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자연으로 승화시키는 화가, 박남재 글. 구혜경 올 여름 유난히 뜨거운 날 금암동 주택가 골목에 자리 잡은 집을 찾아 젊은 화가 몇몇이 모였다. 담장 너머로 나무가 울창하게 뻗어 있는 파란 대문 앞에 멈춰서 문패에 ‘박남재’라는 이름이 한문으로 소박하게 새겨진 것을 확인한 다음, 숨을 고르고 흘린 땀을 닦으며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나서야 초인종을 누르는 우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북 화단의 어른이기도 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였기에 어려운 마음은 더욱 컸던 모양이다.문을 열고 우리를 맞아주신 분은 반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계신 박남재 선..
사실주의 로맨티스트, 자연과 삶을 사랑한 화가 박민평 글.구혜경 2000년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에서 만난 박민평 화가는 마른 몸에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한 눈에 봐도 화가라는 인상을 주는 모습이었다. 당시 전시장에 걸려 있던 자화상처럼 과묵하고 깐깐해 보이는 얼굴에서 무서움마저 들었지만 의외로 환한 웃음을 지을 때는 천진난만함과 호탕함이 동시 나타나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습은 그대로 동문거리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동문거리의 막걸리집에서는 1980년대 전주의 예술 담론을 논하던 지인들과 탁주 한잔을 기울이고 기분 ..
‘고향’의 순수성을 구현해온 화가, 홍순무 글. 최정학 홍순무 화백은 올해로 일흔여덟 살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저런 명함과 직함으로 살 수도 있을 약 80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홍 화백은 딱 두 개의 길만을 걸어왔다. 하나는 교육자로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화가로서의 삶이다. 40여 년을 걸어온 교육자로서의 길 위에서도 교수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으니, 한평생을 그림 그리는 길만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그림이건 꼭 똑같이 따라 그려야 직성이 풀렸지 홍 화백은 1935년 고창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아홉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
한국민속예술의 (심연(深淵)과 외연(外緣)에서) 청어람을 이룬 명인, 지성자 글. 양옥경 여는 말 우륵의 ‘애이불비(哀而不悲)’는 어쩌면 우리음악에 대한 최초의 미학적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슬프나 슬프지 않은 척 하는 것’과 ‘슬프나 처연하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먼 해석의 차이다. 전자는 생물학적이고 신체적인 상태와 그것의 일시적 변환을 설명하지만, 후자는 인간의 내면적 정서가 소리를 통해 완전히 다른 형질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후자의 변환은 예술이 아니었던 것이 곧 예술의 영역으로 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예술 주체뿐..
소리결, 마음결은 월명단이요, 소리꾼 이일주 글. 양옥경 본명 이옥희. 그러나 우리에겐 이일주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뚝심의 판소리 여장부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듯, 이일주 명창은 말을 참 ‘걸지게’ 한다. 이 역시 많이 유화시킨 표현임도 아시는 분은 다 아실 것이다. 기회가 닿아 물었다. “왜 그리 제자들에게 독심스럽게 말씀하시는지요?” “그래야 소리가 여물제” 단문의 답에도 그녀의 성음(聲音)이 옹골지듯 맵차다. 무슨 사연으로 이리 가냘픈 여인의 몸에 수 만 번의 풀무질 끝에 내놓은 쇳덩어리 소리가 실렸을까? 명인의 근황 이일주 명인은 193..
창극무대의 히어로, 은희진 글. 양옥경 어떤 인물을 소개하는 글을 쓸 때는 항시 그가 태어난 해나 탯자리를 먼저 말한다. 그런데 은희진 명창을 대하는 이 글은 거꾸로다. 그의 별세 나이를 먼저 말할 수 밖에 없는 그 마음에 대한 설명은, 그가 부른 단가 를 듣고서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터져 나온 비명같은 탄식에 있다. ‘어이 할꼬! 절창(絶唱)이 너무도 빨리 절명(絶命)했구나!’ 이 비명 같은 탄식으로...... 판소리 명창 은희진은 2000년 9월 24일 오전 6시 전북 전주 예수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3세. '천재는 하늘이 내린다'는 ..
소리 없이는 존재가치가 없네, 명창 오정숙 글.양옥경 천생(天生)소녀 같은 결 고운 품성,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 넘치지 않는 유쾌함, 오정숙 명창을 만나러 가는 차 안, 미리 다운로딩 해둔 명인의 춘향가 음원을 올렸다. 예의 그 대목, 이도령이 방자를 꾸짖고 으르다가 또 지레 사정조로 바뀌는 것이 재미진 ‘해 좀 보아라’ 대목이다. 같은 대목을 ‘이도령, 춘향 만나러 가는 대목’ 이란 이름에 포함시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의 이름으로 ‘해 좀 보아라’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이 다섯 음절에 이도령의 애간장 녹는 심정이 함축적으로 다 담겨있기..
기악과 성악을 두루 섭렵한 국악인, 강정렬 글.양옥경 산을 옮긴 우공(愚公)보다 더 우공같은 인물 1950년 5월 1일, 전북 남원시 보절면 신파리의 어느 허름한 집. 오지라고 하면 진오지라 할 수 있는 그 곳에서 훗날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보유자인 강정렬이 태(胎)를 벗는다. 이후 아버지의 사정에 따라 진안으로 거처를 옮겨 살기도 했는데, 진안으로의 이주가 오늘날 가야금병창 부문의 명인, 강정렬을 만든 공시적 동기가 된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왜 그러한지 곧 이어지는 글속에서 해명된다) 예전 풍속과 달리 요즘은 대회 수상력..
역사로부터 호명된 작가 홍석영 글.박태건 본명은 홍대표(洪大杓)다. 1930년 전북 익산군 왕궁면 왕궁리에서 태어나서 공부와 취직 때문에 몇 년 타향살이 한 것을 빼고는 평생을 익산 땅에서 살았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으나 재능이 뛰어나 일가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했다. 전주사범학교 재학 시절에 교사였던 김해강을 만났고 동기인 하근찬, 1년 후배인 신동엽 등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동인지 『횃불』에 게재한 소설이 당시 3.15 부정선거를 풍자했다고 하여 ‘소년수’로 복역하게 된다. 이후 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을 당시인 1960년 [자유문학]에 로 추천 완료되었다..
나그네는 지금도...시인 정양 글. 박태건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시와 문학 평론으로 각각 등단했다. 지역에서의 오랜 교사생활로 문인 제자를 많이 키워내 그의 곁에는 언제나 후배와 제자가 끓이지 않는다. 등단 직후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절필을 하여, 작품의 대부분은 중년 이후 써낸 것이다. 특히『까마귀떼』,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등의 시적 성취가 뛰어나서 많은 이들을 아쉽게 했다. 젊은 작가들이 주는 을 수상한바 있는 그는 언제나 문학청년을 자임한다. 정양 시인의 문학과 삶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다. 정양은 신석정의 『촛불』과..