버려지고 길가에 방치된 나무를 당시 작품의 주요한 소재로 삼았다. 작품은 고목 그대로의 조형성을 살리고 가공을 최소화하여 새롭게 예술적 생명을 주었다. 당시 전시회는 전국적으로 특별하게 주목받았고, 전시회에서 선보인 한 작품은 전주 상산고등학교 학원재단에서 매입하였다.

 

김윤환의 제2회 개인전은 첫 개인전이 있고 10년이 지나서 1992년 일본 교토 마로니에 화랑에서 갖게 된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중요하게 향후 그의 대표적 시리즈가 되는 <태양을 향하여>, <동산> 시리즈가 처음 등장했다. <태양을 향하여> 시리즈 중 하나인 <기쁜 소식>은 기다리던 소식을 주제로 조형적으로 단순화되고 규격화되게 가공되어 짜맞춰진 형식이 특징이며, ‘가구 디자인적인작품으로의 확실한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제1회와 달리 한 작품에서 다양한 목재를 사용하여 완성하는 변화된 모습도 보여주는데, 이는 한 작품에서 여러 종류의 목재를 구성하여 그 특성에 따라 적재적소에 생기를 주면서 주제를 강조했다. 작품은 각기 다른 색과 느낌을 보유한 목재들이 사용되었는데도 복잡하거나 이질감을 주지 않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는 작가가 목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등장한 <동산> 시리즈에서는 낮은 산과 반가운 소식을 담은 새를 함께 제작하여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작품 <무지개><동산 시리즈>의 반향이다. 2회 전시회 도록의 서평에서 미술사가 서공호는 작가가 선택한 소식, 동산, 새 등의 모티브들에 대해 우리들의 주변을 이루고 있는 매우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의 시선은 이들의 곧 본래적 자연성과 어떻게 합일되어 가는가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김윤환은 1993년 일본 도쿄시립예술대학 객원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일본 교토시립예술대학 갤러리에서 제3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특별하게 세 번째 전시회에서는 일본의 자연환경을 작품에 담았다. 산과 바다, 돛단배 등 섬나라의 자연환경을 모티브로 다양한 에스키스(esquisse)와 작품을 남겼다.

 

 

 

 

 

 

 

새로운 세기를 앞둔 1990년대에는 모든 예술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로 급격히 휩쓸려 갔다. 공예에서도 기능적이고 단순한 양식이 주창되면서 가구디자인에 있어 그 기능성이 중요한 키워드로 전환되었다. 이미 국제적인 흐름을 통해 미리 파악하고 있었지만, 유독 한국 디자인계에서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김윤환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공예가 점차 자리를 잃고 사라지던 시대를 현장에서 체험하며 공예와 목가구의 기능성을 고민하였다. 이에 1990년대 작품에 예술성을 기반으로 하며 실용성과 기능성을 추가하면서 서랍을 넣게 된다. 서랍은 예술적 동반자였던 아내의 권유가 먼저 있었고, 대학 동기이자 가구회사를 운영하던 김관중의 관점, 즉 모던하고 대중적인 가구디자인을 수렴하면서 확립되었다. 이렇듯 1990년대 김윤환의 작품은 기능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서랍이 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전환되었다. 여기에 일본 예술대학 객원 교수로의 연구 기간은 그에게 일본 옻칠을 배우는 기회가 되어 새롭게 변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2006년 개최된 제4회 전시는 제자들이 합심하여 마련한 정년 기념전시회였다. 그는 원광대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70~1980년대 초, 시대적으로 디자인계의 변화 시기를 직접 경험하였고, 분야의 선배이자 교육자로서 후배 디자이너에 대한 미래지향적 방향성을 모색했다. 한편 그는 모든 작품을 항상 손수 제작했다. 특별히 작품에 전문적인 금속 장식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자신이 직접 목재를 깎고 다듬고 짜맞추고 손질했다. 이에 네 번째 전시회에서는 지난 30년간 교육자이자 작가로서 품어왔던 목공예의 디자인과 예술적 측면에서의 고민, 조형예술의 표현 매체로서의 아트퍼니처(Art Furniture), 그리고 평생 지켜 온 작가적 고집이 작품으로 온전히 회고되었다.

 

1990년대 초반 문화재 전문위원 박영규는 김윤환의 목공예 작업에 대해 목공예가 갖는 용도와 아름다움에 자연적인 생명력을 불어넣고 좀 더 자연에 근접하려는 목공예의 바람을 담은 것으로, 그의 작업에서는 목재를 재구성해서 다시 자연 나무로 돌아가려는 의도까지 엿볼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술성에 기반한 그의 목공예 작품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했던 공예 세대들에게 실용조형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과 항상 충돌하게 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공예사는 서구와 일본과 달리 복잡한 상황을 겪으면서 남다른 길을 걸었다. 예술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는 근대공예 운동, 그리고 일본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을 통해 공예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고 예술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한국의 공예는 문인화, 한국화 등과 같은 전통적 고급 미술로서의 미술적 지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서구의 산업화를 맞닥뜨렸지만, 그 계보도 받지 못했다. 이유는 근대적 시기 일본의 개입으로 조선미술전람회공예부라는 미술 분야로서 공예가 기물(器物)에서 미술품으로, 공예가가 장인에서 미술가로 바뀌었고, 오랫동안 공예가 가져왔던 현실적 기능(생활상의 실용)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실되는 대신에 미술이라는 새로운 체제 안에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이후 현대적 의미로 만난 서구의 공예는 대중적 산업물이라는 자격을 얻고 공장 생산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 근대공예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즉 서구에서는 대량 생산품으로 산업화된 황실 그릇이나 가구 등이 등장했지만, 한국의 공예품은 서구의 기계화되고 산업화된 제품처럼 동일한 물건이란 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공예는 절대로 틀에 박힌 통일된 규격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공통된 균형감각 내지는 안목에 의하여 짜였다. 여기에 한국의 공예는 예술성에 있어 현대적인 감각으로도 받아들여지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는 오늘의 생활공간 속에 놓여도 조화를 이루며, 시대가 바뀌고 생활공간이 달라졌음에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다. 한국 공예가는 어떤 보편성 있는 아름다움과 조화의 일정한 척도가 있어서 그에 맞춰 물건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움과 조화를 위한 규격화한 척도가 없기 때문에한국의 공예품은 저마다 규격이 다른 미술품으로서 감상하며 작품이 되었다.

 

 

 

 

 

 5. 마지막 작업

 

김윤환은 2024118일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향년 만 82) 안타깝게도 그는 같은 해 9월 교동미술관 기획 초대전을 앞두고 있었고,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교육자로 일생을 바쳤던 그가 정년퇴직 이후 의욕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과 제자들은 안타까움과 함께 커다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윤환은 오랜만의 신작 발표를 위해 다시금 삶의 즐거움을 느끼며 열정적으로 몰입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나무를 태우는 방법(burring skill)으로 작업했다. 새로운 시도였다. 하지만 이 작업 방식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말년에 기흉수술로 인해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손아귀 힘이 약해져 큰 나무를 깎고 다듬는 작업이 힘에 부치게 되면서 버려진 작은 통나무들, 나뭇가지들을 사포질이나 옻칠 없이 전혀 가공하지 않은 채 서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작품 만들기를 좋아했다. 이전 작품들은 화려한 옷을 챙겨 입은 듯 세련되었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순수한 시골 아이들 같아서 좋았다. 다만 이번 전시에서 태우는 방식은 나무의 거친 결을 다듬기 위해 중요한 기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작업에 몰두하며 삶의 의미를 갖고 행복했지만, 건강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갔다. 그래도 그는 일평생 그래왔듯 작업실에서 나무를 쓰다듬고 매만지며 지나간 시간과 남은 삶을 정교하게 깎고 다듬으며 보내고자 했다.

 

부인 이예순 씨는 ‘제자들의 전시회에 초대되어 갈 때마다 최근 하고 있는 작업과 준비 중인 개인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제자들을 격려했다’라고 그의 말년을 회상했다. 제자들에게 작가로서 모범이 되고자 했고,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도 강한 의지와 자부심을 비췄던 것이다.

 

원광대 재직 시절은 물론 퇴임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던 김윤환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소중한 많은 것을 나누고 보여주고 싶었다. 이에 익산보석단지 디자인센터에서 일하는 제자의 권유로 2023년 전북디자인센터에 그간 보관했던 디자인 책과 자료를 기증하였다. 갈수록 새로운 책들이 발간되고 있고, 서고나 도서관에 가서 직접 책을 찾아 복사해서 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지만, 디자인 공부를 하는 후배들이 지나간 역사의 소중함을 조금이나마 알고 되새기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월간 디자인 창간호(1976)20(1978), 종합디자인 학술·논평지, 월간 코스마, AXIS 19981·2월호, 다양한 논문집과 워크북 등 교재로 활용했던 소장본 등 300여 권을 기증했고, 여기에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바우하우스가 포함되었다.

그는 평소 가구디자인을 전공했던 딸 희선과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김윤환은 디자이너의 작품은 남을 위한 것이지만, 예술가는 자기표현을 위한 것이고, 아티스트로서의 자기 자신, 즉 한 인간을 고민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작품을 계속하면서 창조성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후배들이 봤으면 좋겠다라고 미술과 자신의 작업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평소 제자들이 자신을 통해 창조성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몸소 실천하였다. 최근까지 공예단체전에 매년 꾸준히 출품하였고, 2024년 개인전을 위한 작품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준비하던 개인전은 그가 유명을 달리하며 무산되었지만, 그는 언젠가는 전시로서 우리가 김윤환을 다시 추억할 수 있도록 미발표 유작을 남겼다.

 

  

 

 

 한국의 목공예에 대해 전문 미술사가들은 전통적인 조선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중략) 그것은 미술이자 곧 종교요 미술이자 곧 생활이다. 말하자면 상품화된 미술이 아니므로 정치(精緻) , 정돈된 맛에서는 항상 부족하나 그 대신 질박한 맛이나 둔후(鈍厚)한 맛과 순진한 맛에 있어 우승(優勝)한다고 하였다. 이조 목공의 미는 인공적인 장식성, 인위적인 조형을 최소한 줄이고 간결한 선, 명확한 면의 미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어 낸 데 있다고 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한국의 목칠 공예의 특징이 자연주의에 있다는 말로 집약된다. 즉 자연적 소질(素質)과 자연적 소박성을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난 공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1980년대 김윤환의 1회 개인전에서 보여준 초기 작품과 가깝게 맞닿아 있다.

그러나 김윤환이 1990년대 이후 발표한 작품은 과히 전통공예를 현대적인 것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었다. 즉 김윤환의 1990년대 이후 발표한 작품들은 최순우의 말을 빌리자면, 조선의 목칠공예에 대해 가식 없는 단순한 의장과 건실한 구조미는 근대적인 (여기서는 현대적 미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예미와도 상통되는 아름다움으로서 개개의 목공작품에서 볼 수 있는 적정한 비례와 간결한 직선 구조미는 유례가 없을 만큼 새롭다. 이러한 구조와 의장들은 기물의 용도에 가장 충실한 것을 대본(大本) 삼아서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구석진 공정이나 보이지 않는 세부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심한 성실이 나타나 있다라고 말한 근대성’, 즉 오늘의 현대적 미감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김윤환이 단순한 의장과 견실한 구조, 알맞은 비례가 모두 용도에 충실하고 공정상으로도 치밀하게 최선을 다해서 얻어낸 결과인 것이다.

 

김윤환은 지방이라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목공예라는 예술이자 가구디자인 분야를 전북에 뿌리내리고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북 목공예와 가구디자인, 그리고 전북 미술의 활성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이제 미처 발표하지 못한 그의 마지막 미완성 작업으로 남았고, 이는 새롭게 발전하는 후배들의 창작을 위한 진행형이 되었다.

예술과 실용의 사이에서 미술과 디자인이 활용된 산업디자인 제품은 우리의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집 안에 있거나 집 밖에 있거나, 또 일할 때나 쉴 때 언제 어디서든지 의자, 책상, 테이블 등의 가구는 물론이고 다양한 공업제품을 접하고 살고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 삶 속에서 인간과 함께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즉 다양한 공산품들은 가정, 일터, 학교, 공장, 사무실, 상점, 공공건물과 거리의 교통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우리 눈에 보이는 일상생활 속의 온갖 문화적 풍경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에 분명 김윤환은 우리 시대에 국한된 세계관을 가지고 목공예와 가구디자인을 뿌리내리도록 한 건 아닐 것이다. 그의 철학은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예술품과 공산품, 미술과 디자인 사이에서 그 전체성 안에 예술과 기능과 목적이라는 복잡한 패턴들을 담고자 했으며, 제자들에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태도를 분명하게 담아내도록 방향을 제시했다. 이제 우리가 그에게 화답할 차례이다.

 


 

 

· 참고문헌 및 자료 


1982년 제1회 김윤환 개인전 도록(전북예술회관)

1992년 제2회 김윤환 개인전 엽서(일본 교토 마로니에 화랑)

1993년 제3회 김윤환 개인전 도록(일본 교토예술대학 화랑)

2006년 제4회 정년 기념 김윤환 개인전 도록(원광대학교 미술관)

 

김윤환, Systematic Furniture Design의 지향점: Office의 능률화를 위하여, 디자인·포장(Vol.6), 재단법인 한국디자인포장센터, 1975.

김윤환, 현대 목공예의 이해

박영규, 목재조형으로 표현한 시각적 아름다움과 자연의 생명력

최공호, 전북목공예가 3인전에 부쳐, 목공예가 3인전, 전북예술회관, 1991.

최범, 한국 현대공예의 상황, 공예, 시간과 경계를 넘다, 서울공예박물관, 2021.

박영규, 김동우, 목칠공예, , 1990.

이종석, 한국의 목공예, 열화당, 2001.

리오넬 리하르트, 바우하우스, 열화당, 1993.

존 헤스켓, 산업디자인의 역사, 시공사, 2004.

김윤수, 한국미술 100, 한길사, 2006.

박계리, 모더니티와 전통론, 혜안, 2014.

()한국공예문화협회, 한국공예 100인 초대전, 북이너스, 2016.

예술의 전당, 예술의 전당 미술관 개관 기념 한국미술-오늘의 상황, 공예, 1990.

 

송승욱, 디자인 1세대 김윤환 전 원광대 교수 디자인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것, 전북일보, 2023.6.1. 기사

 

청주공예비엔날레조직위원회 아카이브, http://benl.okcj.org/ (마지막 검색, 2024.9.4.)

 

유족 이예순, 김기태, 김희선, 제자 김상경 인터뷰(2024.7.24.)

 

 

· 연보

 

김윤환(金潤煥, 1942.6.19.~2024.1.18.)

 

1942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출생

1960 전주 신흥고등학교 졸업

1966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디자인학과 졸업(가구디자인 전공)

197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미술대학원 졸업(가구디자인 전공)

 

1975~2007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산업디자인과 교수 역임

1985~1992 전라북도 초대작가 운영위원 심사위원

1989~1990 전북산업디자인협회 회장

1991~1992 전라북도 관광공예 경진대회 심사위원장

1992 대전엑스포 조직위원회 자문위원

1993 일본 교토 시립예술대학 객원 연구교수 역임

1993~1994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역임

1999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심사위원 역임

1999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초대작가

2003 대한민국 공예대전 심사위원 역임

2003 청주공예비엔날레 초대작가

한국공예가회, 홍림회, 전북공예가회, 전북산업디자인협회 회원

 

 

· Exhibition

 

- 개인전

1982 김윤환 개인전(전북예술회관)

1992 김윤환 개인전(일본 교토 마로니에 화랑)

1993 김윤환 개인전(일본 교토 시립예술대학 갤러리)

2006 김윤환 개인전(원광대학교 미술관 개인전)

 

- 초대전 및 단체전

1970~1976 대한산업미술가협회 회원전

1975 한국현대공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0 한국 공예가 회원전

1981~1992 전북산업디자인협회전

1982 홍림회전

1984 홍익현대미술초대전(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1985 한국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5 전라북도 미술대전 초대전

1987 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90 한국 미술 오늘의 상황전(예술의 전당)

1990 한국 공예 트이엔날레(서울 동숭갤러리)

1991 한국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93 한ㆍ일 현대 조형작가 교류전(일본 KYOTO)

1995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전

1996 한국 현대미술 현재와 미래전, 서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문 미술초대전

 

1996 한ㆍ일 현대 목칠 공예작가 교류전(일본 이다미 시립공예미술관 바탕골미술관)

1997 한ㆍ일 현대 아트 퍼니처전

1999 원광대학교 국제 초대 작가전(원 갤러리)

1999 청주공예비엔날레 국제 초대전(청주 예술의 전당)

2000 현대 목공예 위상전

2003 청주공예비엔날레 국제 초대전(청주 예술의 전당)

2003 몬클레어대학 초청 교류전(몬클레어대학 미술관)

2005 전주 공예품전시관 개관 3주년 기념 초대전, 전주 공예품전시관 기획관 초대전

2007 전북대 개교 60주년 교수 60인 초대전

2012 전주 교동아트센터 소장품 기획전

2016 한국공예 100인 초대전(익산 예술의 전당 미술관)

 

· 수상 내역

1965 14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공예 부분 입선

2018 ()목정문화재단 목정문화상

2007 정년퇴직 때 옥조근정훈장

 

 

· 소장처(기관)

전북도립미술관, 원광대학교, 상산고등학교 학원재단, 교동미술관 등

 

 

 

가족이 바라보는 작가 김윤환

사랑이 많은 아버지이자 자애롭고 따뜻한 선생님, 김윤환에 대하여

 

 

김희선(공간 디자이너)

 

 

저는 목공예 작가 고 김윤환 작가와 플라워 아티스트인 이예순 씨의 딸 김희선입니다. 홍익대학교 미대에서 학사 과정을 마친 뒤 저는 미국에서 건축 인테리어를 전공하고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뉴욕과 신시내티에서 근무하며, 글로벌 브랜드(global brand)를 위한 공간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윤환이라는 존재는 저에게 단순히 아버지라는 하나의 단어가 아닌, ‘스승’, ‘선배그리고 멘토(mentor)’라는 여러 개의 복합적 의미로 정의 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어릴 적 제가 가장 사랑하던 놀이공간은 아버지의 작은 서재이자 작업실이었습니다. 커다란 제도 테이블 위에 나열된 파스텔과 색의 이름이 인쇄된 예쁜 색연필들, 돌돌 말려 있던 반투명의 트랜싱 페이퍼들은 어린 저에게는 최고의 장난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작업실은 이색적인 형상의 이미지들로 프린트된 디자인 잡지들과 함께 미술 관련 서적들이 빼곡히 박혀 있던 오래된 책장들로 둘러싸인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은 아버지가 주로 작품의 초안을 구상하시던 공간이자, 그림 그리기와 예쁜 이미지들을 좋아하던 어린 딸을 위한 놀이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공간에서 보낸 아버지와의 시간은 미술이란 학문을 놀이와도 같은 재미있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해준 특별한 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미대 입시 준비 기간이 짧았습니다. 아버지의 교육관이 영향을 미친 것이었습니다. 후일 미대 합격 후 아버지께 그 연유를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손으로 형상화하는 과정들이 사랑하는 딸이자 제자인 저에게 매우 자연스럽고도 재미있는 경험이 되길 바랐고, 또 표현해 나가는 그 모든 과정과 시간이 행복한 순간들이기를 원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객원 연구교수로 재직하실 당시 저는 가족과 떨어져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손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20대의 딸에게 띄우는 아버지로서의 염려와 당부를 담은 글이었습니다. 그 글 속에는 같은 공부를 하는 후배를 향한 다정한 조언이, 공예를 연구하는 스승으로서의 현실적 가르침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보내주신 편지 중 제가 디자이너로서 사고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준 글귀가 있습니다.

 

잘 만들고 잘 깎고 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보다 어떻게 생각하고 그 과정을 얼마만큼 깊이 그리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또한 아버지는 당시 50대 중년의 나이였음에도 하루 6시간 이상 자지 않고 일어 공부, 논문 준비, 전시를 위한 작업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쉼 없이 공부하고 있노라고 일상에 대해 쓰셨습니다. 디자이너로서 고정된 사고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저의 직업적 사고가 그 글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제가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것은 순간마다 쉽지 않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인간과 사물,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관찰을 즐기길 바란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마치 신비로운 주문 같았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진 미국에서의 도전들이 두렵다기보다는 재미있는 경험으로 다가올 만큼 생각의 전환을 불러일으킨 조언이었습니다. 생의 마디마다 선배로서, 스승으로서 저의 앞길을 비춰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가 대학에서 정년퇴직하신 뒤 지병으로 인한 체력적 한계로 작업량이 급격히 줄어드셨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가급적 매일 1~2시간씩 통화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저에게 다시 올 수 없는 값진 축복과도 같은 순간들이었습니다. 평생 디자인과 공예를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목조형을 작업해 온 저의 멘토이자 스승인 아버지에게 매일 같이 미술 강의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시간을 통해 마지막 제자이자 사랑하는 딸인 저에게 당신이 평생을 통해 배우고 깨달았던 철학과 지식을 정성껏 전수해 주고자 하신 듯 생각됩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년에 걸쳐 그 소중한 시간은 지속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제자들을 교육하며 몸소 채득한 교육철학에 관해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무렵 저는 다수의 디자인 팀을 이끌며 실력 있는 팀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표현과 사고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그들이 독립적 사고를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교육관은 특화된 최고의 디자인 팀을 양성하는 데 커다란 양분이 됐습니다. 또한, 그가 추구했던 미학과 기능의 조화라는 그의 작가적 관점은 미학적 기준이 까다로운 하이엔드 브랜드를 고객으로 둔 저의 디자인 프로젝트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병의 악화로 인해 입원하시기 며칠 전까지 아버지는 만 82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연필과 나무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목조형 작가로서의 그런 모습은 디자이너라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후배인 저에게 마음속 깊은 울림을 주셨습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이자 자애롭고 따뜻한 선생님이셨습니다. 사물과 자연,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가진 작가였습니다. 교육에 대한 쉼 없는 노력과 정성을 쏟은 참교육자였습니다. 그가 가진 열정이 그의 작품과 이 글을 만난 분들에게 힘 있는 공감과 울림이 있는 영감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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