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하를 그리는, 길 위에 선 화가 천칠봉문리 미술평론가1920년, 일제강점기 한복판에 태어나 붓을 허리에 차고 평생을 살아간 화가. 전주 완산칠봉이 보이는 고사동에서 천대갑(千大甲)과 이성녀(李性女)의 2남 3녀 중 장남. 그래서 이름도천칠봉(千七峰, 1920~1984). 천생 전주에 뿌리를 둔 화가다. 후손과 후학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래 잘하고, 음주와 가무에도 능하고, 훤칠한 키에다가 호방한 성격과 지도력, 지극히 사교적성격을 가진 팔방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타고난 미술적 재능과 뜨거운 열정으로 불혹의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뒤로하고 전업 화가로 길 위에 선 남자. ..
농사짓고 판화 새기며 정직한 노동을 추구한 판화가, 지용출김미선 전북대학교 초빙교수지용출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아쉬운 이별로 그를 떠올린다. 서울에서 자란 지용출은 1994년 그가이제 막 서른을 너머 선 무렵 전주에 왔다. 그리고 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당시는 작가로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 47세의 나이였다. 더욱이 그는 열두 번째 개인전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었다.잘 알려진 대로 지용출은 추계예대 재학 시절 ‘사회변혁운동’의 일원으로, 혹은 선봉에 서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먹을 쥔 판화와 걸개그림을 그렸다. 졸업 이후 전..
시의 뼈대 위에 산문으로 사유를 기록하는 작가, 김용옥기명숙 시인1.유년의 행복, 청장년기의 분투, 노년기 풀꽃으로의 귀환매일생한불매향(梅日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피지만 꽃향기를 팔지 않는다. 추운 겨울을 인내하며 늦겨울에서 초봄까지 꽃을 피우는 인생이니 춥기 마련이지만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다.선생은 45년 된 매화⑴와 산다. 선생의 아파트에 날아와 집을 짓고 가족을 꾸린 제비와도 몇 해 동안 함께살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학이 물가에서 놀다 밤이 되면 나무 위로 올라와 쉰다는 서서학동. 선..
전북 수필 문단의 거목, 김학장세진 평론가 1. 잊을 수 없는 멘토 “장세진 선생, 방금 ‘미국영화 톺아보기’ 잘 받았습니다. 고맙소이다.이 원고를 언제 다 썼단 말이오? 대단합니다. 문운창성을 빕니다. 김학.” 이는 2020년 11월 27일 김학 수필가가 내게 보내온 문자 메시지다. 그 무렵 나의 책 『미국영화 톺아보기』를 받아본 문인과 지인 41명이 문자·전화·편지 등으로 발간을 축하해 주었다. 가장 먼저 김학 수필가가 축하 문자를 보내왔다. 그만큼 반가워했던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사실 김학 수필가는 나의 고교 13년 선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198..
지성과 서정과 신앙의 조화로운 시세계를 개척한 시인, 이기반이동희 시인, 前 전북문인협회장월촌 이기반(李基班 1931.5.25.~2015.11.18.) 선생은 우선 외모에서 범상치 않은 선비 기질이랄까, 지사다운 풍모를 지닌 분이다. 훤칠한 키와 늠름한 자태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길을 걷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절로 존경의 염이 들게 하는 풍모를 지녔다.월촌 선생을 생각하면 먼저 그 훤칠한 풍채가 떠오른다. 육 척 장신의 키, 올백으로 단정하게 넘긴 머릿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동문거리를 걸어 출퇴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출근할 때의 눈길은 저 멀리 ‘기린봉麒麟峰(완산..
전북 춤 뿌리를 찾아온 여정, 문정근김미진(전북도민일보 문화교육부 부장) 춤을 인연이자 삶이라 생각하는 문정근 명무에게 승무를 추는 것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일이다. 세상사 모든 번뇌와 욕심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는 잔잔한 텅 빈 마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사소한 욕심을 내어보기도 했으나,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수련시켜주며 참된 인간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주는 승무가 그냥 좋았다. 한국무용의 많은 선택지 중에서 왜 승무를 택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못난 얼굴을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그 누구보..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천생 예인 김기홍조민철 전북연극협회장연극계 뿐 아니라 전북예술계의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 예인이자 호인이었던 김기홍(金基洪)은 해방 직후인 1946년 8월24일에 전주시 덕진동 떡전거리(現.성모병원자리)에서 부친 김순병과 모친 성귀미장님 사이에서 1남 6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을 귀히 여기던 당시에 더군다나 독자로 태어난 덕에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집 주변에 자리한 온통 호밀밭이었던 전주천을 거침없이 뛰어놀며 피라미도 잡고, 물새알을 찾고, 밤이면 종달새 둥지를 찾아다니며 그렇게 유년기를 보냈다. 금암국민학교, 동중학교, ..
전북 영화, 그 영화로운 날들을 기억하는 영화인 김득남조석창 전북중앙신문 문화부장김득남 선생은 1943년에 태어나 전주시 경원동에서 자랐다. 조그만 논을 경작하는 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주초등학교와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를 거쳤다.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전주는 대한민국의 헐리우드라 불릴 정도로 영화촬영이 빈번했다. 우연히 후배 아버지였던 조진구씨를 만난 게 영화와 인연이 시작됐다. 조진구씨는 당시 전북도 공보실에 근무하면서 영화도 제작했다. 영화 ‘모녀기타’를 만들었고, 신상옥 프로덕션인 신필름에도 근무를 했..
전북 전통예술계의 새 중흥기를 이끈 황병근유장영(전, 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유당(由堂) 황병근(黃炳槿. 1934~ ) 선생께서는 근대 우리나라 서예계 태두(泰斗)로 널리 알려진 석전(石田) 황욱(黃旭) 선생의 3남 1녀 중 막내 자제(子弟)이시다. 아호 유당(由堂)은, 그의 선친께서 학문과 실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에게 일러 준 군자의 용(勇)을 생각해 지어주신 이름이었다.“어렸을 때는 내가 아주 행복한 사람이었지,우리집이 천석군이었으니까.천석군이면 부자 중에 부자여.천석군의 둘째 아들이 우리 부친, 거기다 우리 외가는..
담대한 소리꾼, 성준숙서경숙 전라북도립국악원 학예연구팀장전라북도는 소리의 고장으로,소리의 고장답게 소리꾼들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다.여러 명창들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의외로 태생 자체가 이곳 출신은 드물다.성준숙은 그중 몇 안 되는 전주 출생의 명창이다.성준숙은1944년9월16일 전북 전주시 완산동에서 부친 성홍근과 모친 김희순 사이의2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어린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잠시 완주군 이서로 이사를 가서 살았는데,그 이유로 그의 본적은 완주군 이서로 되어 있다고 한다.성준숙의 아버지는 종종 딸 성준숙을 업고 다녔는데,그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