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곤 시인, 참 스승의 삶의 따라
- 시와 인간, 기자와 예술의 동일성
김사은(수필가, 전북원음방송PD)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의 서사가 마냥 순풍만범(順風滿帆)일 리 만무하지만 언론인으로서, 시인으로서, 예술가로서 김남곤의 삶은 모든 면에서 정점을 찍은 성공 사례처럼 보인다. 기자로 출발해서 언론사 사장까지 역임하며 정론직필의 언론인의 표상이 되었고, 시인으로서 “그의 삶이 곧 시요, 시가 곧 삶”이라는 데 이견을 품을 사람이 없다. 그뿐 아니라 문학단체의 설립을 돕고 전라북도 예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등 예술 저변의 확대와 발전을 이끌어 온 공로는 역사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서 김남곤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경계하며 그의 가슴에 ‘가시’를 품고 살아왔으니 춘풍추상(春風秋霜) 그 자체인 듯하다.
언제부턴가
내 안에는 가시 문 한 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가시눈을 시퍼렇게 돋우고 서서
내 거동을 살핍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어느 때는
그 가시눈에 찔려 회한의 통증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무감각 상태로 그냥 지냅니다
어느 날 나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서 한 장을 몰래 끼고 나오다가
여지없이 등살을 찍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비명을
내가 순순히 받아준다는 허물이
하나도 용서 같지가 않아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는
더 찔리고
더 아프고 싶어도
더 이상 논할 가치가 헐어진
노을역驛에 나는 내린 것 같습니다
- 김남곤 편저 『내 안의 가시』 책머리(2023, 신아출판사)
김남곤 시인은 『인본주의 사상을 배태한 시 – 내 안의 가시』 후기에서 “내 가슴 안창의 ‘가시’라는 제명을 단 것은 두고두고 새겨야 할 조언이자 채찍이었기 때문에 명심하지 않을 수 없는 아픔”이라고 밝히고 있다. 평생 가슴에 ‘가시’를 품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 스스로 심어 키운 ‘가시’이거나 혹은 애초 짊어진 멍에일지언정 마치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을 실천하며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를 연상케 한다. 눈 맑은 시인의 성장 과정에서 유년 시절에 굴레 씌워진 가난을 떠올리는 이는 없으나 그는 유년 시절의 아픔과 설움을 회억하곤 한다.
2. 문학으로 녹여낸 시대적 삶의 아픔
김남곤 시인은 1937년 7월 23일 전북 완주군 조촌면 만성리 702번지 두현부락(황방산 말고개)에서 아버지 김용진 님과 어머니 이현숙 님의 6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만성리는 현재 전주시에 편입되어 있으나 그 옛날 ‘만성리 고샅길’은 그의 시 「유년의 고샅」에 나오는 것처럼 ‘자고 나면 호박 넝쿨이 한 자씩이나 가로막는’ 험한 곳이었다. 황방산 아래에서 전북교육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옛 전주서중학교를 오가면서 지금의 진북동 우성아파트 자리에서 비행기가 뜨고 나는 것을 보고 다녔다. 전주공고를 졸업하고 제3수송항만사령부에서 병장으로 전역했다. 그의 20대는 깊은 상처로 그늘지었다고 회고한다.
지천명을 눈앞에 두고 이승을 떠나신 아버지의 짐은 곧바로 나에게 옮겨졌다. 6남매의 꼭지로 태어난 나의 멍에 자리는 그때부터 질긴 공이가 박히기 시작했다. 굵지 못한 허리가 휘청거릴 적마다 나는 늘 힘겨운 짐을 원망했다.
노을빛만 봐도 눈물을 글썽거렸던 내 20대의 설움은 그래서 늘 깊은 상처로 그늘이 지었다. 그 누이들이 자라서 이불 보따리를 안고 시집가던 날, 나의 부끄러움은 쥐구멍이었다. 혼숫감 하나 변변하게 마련해주지 못했던 나의 무력함을 되돌아보면 지금도 노상 짠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어느 날 그 누이들이 진눈깨비를 맞으며 가난한 친정을 찾아왔을 때 나는 목구멍이 뜨끔할 정도로 울대뼈가 굽는 정스러움을 느꼈다.
김남곤 수상집 『비단도 찢고 바수면 걸레가 된다』에서 「6남매의 꼭지」(2003, 신아출판사)
이 이야기는 이미 발표한 「누이들」 시에서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기에 6남매의 꼭지이자 ‘혼숫감 하나 변변하게 마련해주지 못한’ 오라비의 무력한 심정이 오롯이 이입된다.
누이들
눈이 내려
동구 밖이 질퍽거리던 날
섧게 시집간
누이들이 왔다
큰아는 완주에서 살갑게 오고
작은아는 진안 백운산白雲山 밑에서
얼어 죽을까 봐
친친 싸매고 왔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오소리 잡듯 담배 피우며
소태같은 세상
낙서하고 있는데
누이들은
저희끼리 오랜만에 마주 앉아
마른 고춧대 꺾어 태우며
때 겨운 점심도 짓고
밀린 옷가지도 빨아 널며
매운 연기 핑계 삼아
눈물 시합만 해쌓는다
듣자하니 눅눅한 이야기뿐
목이 메인다.
- 김남곤 시집 『헛짚어 살다가』(1991, 도서출판 친우)
우리나라 농촌 서민들의 삶이 누이가 되고 오라비가 되어 일상의 시각으로 투영된 이 시는 당대의 시대적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신동욱 문학평론가는 “김남곤 시인의 작품들에는 빈곤한 농촌의 현상과 그 안에 담긴 고통과 시대의 모순을 엄정한 눈빛과 경고한 의지로 말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소박한 어조로 누이들의 이야기를 “눈물”로 적셔서 간접화시켜 말하고 있다. 곤궁한 농촌에서 출가하여 헤어진 가족들과의 지난 이야기를 구체화시키지 않고,
어려운 삶 속에 담긴 고통이나 슬픔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 신동욱 문학평론가, 김남곤 편저 『내 안의 가시』 중 「고향의 말에 담긴 정신」(2003, 신아출판사)
시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개인적으로 주목한 시어는 ‘밥’이다. 밥 먹는 일은 삶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 밥은 곧 삶 그 자체였다. 밥이 없는 삶은 가족 모두에게 고통이거니와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어머니의 책임이기에 밥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어
머
니
밥
주
세
요
밥
없다.
- 김남곤 시집 『새벽길 떠날 때』(2003, 신아출판사)
간결한 시구는 뼛속까지 체화된 한국적 가난과 어머니의 심정이 명징하게 다가온다. 어린 소년과 어머니의 ‘투 샷’이 흑백사진으로 남겨진다. 어머니와 밥에 대한 이야기는 동시집 『선생님이 울어요』에서도 후일담을 들을 수 있었다.
밥
어머니,
밥 주세요
밥
없다
있다는 말
다 못 하시고
아흔까지
살으셨다.
- 김남곤 동시집 『선생님이 울어요』(2018, 신아출판사)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극한 궁핍함이 절박하게 다가오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그 가난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역시 작가의 힘이다. 담박한 어조, 차분하고 담담한 화법, 순정함은 미래 지향적인 낙관이나 희망도 없고 관념이나 망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의 시는 회상과 반추의 대목에서 ‘빛바랜 추억의 흑백사진’처럼 정지된 스틸컷으로 한 장면 한 장면 남아 있다. 상당히 객관적인데 그 감동은 원초적이다.
출생부터 운명 지워진 가난은 여전히 청년 김남곤의 어깨를 짓눌렀다. 곤궁했던 어린 시절의 삶은 청년이 되어서도 그리 형편이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빚
빚 얻고
돌아오는 날
눈물도
기쁘다
- 김남곤 시집 『녹두꽃 한 채반』(2009, 신아출판사)
정병렬 시인은 김남곤의 시 「빚」을 읽고 “단연코 「빚」은 그의 대표작임에 손색이 없다고 본다.”라고 평했다. 청년 김남곤이 얼마나 강퍅한 삶을 견뎌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성실하고 긍정적으로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쓰린 고난을 환희로 녹여내는 읊조림이 선율仙律로 다가온다. 눈물도 기쁘다는 청년! 덥석 손잡아 보고 싶지 않은가.
아픈 이야기지만, 그는 가난해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남들은 상아탑 문에 드는데 그는 곧바로 직업전선으로 나아가 밤낮없이 생업에 매달려야 했다.
절망 같은 벼랑에서 구원처럼 빚을 얻어 돌아오는 날, 흘리는 눈물 또한 거역할 수 없는 값진 삶의 현주소였기로, 이를 끌어안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줄달음질 쳤으니, 그 선인仙人 같은 곱고도 착한 심성에 어찌 감복하지 않을까.
그의 성공적인 삶과 문학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짤막한 시 ‘빚’이 고스란히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단연코 시 ‘빚’은 그의 대표작임에 손색이 없다고 본다. 난해한 시가 넘치는 시의 바다에서 삶의 표상과도 같이 간단명료하게 뽑은 14자 한 문장으로 된 시가 어쩌면 그리도 계산된 것처럼 넉 줄 한 단으로 기승전결의 구조를 이뤄놓기까지 했다.
생명인 삶(빚)에서 시작하여 전개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빚 얻고, 돌아오고, 눈물 흘리고) 기쁨으로 개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꿰뚫고 있는,
그 무엇인가 본질을 삭여내는 원초적 천성이라 할 감성이 스며 나는 시!
흐르는 ‘눈물도 기쁘다’라고 몇 번이고 되뇌어 볼수록 감칠맛 나는 기막힌 역설이자 긍정적 순응으로 이어지는 눈물겨운 명시明詩로 다가온다.
- 정병렬 시인, 김남곤 편저 『내 안의 가시』 중 「시, ‘빚’에 주목했다!」
몇 편의 산문과 시를 통해 선대부터 이어져 온 가난의 대물림, 마흔아홉에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부재, 그 가운데 6남매를 먹여 살려야 하는 어머니, ‘밥’과의 전쟁 같은 삶, 6남매 꼭지로서 짊어져야 했던 장남 김남곤의 희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시적 자산은 시인의 생장 과정의 생활 배경과 직결되면서, 그 시인만의 언어적 풍토가 짙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미적 다양성을 보이고
그리고 개성적인 질감을 수반하게 된다.
- 신동욱 문학평론가, 김남곤 편저 『인본주의 사상을 배태한 시』 중 「고향의 말에 담긴 정신」(2023, 신아출판사)
3. 언론인 김남곤, 또 하나의 역사
가난의 굴레 속에서 멍에와 상처는 그늘을 남겼다. 그럼에도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딛고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로 ‘빚’을 ‘빛’으로 승화시켜 온 김남곤. 언론가로서도 그의 명성은 높다. 지금도 많은 언론사의 후배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주저 없이 김남곤을 꼽고 있다.
언론사에 입사하게 된 것은 전북일보 공무국 직원이던 고모부의 영향이다. 고모 댁에 놀러 가면 ‘게라쇄’라고 부르는 인쇄지가 많았다. 일본식 조어 ‘게라쇄’는 활자 조판에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시험 인쇄를 통해 인쇄된 교정지를 말한다. 앞면은 기사가 인쇄되어 있지만, 뒷면은 백지였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쓰임새가 좋았다. 덕분에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무척 재미있었다고 회고한다. 처음부터 기자가 되고자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인지 인연인지 그렇게 기자가 직업이 되었다.
1965년 12월 삼남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1973년에는 전북지역의 3개 신문사가 통폐합하면서 새롭게 출범한 전북일보로 자리를 옮겨 1973년 전북일보 문화부장, 제작국장, 1987년 광고국장, 업무국장, 1988년 전북일보 편집국장, 1991년 수석논설위원, 1994년 전북일보 이사, 2001년 전북일보 전무이사, 2007년 전북일보 대표이사 사장 및 우석대학교 이사장 등을 거쳐 2013년 은퇴했다. 기자로 입사해서 사장까지 지냈으니 이력도 화려하다. 그러나 정작 ‘기자 김남곤’을 논할 때 기자의 사명감, 역할, 사회적 기여도 등에서 ‘김남곤 장르의 시’처럼 ‘언론인 김남곤’이 걸어온 길은 또 하나의 역사다.
4. 지역 문화를 저널리즘의 중심으로 지역 언론에 생명을 더하다
기자 시절에도 궁핍함을 면치 못했다. 1973년 전북일보와 통합이 되고서도 박봉이었다. “당시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밀가루 빵 두 개 먹고 물 한 잔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라며 “어쩌다 먹게 되는 콩나물국밥이나 설렁탕은 특식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점심으로 밀가루 빵과 물이라니, 요즘 시각으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가난으로 고통받던 시절이고 ‘배고픔이 삶’이었던 시절이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직장이었다.
문화부 기자 시절, 도 교육청을 출입하며 교육 기사를 많이 썼다. 특히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었을 때,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집중 취재를 해서 학교 시리즈로 엮었다. 고등학교 등급이 확연했던 환경에서 평준화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대상 학교 모르게 취재해서 격려와 항의를 동시에 받았다. 그만큼 평준화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문화부는 출입처가 없는 부서여서 발로 찾아다니지 않으면 기사를 쓸 수 없었다.
“고생스럽긴 했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일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행운이었습니다.”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 진사동에 있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가람이란 거목의 생가가 썩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김남곤 기자는 이런 상황을 취재해서 기사화했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성금이 들어오고 각계의 관심이 커지면서 복원에 활기를 찾았다.
“그런데 가람 선생의 부인께서 ‘일희일비一喜一悲네요’라고 하시는 거야. 무슨 사연인지 여쭈었더니, 여산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손녀가 그 학교에서 최초로 전주여고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서 학업을 중단해야 할 상황이라고 해요. 집은 그야말로 곰팡이가 피고 무너져 가던 판국에 겨우 복원의 기회를 얻었지만
가람 선생의 자손은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거죠.”
‘가람가家가 무너지고 있다’라는 표제는 생가의 외형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곤궁한 삶도 암시하는 중의적인 표현이 되었다. 후속 기사 또한 큰 반향을 불러왔다. 도지사를 비롯해 교육감, 대학 총장, 지역 인사들의 장학금과 격려가 이어졌다. 김 기자는 가람 선생 손녀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이 돈을 전액 통장에 입금했다.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통장에 입금된) 장학금을 전달하며 전주여고 진학을 축하했다. 등록금이 없어서 하마터면 여고 문턱을 밟지 못할 뻔한 가람의 손녀는 명문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교대를 나와 교직에 몸담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전주로 온 큰손녀도 취업을 알선해서 전주 정착을 도왔다. 각자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하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니 이래저래 가람가와 큰 인연이 되었다.
‘가람가家가 무너지고 있다’ 기사는 단순히 ‘가람가家’를 되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살리고 문학을 살리고 지역사회를 살리는 불씨가 되었다. 전북의 문화가 살아나는 기연이 되었다. 이처럼 김남곤 기자는 문화 교육 분야에서 일하는 동안 전북 문화를 조명하는 다양한 기획기사로 지역 문화를 저널리즘의 중심에 들여놓았고 문화의 지평을 넓혔다. 그와 교유했던 예술인들은 오늘날 전북 문화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던 김남곤 기자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김남곤 기자의 이러한 기자 정신은 동료 후배 기자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1988년에 전북일보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처음으로 노조가 주관한 직선제 편집국장이 임명됐다. 그동안 보직은 전적으로 회사 경영진의 결정이었던 바, 직선제 편집국장은 새롭고 낯선 문화였다. 노사의 갈등 국면이 화합으로 모아진 지점에서 직선제 편집국장은 편집권 독립을 상징하는 전북일보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획기적인 일이었다.
김남곤 편집국장은 곤욕도 치렀지만 끝내 밀고 나갔다. 분명한 비판의식을 갖고 옳은 것을 견인해야 한다는 기자 정신,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신념이다.
“언론은 권력과 대칭 관계에 있기 때문에 분명한 비판의식이 있어야 해요. 옳은 것을 견인해야 한다는 정신이 있어야 하죠.”
“기사는 진실과 균형이 생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올바른 방향이나 비평도 그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그런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는 것이어야 하는가를 늘 고민했지요.”
2016년 4월 4일 전북일보 지령 20000호
전북일보 첫 직선 편집국장 김남곤 前 사장 “진실과 균형이 언론의 생명…다시 새 역사 써나가라” - 인터뷰 기사 중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전북일보 사장 시절에는 ‘7층 기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장실이 7층이었는데 그의 책상에는 항상 빨간 펜이 있었다. 대교를 보기 위한 것. 그 시절 “꿈에서도 대교를 본다”고 말하는 그는 천생 기자이기도 하다.
이즈음 애써 눌러온 궁금증이 고개를 든다. 문학의 꿈이 먼저였을까, 기자가 먼저였을까, 자주 듣게 되는 우문愚問에 즉답을 피한 채 그는 미소로 답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교지에 글이 실리면서 작고한 김민성 시인을 만나게 됐어요. 고등학교 때에도 내가 쓴 시나 콩트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어요. 안식구(공숙자 수필가)도 전북일보 ‘학생문원’에 실린 내 글을 보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으로 이어졌으니 보통 일은 아닌 성싶습니다. 기자 시절에는 내 기사를 보고 다른 신문사 중역들이 ‘그 신문사에는 소설가가 있는 모양’이라고 말을 했대요. 후배들이 ‘지금 봐도 세련되고 완벽한 기사’라고 평을 해주니
그 방면에 재주가 있었던 것 같긴 해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지만 정작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던 1979년에야 계간지 『시와 의식』으로 등단했다. 그 후 국내 일급 문예지에서 재추천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단호히 일축해 버렸다. 한번 태어난 자식은 죽어도 그 부모의 자식인 것처럼 재추천을 받는 일도 이와 같다고 해서 끝내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헛짚어 살다가』 첫 시집도 등단 12년 만에 세상에 내놓았다.
언론인으로서는 물들지 않은 기자, 시인으로서는 천사 같은 사람, 사회인으로서는 성인군자라는 말을 들었다.
40여 년 기자를 천직으로 삼아온 그는 기자로서 취재 활동을 충실히 수행함과 더불어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서도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언론인 김남곤, 시인 김남곤은 전북 문화를 견인했다. 두 사람, 세 사람의 몫을 해낸 것.
전북수필문학회, 표현문학회, 청녹두 등 문학 전문단체의 창립을 위해 도왔다. 전북문인협회 통합의 과정을 밟고 단합을 다지기 위해 1987년 5월 22일에는 전주가톨릭센터에서 ‘전북문학인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첫 모임을 했다. 『全北文壇』 창간호를 발간했으며 제2대 전북문인협회 부지부장을 지냈다. 1995년 정년퇴임 후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장에, 1996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연합회장에 추대되었으며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예총 이사를 지내는 동안 전북의 문화예술을 널리 알리는 데 집중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고 이운룡 박사는 일찍이 「김남곤 론論」을 통해 시와 인간과 삶의 동일성을 조명한 바 있다.
인생의 과정 전반에 걸쳐 한 시인의 일생이 훌륭한 시를 많이 남기고 가는 문학적, 예술적 가치에 더 충실한 삶이었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만인의 귀감이 되는 인격적, 인간적 가치에 더 충실한 삶이었는가를 평가받는 문제는 그 어느 한쪽만 가지고서는 시도 인생도 의미 있게 충족될 수가 없을 것이다. (중략)
우리 시단에서 이 양면성을 제대로 갖추고 사는 시인, 시와 삶을 분리하지 않고 동가적 상승세로 균형을 잡고 강렬한 이미지로 가슴에 와닿는 시인,
그런 이상적인 시인이 있다면 그는 다름 아닌 인간 김남곤이며, 시인 김남곤일 것이다. (중략)
그는 사리를 판단하고 분별하는 면에서는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그러나 그 서슬 푸른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기에 앞서 그의 명석한 직관력은 어떤 사건이나 사태의 정곡을 정확하게 찌른다. 이것은 오랫동안의 언론 생활에서 숙련된 첨예한 비판의식이 대 사회적, 대 인간적 접촉과 사물의 내면세계를 냉철하게 투시하는 문학적 감수성에서 드러나는 일면이기도 하다. (중략) 김남곤은 영향을 받는 수동적 점잖음보다는 영향을 끼치는 능동적 리더십이 강한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아니 그보다도 포용력이 강한 이웃사촌이다. 자기를 낮추되 비굴하지 않으며, 분수를 넘지 않고 순리를 따른다.
- 이운룡(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 김남곤 시집 『헛짚어 살다가』 중 「시詩와 인간人間과 삶의 동일성同一性」(1991, 도서출판 친우)
이운룡 박사는 위의 글을 마무리하며 “내 친구 김남곤은 시와 인간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시는 곧 그 자신이며 삶의 표상이고 정신의 집합이다. 그의 시는 나 아닌 것이나, 나 바깥의 세계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자신의 내면 풍경까지 샅샅이 그려내 준다. 그의 존재의미와 존재가치가 시와 동가적 합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시는 문학적, 예술적 진실 그 자체이고 시인으로서의 그는 인격적, 인간적 진실과 동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와 인간이라는 양면성을 통일시키고 조화를 이룬 자리에 이상적 시인으로서의 그의 진선미와 창조적 가치가 있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시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예술가로서의 김남곤은 이운룡 박사의 단언처럼 동일성을 지향한다. 특히 지역사회의 일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 벗고 나섰다. 지역 정신을 고양하는 일도 매우 중요시했다. 힘과 슬기를 모아 깃발을 펄럭이자고 외치고 다녔다. 전북의 정신, 전북의 문화예술을 꽃피워 자긍심을 심어주고 자존감을 높이고자 했다. 이런 사명감에서 2002년 전북전통문화연구소 이사장, 2004년 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로 역할을 다했다.
필자는 2013년 전라북도에서 발간한 『전북의 재발견』시리즈 「얼」편의 일부 집필을 맡아 ‘전북의 어른’을 주제로 취재했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2001년부터 시행된 ‘전북의 어른상(賞)’ 제정에 김남곤 시인이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KBS 전주방송총국에서 제정한 이 상은 평생 향토와 나라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한 원로를 찾아 업적을 선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시행됐다.
김남곤 시인은 당시 전북예총 회장의 자격으로 KBS 전주방송총국 시청자 위원으로 활동하며 “방송국의 이름을 걸고 도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어른을 추대해서 시멘트 바닥에 내 처진 어르신 공경 사상을 일깨우고 아름다운 정신을 계승해 가자”라고 호소했다. 당시 윤대작 총국장은 이 취지에 적극 찬성했고, 우신산업 국중하 대표의 노력으로 현대자동차에서 상금 2천만 원을 포함 프로그램 제작비 등 4천만 원을 지원받아 2001년 ‘제1회 전북의 어른상’을 봉정했다. 당시 KBS 전주방송총국의 편성부장이었던 김학 수필가도 ‘전북의 어른상’ 제정과 시행에 힘을 보탰다. ‘전북의 어른상’은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시행되다가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나무를 올곧고 크게 키워서 큰 그늘을 드리울 수 있을 만큼 가꾸기 위해서는 수십 년간 전지도 하고 거름도 주고 수형樹形을 잡아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큰 나무를 기르는 것처럼 큰 인물을 기르는 것도 결국 우리의 역할이에요.
인본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되, 시대에 맞는 혁신적인 생각과 진취적인 기상, 속도감과 흐름을 간파할 수 있는 어른을 ‘키우는’ 것도 사회의 책무입니다. 깃발을 올리면 깃발을 쳐다보고 그 깃발 아래 모여 단합과 단결로 총화할 수 있는 어른, 바라볼 수만 있어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어른, 숨소리를 듣고 싶고 발걸음을 닮고 싶은 어른을 모시고 실천하는 것은 백행의 근본인 효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고 인본 정신을 함양하는 일입니다.
‘전북의 어른상’이 경로효친의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했습니다.”
‘전북의 어른상賞’은 어른의 위상位相을 높이고 ‘어른상像’을 정립했다. 최근 들어 ‘어른론論’이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을 보면 김남곤 시인의 안목이 매우 높고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문인 사회의 맏형, 문화계의 장형으로 신망받아 온 김 시인은 전북의 어른이다.
자랑
저기 마을 초입에
은행나무 두 그루 보이시지요
암수입니다
이백 하고도 더 쉰 살은
오래 살아 계시다는 것은
그 옛날 어지신 한 분이
살고 가셨다는 증거라네”
저희 마을이옵니다.
- 김남곤 시집 『녹두꽃 한 채반』 중 「자랑」(2009, 신아출판사)
‘자랑’이 자랑스럽고, ‘자랑거리’를 알아주는 또 한 분의 어른이 있어 행복한데 한 호흡 고르고 한 박자 늦추어 겸손함을 잃지 않는 은근하고 뭉근한 마음이 따사롭다. 이 시를 처음 대한 순간,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미국 문학의 거장, 너새니얼 호손의 대표작 「큰 바위 얼굴」이다. 정군수 시인은 김남곤의 시 「자랑」을 인용하여 “시인이 늙으면 큰 나무가 된다.”고 말했다.
여산재에 다 갈 즈음에 학동마을이 있다.
그곳에는 학처럼 우아한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갈 듯한 사백 년은 됨 직한 큰 느티나무가 산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면 약간 긴장을 한다.
조수석에 앉은 김남곤 시인이 머리를 숙이고 비손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낮은 속도로 느티나무 그늘을 지나갈 때까지 조심스럽게 운전을 한다.
어느 날 나는 김남곤 시인에게 물었다.
“형님, 나무에게 무어라 빌었습니까?”
“잘 살아주어서 고맙습니다. 잘 살아주어서 고맙습니다.”라고 했지.
김남곤 시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 정군수 시인, 김남곤 편저 『내 안의 가시』 중 「시인이 늙으면 큰 나무가 된다」(2023, 신아출판사)
전북예총 회장을 지낸 소재호 시인은 ‘김남곤 시인의 시는 무르익은 정서의 서정시’라며 ‘인도주의 사상을 배태한 서사적 서정시’라고 정의했다.
중국 한나라 역사가인 사마천은 130권의 방대한 분량의 『사기』에서 그 내용을 “결국 사람이 답이다”란 말로 총괄總括했다. (중략)
김남곤 시인의 시선집 『사람은 사람이다』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사람은 사람이다 / 사람은 사람이다 / 사람은 사람이다” 세 번을 반복하여 선언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정의되어야 하고, 사람은 그 본질적 가치로만 평가되어야 하고, 사람은 사람다운 도덕 윤리 개념으로 그 무게를 재야 하며, 민주사회 통념 속에서 사람의 위상은 가장 높은 자리에 거처해야 한다는 주장이리라. (중략)
사마천의 ‘결국 인간이 답이다.’에 연상해서 김남곤 시인의 ‘사람이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오버랩시키면, 김남곤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주의의 시인이다.
감히 그렇게 필자는 확신한다.
- 소재호(시인·문학평론가), 김남곤 편저 『내 안의 가시』 중 「인도주의 사상을 배태한 서사적 서정시」(2023, 신아출판사)
계간지 『표현』 회장을 맡고 있는 조미애 시인은 김남곤 시인의 시를 읽고 “천둥소리로 남아 윙윙거렸다.”라고 고백한다.
2021년 꽃이 피고 지는 어느 봄날에 우리는 김남곤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시장에 나가보면 싼시 짠시가 널려있다』를 만나게 되었다. “시장에 나가보면 별별 오로라가 다 떠있다. 나도 비록 끝물이라서 때깔은 그리 곱지 않지만, 구석 자리 하나 펴놔봤다”라고 말하는 책머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내 시를 펴 놓을만한 구석 자리는 아직 남아있을까’와 ‘나의 시는 싼시인가 짠시인가’에 대한 물음이 번개가 지나간 뒤 울리는 천둥소리로 남아 윙윙거렸다. (중략)
가슴 시린 시詩들로 가득한 그의 ‘시장市場’에서 쇠망치 소리가 들린다. 어느 한 구절도 허투루 읽고 지날 수 없는 사람들의 발을 붙들고 있는 시로 가득하다.
오직 그가 펼친 시장에 나 또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짠시’ 한 수 내어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조미애 시인, 김남곤 편저 『내 안의 가시』 중 「시적 고독은 이내 자유가 되어」(2023, 신아출판사)
제법이더라고요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눈도 어둡고
귀도 멀고
고고 고고를 한보따리 싸가지고
가셨어요
꼬마 친구들이
떼 지어 몰려왔어요
나는 놀랐어요
아주, 제법이더라고요
인자하게 웃고 계시는 할머니 사진 앞에
하얀 국화꽃도 드리고
손 모아 얌전히 두 번씩 절도 하고
많이들 컸더라고요.
- 김남곤 동시집 『선생님이 울어요』(2018, 신아출판사)
동시를 쓰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어린이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다. 『선생님이 울어요』 동시집은 67편의 동시와 더불어 시인 주변의 문인과 화가, 아이들까지 각각의 개성을 담은 그림도 풍성하다. 김남곤 동시집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감싸준다.
김남곤 시인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 다르게 가슴이 따뜻하고 감성이 풍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즐거운 삶을 살아온 경험을 묶어, 이제는 시보다 더 아름다운 동심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어린이들의 괴로움, 슬픔, 즐거움을 글로 어린이들에게 가슴을 저릿하도록 하는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에 무릎을 치며
웃어댈 어른들의 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마을에 저리 큰 나무가 / 오래 살아 계시다는 것은 / 그 옛날 어지신 한 분이 / 살고 가셨다는 증거라네”
참고문헌 및 자료
- 참고문헌
김남곤 시집 『헛짚어 살다가』(1991, 친우)
김남곤 칼럼집 『귀리만한 사람은 귀리』(1998, 신아출판사)
김남곤 시집 『푸새 한 마당』(1999, 신아출판사)
김남곤 시집 『새벽길 떠날 때』(2003, 신아출판사)
김남곤 수상집 『비단도 찢고 바수면 걸레가 된다』(2003, 신아출판사)
김남곤 시집 『녹두꽃 한 채반』(2009, 신아출판사)
김남곤 시선집 『사람은 사람이다』(2013, 신아출판사)
김남곤 동시집 『선생님이 울어요』(2018, 신아출판사)
김남곤 시집 『시장에 나가보면 싼시 짠시가 널려있다』 (2021, 신아출판사)
김남곤 편저 『내 안의 가시』(2023, 신아출판사)
『전북의 재발견』, 「얼」(2013, 전라북도)
『전북문단』 95호, (2021, 전북문인협회)
연보
1937 7월 23일, 전북 완주군 조촌면 만성리 702번지 두현부락(황방산 말고개)에서 아버지 김용진 님과 어머니 이현숙 님의 6남매 가운데 맏이로 출생
1951~1956 조촌초, 전주서중, 전주공고 졸업
1962 제3수송항만사령부 병장 제대
1965~1967 삼남일보 기자 교정부 차장을 지냄
1968~1973 전북매일 교정부장, 지방부장, 문화부장 역임
1971 서울신문대학원 기자특수교육반 이수
1979 『시와 의식』시인 등단
1973~1986 전북일보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제작국장 등 역임
1987 전북일보 광고국장, 업무국장 등 역임
1988 전북일보 편집국장을 지냄
1991 전북일보 수석논설위원을 지냄
1994 전북일보 이사직을 맡음
1995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장을 지냄
1996~2004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연합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예총 이사, 미당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전주역사박물관건립 추진위원장 둥 역임
2001~2006 전북일보 전무이사를 지냄
2002 전북전통문화연구소 이사장을 지냄
2004 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를 지냄
2007~2013 전북일보 대표이사 사장, 우석대학교 이사장 등 역임
2014~ 전북문인협회 고문, 전북예총 고문, 한국문인협회 고문, 우석대학교 이사, 완주예총자문위원장 등 역임
2016 신석정 시인 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을 지냄
2018 구름재 박병순 시비건립 추진위원회 공동대표, 바다문학상 운영위원장 등 역임
- 저서
시집『헛짚어 살다가』(1991, 친우)
칼럼집 『귀리만한 사람은 귀리』(1998, 신아출판사)
시집『푸새 한 마당』(1999, 신아출판사)
시집『새벽길 떠날 때』(2003, 신아출판사)
수상집『비단도 찢고 바수면 걸레가 된다』(2003, 신아출판사)
시집『녹두꽃 한 채반』(2009, 신아출판사)
시선집『사람은 사람이다』(2013, 신아출판사)
동시집『선생님이 울어요』(2018, 신아출판사)
시집『시장에 나가보면 싼시 짠시가 널려있다』(2021, 신아출판사)
편저『내 안의 가시』(2023, 신아출판사)
- 수상 내역
1974 한국신문협회상
1991 (10월)전북문학상
2003 (12월) 목정문화상(문학부문)
2013 (2월) 진을주 문학상
2013 (5월) 해양문학상
2014 (10월) 중산문학상
2018 (12월) 한국문학상
2023 (10월) 석정시문학상
그 외 전북문화상(언론), 국무총리상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