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죽음을 거래하다, 시인 박정만 글. 장창영(전북대 교수) ▶ 광활한 우주와 사라지지 않을 박정만의 시 “나는 사라진다/광활한 우주 속으로”(「終詩」)를 외쳤던 시인 박정만,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시와 치열한 삶의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 박정만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사실은 그가 20여 일에 불과한 시간 동안, 300여 편의 시를 썼다는 점이다. 1987년 8월 19일부터 20여 일간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쏟아냈던 수백 편의 시들은 마흔셋, 짧은 생애가 빚어낸 값진 생산물이자 목숨과 바꾼 유산이다. 그는 자..
절대 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歸依한 시인 박봉우 글. 문신(시인, 문학평론가) ▲ 고독한 실존주의자 박봉우 박봉우는 1934년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전남 승주군 군수를 지낸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김효정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했다.1) 23세 되던 1956년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등단한 후,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42살 되던 1975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전주에 정착, 1990년 3월 1일 57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전주에서 살았고, 전주시립..
한국적 색채 배열이 빛나는 독자적 세계, 화가 박종수 글.김미진(전북도민일보 문화교육부 차장) 붉은 황토 흙으로 다져진 낮은 구릉 위에서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소년의 모습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각종 공모전에 떨리는 마음으로 작품을 출품하며 청춘을 불태웠던 청년의 모습도 사진첩에서 사라져버렸다. 미술 시간을 헐렁하게 보낼라치면 이내 불호령을 내렸던 스승의 그림자도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이 남아 있다. 그림만 그리는 한 남자, 박종수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자신의 삶에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찾고, 갈구..
자기 구원과 시대를 증언하는 시쓰기, 시인 허소라 글. 이준호 (소설가·동화작가) 시인 허소라(許素羅, 본명 衡錫, 1936 ~ )는 전북 문단의 산증인이다. 1936년 3월 12일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군 복무 외엔 전북을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로,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란 간 곳도 고향인 진안이었다. 시인은 금산동중학교와 금산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및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거쳐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주 신흥고등학교에서 약 8년간의 교사 생활을 거쳐 1969년부터는 군산수산전문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하여 교수를 역임했다. ..
선비의 기개를 잊지 않은 시인, 최형 글. 최기우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관장) 최형은 1928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으며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전주농고·전주고·옥구종합고·군산고 등 전북과 전남 지역 고등학교에서 30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다가 1984년 자원 명예퇴직을 했다. 이후 시·소설·산문을 집필하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전북문학인협의회·전북작가회의·카톨릭문우회·전북민예총 등 문화예술단체와 참여자치시민연대·통일연대·환경민주연합·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최형은 집회 현장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깨어있는 시인으로 불렸다..
물 흐르듯 북을 치는 명고수, 주봉신 글. 김회경 ‘우리는 어떤 이를 예술인이라고 부를까.’ 한 가지 물음을 안고 명고수 주봉신을 만나러 가는 길. 정오가 가까워진 시각에도 해가 보이지 않는 을씨년스런 초겨울 어느날이었다. 주봉신 선생님을 만난 건 전주에서 삼례나 익산으로 빠져나가는 길의 초입부라 할, 전주시 동산동의 어느 오래된 아파트 상가에서였다. 낡고 비좁은 상가 맨 끝 쪽에 자리한 세 평 남짓한 작은 쪽방이 그의 전수관이자 작업실이다. 둘째 아들이 팔순 중반에 들어선 늙은 아버지를 부축해 자리에 앉혀드렸다. 약속한 시간보다는 한 시간 늦었지..
가장 한국적인 미술표현의 대가 그리고 교육자, 이창규 글. 김미진(전북도민일보 문화교육부 차장)예향 전북을 일으킨 미술 명문대로 통하는 원광대학교. 지난 1970년대 미술교육과로 출발한 이곳 대학에서 배출된 학생들은 현재 전북지역의 중견, 원로 작가의 자리에 위치하면서 지역 미술계를 보듬고 있다. 그 중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이창규 원광대 미술대학 명예교수다. 지난 1980년부터 2009년 원광대를 정년퇴임할 때까지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는 지역 화단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제자가 많기도 많다. 물론, 교육자로서의 삶뿐 아니라 작가로서..
고색창연의 음악 신사, 이광한글. 서철원 70년대 산업화의 숨가쁜 일상에 던져진 육체는 고되고 힘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고통을 씻어주고 지친 몸을 풀어주는 역할이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80년대 멍들고 상처 입은 마음은 현실의 장벽 앞에 무너지던 날이 많았습니다. 음악은 암울한 시대, 정치·사회·문화의 허기를 다 채우진 못했습니다. 본질은 음악이 아니라, 시대를 억압하던 사회악이었으니까요. 그 모두에 대한 사죄, 사람에 대한 예의,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한 치유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틀림없이 음악이었을 겁니다. ..
프레임을 걷어내고 무한의 영역에서 놀다, 개념미술의 선구자 이건용 글. 김미진(전북도민일보 문화교육부 차장) 이건용에 대한 믿음, 이건용이 보여주는 언어의 울림 한국 전위미술 1세대 작가. 한국 행위미술과 실험미술의 전개에 큰 획을 그은 독보적인 인물. 주류와 관계없이 다방면에서 실험을 거듭했던 개념미술의 선구자. 이건용의 이름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특별함 그 자체다. 현대미술의 최전방에서 쉼 없이 달려온 그의 넓은 활동 반경만큼이나 작업세계에 대해 논하는 비평가의 글도 상당수인 상황에서 또 다시 그의 이름을 꺼내드는 일은 부담스러운 작업..
김순영은 정읍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광주와 전주에서 보냈다. 정읍동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았으며, 정읍여중 입학하던 해에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광주로 피난해 광주여중과 광주여고에 입학했다가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전주로 옮겨와 전주여고를 졸업했다. 어렸을 때부터 황윤석 판사와 이태영 변호사 등 법조인을 흠앙(欽仰)했던 그는 이들의 뒤를 잇고 싶어 이화여대 법대를 진학했지만, 2학년 봄에 교통사고를 당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 이후 원광대 법학과에 편입했다. 당시 아버지는 재산을 정리해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사회사업에 치중했고, 그는 전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