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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색지장, 김혜미자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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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인의 자화상 DB

제목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색지장, 김혜미자
  • 2026-05-27 10:04
  • 조회 65

본문 내용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색지장 김혜미자

한지가 곧 나의 삶이고,

내 삶이 곧 한지다


 

 

이병재(전북교육신문 기자)






꼬옥 쥐면 한 줌밖에 안 될 것 같은 가냘픈女人,어디에서 저렇게도 놀라운 창작력과 뜨거운 정열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을까?

해맑은 남색 치마에 오색저고리를 받쳐 입은 상큼한 그녀의 모습은 지금 마악 이슬을 털며 피어오르는 한 송이 창포꽃을 연상케 했다.”

 

(목경희 수필집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1991)꽃길을 걷는女人’)

 

 

 

 

 

1. 성장

 

 

 

김혜미자(金恵美子)1941212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즈음 후쿠오카 농림학교 원예과 출신으로 후쿠오카시에 취업 중이었고 어머니는 당시 전주기전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아버지는 전주로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 달 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후쿠오카로 돌아갔다. 19458월 해방이 되자 부모님은 고향인 전주로 돌아왔다. 전주에서는 현재 완산교회 근처에서 살았다. 전주시 재무과장이던 외삼촌 집이 있었고 외가 식구들은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터줏대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신흥고 교사를 지냈고, 진외가 할아버지는 초대 전주시의회 의장이었다. 특히 그의 집은 정원이 아름다웠다.

 

 

 

우리 집 정원이 너무 예뻐서,완산동에서꽃집 딸하면 다 알 정도였어.

아버지가 후쿠오카 농림학교 출신이라 집에 꽃나무가 많았고,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늘 꽃집 딸로 불렸지.

특히 수국 키가2m쯤 자라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던 모습이 아름다웠고,

백목련·자목련·히아신스 같은 꽃 이름을 많이 알아서 친구들이 신기해하곤 했어.”

 

 

 

정원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과 함께 집 마루에 앉아 바이올린이나 만돌린을 연주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또렷하다. 아버지는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애정과 열정은 대단했다고 기억한다.

 

 

 

아마 내가 네 살쯤이니 아장아장 걷던 때였던 것 같어.

후쿠오카 집에서 배 타는 항구까지는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고,아버지는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어깨에 메고 그 길을 걸었지.

어머니는 내가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 걷던 일을 이야기하며네 아버지가 그만큼 음악을 좋아했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지.”

 

 

 

1953년 완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성심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가톨릭 학교라 세례를 받고 성당 미사에 열심히 참석했다. 성당과 학교에서 무용과 합창, 미술 활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미술과 음악, 국어였다. 고등학교는 전주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당시 성심여중 졸업생 가운데 7명이 전주여고에 진학했고 그는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조용한 학생이었다고 얘기하는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1959, 3학년 겨울방학 동안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아픔을 마주한다.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 일곱 살 터울이던 큰언니는 이미 결혼해서 출가외인이었고 두 동생은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버지와 동생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네 이웃들로부터 된장, 고추장 담그는 법을 배우며 집안 살림을 책임졌다.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이틀간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그 시절은 지금처럼 김치나 된장,간장을 사 먹는 때가 아니었잖아.

나는 이웃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 열아홉,스무 살 때부터 김장도 하고 간장·된장·고추장까지 다 직접 담가야 했어.”



 


1964년 결혼을 하고 이듬해인 1965년 용두동(서울)에 살면서 큰딸을 낳았다. 1970영 전주로 이사 왔다.

그는 딸 셋을 낳았다. 큰딸 김선주 밑으로 김란주(1967년생), 김수아(1970년생)가 태어났다. 김선주는 어머니의 한지 작품 활동을 도우며 자신만의 작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손녀 허석희(1997년생)2022년 제28회 전국한지공예대전에 원앙장을 출품, 대상을 받았고 여러 번 개인전을 열며 전주한지공예를 이끄는 재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색지장 이수자이기도 하다. 둘째 김란주는 전북대 의대를 졸업, 소아과 의사로 재직 중이며, 막내 김수아는 결혼 후 바로 호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

 

 

 

 

 

2. 꽃꽂이와 문향회

 

 

 

.그 자체와 꽃꽂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감상하게 되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꽃은 단순히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서 끝나지만 완성된 꽃꽂이는 마음 가는 방향을 따라 

머리로 생각하고 손의 기교를 보태며 자연의 순리를 벗어나지 않는 방향에서

실내로 옮겨 보는 하나의 작업으로 의미를 부여받은 작품으로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보는 이에게 공감 또는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미술(색채,구도,구성),음악(고저장단의 흐름),문학(작품명·줄거리)등을 이해하고

참고삼아 작품 속에 소화하는 어려움마저 곁들이지 않는다면 무미건조한 손놀림에 불과할 뿐이다.”

 

(김혜미자내가 쓴 글-노트’)

 

 

 

김혜미자 꽃꽂이 연구실()’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북을 대표하는 꽃꽂이 전문 기관이었다. 무형유산 색지장인 그의 예술은 전북여성회관에서 주최하는 꽃꽂이 교육을 수강하면서 시작됐다.

 

 

 

원광대학교 농대에서 학장과 교육대학원장을 지낸 박인현 교수님이 전북에서 처음 꽃꽂이 강의를 여성회관에서 열었는데,내가 그의 첫 제자였어.

어떻게 그 교육을 알게 되어 찾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1년 동안 배웠어.

그 시절에는 꽃꽂이를 해야 교양 있는 여자로 인정받았고 결혼 조건 가운데서도 중요한 교양으로 여겨졌지.”

 

 

 

그는 박인현 교수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공부를 원했다. 서울에서 꽃꽂이로 유명한 임화공 선생(꽃꽂이 화공회 이사장, 우리나라 초대 플로리스트)을 찾아갔다.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행사에 단골로 꽃꽂이를 맡았던 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벽이 있었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처지에 자격증 조건인 4년의 교육 기간은 너무 길었다. 이후 문향회 조재선 회장을 만나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됐고, 지방에 사는 꽃꽂이 작가로는 유일하게 문향회 운영위원을 역임하면서 김혜미자 꽃꽂이 시대를 열어 갔다.

 

 



 

“1972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중략)전주극장 출입문 왼편에 그림같이 아담한 꽃가게가 신기루처럼 차려져 있었다.

가게 전면에미니하우스란 간판이 걸려 있었고(중략)나는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옛집을 찾은 듯이 주저함도 없이 떨리는 가슴으로 문을 밀고 들어섰다.

수선화인 듯 앳된 여인이 친근감이 넘치는 미소로 낯선 나를 맞아주었다.”

 

(목경희 수필집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1991)꽃길을 걷는女人)

 

 



 

1972년 작은 꽃꽂이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장식으로만 여겨지던 꽃꽂이 수준을 개인전 경지로 끌어올렸다. 1976년 그는 전북에서 최초로 꽃꽂이 개인전을 열었다. 꽃꽂이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예술의 한 분야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구체화했다. 이후 13년여 동안 백여 명의 제자들과 문향회 꽃꽂이 회원전을 거의 매년 열었고, 전북예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1991년 우진문화공간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며 꽃꽂이 연구가로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전주에서 처음으로 한국꽃꽂이협회 소속 문향회 1급 사범으로 개인전을 할 만큼 실력 있는 꽃꽂이 강사로 이름을 알리면서 전북여성회관, 전북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전북농촌진흥원 등 여러 기관에서 강의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수많은 전시회 가운데 그는 가장 특별했던 경험으로 그의 지론인 미술, 음악, 문학이 어우러진 꽃꽂이 <춘향전>을 꼽는다.

 


 

 

처음에는 꽃으로 장식한 그네를 만들어 춘향이와 이도령의만남을 표현했어.

이후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사랑’, ‘이별’, ‘고난’, ‘재회’,그리고대단원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오페라처럼 꾸몄지.

춘향이가 옥에 갇힌 장면이 가장 인상 깊어.

당시 골동품 가게에서 빌려 온 칼을 무대에 사용했는데,그 위에 가시덩굴을 꽂아 이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어.”

 

 

 

 1993, 그는 당시만 해도 거의 불치병이었던 선고를 받고 수술을 했다.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자신을 추스르고 방사선 치료를 해 가며 마음속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전시회를 준비했다.

 

 

 

내가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고,이번 전시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전북예술회관11실은 가장 넓은 전시장을 얻었어.그런데 꽃꽂이 강사 과정은 전혀 쉽지 않아.

초급 과정만 해도6개월이 걸리고,최고 수준인1급 사범이 되려면 최소7년은 공부해야 해.

나는3년 이상 공부해3급 사범 자격을 갖춘 사람들70명과 함께 혼신을 다해서 당시 전시를 준비했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향회 꽃꽂이 회원전을 준비하던 그에게 당시 전북일보 문화부 기자이면서 전주여고 5년 선배인 김현수 씨가 한지공예 작품을 같이 전시하길 권했다. 암 투병 중인 후배의 남다른 재주를 아끼는 선배는 아침저녁으로 그를 찾아 한지 작품 전시를 권유했다. 그때까지 겨우 10여 점의 한지 작품만을 배웠던 그는 망설였지만 결국 꽃꽂이 전시실 옆 2실에서 문갑, 이층롱, 태극 상자, 사주 상자, 과반, 소반 등 소박한 한지 작품을 전시했다. 1회 전통한지공예 김혜미자와 회원전이었다.

 

 


 

 

 

 


3. 한지공예 입문

 

 

 

한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던 시절,방송 프로그램에서 어떤 남자가 나와 한지 작품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시작하게 됐어.

그때 내가김혜미자 꽃꽂이 연구실의 이름으로KBS, MBC등 방송국 뉴스나 프로그램에김혜미자 꽃꽂이연구실 제공으로 꽃을 협찬했지.

그러다 보니 방송국 사람들과도 친분이 생겼고.그래서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방금 방송에 나온 그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마흔일곱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한지공예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텔레비전에 출연했던 어떤 남자는 호진 상기호(2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 작가) 선생이었다. 새로운 공부는 쉽지 않았다. 서울 영동 사거리 파리바게트 2층에 상기호 한지공예 연구실이 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 무조건 찾아갔다.

 

 

 

전주에서 밤11시 반쯤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 왔어.

꽃꽂이도 할 때니까 남대문 꽃시장에서 꽃을 사고,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꽃을 보내 놓은 뒤 목욕하고 쉬다가 택시를 타고 영동사거리로 갔어.

영동사거리가 꽤 크데.택시에서 내려 살펴보니 파리바게트가 보였고,그때가 오전8시 반쯤이었어.그래서앙꼬빵하나와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지.

가게 주인에게2층 연구실이 몇 시에 문을 여는지 물으니 오전9시에서10시 사이라고.

시간이 지나자,체격이 큰 젊은 남자가 지나가니저분이다라고 알려 줘서 따라 올라갔어.그때가 아마 오전9시 반쯤이었을 거여.”

 

 



 

한지(전지)공예 공부는 2m 정도 되는 책상에 4명이 한 조가 되어 2시간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해서 남대문 꽃시장을 들렀다가 단 2시간만 공부하고 돌아가는 게 너무 아쉬웠다. 결국 그는 선생님 오실 때 와서 막차 탈 때까지 공부하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허락받았고, 서울 올 때면 아침부터 시작해서 전주 막차를 탈 때까지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새로 시작하는 작업은 즐거웠다. 상기호 선생님 밑에서 이연택 장관의 형수와 같이 공부했고, 생선 매운탕에 지리라는 메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색지공예를 어느 정도 익힌 뒤 한지공예에도 여러 가지 기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스승은 최영준(충남무형유산 2, 지승제조장) 선생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홍성까지 두 시간 반 정도 운전하고 가서 3~4시간 공부하고 왔다. 그렇게 해서 지승공예를 배웠다. 도로 사정이 지금보다 훨씬 나빴던 당시 어떤 마음으로 험한 산길과 겨울 빙판길을 빠짐없이 운전하며 다녔을까.

 

 

 

저는 늦은 나이에 시작을 했어요.

보통 저희 제자들 취미 생활하는 거를 보면 다 젊어서 시작하는데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 때문에

한 번도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나 무슨 조금 배워서 어떻게 응용하자,이런 생각이 아니라 이걸 끝까지 배워서 내가 누구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 그런 욕심이 운전하고 다니는 오고 가는 길에 다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2022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기록사업색지장 김혜미자(2022)중에서)

 

 

 

 

30대 시작한 꽃꽂이로 명성을 떨치던 그가 40대 중반을 넘어 한지공예에 천착하였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예술이지만 관통하는 게 있다. ‘이다. 작업을 할 때 그에게 꽃이나 한지는 색의 조화측면에서 똑같다. 꽃꽂이는 어떤 꽃이 과연 주연인지, 조연인지, 엑스트라인지를 정해서 꾸민다. 구성과 강약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장미꽃이 주연이면 다음은 작은 국화가 조연, 안개꽃이나 푸른 잎은 엑스트라다. 한지공예도 마찬가지다.

 

 

 

꽃꽂이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꽃을 보는 그 감각과 한지에서 색지공예라는 건 색이 어떻게 조화롭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품격이 달라지잖아요.”

 

 (색지장 김혜미자(전라북도무형문화재 기록사업, 2022)중에서)

 

 

 

 

색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관찰이 필수적이다. 꽃마다 각기 다른 꽃잎 숫자와 색깔은 기본이고 빨간 봉오리가 피어 가며 어떤 색깔로 변해 가는지, 봄철 나뭇잎은 어떤 색으로 시작해 위와 아래가 어떤 색으로 변해 가는지를. 낮에 보는 꽃잎과 밤에 보는 꽃잎, 햇빛 아래 보는 꽃잎이 다 다르다. ‘관찰은 자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에 있는 박물관은 다 가 볼 기세로 다녔다. 미술관 전시도 빠트리지 않았다. 한지를 포함한 모든 예술의 기본은 똑같다. ‘안목을 갖춰야 한다. 그는 유홍준(현 중앙박물관장)이 지은 안목을 네 번이나 읽었다. 눈이 열려야 좋은 작업이 가능하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지금도 안목을 키워라.”라고 얘기한다.

 

 

 

“1미터가 넘는 수국 꽃잎이 떨어지면,하얀 눈처럼 마당에 쌓이고.

나는 그 예쁜 꽃잎을 쓸어 내며왜 이런 걸 버려야 하지?’라고 생각했어.

내가 그런 환경에서 자라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있었던 것 같아.

꽃꽂이는 물론이고,한지공예 역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그런데 초등학교1학년 때는 모든 이파리를초록색으로만 그리게 가르쳐.잘못됐어.이파리는 초록이 아니야.

밑에는 청록,초록,연두,유록(봄날의 버들잎의 빛깔과 같이 노란빛을 띤 연한 초록색)이렇게 돼 있어.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나같이 보는 줄 알았어.알고 보니 내가 조금은 특별했나 봐.자연을 보는 눈이 색지공예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해.”

 

 

 

 

 

4. 전국한지공예대전의 출발

 

 

 

1993문향회 꽃꽂이 회원전이 열리던 전북예술회관 전시장 11실 옆 작은 2실에서 열었던 한지공예 작품 전시는 개인뿐 아니라 전주한지공예 역사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날 전시를 계기로 전주한지공예가 전북 미술계 본류 가운데 하나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올해로 31회째를 맞은 전국한지공예대전의 시작은 이날부터였다.

 

 

 

“1993년에 꽃꽂이 회원전을 열었는데,그해 전라북도 예총에서 전주시 예총이 독립했어.

당시 전주시예총 사무실은 전북예술회관 맞은편 전북은행 건물에 있었고,회장은 권병렬 선생님이었어.

나를 꽃꽂이 선생님으로만 알던 전주예총 백옥선 씨가 전시를 구경하러 왔다가 한지공예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어.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예술회관 현관에 올라와 나를 껴안고 돌면서전주예총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한지야!’라고 외쳤어.기억이 생생해

 

 



 



 

전주한지의 가치에 대해 공감한 전주예총 백옥선 씨와 함께 한지공예를 되살리기 위해 다음 해 전주시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직 전주한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 때라 지원받는 데 실패했다. 1995년 전주시 대신 풍남제전위원회(위원장 송기태)로부터 상금 300만 원을 지원받아 제1회 전국한지공예대전을 준비했다. 대상 상금 300만 원을 제외하고는 공예대전 준비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행사 기간에 사용할 예산 한 푼 없이 백옥선 씨가 발로 뛰었다. 확보한 전시장은 현재 전북일보 앞 기아자동차 건물 2, 무상으로 후원받았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책상을 빌려 전시 받침으로 사용하고 그 위에 문방구에서 산 모조지를 깔았다. 모든 게 부족했던 1회 대회. 하지만 그에게는 한지공예가로 각인되는 대회였다.

 

 

 

공예대전 개최 이전에 작업하던 작품이 있었지만 행사의 여러 일을 돕다 보니 출품을 망설였는데 결국 여러 사람들이 권유해서 출품하게 되었어

 

 

 

작품 접수 마감 전날 마무리 작업을 하고 출품했다. 그의 작품 삼층장이 대상을 받았다. ‘삼층장은 대나무 공예에서 착안한 작품. 담양에서 본 대나무를 활용해 완성한 장롱을 보고 대나무 대신 한지를 꼬아(지승) ‘수복강녕이라는 문자를 새겼다. 당시 최영준 선생은 대상 작품을 보고 어떻게 이런 기발하고 창의성 넘치는 생각을 해냈느냐라며 칭찬하셨다. 대상에게 주어진 상금으로 떡과 식혜, 과일 등을 준비해 파티를 했다.

 

 

 

작품 접수 마감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어.우리 집 아파트 옥상에 삼층장을 올려놓고 마무리를 했지.

결국 작품을 출품했고,대상을 받았어.심사는 교육대학 교수 한 분과 다른 분 등 네 분이었어.

이때부터 한지공예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지.”

 

 




 

1995년 어렵게 첫발을 내디딘 전국한지공예대전은 1997년 전주한지축제, 1999년 전주종이문화축제, 2006년 전주한지문화축제, 2025년 전주국제한지산업대전과 함께 전주한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알리며 31회째를 맞았다.

 

 

 

심사평을 하기에 앞서 저는1995년 너무도 열악한 환경에서 한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시 관계자의 정성으로 제1회 전국한지공예대전을 개최한 지9년 만에9년의 세월만큼이나 훌륭하게 발전된 작품을 심사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한지공예를 끌어 주시고 밀어 주신 모든 분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으로 심사평을 드리겠습니다.”

 

 

(2003년 전국한지공예대전 심사위원장 김혜미자 인사말)

 

 

 

 

 

 

5. 색지공예

 

 

 

한지는 그리고 내가 일상을 거의 보내는 한지공예는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번거로운 일상에 오직 마음이 정돈되는 고요한 시간.

매끄러운 한지를 가로로 다음 세로로 붙여간다.

일 년 동안 날마다 물을 갈아주며 삭여온 찹쌀가루로 만든 풀을 정성껏 붙이고

백 번 정도 도침(搗砧,종이나 피륙 따위를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다듬어서 윤기가 나고 매끄럽게 함)하여

거의 한지와 한지를 두드리다 보면60여 장의 한지가 맞물려3mm정도의 두께가 만들어진다.

치수대로 그리고 오리고 붙여 작품의 골격을 만든다.

찰랑찰랑 경쾌한 초배지로 속옷을 입히면 태가 나는 모습으로 설렘을 맛보며 고운 색지로 제 몸에 맞추어 옷을 입히고 용도에 맞게

상징적인 문양을,시간을 잊은 채 새기고 온갖 고운 색지로 배접한다.

안목과 조형감각이 정갈한 솜씨와 정성을 보태어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한지공예의 진수를 맛보는 행복감,편안함을 느낀다.

비로소 한지와 나는 교감을 만끽하며 편안해지면서 나의 일상을 반복하게 만들며 한세월 살고 있다.”

 

 

(김혜미자내가 쓴 글-노트’)

 

 

 

 

1988년 상기호 선생, 1990년 최영준 선생을 사사하며 호진 오색전지공예 회원전’(경복궁 민속박물관) 등에 참여했고 1993김혜미자이름을 건 첫 전시를 열었다. 1994년 전라북도 공예품 경진대회(은상), 24회 전국공예품 경진대회(입선)에 참가했다. 1995년 제1회 전국한지공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50대 중반 그의 한지공예 인생은 무르익어 갔다. 한지공예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조금씩 늘어났다. 대학교와 박물관 등 공공기관에서 한지공예 강의 개설이 이어졌다. 제자들도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1993년 결성한 제자들의 모임 지우회’,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료생과 재학생이 만든 수지회’, 국립민속박물관의 한지공예반과 서울 회원들의 모임인 지연회가 만들어지고 서로 이어 가며 활동하고 있다. 이제 그의 제자들은 한지공예의 다양한 부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한몫을 제대로 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한지공예가로서의 활동은 환갑이 무색할 정도로 더욱 왕성해졌다. 강의와 작품 활동에서 도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지공예를 강의한 것도 이 시기다. 민속박물관에서 한 강의는 전주에서 활동하는 한지공예가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안목을 높일 수 있었다.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가 귀한 색실함(상자)과 색실첩 등 한지 유물을 직접 천천히 살펴보고 크기와 구조를 측정할 기회였다. ‘색실함, 색실첩 복원이라는 꿈이 생겼다. 과거 두꺼운 한지가 생산되지 않아 하드보드를 이용해 색실함과 색실첩 20여 점을 복원했다. 현재 최성일 지장이 생산하는 5mm 두께 한지를 활용해 다시 제작하고 있다.

 

 


 

 



 

이 시기는 창작 작품 활동 외에 전주한지공예이름과 가치를 확산시키는 데에도 많은 공을 기울였다. 2001년 전북미술대전에 전통공예 부문을 신설하도록 나섰고, 전주시 전통 문화상품 개발교육에 참여했다. 전통 한지공예의 독자성을 부각시켜 국립대학교 평생교육원 협의회에서 전통한지공예지도자 자격증을 발급을 주도하였다. 전주한지를 해외에 알리는 일도 시작했다. 20259월 전주에서 열린 제24회 전통공예품전은 공예 분야 유네스코 창조 도시인 일본 가나자와시와 가진 교류전이다. 20024월 전주시는 일본 가나자와시와 자매결연을 하였다. 김완주 시장은 두 도시 간 문화 교류를 위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단체가 필요했다. 사단법인 한지문화진흥원’(이사장 김혜미자)은 일본과 교류를 위해 급하게 만들어졌고 그해 가을 첫 번째 교류전을 가나자와시에서 열었다. 교류전은 매년 전주시와 가나자와시를 번갈아 가며 현재까지 열고 있다. 한지문화진흥원은 일본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와 전통공예 문화 교류 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저는 한지공예에 삶의 모든 것을 걸고자 했습니다.

전주는 한지의 고장이지만 정작 한지공예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시절에 한지공예를 시작하였기 때문인지 언제부터인지

저에게는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안겨져 있었습니다.

전라북도의 각 대학 평생교육원(전북대학교,군산대학교),여성회관(전주,군산,남원,정읍,순창 등),교육청,공공 도서관,시민대학 등

한지공예 강습을 의뢰하는 기관과 단체가 이어지면서 때로는 엄청난 일의 분량에 힘겹기도 했지만 한지공예를 발전시키는 일이라면 기꺼이 나섰습니다.

그사이 저와 함께 공부하면서 성장한 제자들도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기 시작했고,더러는 도내 각 지역에 자리 잡고 한지공예 문화를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2003전주기전대학 문화전통과 교수 임용 공모 당시 제출한 자기소개서일부)

 

 

 



 



 

전주기전대학은 200210월 문화전통과를 만들었다. 전공은 염색, 한지, 꽃꽂이였다. 한지 전공 교수가 거의 없던 때여서 한지공예계에서 활동 영역을 넓혀 가던 대학은 그에게 교수직 공모에 응할 것을 권했다. 여성 관련 기관에서 10여 년 한지공예 강의 경력을 인정받았고 교수에 임용되면서 바로 평생교육원 원장직도 맡아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대학에서 고졸 출신 대학교수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당시를 개인적인 전시회·공모전 외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행복한 꿈같은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기전대학 교수가 나보고 서류를 내라고 왔어.그러길래 내가 대학도 안 나왔는데 평생교육원 강의나 했지 무슨 대학교수가 되냐그랬더니 아니 한지과가 

대학에 없는데 학사가 어디 있으며 석사가 어디 있으며 박사가 어디 있느냐 그래서(중략)기전대학 이사들이 왜 대학을 안 갔냐고 물어봐서 내가 그 평가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잖아.엄마가 고등학교3학년에 졸업 앞두고 돌아가시고,어린 두 동생과 아버지를 놔두고 대학 갈 형편이 안 됐어.

(중략)인터뷰하고 왔는데 만장일치로 교수가 되었지.

되자마자 학장이 나를 평생교육원장 보직까지 줬어.평생교육원 강의는 내가5~6년 했지만,행정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막 사양했는데도 보직을 맡았어.

그때 학생들 내 기억으로는 한20명 안팎이었던 거 같아.”

 

 

 

그가 자신이 추구하는 한지공예 세계를 가장 잘 담아냈다고 인정하는 한지, 그 멋과 공예의 세계2005년에 출간했다. ‘전주전통한지공예연구회제자들과 함께 펴낸 이 책은 그때까지 작업했던 그의 작품과 제자들이 전국한지공예대전이랑 이런저런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과 함께한 작품들을 가지고 만들었다. 가끔 작업하기 싫고 게을러질 때 이 작품집을 보면서 열정을 잊지 않으려 늘 침대 옆에 가까이 놓고 있다.

 

 


 

 

한지.

그저 좋았습니다.

한지.

만져보고,하늘에 비추어보고.염색도 하며 마냥 좋았습니다.

어떤 한지가 질 좋은 것인지,왜 섬유질이 길면 좋다고 하는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전주와는 어떤 인연인지 어떻게 쓰이고 어떤 공예품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며

한지의 매력에 빠져 그렇게 겁 없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평생을 같이할 거라던 꽃의 세계에서 과감히 한지의 세계로 왔습니다.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옛 어른들이 쓰던 유물을 그저 흉내만 내는 건 아닌지,지도한 작품들의 색은,문양은 과연 맞게 쓰고나 있는지.모든 것이 미로였습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전국의 박물관으로,도서관으로,골동품 가게로,서점으로.

그렇게 누더기처럼 사라져가는 한지 공예품을 골격이라도 재현해 보려고

저 자신이 지쳐 변질되지 말자고 다짐하며

앞만 보고 작업해 왔습니다.

그러다 낡은 유물 반짇고리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손때 묻었을 그 반짇고리에,아껴 다루던 옛 분들의 애잔하고도 고운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한지는 어느새 내 가슴에,내 일상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비로소 한지공예는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정갈한 솜씨를 바탕으로

선조들의 느리고 여유로운 삶을 배우며 전통의 바탕 위에 지혜를 더하여 현대에 맞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더 새롭고 현대적으로 가꾸어 세계로 나가야 할 때입니다.”

 

 

(한지 그 멋과 공예의 세계(전주전통한지공예연구회, 2005)서문)

 

 

 

2004년에는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공예작업실을 전주한옥마을, 현 위치로 옮겼다. 자녀들이 마련해 준 공간으로 현재까지 살림집이자 작업실이다. 2007년에 기전대학에서 정년(66)을 맞은 그는 20113월 완주군 임정엽 군수로부터 완주 대승한지마을 승지관 관장으로 위촉된다. 대승한지마을은 행정안전부 사업에 선정돼 20109월 문을 열었다. 당시 임정엽 완주군수가 첫 만남에 A4 종이에 한지 관련 궁금한 사항을 빼곡히 적어 놓고 질문하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고려 시대부터 한지 생산지로 유명한 대승한지마을 관장 자리는 공예가의 안목을 한지로까지 넓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13년 전주한지문화축제 기획전 대한민국 한지장인 명품전을 대승한지마을에서 열었다.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경기도 등 전국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지를 만드는 27곳을 찾아 인터뷰를 통해 명인이 한지에 바친 인생과 우리나라 전통 한지 역사를 정리했다. 재능 기부를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다. 소양면에 있는 마음사랑병원과 인연이 돼서 10년 가까이 입원 환자들과 한지공예를 공부했다.

 

 

 

스승의 날에 갑자기 집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어 보니,마음사랑병원에서 배우던 열 명이 서 있어.

집 마당에서스승의 은혜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진짜 감동이었지.

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이 장면도 들어가.그리고 그중에2명은 나중에 전국한지공예대전에서도 상을 탔어.”

 

 



 

2008년에는 우연한 기회에 국새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새를 올려놓는 석()을 한지로 만들었다는 문헌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한지를 몇 장 붙이다 보면 뒤틀리고 갈라지기 일쑤였다.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붙이고 실패하기를 여러 번, 결국은 8개월에 걸쳐 8cm가량의 석을 뒤틀림 없이 만들었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석을 만드는 동안은 여행은커녕 정해진 시간에 한지를 덧붙이느라 외출도 줄였다. 매일 그의 작업실에서는 붙인 한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주택이니까 가능했지,아파트였으면 여러 번 신고당했을 거야.”

 

 

 

한지공예를 알리기 위한 해외 교류에도 진심이었다. 미국 밀워키 주립대 리나 윤(Rina Yoon) 담당 교수 일행이 전통 한지 제조 기법을 배우기 위해 대승한지마을을 방문한 이래 수년간 교류를 이어 갔다. 그 인연으로 2015년에는 밀워키시에 있는 빌라 테라스 박물관(Villa Terrace Decorative Arts Musiumm)에서 열리는 뉴 한지전(전통 한지 재조명전)’에 초대전을 하였다.

 

 

 

영어도 모르지만 우리 한지를 궁금해하는 미국인들과 문답을 진행하는데 울컥했어.

이렇게 한지에 애정을 가지고 궁금해하는데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지!”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외교부가 주최한 재외공관 한스타일 연출 사업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우리 외교공관 공간을 한국적 분위기로 꾸미고, 이를 통해 한국 문화의 미와 우수성을 외국에 알리는 문화외교 사업이다. 첫해 오만 대사관에 한지옻칠 머릿장을 시작으로 시애틀 총영사관, 가나 대사관, 가봉 대사관, 카자흐스탄 대사관, 인도 대사관, 페루 대사관, 싱가포르 대사관 등 8개 공관에 작품을 전시했다.

 

 

 

가장 보람된 일이라면 내 작품이 외교부가 주최한재외공관 한스타일 연출 사업에 선정된 것이야.

8개국 재외공관 접견실에 옛날 선조들이 쓰던 한지를 갖고 만든 공예품을 전시한 것이 첫 번째 보람.

두 번째는 매년 외국의 미술을 전공하는 미국 밀워키 대학 교수 학생과 위스콘신 예술대학 주립대학 학생들이4년째 와서 한지공예를 접해 보고 체험했어.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일본이나 중국 종이보다 색도 아름답고 닥나무로 만든 질긴 좋은 한지를 재료 삼아 이런 공예품을 만들어 썼다는 것을

알려줬다는 것이 두 번째 보람이야.세 번째는 음식이나 소리밖에 없던 전주에서 한지공예가 소중한 문화로서 국내나 국제적으로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지.”

 

 



 



 

 

 

 

6.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색지장(색지공예)

 

 

상상도 못 할 만큼 괴로웠습니다.한지로 부귀공명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론이고 딸과 손녀들도 한사코 말렸습니다.

하지만전주에 한지공예 뿌리를 키운 어른으로서 개인적으로 서운하겠지만 대승적으로 수용해 달라는 주위의 권유를 마냥 모르는 척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앞길을 막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컸습니다.”

 

 

(전라일보2017119일 인터뷰)

 



 

201716일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보유자로 지정됐다. 단절된 한지공예의 맥을 잇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등 전통 한지공예 활성화에 이바지해 온 점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과정이 녹록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 없었다. 무형문화재 지정 예고 기간에 뜻하지 않은 오해와 시련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어른과 아랫사람을 알아보고, 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가릴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강조한 이유다. 야속한 마음이 왜 들지 않았겠느냐만 그는 손잡이가 닳을 조각도로 정교하게 새겨온 30여 년 시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한지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고, 한지공예를 배울 수만 있다면 나이 고하를 따지지 않고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전히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다.

 

전북을 명실공히 대한민국 한지공예 구심점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2010년대 후반 한때 존폐 위기에 빠져 있던 전주한지문화축제의 지속성을 위해 행정이나 시의회를 가리지 않고 관계자들을 설득, 2025전주국제한지산업대전(전주한지문화축제)‘까지, 이어지게 했다. 20239월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동아시아 종이문화특별전의 일환으로 열린 김혜미자 명인의 특별전. ‘인생을 살아오며 자식처럼 다루고 매만져 온작품 90여 점을 선보이며 한지공예 인생의 깊이를 보여 주었다.

 

 



 

올해 84세로 도내 무형유산 가운데 원로에 속하지만, 가슴속 열정은 아직도 뜨겁다. 202612월 유네스코 무형유산 보호 협약 정부 간 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전통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 중이다. 또한 전북 유일의 한지살리기재단이사로서 202410월 제3회 한지의 날 기념식을 전주에 유치했다. 그는 매주 월요일 한지산업지원센터에 제자들을 만나러 간다. 2011년 한지산업지원센터가 주관한 한지문화 관련 색지장 교육’, 2019전통공예 맥 잇기 교육’, 그리고 2020년부터 현재까지 한국공예장인학교에서 색지공예 교육을 하고 있다. 84세의 나이에도 제자들과 부대끼는 걸 마다하지 않고 종횡무진해 온 그는 올해 처음 보약을 지어 먹었다. 이제는 하루 10시간씩 강행군이 힘든 나이다. 최성일 지장(전북 무형유산)이 만든 5mm 한지 합지를 활용해 유물 26점을 다시 복원하고, 천주교 14(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상징하는 14개의 장면)를 한지로 재현하는 것, 이 두 가지는 건강할 때 끝내 놓을 계획이다.

그는 별도 작업실이 없다. 작업실이 집이고 집이 작업실이다. 자유롭게 쉴 수 없다. 생활공간과 작업공간이 겹쳐 있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지와 관련된 사람들이다. 이 공간이 한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방 같은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저에게 한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제 삶 그 자체입니다.한지와 제 삶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고,그냥 한지가 곧 제 삶이고 제 삶이 곧 한지입니다.”

 

 



 

                         
 

┃연보


김혜미자 1941. 2. 12. ~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보유자(201716) 색지장(색지공예)

 

1941 (212) 일본 후쿠오카 출생

1953 완산초등학교 졸업

1956 성심여자중학교 졸업

1959 전주여자고등학교 졸업

 

사사

1988 전지공예 입문(호진 상기호 선생. 1998년 제2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자)

1990 지승공예 입문(최영준 선생. 1986년 충남무형유산 2호 지승제조장)

 

입상

1994 전라북도 공예품 경진대회 은상

1994 24회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입선

1995 1회 전국 한지공예대전 대상

 

꽃꽂이 전시 경력

1976 꽃꽂이 첫 개인전(전북 최초)

1977~1995 문향회 김혜미자 꽃꽂이 회원전 및 개인전 17

1987년 꽃꽂이 춘향전’(전북예술회관)

1991년 제2회 꽃꽂이 개인전(우진문화공간)

 

전시

· 국내 전시회

1993 1회 전통한지공예 김혜미자와 회원전(전북예술회관)

1997~2003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강생 작품전 진선미전지도(전북예술회관)

1999 2회 전통한지공예 김혜미자와 지우회전(김혜미자한지공예관)

2000 전주종이축제 기금 마련전

2001 3지우전주전통한지공예연구회 회원전(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

2001 전주 전통한지공예초대전(지우회)(분당 삼성플라자 갤러리)

2001 안동 국제탈페스티벌 초대전(안동 하회마을)

2002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개관 기념전(한국소리문화의전당)

2002 월드컵축구 미니타임캡슐 작품 전시(청홍삼합상자)(전주월드컵경기장)

2002 한지문화진흥원과 일본 가나자와시 교육 초청전(전주공예품전시관)

2002 한지공예작가초대전(팬아시아종이박물관)

2003 김혜미자와 지우회 초대전(경기 용인 송담대학 미술관)

2005 한지, 그 멋과 공예의 세계출판기념전(서울 인사동 백송화랑)

2007 김혜미자 첫 개인전(국립전주박물관)

2010 김혜미자 세간살이전시회(서울 인사아트센터)

2011 김혜미자 한지 세간살이 색실상자와 실첩’(국립전주박물관)

2011 승지관 개관 1주년 기념 산골마을 한지로 등 밝히다’(완주 대승한지마을)

2017 명장의 손

2021 달빛연가: 한지 워크와 현대미술(전북도립미술관)

2021~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작품전

2023 백년일로전(전라감영)

2023 색지장 김혜미자 특별전(한국전통문화전당)

2024 기획전시 손끝의 결: 한지·나무’(하얀양옥집, 주관: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외 다수

 

· 국제 전시회

1985~1990 한국 꽃꽂이협회 일본 초대전 및 교류전 6

1996 한국의날 초청 전통공예 초대전 및 시연회(일본 사이타마현)

2001 한국의날 초청 전통공예 초대전 및 시연회(일본 오사카시)

2002~현재 전주시-가나자와시 자매도시 교류 전통공예전

2005 전주한지초대전(미국 워싱턴)

2006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한지공예 초대전(프랑스 파리)

2007 전주한지 초대전(스페인 마드리드국립박물관)

2008 전주한지 페스티벌 in 스톡홀름(스웨덴 스톡홀름 갤러리)

2010 전주한지 초대전(폴란드 바르샤바)

2013 중국 강소성 민속박물관 전주한지 초대전(중국 강소성)

2014 사할린 주정부 초청 전주한지 초대전(유즈노사할린스크 미술관)

2015 밀워키 주립대 초청 전통한지 초대전(미국 밀워키)

2016 전주한지 초대전(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2023 THAT’S KOREA: HANJI(이탈리아 베니스)

2024 국제한지 특별전(독일, 뮌헨오대륙박물관)

 

포상 및 경력

2000 전라북도지사 감사패

2004~2007 전주기전대학 문화전통과 교수. 평생교육원장. 예원예술대학교 대학원 출강

2008 대통령 포상(국새 및 의장품 요석 제작 공로)

2009 전통공예교육 문화관광부장관상

2009 전주시민의장 문화장

2011 대승한지마을한지공예품 전시관인 승지관장

2012 천년전주 기네스 선정(도내 최초 한지공예가)(전주시)

2019 1회 전라북도 예술대상(전북문화관광재단)

2023 28자랑스러운 전북인대상에서 문화대상(전라북도특별자치도) 외 다수

현재 ()한지문화진흥원 이사장, 전주전통한지공예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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