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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단아한 글꽃이 된 수필가, 목경희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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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글꽃이 된 수필가, 목경희
  • 2025-04-21 13:30
  • 조회 123

본문 내용

 














단아한 글꽃이 된 수필가 목경희

 

최기우(극작가)

 

 

 

1. 목경희의 삶과 수필

수필가 목경희는 1927년 봄 완주군 동상면에서 태어났다. 1941년 전주여고에 입학하면서 전주와 인연을 맺었으며, 1980년을 전후로 10년 동안 서울에서 생활한 것을 빼고 전주에서 60년 넘게 살았다.

1969전북문학3호에 수필을 처음 발표했다. 지천명에 이른 1976년 월간 수필문학에 추천받으며 등단 과정을 시작해 1992한국수필문학에서 추천을 완료하며 수필가의 입지를 다졌다.

198740·50대에 쓴 글을 모아 첫 수필집 먹을 갈면서를 냈고, 1991년 엄마 목경희의 병간호 일기와 세상을 떠난 딸 박혜신의 암 투병기 등을 함께 엮어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교음사)를 냈다. 애끓는 정이 고스란히 담긴 모녀의 수필집은 많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독자들과 나눈 힘은 목경희의 펜이 더 간절해지는 힘이 되었다. 이후 수필집 길 바보의 고백(1997·교음사), 새끼손가락(2003·교음사), 그리움의 나라(2006·교음사)와 수필 선집 우산처럼 양산처럼(2001·교음사), 편지모음집 숲의 향연(2008·교음사)을 냈다.

목경희는 자신이 걸어온 삶의 마디마디를 수필의 소재로 삼았다. 삶에 배인 절절한 사연들은 유려한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자상하고 진솔한 품격이 행간에 스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곁을 준 사람을 향한 소박하고 겸허한 애정, 역사에 대한 분명한 직시와 깊은 통찰, 자연에 대한 세심한 살핌과 진지한 체험,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낸 지혜와 보람은 독자에게 큰 감동을 안겼고, 삶에 대한 끈질긴 기록은 많은 여성 수필가의 탄생과 성장으로 이어졌다.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회,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에서 활동했으며, 한국크리스천문학상(1999)과 한국수필문학상(2006)을 받았다. 천생 글쟁이인 목경희는 2015년 가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안군 부귀면 전주공원묘원에 안장됐다.

 

2. 굴곡진 삶을 담은 수필


1) 삶이 글이 되는 시간

 

목경희의 수필은 단아하다. 그의 문장에는 수필을 쓰기 시작한 중년부터 노년까지의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있어 편안하고 정겹다. 행간의 여백은 힘들었던 시절의 일상을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드러내 평온하고 차분하다. 스스로 자신의 수필을 가리켜 서툴게 살아온 삶의 회고록이라고 했지만, 그의 글이 단정하고 단단한 이유는 곁에 있는 것들을 두루 헤아린 후 걸러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경희의 수필은 서툰 삶의 흔적이 아니라, 모든 삶은 서툴다는 것을 일깨우며 상심하고 힘겨운 이들의 삶에 보내는 가슴 벅찬 위로가 된다.

 

찬란한 21세기를 바라보며 산다는 게 감사합니다. 펜을 줘서 글을 쓰게 해 주신 것도 고마운데, 쓰는 걸 귀찮아야 할 수는 없지요. 사람이 산다는 것을 잔인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란 시간은 모든 것이 고마운 때라는 걸 여든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 전북일보 2006년 4월 11일 자 <『그리움의 나라』 펴낸 목경희 씨> 재구성

 

완주군 동상면 시평리에서 태어난 목경희(睦瓊憙, 본명 목경상·睦瓊相)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소양공립학교(현 소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제인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19411945·현 전주여고)에 다닐 때는 박계주의 순애보, 방인근의 새벽길, 박종화의 대원군, 박화성의 찔레꽃등 한국소설을 읽으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비교적 유복한 집에서 자란 데다 공부 욕심도 많았지만, 학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온갖 거짓을 늘어놓으며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끌고 갔던 일제강점기. 딸의 장래가 걱정됐던 아버지가 당사자도 모르게 약혼을 시켰기 때문이다. 다섯 살 위인 약혼자는 대동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과 문화연필 등에서 근무한 인재였다. 그러나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하게 만든 야속한 세상은 두고두고 큰 한이 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겹으로 살아야 하는 것임을 아는 그였기에 다음을 구상하면서 늘 긍정적으로 살았다.

 

한국 사람만 다니는 여학교는 경기여고하고 전주여고뿐이었대요. 내가 전주여고에 들어갈 때만 해도 110명이었어요. 그런데 2학년이 되면서 영어 과목이나 예능 과목이 폐지되고, 학생들은 근로봉사라는 것을 나갔어요. 모도 심고, 산에 가서 송진도 따고, 말똥도 줍고, 운동복 입고 모자 눌러쓰고 날마다 거름 나르고, 나무해서 

나르고, 전쟁 말기 일본 사람들은 식량을 다 공출해 가고 사람까지 공출해 갔어요. 또 쇠라고 생긴 것은 다 가져갔어요. 심지어 문고리까지도 떼어 갔으니까요.”


- 허명숙 외, 『전북여성 100년사』 (전북발전연구원 · 2013) 190쪽

 


 




결혼 이후의 삶은 글을 쓰고 살기에 녹록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것이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45년 모교인 소양초등학교 교단에 섰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 편물(뜨개질) 장사도 했지만, 그의 젊은 날은 패션디자이너로 많이 알려졌다. 남편 박영진의 실직과 와병으로 양장·한복을 만들어 살림을 꾸린 것이 시작이었다. 전주 중앙동에서 양장점 <순미사>를 운영하며 1969년 전북에서 처음으로 패션쇼 1회 목경희 의상발표회를 열었고, 이듬해인 1970년에는 전주에 4층 규모의 건물까지 세웠다. 스카이라운지를 갖춘 전주 최초의 빌딩. ‘전주 문화의 전당으로 불리며 문화예술인들에게 문호를 넓힌 경희빌딩이다. 이 무렵에는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양장협회 전북지부장, 여권옹호협회 전북지부장, 가정법원 윤리위원, 기능올림픽 양재 부문 심사위원 등은 1970년 한 해 동안 그가 가졌던 명함이다.





              


 

예기치 않은 사건들 속에서 그를 다잡아 준 것은 글쓰기였다. 옷을 만들다가도 재단지 한 귀퉁이에 생각나는 것을 끼적거리며 삶의 고단함을 달랬다. 남편과 친정아버지를 병간호하느라 병상까지 아울러야 했던 삶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고, 사업에 실패한 뒤에도 미흡했던 자기 삶을 다시 살펴 행간에 담았다. 유학을 마치고 온 맏딸 혜신이가 암에 걸렸을 때도, 5년여에 걸친 딸의 병간호 기간에도 힘주어 펜을 쥐었다. 이별에 대한 불안이 밀려올 때, 글은 생을 직면하게 하는 이정표가 되어준 것이다.

 

 

어떤 느낌이 들 때면 어디든 적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고통을 글로 쓰면 객관화가 돼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러다 보니 물이 줄줄 새는 집에서도 빗방울 소리를 즐길 여유가 생겼어요. 글쓰기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글이 제가 사는 의미입니다. 내 생명이 소진하는 그날까지 계속 글을 써야지요. . 마음이 급하기도 하고, 느긋하기도 해요. 오래 살아온 만큼 나보다는 시대를 써서 남기고 싶어요.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헤어짐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니까요

몸의 건강보다 정신의 건강을 돌보며 살고 싶습니다.”


- 서울신문 2006년 5월 13일 자 <수필문학상 받은 목경희 씨> 재구성



목경희는 2006년 가을, 모교인 전주여고에 평생 쌓은 장서 3,200여 권과 생계를 이어준 재봉틀을 기증하기로 결심하며 슬픔과 화해를 시도했다. 손때 묻은 정든 책과 여러 날 한 권 한 권 대화를 나누며 정리했고, 이 책들이 후배들의 손에 가까이 닿기를 바랐다.

그가 기증한 도서는 대부분 그의 작품이 실린 잡지들과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며 받은 것이었다. 특히, 전북문학창간호(1968)부터 243호까지 결호 없이 전질이 기증돼 전북 문학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꼽혔고, 의미 있게 헤어짐을 준비하는 그의 마음은 삭막한 시대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목경희는 사람이 사는 사회를 숲에 비유한다. 숲은 잠시도 침묵하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찬란한 몸짓 속에서 약동한다. 삭풍이 불어와도, 성난 파도가 덮쳐 와도 서로를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서로를 지킨다.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태풍이 불어와 생나무 가지가 꺾이고, 폭우가 쏟아져 둑을 무너뜨리고, 해일이 밀려와 삶의 터전을 쓸어가기도 한다. 평온한 날은 흔한 것이 아니다. 성난 바다나 막막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용케도 견디게 한 것은 삶의 의지와 마음을 내어준 동료들의 다정함, 그리고 힘이 되어준 글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요즘같이 컴퓨터로 만사를 해결하는, 빛처럼 빠른 찬란한 문명의 바다 그 한가운데서 원고지에 펜으로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쓰는 진부한 편지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에 부대끼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펜이 창검보다 위대하다는 격언을 믿는다. 따라서 편지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요 우리 인간 사회를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게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이기를 바란다. . 나는 편지쓰기를 매우 좋아한다. 따라서 나는 날마다 편지를 기다리는 희망에 산다.


- 서간집 『숲의 향연』 서문, 재구성


글은 그에게 위안과 화해를 선사했다. ‘세상은 온통 감사할 일이라고 자주 말한 그는 지인들이 던지는 그리움의 나라가 어디냐?’는 질문에 우리 집 3평 베란다라고 수줍게 말하곤 했다. 그 작은 공간에서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글을 쓰고, 작은 꽃봉오리가 맺는 모습에서 봄을 실감하고 생명의 순간도 만끽한다. 그 순간은 애정과 정성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펜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를 기다리는 때와 같다.



 

2) 문학의 바탕 넓히기

 

목경희의 글쓰기는 여성 문학인이 거의 없던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1968년 전북일보 칼럼 전북춘추1년 동안 집필자로 참여했고, 전북문인협회에 가입했다. 이기반(19312015)·최승범(19312023) 시인의 권유가 큰 힘이었다. 두 문학인과의 인연은 이듬해인 19697월에 창간된 동인지 전북문학으로 이어졌다. 그가 수필을 처음 실은 매체가 19691030일에 발간된 전북문학3호이다.

작품은 산이 좋아서 나는 가끔 산을 찾는다.’라고 시작하는 수필 산으로 가는 마음. 목경희는 1982년에 쓴 수필 전북문학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글들이다. 그러나 어린 날의 사진 속에서 철없이 유치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감미로운 추억에 빠져들 듯이 그것들을 보는 마음 또한 그렇다. 그것들은 어린 날의 내 모습처럼 미숙하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요, 버릴 수 없는 나만의 얘기들이다.’라고 밝혔지만, 이 작품의 사고는 꽤 깊다. 목경희의 작품을 추천한 최승범 시인도 이 글에 대해 사물에의 아름다운 정감’, ‘짜임새 있는 구상’, ‘아기자기한 표현’, ‘폭넓은 독서등을 거론하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극찬했다.


목경희의 글은 편편이 격조 높은 수필이다. 어쭙잖은 글을 수필이라고 내세우는 수필가가 아니요, 밖으로 내놓은 수필보다도 더 많은 수필을 벽장 속에 

간직하고 있는 당()에 오른 수필가다

최승범(시인)

 

목경희의 문장은 군더더기나 지나친 수식 없이 간명하고 여유롭다. 주제를 정의롭고 순리적으로 이끌고 가면서 성숙한 글의 구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역량은 타고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강석호(수필가·문학평론가)



수필의 세계에 접어든 목경희의 문단 활동은 초기부터 활발했다. 첫 수필을 발표하고 다음 달에는 여성동아(통권 25) ‘여성 수필 릴레이전북을 제목으로 한 수필을 발표한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전북문인협회의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문단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705월에는 전주유네스코협회와 공동으로 선자 시화전을 마련했다. 전시회에서 얻은 이익금으로 이듬해 4월 사화집 밀림대를 간행했다. 목경희와 이기반, 최기인, 최승범, 최진성이 편집위원을 맡았다.

1960년대 전북의 여성 문학인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1970년대 접어들면서 김기선·김순영·김옥생·원영애·전덕기 등이 등장하며 문단은 한결 다채로워졌다. 전북문학을 비롯해 전북의 문예지들이 신춘문예 당선이나 중앙문예지 추천 여부와 상관없이 실력 있는 전북의 문학인에게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이다. 목경희와 김옥생·김태자·원영애·최증자 등 여성 수필가가 작품을 선보였으며, 이들의 참여는 수필이라는 장르가 정착하는 기회로 이어졌다. 서해방송이 197210월 신설한 수필 낭독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여로>도 수필 문학의 저변을 크게 넓혔다. 19754월부터 집필자를 목경희와 강인한·김동필·김종명·이귀호·이기반·이범순·이병훈·임동조·정덕룡·정렬·정주환·최승범·허소라 등 전북의 문학인으로 넓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때가 라디오 전성시대였던 까닭이다.

또한, 1970년대 후반에는 현대문학(1976)멀리멀리 갔더니, 새가정(1976)제이악보, 시조문학(1977)마음의 창 너머로 본 구름재 선생님, 여성세계(1977)액자, 바둑(1978)신선도를 발표하며 창작의 영역을 넓혀갔다.

서울 소재 문예지를 통해야 전문수필가로 인정받던 당시 문단의 풍토에 맞춰 목경희는 1976년 월간 수필문학(수필문학사)에 수필을 발표하며 추천의 과정을 시작했다. 수필문학19823월호로 종간돼 목경희는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1992한국수필문학을 통해 추천을 완료했다.


 

3. 강건함으로 품은 수필

 

1) 일곱 권의 책에 스며든 삶

 

목경희는 일곱 권의 책을 냈다. 수필집 먹을 갈면서(1987),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1991·교음사), 길 바보의 고백(1997·교음사), 새끼손가락(2003·교음사), 그리움의 나라(2006·교음사)와 수필 선집 우산처럼 양산처럼(2001·교음사), 서간집 숲의 향연(2008·교음사)이다.


 



목경희가 1969년부터 2015년까지 47년 동안 몇 편의 수필을 쓰고, 발표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의 발표지면은 전북문학·전북문단·수필과 비평등 전북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 외에도 수필 전문잡지와 기독교계 잡지까지 다양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정치·사회 분야의 잡지와 여성지에서도 간간이 찾아진다. 또한, 목경희를 비롯해 왕성하게 활동한 수필가들은 제목이나 내용을 수정·보완해서 재수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신작 여부를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고향, 노래하는 마음, 태산목 연가는 두 권의 수필집에 실렸는데, 분량을 배 이상 늘려 다시 쓴 뒤 제목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실은 경우다.

 

재수록을 제외하고 찾은 목경희의 작품은 수필집 다섯 권에 실은 261편과 여러 잡지에 실은 수필 58편이다. 수필집에 넣지 않은 작품은 대부분 1970년대 발표한 작품과 기독교 계열의 잡지에 발표한 수필로, 불치병으로 딸 잃은 어머니의 신앙수기(빛과 소금·1991), 사치와 무관심의 망국적인 잠에서 깨어나라(전북의정연구·1992), 목마른 영혼들(기독문학·1994), 잔잔한 물가(크리스챤저널·1994), 빛이 있는 곳에는(전북예총 Magazine·1994), 앞서가는 사람들(노령·1995), 생활 속의 믿음의 조각을 주으며(빛과 소금·1998), 그가 떠난 빈자리(한국크리스천문학·1999),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신앙세계·2000), 아버지와 고욤나무(한국크리스천문학·2004) 등이다. 마지막 수필집 그리움의 나라를 낸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수필문학·창조문예·문학공간·한올문학에 발표한 14편의 수필도 있다. 다시 찾은 비밀번호, 교회로 가는 길, 보름달, 고귀한 선물」 「태극기 달아놓고등 수필집에 실리지 않은 분명한 그의 글이다.


먹을 갈면서부터 다양한 소재를 보여준다. 냄비·시계·안경·액자·화분과 같이 늘 곁에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에도 특별한 의미를 준다. 이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작품으로 형상화해 새로운 생명을 입힌다. 목경희의 수필을 읽으면 삶과 철학이 따로 분리된 게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생생하게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경옥(동화작가)

전북도민일보 20221121일 자 <수필로 다가서는 목경희의 삶: 먹을 갈면서를 읽고> 재구성


 

첫 번째 수필집 먹을 갈면서에는 1970년대의 고단한 삶과 불안한 시대상이 담긴 62편의 수필이 있다. 구름재 선생님, 늙는 연습, 모악산 앞에 서서, 세숫물에 담아준 정, 작은 풀꽃들의 이야기, 짝 잃은 양말등이다. 회갑(1986)을 기념해 큰아들이 내준 것이라 출판사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회갑기념이라고만 쓰여 있다. 그토록 기대했던 첫 수필집이지만, 기쁨은 크지 않았다. 딸의 암 투병과 죽음 때문이다. 출판이 일 년 늦어졌지만, 이 수필집은 할 말을 다 못하고 가려서 한 탓에 오히려 행간의 의미가 더 깊어졌다.


 

 

 

삶의 끝자락에 서 있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마지막이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이다. 책에는 죽음 앞에서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라고 소망하다가 죽음이 또 다른 생명의 길임을 깨닫는 지혜와 평안이 꽉 차 있다


이진숙(수필가)

전북도민일보 20221124일 자 <그녀들의 사모곡: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를 읽고> 재구성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는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딸 박혜신(19461987)과 주고받은 편지와 병간호 일기 등이 실린 어머니와 딸의 수필집이다. 먹을 갈면서가 육신의 외침이라면 이 책은 딸과 함께 살아낸 영혼의 신음이다.

전주여고 교사였던 딸은 남편과 함께 일본 문부성의 지원을 받아 전액 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4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딸의 미래는 행복이 아니라, 암과의 사투였다. 엄마의 간호를 받던 딸은 어린 두 자녀를 남기고 3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목경희는 사위에게 딸의 사진과 편지 등 모든 유품을 받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고, 5년 뒤에 딸과 함께 썼던 병간호 일기를 펴냈다. 에는 108편의 수필이 있다. 목경희의 경수필 26편과 딸에게 보낸 편지글 11, 3개월의 병간호 일기(1987321~ 621), 박혜신의 수필 13편과 병상 일기,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30,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 26편이다.

책의 후기에는 오늘도 생때같은 자식을 앞세우고 애통해하는 수많은 어머니에게, 악한 병마와 싸우며 고통의 늪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랑하는 내 이웃들에게 한 방울 청량제 구실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는 가녀린 소망을 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옮겨 보았다.’라고 적었다. 딸과 함께하며 딸의 생명으로 틔운 글은 많은 사람에게 닿았다. 독자들과 슬픔을 나누며 얻은 힘은 그가 계속 글을 써나가는 커다란 동력이 됐다. 글에 대한 더 큰 간절함도 갖게 했다.


나는 늘 정직하고 구체적인 문장을 쓰고자 했다. 순간의 감각을 분명하게 묘사하는 힘을 갖고 싶었다. 길 바보의 고백을 읽으며 원하는 힘을 기를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돌보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의 수필은 나에게 무엇을 먼저 시작하면 좋을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흠모하게 되었다


최아현(소설가)

전북도민일보 20221128일 자 <길 바보를 따라 걷는 길: 길 바보의 고백을 읽고> 재구성



 



길 바보의 고백은 첫 수필집 이후 11년 만에 낸 개인 수필집이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원래 길 바보였기에 잃었다 다시 찾는 그 길이 늘 소중했고 새로워서 그 길을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라면서 생명을 머금은 작은 물방울로 다시 나서 깊고 넓고 장엄한 생의 바다에 던져져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수필가의 길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한다.

 

 

내가 왜 이런 글을 써야만 하지? 하고 수도 없이 물어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는 왜 숨을 쉬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과도 같았습니다. 글은 곧 저의 호흡이며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지고지순을 지향하고 싶은 비전이 있고, 거기에는 서로를 위해 노래하는 그리움이 있고, 거기에는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나를 볼 수 있는 창이 있기에 저는 다시 산다 해도 이 길을 갈 것입니다.


-길 바보의 고백책 머리에 쓴 글. 재구성.


목경희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61편의 수필에 정갈한 문장을 남겼다. 고장난 시계, 나를 위해 울어주신 임옥인 선생님, 내가 마지막 본 어머니의 모습, 맛의 진수, 어머니라는 이름, 영원한 나의 동반자, 장애자의 날에, 포크레인 행정등에 다정한 마음을 담았다. 그중 계란 장수 할머니의 죽음, 내 영혼의 보릿고개, 산동네등은 1977년부터 1986년까지 10년 동안의 지치고 피곤했던 서울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

 

우산처럼 양산처럼은 서민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그의 이야기에서는 불쌍하다거나 가련하다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그는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였고 놓여 봤기에 남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며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상황을 묵묵히 전하면서 

자신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는 계기로 삼는다

김근혜(동화작가)

전북도민일보 2022121일 자 <목경희, 그의 차분하고도 담담한 서사의 힘: 우산처럼 양산처럼을 읽고> 재구성



우산처럼 양산처럼수필문학사139번째로 기획한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 선집이다. 이전 세 권의 책에 실었던 작품 중 서른세 편을 골라 다시 엮었으며, 이 중 세 편은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했다.

목경희가 선택한 수필들은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가족과 다양한 인연들, 삶의 궤적을 더듬을 수 있는 터전과 굴곡진 삶을 이끈 이야기들이다.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애쓴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목경희는 가난했기에 가난을 힘주어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의 가난이 서로 나누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했다고 말한다. 경제력이 주목받고 가난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서 가난이 삶을 잠식할 수 없게 만드는 길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보듬고 끌어안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여고 후배와 처지가 비슷한 것을 알고 1년 동안 두 가족이 살림을 합쳐 함께 살다가 후배 가족을 말없이 떠나보낸( 우산처럼 양산처럼) 것이나 쌀을 빌려 간 뒤 소식이 없는 강 씨 노인에게 찾아갔지만, 멀건 죽 한 그릇 놓고 시름겨워하는 만삭 며느리에게 오히려 쌈짓돈을 쥐여 주고 나온(내 영혼의 보릿고개) 일화가 한 예다. 목경희는 가난을 고통의 원인이 아닌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시작이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거울이라고 믿었다.

 

 

새끼손가락에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이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사람을 좋아하는 작가의 정성이 담뿍 묻어있고, 먼저 떠나간 이와 지난 시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멍울져 내리기도 한다. 목경희는 그 시간을 충실히 그리워하고 추억한다


송지희(극작가)

전북도민일보 2022125일 자 <진정한 문학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새끼손가락을 읽고> 재구성



수필집 새끼손가락은 빛바랜 흑백사진과 같은 삶의 추억들을 50편의 수필에 정겹게 담았다. 어린 시절 올기쌀에 얽힌 추억과 60·70년대 양장점 <순미사>와 경희빌딩을 운영했던 때의 일화, 신석정(19071974) 시인으로부터 설주(雪注)라는 호를 얻고도 쓰지 못한 사연, 변산반도 하섬에 얽힌 이야기, 전주여고 동창생(16전북문인협회 사람들 등의 단상을 겨울 나그네, 나의 베란다, 너는 아직도 9, 마이산 가는 길, 빌딩이야기Ⅲ」, 여성은 무엇으로 아름다운가, 옷 속에 세월 속에 나를 묻고, 이젠 악필과도 이별인가, 코스모스 연가50편의 수필에 나눠 실었다. 각각의 글은 삶의 단편을 고스란히 전해주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가치를 일깨운다.

목경희는 책의 서문에, 문학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적었다. 문학은 자신이 의도하고 계획한 길은 아니었지만, 절망할 때마다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고희의 고개를 넘으면서 조금씩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태산보다 높은 문학이라는 산맥 앞에 서 있는 개미보다도 작은 나의 존재를 보았다.”라면서도 그러나 내 사전에 절망은 없다.”라고 단호히 밝혔다. 글이 익어가는 순간이다.

 

그리움의 나라에서 들리는 목경희의 문장은 자신을 위로하는 마두금(몽골 현악기)이었다. 먼저 떠나간 두 아이가 엄마의 남은 삶을 위해 스스로 마두금이 되어 그녀에게 숨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슬프지만 고귀한 악보로 연주하는 목경희의 수필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황지호(소설가)

전북도민일보 2022128일 자 <그리움의 나라를 위한 노래: 그리움의 나라를 읽고> 재구성


그리움의 나라는 목경희의 마지막 수필집이다. 50편의 수필에는 흙냄새 가득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곳에서 부모·형제와 함께했던 시간, 여전히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유년의 아련함이 고해성사처럼 꾸밈없이 담겨 있다. 자신도 여든이 넘어 꺼내놓은 이야기들이 무척 죄스럽다면서 이 수필집에 인생의 여러 고개를 넘어온 자신의 인생을 발가벗겼다라고 표현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천둥벌거숭이처럼 무딘 펜 한 자루 고쳐잡고 찾아 나선 그곳은 터만 남은 채 말이 없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만 옛 얘기를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 “어느덧 인생 팔십의 고갯마루에 섰습니다. 서툴게 살아온 인생인데도 살아온 날들 모두가 그립습니다. 그 그리움을 나누고 싶어 연필을 꼭꼭 찍었습니다. 돌아보니 전부 그리움입니다.”


새전북신문 2006424일 자 <목경희 씨 수필집, 그리움의 나라> 재구성

 

 

 

아쉽고 설레고 지금껏 마음에 깊이 새겨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수필 한 편 한 편에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추억을 남겼다. 가장 많이 꺼낸 소재는 딸의 기일에, 밤팃재에 준상이를 묻고, 병아리 아빠의 꿈, 언덕 위의 하얀 집, 큰아버지 집등에 담긴 고향과 가족이다. 어머니, 어머니의 콧노래 소리, 곶감과 아버지, 아버지의 감나무 사랑등은 부모님에 대한 글이다.

수필은 글쓴이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문학이다. 책갈피에 깃든 목경희의 고뇌는 더욱 깊어졌고, 지난 삶을 간절하게 안아주었기에 글은 더 순해졌다. 작가는 이 책으로 한국수필문학가협회와 월간 수필문학이 주관하는 16회 수필문학상을 받았다.

목경희의 마지막 책은 서간집 숲의 향연이다. 서랍을 정리하다 3천여 통이나 되는 편지 묶음을 발견하면서 서간집 출간을 떠올렸고, 책을 준비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다. 책에는 지금까지 출간했던 수필집에 관한 이야기와 서신으로 나눈 다감한 흔적이 빛바랜 기억으로 걸려있다. 버거웠던 시절이 담담한 추억으로 아로새겨졌는가 하면, 신석정·이영도(19161976)·장만영(19141975) 등 잊지 못할 문학인과의 일화도 담겼다. 젊을 때부터 전국을 다니며 차곡차곡 모았던 서화도 소개했다. 표지는 전주여고 후배인 김화래(19432023) 화백이 대숲에 스미는 햇볕처럼 너그럽게 다가오는 이여라는 문구와 함께 써서 선물한 오죽, 본문에는 난정’(蘭汀)이라는 호를 지어준 강암 송성용(19131999)의 작품 ’()을 실었다. 이 책에 목경희의 수필은 없지만, 숲의 향연은 그가 살아온 여정을 갈무리한 기억의 정수다.

 

2) 벅찬 그리움과 담담한 위로

 

목경희의 수필은 차분하고 담담한 서사의 힘이 돋보인다. 가난, 가족, 계절, 고향, 문학, 사색, 여성, 음식, 자연, 전북, 전주, 종교, 죽음, 지인 등 다양한 소재를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다정한 언어로 들려준다. 각각의 소재는 다채롭게 풀어지지만, 글의 바탕은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애절한 사랑이다. 1927년생이 견뎌낸 현대사의 굴곡으로 피로가 켜켜이 쌓이고, 의심과 방황과 갈등 속에서 헤맬수록 목경희는 이해와 배려와 사랑을 강조한다. 사랑을 잃으면 삶 전체를 잃게 된다는 신념은 갈수록 짙어진다.

 

목경희 선생은 어휘력이 탁월하여 말이 빠르듯이 글줄이 빨리 흘렀다. 목 선생은 원숙한 인격과 세파의 예리한 분별력으로 수필을 썼다. . 목경희 선생은 막 이순 이후 기둥 같은 외딸을 천국으로 앞세웠다. 그 후 부지런한 수필가가 되었다. . 참으로 정직 정확한 작가다. 글 속에 꽃 이름 하나를 읽을 때면, 그분의 열정과 글에 대한 태도가 떠 오른다. 검정 수첩 갈피에 끼워진 꽃과 잎사귀들. 만남의 자리에 앉자마자 펼치는 수첩에는, 고향 땅에 다녀오다 채집한 광대나물, 꽃마리, 개구리발톱, 고추나무꽃, 국수나무꽃이 마른 채다. 꽃 이름을 불러드리면 수첩에 빼곡히 받아 적었다. 쪼그리고 앉아 풀꽃에 눈을 맞추고 있는 늙은 어린이가 그립다


김용옥(수필가·시인)

전북도민일보 2021414일 자 <내가 사랑한 수필가 목경희> 재구성



 



사위에게 작은 국화 화분을 선물 받은 어느 가을 오늘 나는 한 사람의 손길에 의해 내 거처로 옮겨진 소국에서 내 생애를 한꺼번에 피워 올린 것 같은 알찬 가을을 본다.’(小菊)라며 작은 정성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고, 곱고 미더운 마음을 읽어내는 세심함은 그의 수필에서 흔하게 보인다. 무심코 흩날리는 꽃잎 한 장, 그리움같이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향기도 없으면서 넘치도록 봄을 채우는 샛노란 개나리,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밤의 이슬. 그는 세상 온갖 것을 글의 품에 안으며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에 감사한다. 목경희의 수필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연민을 다루는 부분을 읽으면 더 깊고 고요하고 아늑하다.

 

큰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형님 우리 형님은 늘 언니의 베풂을 당연하게 여긴 사실을 고백하고, 막내가 떠나던 날은 입대하는 막내를 보며 어머니와 남편의 죽음과는 다른 이별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치매 앓는 아버지를 보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구체화한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자신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운을 던진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과 딸의 빈자리에 대한 아픔이 그의 고뇌를 더 깊게 만든 탓이다. 유달리 죽음이 많았던 그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열두 명의 남매 중 열 명을 일찍 잃었고, 어머니마저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한국전쟁 피난살이 중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그악스러운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숨 거두는 순간까지 소첩들 거느리고 아버지 등만 바라보고 사신 어머니! 평생을 베틀에서 밤새우시며 조강지처의 자리를 콧노래로 지키신 어머니! 그러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12남매를 낳으시고 10남매를 어머니의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12남매 그 한가운데 제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콧노래 소리

 

그렇게 아버지의 자전거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동상간이학교를 졸업하고 기어이 아버지의 뜻을 꺾고 밤팃재를 넘어 소양보통학교를 다니던 날부터 졸업하던 날까지 나는 또 하나 아버지의 짐이 되었었다. 2년 동안 개근상을 탔으니까,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학교길을 다녔었다


∥「아버지와 자전거



목경희의 수필 세계에서 고향도 두드러지는 단어다. 목경희가 글에 표현한 고향은 두 곳이다. 생의 고향 완주와 삶의 고향 전주다.

하루도 잊은 적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고향, 완주군 동상면 시평리. 그러나 그와 고향 사이에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고되고 험한 밤팃재처럼 가로막고 있어 오랫동안 찾지 않았다. 마을을 첩첩 두른 산과 골짜기에서 기어 나오고 싶었던 절박한 마음, 밤팃재에 어린 동생을 묻던 날의 땀과 눈물과 한이 서린 먹먹함, 일본군위안부를 피해 서둘러 치른 약혼. 어머니의 손을 놓고 울고 넘던 밤팃재를 그는 다시 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희와 산수를 넘기면서 그보다 더 험한 인생의 고개를 수없이 넘다 보니 아픈 기억과 푸념은 한낱 응석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꼭 감으면 오랜 세월 묻어 두었던 고향과 유년의 아련한 풍경이 하나도 늙지 않고 그를 찾아왔다. 한 줄을 쓰더라도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뻔히 아는 것이어도 자료를 찾아 확인하는 성격 탓에 고향 땅과 사람들을 여러 차례 더듬었다. 고향도, 옛사람들도 그에게 왜 늦었느냐고 나무라지 않고 그를 감싸주었다.

60년 넘게 산 전주에 대한 애착은 더 깊고 구체적이다. 여고 시절부터 시작된 전주와의 인연은 결혼과 출산, 사업과 사회활동, 출판과 문단 생활까지 이어지면서 삶의 전부가 되었다. 전주의 명소와 관련된 글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특히, 전주천에 대한 애정은 유별나서 전주천 발원지부터 삼례천까지 답사하고, 사라진 각시바위를 휘감고 돌던 쪽빛 물을 그리워하며 한벽당과 오목대의 잃어버린 옛 정취를 애석해한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우리 학교에서 일 킬로쯤 떨어진 한벽루를 체육 시간이면 체육 선생님의 인솔을 받으면서 곧잘 찾았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서 무릎 위까지 빠지는 물을 건너면 조약돌이 깔려있는 질펀한 천변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신주머니에 혹은 보자기에 조약돌을 주워 담으며 낯선 친구들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한벽루의 네 계절

 


꿈 많던 여고 시절부터 시작해서 젊은 생애를 고스란히 삭혀버린 전주, 네 남매의 출산지요, 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한 아들의 어린 영혼이 머물고 있는 전주, 아직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딸애가 있는 전주, 군에 간 막내가 제대하면 달려갈 전북대학이 있는 전주, 산맥처럼 빽빽이 둘러쳐 있는 우정들! 샘물처럼 맑은 시정들! 내 몸은 비록 낯선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영혼의 뿌리는 자랑스러운 내 고향 전주 땅에 깊숙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내 고향 전주



기복이 심한 생활 여건으로 거처를 옮길 때도 있었지만, 목경희는 어느 한 곳 발길 닿지 않은 곳 없고, 기쁘고 슬픈 일, 행복하고 괴로웠던 일, 그리움이 깔린 걸음걸음마다 오색 꽃잎이 내려앉는 전주를 사랑한다.

통한의 현대사도 그의 수필에 자주 나오는 소재다. 그중 일제강점기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옛 터를 찾아서와 신혼 초 피난길을 묘사한 동생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견뎌낸 여성의 생생한 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사건은 드디어 2학년 전체로 확산하였고, 수업 거부 운동으로 번졌다. 교장 선생님에게 야만인 선생을 추방하라는 탄원서를 가지고 학급 대표 열두 명이 교장실을 찾았다. 당시, 이 사건을 우리는 스트라이크라고 해서 한동안 학교가 온통 떠들썩했다. (중략) 몸빼에 방공복, 방공모를 뒤집어쓰고 방공호를 안방처럼 들락거리며 밝은 불빛 아래서 마음 놓고 공부해 보지도 못했다. 거기에 바로 우리 16회가 저 전율의 정신대의 표적이었다

∥「옛 터를 찾아서

 


인민군이 전주까지 밀고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먼 길을 달려오셨다. (중략)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아버지집은 진정 천연의 요새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찾아간 아버지집은 인민군의 본거지가 되었다가 종래에는 아군의 작전상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불태워졌다

∥「동생



 



그의 현대사 기록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일제의 잔학성과 여성 학대 정책,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을 맨몸으로 막다가 징계받으며 교직 생활을 했다는 지동옥 선생이다. 그의 이야기는 검정 치마, 흰 저고리가 빛나던 선생님, 나누는 기쁨(2), 동상간이학교와 엄상섭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한 세월, 소양초등학교, 지동옥 선생님의 부음을 받고등 여러 작품에 언급됐다. 그가 스승을 소환할 때마다 상처도 되살아나지만, 폭력에 저항했던 스승의 단단한 정신은 늘 삶의 위로가 되고, 기필코 지켜야 할 정의를 떠올리게 했다.

지동옥 선생님은 평북 태생의 꼿꼿하고 정열적인 기질을 가진 분으로 항일정신이 투철하셨으며 그 어느 남자 선생님보다도 지도력이나 영향력이 뛰어나셨다. 자부심 또한 대단하셔서 언젠가 학생이 조선말을 썼다고 교무실에 불려 나가 후데이센진(不逞鮮人)으로 매도를 당할 때 달려가서 여보시오.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이오. 당신이야말로 부정한 왜인이요?” 하고 저들과 당당히 맞섰다는 얘기는 통쾌한 일화로 당시 학교 내 자자하니 돌고 있었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가 빛나던 선생님


유일한 한국인 여자 교사로서 1회 때부터 해방되던 해 바로 우리 16회가 졸업할 때까지 일본인들 틈새에 끼어서 민족적인 한을 소리 없는 눈물로 달래며 학생들과 모교를 지키신 분이다. 광복 후에는 전북에서 오직 한 분 여자 교장으로 불평등한 시대에 어렵게 교단을 지킨 세월 5, 합해서 전주여고에서 보내신 세월만도 자그마치 20년이 넘는다
∥「나누는 기쁨(2)


 

또한, 유난히 꽃을 좋아했던 목경희는 한 땀 한 땀 국화를 수놓으며 흠모했던 신석정 시인을 위로하고, 성근 눈발이 날리는 날 찾아온 매화의 고즈넉한 향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친구를 불러 인고의 고개를 넘어온 매화를 환대한다. 작가가 불러낸 기억은 회복 불가능한 과거이지만, 그들과 나눈 삶의 조각들은 작가의 삶을 채우고, 작가의 세계를 세웠다.


197476일 우리의 시인 신석정 선생님은 다시 못 오실 머나먼 길을 홀로 떠나가셨다. 그때 밤을 새우며 선생님의 영정 앞에서 삼베 포에 수백 송이의 국화를 수 놓았다. 내 마지막 정성을 다하여 수놓은 국화 향기로 선생님의 관을 덮어 드리고 싶어서였다


∥「태산목 연가

 


추운 겨울 한가운데서 눈물 빛 꽃망울을 다소곳이 피웠다. 청상 같은 아픔을 목 놓아 터트리며 하얗게 봄을 피운다. 으스러지도록 인고의 세월을 껴안고 신의 부름에 촌각의 지체함도 없이 대한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서 온 귀한 손 겨울꽃, 청아한 그의 향기를 흠모하여 읊은 옛 시인의 시 한 수를 매화 앞에서 나도 반추해 본다


∥「매화가 피던 날


작가의 교감은 친우들과의 교류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몸과 가족을 살게 했던 미싱’(재봉틀)이 그것이다. 그래서 수필과 함께 그의 한 시절을 대표하는 단어는 재봉틀이다. 재봉틀 한 대로 시작한 양장·한복 맞춤 사업이 크게 성공해 양장점에 패션쇼까지 열었고, 빌딩까지 세웠지만, 그의 사업은 기성복이 유행하면서 나락의 길로 접어든다. 가난이란 긴 터널에 다시 들어선 것이다. 목경희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싱거미싱을 들고 상경한다. 다른 건 다 버려도 재봉틀은 버릴 수 없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마무리했고 미래를 박음질할 물건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삶의 풍파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모든 것이 떠나간 뒤에도 유효했다. 어느덧 목경희는 인생의 질곡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기면서도 품에 꼭 끌어안고 슬픔을 나누고 희망을 채웠던 재봉틀과 수필. 이 둘은 거친 세상에 내던져진 그를 향해 가만히 손을 내밀어 준 동반자였다.

 

3) 단정한 언어로 피운 수필

 

목경희의 수필은 누구의 인생이든 수많은 고난이 있고, 그 아픔을 이겨내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음을 자연스레 전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 애가 타는 작가의 고운 마음과 외로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눈길도 희망이 된다는 믿음은 그의 문장에서 꽃보다 더 화려하고 단아하게 피어난다.

목경희는 삶과 시대의 안팎을 재고 자르고 붙이고 꿰매고 박음질한 단정한 언어를 수필에 담아 자신의 체온을 전했다. 목경희는 스스로 곱고 밝은 글꽃이 되었다.

 

 

 

 

 

연보

     1927 51일 완주군 동상면에서 태어남.

     1945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소양초등학교 교사로 1년 동안 근무함.

     1946 박영진(1975년 사망)과 결혼해 전주에 정착함.

     1949 첫째 박혜신(·38세 사망)을 낳음. 이후 치문(아들), 치구(아들·9세 사망), 치선(아들), 치원(아들)을 낳아 슬하에 14남을 둠.  

     1968 전북일보 칼럼 전북춘추집필진으로 참여함. 전북문인협회 가입함.

     1969 전북문학3호에 첫 수필 산으로 가는 마음발표. 전북문인협회 상임이사(1973) 역임함. 양장점 <순미사> 대표로

                  전북 최초의 패션쇼(1회 목경희 의상발표회)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침.

     1970 전주 중앙동에 전주 최초의 빌딩인 경희빌딩(4) 지음.

     1973 강암 송성룡 제자로 서예 입문, 연묵회 회원전 출품함.

     1975 서해방송 라디오 수필 프로그램 <밤의 여로> 집필진으로 활동함.

     1976 월간 수필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추천 과정을 시작함.

     1977 양장점 폐업 후 거주지를 서울 변두리로 옮김.

     1981 전북 여성 수필가로는 처음으로 현대한국수상록 전집에 수필 10편을 발표함.

     1986 서울 생활을 끝내고 전주로 돌아옴.

     1987 수필집 먹을 갈면서출간함.

                       1991 수필집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교음사) 출간함.

                          1992 한국수필문학에서 추천 완료함.

                          1993 한국문인협회 회원 가입함.

     1994 전주KBS 라디오 프로그램 전라칼럼(13개월) 연재함.

     1997 수필집 길 바보의 고백(교음사) 출간함.

     1999 한국크리스천문학상 받음.

     2001 수필선집 우산처럼 양산처럼(교음사) 출간함.

     2003 수필집 새끼손가락(교음사) 출간함.

     2006 수필집 그리움의 나라(교음사) 출간함.

     2006 16회 한국수필문학상 받음.

     2008 편지모음집 숲의 향연(교음사) 출간함.

     2015 1126일 영면. 진안군 소재 전주공원묘원 가족묘에 안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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